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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히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 내용은 매우 심오하지만, 그 심오성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과 인간의 의무에 관한 다른 고백처럼, 인간의 궁극적 목적에 관한 이 조항은 자주 명령문으로 받아들여진다: 당신의 전 존재가 하나님에 집중해 있을 때만 당신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바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구체적으로 당신 자신을 잊어버릴 때만 인간의 할 바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기쁨의 근원인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누구도 진실하게 지킬 수 없는 명령으로 번역된 셈이다. 복음이 또 율법이 되었다- 종교가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이 “율법”이 기도에 적용된다면,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엄청난 노력과 형언할 수 없는 신적 신비로의 몰입을 통해서만 정당화된다.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이것은 불면증 걸린 사람에게 “가서 자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수 세기 동안 “올바른” 기도의 중요성과 그 기술 때문에 시달려 왔다. 그 결과 소수의 특별한 기독교인만이 늘 기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외 사람들은 가끔 기도할 때에도 그 기도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도와달라는 우리의 본능적이고 절박한 외침은 기도의 전문가들이 정한 기도의 기준에 따르면 하나님 중심의 기도가 갖추어야 할 찬양, 감사, 중보 등의 필수적 요소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는 매우 신선하다. 이 기도는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인간적인 기도이다. 이것은 인간을 위한, 즉 필요한 것이 있는 피조물을 위한 기도이다.
예수의 기도는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초월성(“하늘에 계신”), 타자성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권 (“나라가 임하옵시며”)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인간적인 관점이 명확하게 반영되어 있다: 초월적 하나님은 “아버지”이다. 하나님의 거룩은 우리가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우리 가운데 현존함이다; 하나님의 나라(왕국)는 우리 친인척을 초월하여 지구 전체를 가리킨다. 여기에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하나님만,” “저 위의 하나님과 이 아래 우리”라는 개념이 없다. (로빈슨, 『신에게 솔직히』 참고)
이것은 성서의 기도에 관한 입장과 일치한다. 유대-기독교적 신관은 우리와 함께하는 신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결코 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예루살렘 전통의 존재론은 관계적 존재론이다. 이에 따르면 어떤 존재도 – 창조자까지 포함하여- 다른 존재와 분리되어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서적 신학은, 따라서, 신에 관한 학문이 아니다; 신학은 “우리와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칼 바르트는 “theo-anthropology”라는 용어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순간에도 인간을 잊지 않는다.
이 짧은 서두에 이어 기도는 인간의 필요에 관한 부분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소서….”로 연결되는 요구는 얼마나 직설적이고 무례해 보이는가? 인사말을 하고는 곧바로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방식은 인간관계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보통 타인의 호의를 기다리지, 직접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럴 때 역효과만 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이 기도를 경건하게 조용히 반복하라고 배웠지만,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해 얼마나 무례하고 공격적으로 자본주의적 욕심을 표현하고 있는지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Please”라는 말도 없이, 의례적인 “사랑의 주님,” “은혜로우신 주님” 같은 구절도 없이, “달라…. 달라…. 달라”의 기도이다.
이 기도가 너무 직설적이고 뻔뻔스럽게 여겨지지 않는가? 이것은 기도할 때 위선자나 이교도들처럼 같은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예수의 경고(마 6:5; 6:7)와 모순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 기도가 갖는 큰 전제는 이 기도가 실제적인 필요에 의해 드려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절박한 필요 때문에 드려진다. 미사여구나 겉치레를 할 의도나 시간적 여유가 개입될 수 없다. 기독교적인 기도의 목적은 신에 관한 명상 속에서 자신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찾는 것, 즉, 가능한 최선의 본연의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존적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 주소서." 우리는 죄인이다. 따라서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는 잃은 자이고 연약하다. 따라서 인도하소서, 구원하소서.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영광스럽다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로(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지어낸 신과 같은)가 아니고 사랑의 관계 속에서 그렇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진솔한 기도를 통해 우리의 치명적인 약점을 깨달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새로운 힘의 근원을 만날 수 있다.
예수가 제시한 기도의 모범(5:13) 이후에 나오는 구절은 그 기도가 강조한 것을 다시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즉, 기도는 온순하고, 참회적이고,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고 진정한 인간이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아는 자의 인간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진정한 기도는 가장할 수 없다. 그 필수 조건은 우리의 필요에 관한 깊은 이해 그리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겸손이다. 구하라 (진정으로, 계속해서), 주실 것이다. 구함 속에 이미 주심이 포함되어 있다.
주석적 관점
- 다른 출처들의 자료를 편집하여 누가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기도와 하나님의 신빙성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묘사한다. 누가복음의 예수의 기도에 대한 주의는 주목할 만 한데(3:21;5:16;6:12;9:18,28-29;18:1;21:26), 사도행전에서는 기도가 믿음의 공동체들을 드러낸다(1:14;2:42;12:12;13:3;20:36). 누가 11장에 따르면 기도를 통해 신자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앞당기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한다.
- 주기도문(1-4) 마태와 누가의 주기도문 버전은 아마도 초대교회의 예배를 통해 기도가 발달되었던 다양한 방법을 통해 생겨났다. 두 버전 모두다 공동의 청원을 하고 있는데, 1인칭 복수로 말하고 있다. 기도의 형태와 주제는 고대 유대의 기도와 유사하다. 용어와 강조는 누가의 신학적 견해와 상응한다. 예를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칭하는 것은 예수 당시에 익숙한 실행이었는데, 하지만 화자의 맥락에서 기도의 시작하는 말은 또한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는(10:21-22) 앞의 기술을 생각나게 한다.
다섯 개의 단문이 기도를 구성한다. 첫 번째 두 문장은 비슷한데, 각기 고백을 하고 – 하나님은 진실로 예수 안에서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며,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10:9,11) - 한편으로 보다 완전한 실현을 또한 염원한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존중한다는 것, 하나님의 통치를 완전히 수립하는 것이다. 두 문장 다 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 나머지 세 문장은 세 가지 필수적인 필요들을 언급한다. 3절의 말은 보통 “날마다”(epiousios)라고 번역하는데 문제가 있다. 마태와 누가 전의 헬라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어원에 근거하여 그것은 “날마다” “내일의” 또는 “필요한”을 의미할 수 있다. 기도의 첫 번째 두 문장의 종말론적 경향은 예수가 “내일의” 빵을 말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메시야 잔치를 염원하며 하지만 “매일”이라고 분명히 얘기하고 있고, 3절의 현재형 명령법 “주십시오”라는 것은 사람들이 매일 필요한 필수적 생활을 위한 요청을 보여준다. 다음 요구는 용서이다. 기도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는 자극으로 작용한다. 현재형 동사로 예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끝나지 않는 과정임을 인정했지만, 문장 서두의 단순과거 명령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명확한 용서를 기대하고 있다. 마지막 문장은 보존을 요청한다. “시험의 때”는 악을 행하도록 유도하는 “시험”이 아니다. 예수는 시험이나 특히 박해의 위협을 통하여 믿음을 곤경에 빠뜨리는 환경에서 보호해 주기를 요청한다(눅8:13;22:38;행20:19을 보라).
- 한 밤중의 친구(5-8절) 이 구절은 헬라어에서 “이것이 당신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단 한 가지 질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질문은 부정적 대답을 예상한다. 예수의 말을 듣던 그 누구도 7절에서 친구가 그런 말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에서 돕기를 거부하는 친구는 환대의 관습을 위반하는 것이고 수치를 초래한다. 예수의 논점은 비록 우정과 환대의 거룩한 의무가 친구를 반응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친구는 결론적으로 요청하는 사람의 절박한 끈덕짐 때문에 빵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어진 절이 명확하게 하듯이 예수는 하나님께서 도우려고 애쓰는 것으로 성격규정하고 있다. 하나님은 친구 이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응답한다. 그래서 동시에 사람들은 굳게 결심하고 건방진 사람들을 괴롭히며 끈덕지게 기도해야만 한다(18:1-8참조).
-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9-13절)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주신다. 더 넓은 맥락은 하나님의 통치를 신자들의 기도의 첫 번째 초점이 되도록 세운다. 나중에 예수가 말하기를 (12:29-31) 그러한 통치를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구하고 찾아야 한다. 악한 부모들도 아이들을 돌본다면 키워야 할 사람에게 제공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얼마나 클 것인가. 아마도 이것의 최상의 표현은 성령이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새로운 시대가 완성되도록 한다(행2:1-36참조)는 것이다. 성령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주님의 기도에 대답하는 헌신으로서 보여주고 있고, 성령을 받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도가 그렇게 한다는 것을 선언한다.
- 결론 아버지들은 어느 시대이든지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아이를 키운다. 이 관계적 용어가 주기도문 시작에서 나타난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키우고 사랑하는 부모로 성격화 시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돌봄과 신실성을 묘사하는 전체 본문에서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한 필수적 스케치를 제공하고 있다. 성령을 주시는 믿을만한 하나님에 대한 기초적인 스케치와 무관하게, 1-4절은 아마도 자주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는 신에게 말하는 하고싶은 생각이나 높은 기대들로 받아 들일수 있다. 주기도문과 무관하게, 5-13절은 공허한 약속들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고, 유쾌하게 제안하기를 하나님께서 자동판매기같이 호의와 축복을 나눠준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 열매를 맺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 구절들은 이러한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헌신한다고 확증하고 있는데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도록 우리를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예상해야만 한다.
목회적 관점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고, 사람의 삶이 가난하고 고독하고 불쾌하고 잔인하고 결핍되었다면, 기도는 가장 완벽한 자기-기만이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는데, 막연한 뜬소문과 어둠 속에서 명령하는 분으로만 알려져 있다면, 기도는 징징대는 바보짓이다. 죽는 것은 더 고귀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치 예수처럼 깊고 영원한 의미 안에 있다면, 하나님과의 우정은 우선적인 관심사이고, 가장 훌륭한 예술이고, 최고의 자원이고, 장엄한 기쁨이다.”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말했다. 목회자들도 계절이 시작할 때와 계절이 끝날 때 같은 요청을 받는다. 누가복음의 이 대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제자들에게, 이후 이천년 동안 사람들의 가슴에 기록되는 기도의 주형 template 을 주신 후, 예수는 간절히 비는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도는 가장 완벽한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무릎을 꿇고, 우리의 애통함, 우리의 요구, 우리의 슬픔을 허공에 외치거나 우리 안에 있는 자아에 외치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가? 이것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자기-기만 아닌가?
기도에 관한 인간의 의심은 솔직히 지적인 논쟁의 문제일 수 있겠지만, 흔히 그와 같은 의심은 절망, 가난, 고독, 불쾌함, 잔인함, 결핍 같은 인생의 경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는가에 대한 질문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기도하는 모든 사람이 만나왔던 침묵을 인정함으로 그의 가르침을 시작한다. 그의 가르침은 직설적이다. 때때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침묵을 인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예수는 한 밤중에 친구를 찾아 온 사람의 이야기를 하신다. 처음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친구는 때때로 사람의 인내 때문에 하나님이 점차로 깨어나서, 내려 와서, 우리가 문 두드리는 데 응답하시는 것을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다. 기도는, 예수가 길게 설명한 것처럼, 깜빡 졸고 계신 하나님을 깨운다.
기도에 관한 예수의 첫 번째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어진 것은 기도하라는 명령이다. “구하여라…찾아라…두드리라.” 이따금 이것은 대화에서 공통된 주제를 잃어버린 교인에게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좋은 조언이다. “그냥 그렇게 하라!” 다른 때에는 청원자가 이미 기도한 것을 들을 필요가 있다. 궁지에 빠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 “도와주세요!”일 때, 목사는 그 한 마디 말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기도가 말로 하기에는 너무 깊은 탄식 이상일 때, 기도로 소통하는 것은 인간의 분노, 두려움, 갈망 혹은 감사로 말하기 시작한다.
Buttrick은 우리의 선생님에게 깊은 질문을 한다. 만약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기로 했다면 어떨까? 만약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는 의심할 바 없이 사실이지만 그의 의도는 숨겨져 있고, 그의 행동은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엄격한 부모와 같다면 어떨까? 그래서 우리의 곤경에 대해 조금의 동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분에게 어떤 보장도 없이 자비를 빌어야 한다면 어떨까? 기도는 징징대는 바보짓과 같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부모가 자녀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방향전환은 위험한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생선 대신 뱀을 주고, 달걀을 달라고 하면 전갈을 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예수의 초점은, 가장 잘 짜여진 시나리오에서도, 부모가 자녀의 가장 깊은 요구를 알았을 때도, 우리를 아버지를 부르도록 초청하시는 예수가 우리를 아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Buttrick은 끝으로 “만약 하나님이 예수처럼 깊고 영원한 의미 안에 있다면, 하나님과의 우정은 우리 첫 번째 관심사요, 가장 훌륭한 예술과 최고의 자원과 숭고한 기쁨”이라고 한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는 분 안에서 우리에게 알려지기로 했다면, 기도는 우리의 친구인 분과 대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고 예수가 말한다. 그는 이 거룩한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한 친구이다. 그의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고 말하는 분을 안다. 그의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진 대화에 초대되고 포함된다. 가난, 고독, 불쾌함, 잔인함, 결핍 같은 우리 인생의 경험으로 우리를 이끌었던 침묵은 육신을 입고 우리의 기도에 대답하시는 말씀에 의해 깨졌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신 각각의 가르침은 그들을 관계 안으로 들어가도록 초대한다. 관계는 대화를 포함하고, 대화는 말로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하나의 말씀 Word 을 하셨다. 이제 우리는 응답하기 위해 좋은 감각을 모으기만 할 필요가 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행한다면, 우리는 그 자신이 고통으로 울부짖고 침묵을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약함을 잘 아는 친구와 대화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그와 대화하는 중에 성경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그의 교회의 증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를 따라 오시고,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았을 때 우리와 함께 음식을 먹고, 우리의 인생을 허비하고 난 후 우리를 집에서 환영하시고, 우리가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실 하나님이심을 신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을 증언하는 말씀과 그가 없는 우리의 가난하고 외롭고 불쾌하고 잔인하고 결핍된 삶을 중재할 것이며, 어떻게 우리가 함께 길을 가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만약 하나님이 예수와 같이 깊고 영원한 의미 안에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껍거나 얇거나, 지옥이 오거나 높은 물이 오거나, 어떤 것도 가로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그의 몸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말씀 the Word 을 침묵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교적 관점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었나요? 무엇을 위해 기도하나요? 어린 시절을 생각해본다. 우리 가족들이 기도했음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는 수년간 모아두었던 특별한 기도카드를 넣어 둔 작은 책에서 어느 기도제목을 뽑아서 하곤 했다. “나를 가장 잘 알고있는 선하신 주님”이라고 늘 기도했다. 나의 “둘째 아버지” (second father, 나는 계부-stepfather-라는 말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는 볼티모어 가스전기회사에서 가스계기를 점검하는 일을 하였는데 종종 교회 뒷쪽 의자에 앉아 점심을 드시곤 하였다. 그는 “윗 층에 계신 분” (the Man upstairs)-이라며 기도했는데 이 말은 우리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에게는 아직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존경을 표하는 분을 뜻했다. 나의 부모들과 조부모들은 특정한 말보다는 구체적인 예를 통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들로부터 나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고 매일매일의 필요에 관심을 갖는 분임을 배웠다.
-카톨릭 학교에서 나는 기도해야 할 4가지 이유에 대해 배웠다,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용서를 요청하고 그리고 내가 필요로하는 것 혹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은 겟세마네에서의 예수처럼 “하지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로 끝나야 했다. 후에 로마 카톨릭 수도단 중 하나인 Redemptorists [1732년 창설, 나폴리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목적으로 후에 전 세계로 확산, Congregation of the most holy Redeemer]회원으로 있을 때에는 명상하고 묵상하는 기도를 배웠다. 내가 있던 종단의 창시자인 Alphonsus Liguori는 ‘기도, 구원의 위대한 수단’ (Prayer, the Great Means of Salvation)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서 그는 기도하는 자가 분명히 구원받을 것이라면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보다 최근에 나의 기도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준 사람은 Thomas Merton인데 그는 기도를 하나님의 궁극적 자유에 우리의 자유가 함께 하는 것이라 말했다. 또 한 사람은 Anne Lamott인데 그녀는 두 가지 기본적인 기도를 말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를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우리들 모두는 이처럼 기도에 관한 지나온 길이 있다. 하지만 오늘의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기도의 출발점으로 우리를 돌아가게 한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의 생애에서 경건한 순간을 언급하는 그 이상이고 어떻게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는지 또 선생인 예수가 주는 교훈 그 이상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과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가르쳤다. 기도는 그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했고” (5:16) 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6:12과 9:18)라고 말한다. 예수는 사도들을 선택하기 전에 기도했고 (6:13-16) 5천명을 먹였을 때도 기도했다 (9:16). 그는 죽기 전날 밤에도(22:39-44) 또 십자가에서도 (23:34,46) 기도했다. 기도는 그의 삶의 일부였고 죽음에서도 그러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을 때 그가 가르친 내용은 중요하였고 또 이후 교회의 삶에서도 중요하였다. 그는 그들에게-또 우리들에게-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리고 난 후 하나님께 요청하는 말들을 가르친다. 예수는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시작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아버지(Father)”또는 친밀한 표현으로 “아바(Abba)”라고 부른다. 이 한 단어에 관해 많은 해석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족처럼 존중해주는 분으로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소중하게 여겨주는 분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삶이 깨어지기 쉬운 오늘날-이런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강화되어왔다- 예수의 기도는 모든 것을 주관하고 우리들 가까이 계신 한 분이 있음을 기억하게 한다. 이어 뒤따르는 두 구절은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할 것을 요청한다: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리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 우리의 생명, 삶을 진정으로 맡아주실 것과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 주기를 탄원하고 있다. 나머지 간구는 세 가지 모두 기본적인 것들이다: 양식 (food,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용서 (forgiveness,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그리고 충실함 (fidelity,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이 요청들은 우리 개별적인 몸의 생명에(양식), 공동체의 삶에-교회, 사회 그리고 세상(용서), 또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의 삶에(충실함) 필수불가결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선물인데 그 이유는 우리를 먹이시고 용서하시며 신실하게 대하시는 하나님과 우리가 연합할 때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기도에 관한 대목을 인내를(persistence) 촉구하는 한 비유와 교훈으로 마친다. John Pilch는 예수 당시의 문화 속에서 인내에 대한 보다 나은 번역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shamelessness)이라고 제안한다.[John J. Pilch, The Cultural World of Jesus, Sunday by Sunday, Cycle C (Collegeville,MN: Liturgical Press, 1977), 116–17.] 환대가 높이 평가되고 있는 세상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shameless)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것은 긴급한 환대가 요청되는 상황에 응답하지 않고 이불 속에 있는 한 친구의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를 세상에 고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 가운데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기를 계속하는 일은 똑같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하나님은 이들을 선한 아버지 혹은 후원자(patron)처럼 돌보아 준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잠자는 친구로 등장하는데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는 친구가 흔들어 깨워야 할 필요가 있는 존재이다. 누가는 계속해서 사람이 필요로 하는 그 이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언급하며 구하는 모든 이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분임을 말한다.
-오늘의 복음서는 우리들의 기도생활을 성찰하게 한다. 우리는 삶에 있어 기도가 필수적임을 알게 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께 간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비록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지를 모를 때에도 성령께서 우리의 약함 가운데 탄식함으로 도우신다는 말에서 (롬 8:26-27) 위로를 얻기도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확신으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 기도를 우리에게 맡겨 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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