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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정보
[춘천] 김유정 문학을 찾아서
 
 
 
카페 게시글
실레마을은 김유정문학촌 스크랩 춘천의 `금병산`과 `김유정 문학촌`
권창순 추천 0 조회 22 12.03.23 00: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세모의 주말은 으레히 망년회로 채워져 있다. 폭음과 피로가 거동을 둔하게 한다. 그래도 움직여야 하겠기에 춘천의 금병산을 찾아 간다. 김유정역 앞에 도착하니, 한 옆으로 김유정문학촌이 있다. 이곳을 한바퀴 둘러보고 금병산으로 향한다. 김유정은 현종의 비 명성황후의 친정아버지인 김우영의 후손으로 그의 넷째 손자 도택(道澤)이 김유정의 선조가 되었다. 아버지 김춘식은 자를 윤주(允周)라 했으며 진사시험에 합격해 사마좌임금부주사(司馬座任禁府主事)를 지냈다. 김유정은 1908년 이 곳 춘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야학활동을 하였다. 민중들을 사랑하여, 명문집안의 자손인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소작인들에게도 존대말을 하였다고 한다. 단편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에 당선되고, <노다지>가 중앙일보에 당선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집안이 기울면서 공장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누나에게 얹혀살다가 1937년 폐결핵 29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30여 편의 소설을 창작하였다. 오랜 벗인 안회남에게 편지 쓰기를 끝으로 1937년 3월 쓸쓸하고 짧았던 삶을 마감한다.

보성전문을 중퇴한 김유정은 당대 명기이며, 명창인 기생 박록주를 좋아 했지만 구애를 거절 당하고, 연희전문에서 제적까지 당하자 유정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불현듯 고향 춘천의 실레마을로 내려간다. 그가 고향에 내려간 것은 남은 재산을 마지막으로 탕진하고 있는 형을 상대로 한 재산분배를 주장하는 소송을 내기 위한 일도 겸해 있었다. 형에게 병 치료와 생활비를 요구한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둘째 누이와 함께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매형 정씨의 꾐으로 그런 일을 벌였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김유정이 고향산천을 찾아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항상 잊지 못하고 살아온 고향의 산골 정취가 다분히 감상적인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김유정은 고향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그 시대 농촌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가난하지만 순박한 그네들의 삶을 통해 그는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울분이나 박록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시골 농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바라보면서 어느 정도 가셔졌던 것이다. 박록주에게 열중했던 것처럼 그는 고향에서 자기 자신을 다 던져도 좋을 그런 신명나는 일을 찾고 있었다. 그는 금병산을 오르내리며 봄이면 잎이 나기 전 노랗게 피어나는 동백꽃(생강나무꽃) 향기에 취했으며 마을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네들의 투박한 강원도 사투리 속에 깃든 원초적인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어울리고 싶었다.

그러나 김유정이 고향 마을에서 가장 정을 많이 준 사람들은 역시 자기보다 연상인 들병장수 여자들이었다. 박록주에 대한 미련이 여기저기 짚시처럼 떠돌며 술을 파는 들병이로 옮겨진 것이다. 들병이가 등장하는 작품 '솥'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등은 거의 실화에 가깝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들병이들을 찾아다니면 거의 매일 마시는 술로 치질이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결핵성 늑막염까지 겹쳐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유정은 고향집 언덕받이에 움막을 파고 한때 자기네 마름집 아들인 조명희, 조카 영수 등과 뜻을 맞춰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열었다. 김유정은 대학 공부에 대한 미련을 안고 다음 해(1931년) 다시 상경하여 보성전문(普成專門)에 입학했으나 그곳에서도 곧바로 퇴학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시 실의에 빠진 유정은 매형 정씨의 주선으로 병 휴양 차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갔으나 광부들과 어울려 매일 술만 먹게 되어 결국 건강만 더 망친 상태로 서너 달 만에 다시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광업소에 있던 경험을 살린 작품으로 '금'이 있다. 고향에 다시 돌아온 김유정은 먼저와는 딴판으로 사람이 달라져 야학 일에 열중하면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해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벌인다.


김유정의 소설은 인간에 대한 훈훈한 사랑을 예술적으로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는 데 묘미가 있다. 많은 사람을 한 끈에 꿸 수 있는 사랑, 그들의 마음과 마음을 서로 따뜻하게 이어주는 사랑을 우리의 전통적인 민중예술의 솜씨로 흥미롭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민중에 대한 사랑에 뿌리를 둔 민중적 성격의 문학이라고 해서, 그의 작품들이 한갓 통속적 흥미나 저급한 희극성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김유정의 소설은 흔히 인물들의 어리석음이나 무지함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일면에서 그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가난하고 비참한 실제 삶과 이어져 진한 슬픔을 배어나게 하는, 말하자면 해학과 비애를 동반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저에게 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제가 어려서 잃어버린 그 어머님이 보고 싶사외다. 그리고 그 품에 안기어 저의 기운이 다 할 때까지 한껏 울어보고 싶사외다" - '미완성 장편소설 '생의 반려' 중에서~

김유정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읜 슬픔은 그의 자전적 소설 '생의 반려' 속에 잘 나타난다. 매일매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던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가 바로 김유정의 첫사랑 박녹주이다. 2년여 동안 광적인 구애를 했으나, 그의 애절한 마음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대 최고의 기생이 네 살 연하의 김유정의 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다. "어디 사람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낏 스쳐본, 그나마 잘 낫으면 이어니와, 쭈그렁 밤송이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럿두 서루 눈이 맞아서 달떳다면야 누가 뭐래랴 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너겨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달동안 썼다." -소설 '두꺼비' 중에서~

그래도 김유정은 끊임없이 "벌거숭이 알몸으로 가시밭에 둥그러저 그님 한 번 보고지고"를 외쳤다. 우리는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속에 실렸던 소설 '두꺼비'를 통해 김유정과 박녹주의 그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산 저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고향마을에서 김유정은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고향에서도 김유정은 나이 많은 들병이들과 같이 어울리며, 마을 사람들과 정을 나눈다.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 '봄봄', '솥',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등 12편의 작품이 고향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김유정 문학촌을 떠나 금병산으로 들어선다. 산은 그저 잡목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전형적인 육산이다. 그리 볼거리도 좋은 풍경도 없다. 다만 잘 발달된 등산로와 부드러운 능선은 험하지 않아 힘든 줄 모르고 걸을 수 있다. 수목이 울창하여 여름산행지로 좋을 것 같고, 눈이 쌓인 겨울철에 가족들과 함께 여유로운 심설산행을 하면 아주 좋을 듯하다. 

이산은 크지도 않고 수려하지도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이다. 산행겸 김유정의 흔적을 찾아 보는 것도 좋지만 수도권에서 경춘선을 타면 곧바로 김유정역에서 내려 산행을 할 수 있는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강촌을 지난 김유정역(구:신남역)은 금병산 산행기점이다. 이 곳은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는 뜻으로, 시루 증(甑) 자를 넣어 증리라 한다. 앞으로는 삼악산이 그림처럼 늘어서고 뒤로는 금병산이 병풍을 둘러치는 작은 분지다. 김유정은 경춘선 철길이 부설되기 3년 전에 요절하여 고향에 기차길이 생기는 것을 구경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유정의 고향 역 이름은 개통 이후 65년간 '신남역'으로 불리어 왔다. 이 신남역이 춘천시 문화인들 노력으로 12월1일부터 '김유정역'으로 바뀌었고 간판도 새로 걸렸다. 우리나라 역 이름 중 사람 이름으로 역 이름이 붙기는 처음이다. '김유정역'에서 바로 금병산 산행이 시작되는것이다,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지능선길로 잠시 오르면 왼쪽 아래로 산신각이 내려다보인다. 금병산을 넘어가는 십수 개의 고압송전탑을 세워 이 산신령이 노하시는 것을 달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능선을 걷다보면 나무가지 사이로 골프장과 춘천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금병산은 정상에서의 조망을 빼고 나면 그리 볼만한 풍경은 없다. 다만 군데군데 제멋대로 자란 아름드리 노송이 능선을 가득채워 놓아 단조로움을 덜어 준다. 산은 어느 산에 오르더라도 세세히 둘러보면 나름대로의 멋을 찾을 수가 있다. 아무리 못생긴 사람에게서도 나름대로 매력을 찾아 낼 수 있듯이~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능선길로 10분 더 오르면 금병산 남서릉 송전탑 아래 안부에 닿는다. 이후 완만하게 이어지는 남서릉을 타고 오르면 삼거리에 닿는다. 이어 아름드리 노송군락지대로 들어서면서 조금씩 가파라진다. 나뭇가지 사이로 싸리골과 실레 마을이 눈에 들어오고, 이따금 철길을 달리는 열차소리가 귓전에 와닿는 노송지대를 40분 오르면 하늘이 트이는 헬기장이 나오고, 전망대가 있는 정상에 닿는다. 정상은 참나무숲으로 에워싸여 조망이 어려웠던 것을 나무를 베어내고 전망대를 설치하여 사방으로 막힘없는 조망을 즐길 수 있다.

 

 

북으로는 춘천시내로 들어가는 잼버리도로를 비롯해 봉의산 의암호반 용화산 오봉산 부용산 종류산 등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북동으로는 중앙고속도로 위로 금병산의 모산인 대룡산이 하늘금을 이룬다. 남동으로는 연엽산 구절산, 남으로는 금확산 쇠뿔봉 산릉이 넘실거린다. 남서쪽으로는 좌방산 종자산 널미재 장락산 등이 멀리 용문산과 함께 광활하게 조망된다. 서쪽으로는 소주봉 봉화산 검봉이, 북서쪽으로는 삼악산이 하늘금을 이룬다. 삼악산 오른쪽 멀리로는 계관산 북배산 가덕산 뒤로 화악산이 하늘금을 이룬다.

 

 

 

 

 

 

 

 

하산은 서릉을 탄다. 정상서 30분 정도 내려서면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북쪽 사면으로 내려서면 지능선에 닿고, 계곡으로 잠시 내려서면 펑퍼짐한 계곡을 뒤덮은 잣나무숲 속으로 들어간다. 잣나무숲을 빠져나오면 정면으로 삼악산이 마주보이는 농가에 닿는다. 삼악산을 마주 바라보며 15분 거리에 이르면 실레 마을에 닿게 되고 산행을 마치게 된다.

 

 

 

 

 

 

 

 

 

 

김유정역을 출발해 금병의숙 - 싸리골 입구 - 잣나무숲 - 남서릉 안부 - 남서릉을 경유해 정상에 오른 다음, 서릉 - 함몰지대 삼거리 - 잣나무숲 - 비닐하우스 농가 - 김유정기념전시관을 경유해 김유정역으로 닿는 산행거리는 약 8km로, 3~4시간 안팎이 소요된다. 하산을 하니, 농가에서 장작불을 지피는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라 산촌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백미현 - 눈이 내리면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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