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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22 목자 없는 양시 89:20-37; 삼하 7:1-14a; 엡 2:11-22; 막 6:30-34, 53-56 오순절 여덟
시 89:20-37
20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21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22 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23 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24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25 내가 또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놓으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놓으리니 26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28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29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30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31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32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33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34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35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36 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37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 (셀라)
삼하 7:1-14a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3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엡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막 6:30-34, 53-56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도입
한때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욘사마라 불리우는 한국 배우 배용준입니다. 그의 인기는 겨울연가라는 드라마를 통해 뭇 여성들의 감성을 자극 한데서 일어 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려운 부위를 긁어주지 못하는 현실을 드라마의 가상 인물을 통해 속 시원히 긁어 주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욘사마의 인기는 가는 곳곳마다 수많은 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팬들에게는 그의 실제 삶이 어떠하든 상관 없습니다. 직접만나보고 손이라도 한번 잡아 본다면, 그저 가까이서 볼 수만 있어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만큼 팬들의 마음을 애절하게 했습니다. 현실과 이상과의 거리가 결코 가깝지 않음에도 팬들은 무엇을 보고 따랐을까요?
본문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에도 갈릴리 지역을 뜨겁게 달구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의 가는 곳 마다 열성 팬들이 몰려 듭니다. 그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스승 예수에게 이런 저런 보고를 합니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빡빡한 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배를 타고 조용한 곳에 가서 좀 쉬자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열성 팬들은 배보다 먼저 가서 기다립니다. 그 열성팬들, 무리들을 본 예수는 목자 없는 양 같다는 생각을 하며 불쌍히 여기고 여러 가지로 가르칩니다. 그렇게 예수가 다니는 곳에는 소문이 나고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병자들은 예수에게 손만 대게 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합니다. 그에게 손을 댄 사람은 모두가 나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욘사마의 팬들과 달리 예수의 팬들은 현실과 이상의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현실에서의 아픔과 병들이 예수를 만남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몰려드는 것입니다. 어쩌면 욘사마의 팬들도 그것이 어떤 면에서 가능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봅니다만, 중요한 것은 팬들을 보고, 예수의 불쌍히 여김에 있다는 것입니다. 욘사마는 그의 팬들을 보고는 스스로의 인기를 앞세웠겠지만, 예수의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는 것, 여기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왜 그들을 불쌍히 여겼습니까? 오늘 성서는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의 모습 같다고 합니다.
목자가 있는 양은 그저 목자를 따르고 모든 것을 목자에게 맡기면 되지만, 목자 없는 양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리나 맹수들의 공격을 피할 수 없습니다. 순식간에 잡혀 목숨을 잃는 죽음의 위협 앞에 놓여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피해 높은 곳, 높은 산에 오르게 됩니다. 일단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지만 내려 오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결국 죽기는 마찬 가지임에도 뒷일은 생각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목자 없는 양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절벽 아래로 뛰어 내리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의 모습이 바로 목자 없는 양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모든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고 쉬고 싶었지만 죽음을 향해 달려드는 그 모습이 너무나 불쌍한 것입니다. 불쌍히 여김의 결과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예수의 삶, 곧 복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과 평화, 그 외의 다름 아닌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생명과 반평화는 하나님나라와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시대에도 목자라 불리우는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이 예수를 따랐다 함은 종교지도자들이 제 몫을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나아가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나라보다 반생명과 반평화의 자신들이 꿈꾸고 투영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대상황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오늘 한국교회는 세계 역사에 우뚝 섭니다. 짧은 기간 엄청난 성장과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배출 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지만 바로 옆에 교회가 있고, 한 건물에 몇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쯤 되면 목자 없는 양의 모습은 볼 수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목자 없는 양의 본능이 현실적 두려움, 즉 죽음을 피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특징이 나타 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현실적 두려움이 없는지 한번 봅시다.
며칠 전 교우 중 한 분이 기도요청을 하였습니다. 경제적 압박이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게 된 지가 약 6년쯤 되는 것 같습니다만, 누구보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열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때로는 훌륭한 목사님 같다는 느낌도 받을 정도 였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분에게 물질적 여유를 좀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아 힘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 시대 속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고민에 낙담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현실 앞에 곧게 선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현실과 타협하고, 급기야 물질의 유혹에 노예가 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돈만 있으면 안되는게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시대가 없을 정도로 돈과 물질의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늘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는 거기에 우리의 영혼을 팔고 맙니다. 물질만 있으면 모든 것을 포기 할 수도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살아가는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화요일이면 이사를 하게 됩니다. 몇해 전 경산에서 대구로 이사 올 때 의뢰했던 이삿짐센터 사장님께 또 의뢰했습니다. “요즘 뭐하노”라고 물어서 교회일한다고 했더니, “요즘 종교는 교회를 포함해서 다 돈이제” 라고 하였습니다. “맞습니다”라고 하자 심장을 두드리는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자네는 안그렇제” 순간 온몸이 얼어 붙는 듯, 도둑이 제발 저리는 듯 한 심정이었습니다. 종교까지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린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인터넷에 몇 천원에 일가족이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도 보았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무조건 돈을 모아야 합니다. 부정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두려움을 쫓아내고 목숨을 지킬 수 있다는 꾀임에 넘어 가고 만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은 안중에 없습니다. 자신의 평화를 위해 다른 사람의 평화는 잊은지 오랩니다. 돈이 두려움을 없애 주고 생명을 보장해 줍니까? 없으면 안되고, 많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문제 해결은 아닐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해결되겠지만, 여전히 두려움은 남아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문제 해결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예수의 행동에 그 해결 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예수의 불쌍히 여김에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친히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목자가 있는 양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문제 해결을 찾은 것입니다. 더 이상 두려워 산으로 도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돈을 모으고, 재물을 쌓는데 혈안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떻게 보면 좋겠습니까? 나의 갈급함은 어떻게 보면 좋겠습니까? 예수를 믿고 따르지만, 여전히 우리의 시급한 문제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대체 왜이렇게 인생이 꼬이고 풀리지 않는 것입니까? 나아가 천만이 넘는 기독교인이 우리나라에도 있는데 왜 이렇게나 나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신앙이 있다 하는 정치인, 경제인들로부터 비리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까? 혹 이들이 목자 없는 양이기 때문입니까? 예수는 우리를 목자 없는 양으로 보고 불쌍히 여겨 궁극적인 것을 주었지만, 우리가 그것을 받아 내지 못하고,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점점 머리가 아파지는 듯 합니다. 잠깐 머리를 식히며, 물도 한잔 마시고, 오늘 시편과 사무엘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삶을 잠깐 들여다 보며 생각해 봅시다.
본문시편 20절 이하에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하나님은 양을 돌보는 다윗을 찾아내어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의 대로를 탄탄하게 하였습니다. 원수도 악한 자도 그의 앞길을 막아 서지 못했습니다. 이는 다윗의 거시적으로 드러나는 삶입니다. 그러나 미시적인 삶은 정말 말도 못할 것입니다. 여기 계신 누구를 붙잡고 물어보아도 옛날에 어땠나요 한다면 책을 몇 권 써도 다 못쓴다라고 할 것입니다. 다윗의 미시적 삶도 고통과 고난의 연속, 뿐만 아니라 죽을 고비가 수없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인생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노래가 있지 않을까요? 중요한 것은 다윗의 고백을 빌려 봅니다. “주는 나의 아버지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오늘 처음으로 아버지 앞에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설교 어떻습니까? 저분이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저도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천하무적이고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불가능이 없으며 나의 모든 것들을 이루어 주는 분입니다. 물론 자라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다윗이 고백한 여호와는 평생에 나의 아버지며, 하나님이고, 구원의 바위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은 목자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는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삶은 어릴 적부터 주체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역설적이지만 그 주체적 삶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이다 함은 전혀 주체적이지 못한 것 같지만, 그것이 주체적이 된다는 것 때문입니다. 나는 없어지고 하나님이 대신 나타나는 것,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온순한 양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 어쩌면 바보같은 삶으로 보일 수도 있는 삶, 어쩌면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는 삶 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 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주에 요한의 실패, 예수의 실패, 나의 실패, 여러분의 실패로 역동적인 성령님이 활동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령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생각 그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주체적인 삶은 하나님을 의지 한 것에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삼하에는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찔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리와 제언
수많은 일본 여성팬들이 욘사마를 외치며 밤잠을 설레입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만나기를 애원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따르는 것일까요? 욘사마와 예수의 다른 점은 전자는 자신의 인기가 우선이지만 후자는 무리를 보고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에로 초대했다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이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눈앞의 두려움과 죽음을 피해 달아나려 할 때 예수는 친히 그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 목자 앞에 서만 다윗의 삶처럼 주체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목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쉬운 것 같습니다만 다시 오늘 우리의 현실로 돌아서면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제 거시적인 눈, 거시적인 시야로, 전체를 통해 볼 수 있는, 통전적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바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눈이고, 신앙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에서 주체적인 삶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는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인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먼저 보게 됩니다. 이웃의 아픔을 먼저 돌아보게 됩니다. 너가 존중 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리를 보고 예수가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불쌍히 여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기도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열심을 내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의 열광적 팬클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혹 나를 보고 하신 말씀이 아니었는지요? “너는 목자 없는 양 같다” 주님 지금까지 무엇을 향해 달려 왔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체적 삶으로 방향이 전환되게 하옵소서
중재기도
주님, 목자 없는 양이 나의 삶은 아니 었는지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싶습니다. 더가지고 더 모으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궁극의 삶이 아님을 압니다. 하지만 현실에 매인 몸이라 쉽지 않습니다. 주체적 삶으로 전환 되게 도와 주십시오. 정성으로 드린 예물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 될 수 있게 하옵소서.
위탁의 말씀
여러분, 목자 없는 양의 삶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으로 사십시오.
여러분, 주체적인 삶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거시적 눈을 가지십시오.
축도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하나님 앞에 거시적 눈을 갖고 세상을 섬기고자 다짐하는 마가교회 머리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실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