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錫이요.字는 君敍이고,號는 遜愚堂,또는 晩悟이며.시호는貞敏이니
서기1604년(선조37년갑진)12월13일,군수공휘 敬紹를 아버지로,
淑夫人청주한씨를어머니로 하시여 삭령군 아사 (衙舍)에서출생하시었다
공은,志氣가 뛰어났고 같은또래의 아이들에 모범이되었고,어릴때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시여 밖에서는 좋은구경거리가 있어서 모든아이들이 모두 모여서 구경하는데도
공은 문을 닫고 독서 에열중하셨고 글을 배워서 다 외우지 못하였거나 또는 그 글뜻을
이해 하시지 못하시면 밥 을 먹지 않으시어 母夫人이 강권하시면 조근잡수시었다고한다
공이 나이 겨우12세되는해 母夫人한씨 가 돌아 가시자 殯廳을 떠나지않으시고
통곡을 그치지 않으시고 매일 죽(粥)을 드시며
상중의 예절에 조금도 어긋남이없으셨다고한다
공은 20세되던해 서기1624년(계해년)에 판관 기계유상중의따님에게 장가를드시었다
공은 淸陰金尙憲선생과愼獨齋金集선생 양 문하 에서 글을 배우시고 성리학을 정공하시어
일가견을 이루시었고 행실이 법도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시며 謹嚴하시어 오히려
스승이신 청음선생마저 洪錫은 나의 두려운 벗이라 고 말씀하시었다
공은 오남 2녀 를 두셨고 서기1637년(인조15년정축)6월17일에 군수공 의 喪을당하시어
삼년간의여묘생활을 하시고,서기1637년(인조15년정축)에 병자 정축 양년의胡亂이
굴욕적인 화의 로 끝을 맺자 科業을 버리시고 서기 1640년9인조18년경진에 東海에
투신자살하고져 가시던중 뜻을같이하는 二吾堂晉州姜恰.抱翁迎日鄭瀁.杜谷南陽洪宇定.
覺今堂淸松沈長世선생 등과 (*以上太白五賢)만나서 의기투합되어 태백산에 입산하여
공은 太白山下춘양에(경북,봉화군,춘양면,춘양동,)에 자리잡아 杜門不出은거하시면서
학문에 전념하시어 경서와예문,성리학에 뛰어나 그 聲色이 세상에 알려지자,
세상은 공을 그냥 두지아니하고 바깥세상으로 나오시게하였는바.
文忠公金壽恒선생과尤菴宋時烈선생의特薦으로 서기1659년(효종10년기해)봄에
宗簿恃主簿가 되셨고서기1664년(현종5년갑진)에는용담(지금의진안군)현령을 거처서
서기1671년현종12년신해)이는 翊衛司司禦 가 되시었다
공은 수차례의상소를올려 사직하시고 다시입산하시어,
서기1680년(숙종6년경신)1월21일에 77세로 천수 를다하시고,돌아가셨다
공은 臨終때사람으로 하여금 일으켜 달라고 하시어 세수를 하시고 손 발톱 을깎으시고
다시 누워서 遺言 을하시고 돌아 가시니 공 을 이시는 모든사람들은 비통해 하며
그의 높은 학문을 세상에 다 피지 못함을 애석 하게생각하였다
그후서기1732년(영조8년임자)봄에 나라에서 는 贈職으로 通政大夫丞政院左丞旨兼經筵參贊官
또다시 서기1816년(순조16년병자)5월에 贈嘉善大夫吏曺參判兼 同知義禁府事 五衛都總府副總官.
증직을 내렸으며 경상도지방의선비400명이 해를거듭하여 중앙과 지방관청에蔬를 올려褒典할것을
청 하였고 서기 1858년(철종9년무오)5월에 또다시 나라에서증직으로
贈資憲大夫吏曺判書兼知義禁府事 五衛都總府 都總官을 내리시고,
서기1847년(고종11년갑술)10월에 나라에서는 贈諡로 貞敏公으로 시호를내렸다
*貞은淸白自守함을이름이요(맑고깨끗하여스스로를지킴)敏은모든일에공이있음을이름)*
그리고 1876년(고종13년병자)오월에는 공의 부인이신 기계유씨 에게 정부인의교지를내렸다
공은 외직으로 용답현령으로 계실때는 목민관의 직분을 다하시어 관민으로 부터 많은
칭송을받으셨고 공 은 특히 예문과성리학 에 뛰어나셔서 그 당시 제일인자로 불리었고
喪祭要錄.日省錄.禮叢要說.禮記類會.經史序跋.理氣錄.四賢傳.模範錄.등 많은저서와
明堂圖.井田圖.太極節氣圖는 同春堂宋俊吉선생이상감에게 차(箚)를 올려서극찬하시면서
"상감께서 좌우에 걸어두시고 보시면 천지조화지리와 음양진퇴진기를 알수가 있읍니다"
라고 권유 하시었다
공은 특히 우암송시열선생과동춘당송준길성생.청음김상헌.신독재김집선생과는 학문적
토론을 많이 하시었고 가까운 사이 셨다
태백오현중의한분이신,손우당홍석선생의실기를 2006년9월27일왕식옮겨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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