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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삶의" 터전(제1장)
1941년 일본이 미국을 침략한 12월7일 미 대통령과 의회는 "치욕의 날"이라며 전쟁을 선포하고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여하게 됐다.
힘센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략해 자원과 인권을 유린한 약육강식의 시대로 우리부모님 세대는 제국주의 시대를 살아 오시면서도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겼고 나라을 찾기위해 해외로 떠돌며 투쟁한 일제시대에 강제로 독도를 자기네 땅으로 편입시켜 우기고 있는 것도 범죄행위인데 일본이 미국과 영국 및 연합국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피해보상과 빼앗은 땅을 되돌려 줘야 하는 회의에 연합국은 우리나라를 부르지 않은 이유로 조선이 일본과 싸워 이긴 승전국이 아니라는 나약하고 힘없는 나라였다는 사실이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은 "항복"의 백기를 들면서 미국에 의해 어부지리로 대한민국 정부가 만들어지면서 이승만 정권의 험난한
권력싸움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이 권력을 지키려고 온갖 편법을 동원하였지만 추종자들의 과잉충성이 시행착오를 저질르자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쟁에 몰두한 틈을 노린 북한 김일성은 왕국건설의 꿈을 키우는 방법으로 반대파의 저항을 제거하려는 수단으로 전쟁 남침을 기획-선동하면서 노골적인 전쟁준비를 강조하는 행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1948년 4월3일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제주 군부사령관(김달삼)은 휘하의 부하들(1500명)을 이끌고 도내 20여개의 경찰서 관공서 서북청년단 숙소등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며 명단에 오른 우익인사들을 인민재판으로 처형하며 제주도을 장악했다.
혼란에 빠진 제주도 진압에 나선 미군정과 이승만정부는 제주4.3진압 과정에서 도민 28만 명중 5만여명의 사망자를 냈고 마을77%를 초토시키면서 여론이 극도록 나빠지기 전인(1948.2.8) 북한의 김일성은 대규모 인민군대를 창설시켜 남침훈련에 돌입했다.
1949년 1월에 미.소가 남북에 주둔병력을 철수하기로 합의한 일정에 따른 미군정이 철수한 시기를 노린 김일성은 극비에 소련의 남침계획을 승인받으려다 북조선이 남한을 침공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시문이 전달되자 김일성과 박헌영은
이를 기화로 소련에 무기공급을 요청해 성공을 거두면서 북한 전역을 마음데로 주무르는 철저한 독제자로의 변신을 시도했다.
1949년 5월4일 소련의 무기 지원을 받은 김일성은 남침 예행연습차 인민군 2천여명으로 새벽3시에 개성인근의 아군초소를 기습점령하여 서궁덕 상사와 장병 10여명이 점령당한 인민군 초소에 수류탄을 휴대하고 자폭해 아군초소를 재탈환 육탄10용사 사건이다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북한 인민군이 소련제 탱크를 몰고 남침 1개월만에 대한민국을 초토하시키며 대구까지 점령했다.
1950년7월14일 미국은 한반도에 평화가 깨지자 유엔에 보고하고 유엔은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을 파견한 최초의 참전병력 16개국과 의료지원부대 5개국을 급파해 총사령관에 맥아더 장군을 임명하여 동서부에 방어선을 치고 서부방어선 UN군 동부선 한국군을 배치한후 9월17일 인천상륙 작전을 전개해 수도서울 탈환에 성공하자 여세을 몰아 평양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다.
1950년 10월14일 패주하던 인민군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밀려들자 중국정부는 북한인민군을 지원한 11월11일 한국군 2군단과 중종군과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면서 유엔군이 청천강 유역에서 중공군에게 역습을 당해 12월14일부터 흥남철수작전을 전개하고 12월30일 38선 이남으로 후퇴하기 시작해 1951년 1월4일 한겨울에 밀려가는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피난길을 떠난 1.4후퇴였다.
김일성이 시작한 이 전쟁은 북한군 6만,중공군17만명으로 인해전술에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당했지만 중공군이 개입한 1개월만에
중공군은 10만의 병력을 잃었고 남북은 쌍방 150만명의 사망자와 360만명의 부상자 및 남북국토을 초토화시킨 전쟁이었다.
1953년 7월27일 유엔군과 북한인민군은 휴전협정을 조인하면서 중공군을 참관시켜 한반도 전쟁을 휴전상태로 만들어 이에 반발한 이승만 대통령은 저항의 표시로 전쟁포로들을 석방시켜 유행어가 된 빨갱이란 말의 근원은 공산국가가 선호하는 빨간색을 빗댄서 퍼진 빨지산 또는 빨갱이세력으로 불리어지다 좌익세력으로 새를 키운 후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종북주의자로 불려지게 됐다.
이런 변천을 거치면서 종북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을 갈망하는 것인지 맥목적인 북한 김일성을 추종하는 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김일성의 남침전쟁인 6.25을 겪은 우리세대는 기억하고 있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이 부르는 노짱세대들 말이다.
폐허가 된 서울거리,가족을 찾아 헤매는 울부짖음,붉은 완장을 찬 청년들의 인민재판으로 살인하는 끔직한 장면을 어린시절 8세때 목격한 기억과 아직도 남침 야욕을 버리지 못하는 왕족국가를 꿈꾸는 조폭집단의 망상이 전쟁을 일으킬수 있는 난폭자들 말이다.
(1950년) 미국의 주도로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공산화 될 뻔한 위기에서 나라를 되찾은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 욕심 때문에 측근인 이기붕씨의 당선을 위한 부정선거가 들통나 촉발된 1960.4.19 민주화 혁명으로 내각책임제를 수용하고 모든 권력에서 물러나겠다고 이승만 대통령은 눈물어린 호소를 했지만 장기집권을 위한 독제는 버티지 못해 결국 1960년4월26일 하와이로 망명했다.
4.19혁명으로 권력을 이양 받은 집권당인 민주당은 신.구파가 권력싸움에 분열되어 있었고 우리사회도 편싸움에 휩쌓여 혼란한 시기와 맞물린 민주화 욕구는 물가폭등과 사회질서마져 흔들리면서 지도층 일각에서 군의 정치개입을 원하는 목소리뿐이었다.
이에 편승한 군내부에서도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 적체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이 일어났다.
1961년 5월16일 이를 기화로 제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소장과 육 8기생들이 군사정변을 주도해 미8군 사령관 및 야전사령관 이한림 국방장관 등의 반대에 부딪쳤지만 미국정부의 지지표명과 장면내각 총사퇴,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의 묵인으로 5.16 군사정변은 성공한 군사 혁명으로 군출신들이 나라를 이끌어 온 제3공화국시대 희비애락은 월남전쟁이 불붙으면서 경재발전의 큰 그림이 그려지면서 북한과의 격차가 나타나기 시작한 단초가 되었지만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시위로 비상계엄령 선포와 계엄포고령으로 위반자 1120명을 검거했다고 중앙정보부 부장 김형욱은 인혁당 사건을 발표하면서 북한의 지령을 받은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은 전국에 수배중 이라며 국가변란을 기도한 지하조직이라고 발표하며 검찰에 송치하자 공안검사들이 기소장 서명거부로 항명 파동을 일으켰고 재판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에 의한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져 관련자가 뒤 늣게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상처가 아물지 못해 이런 일련의 일들이 쌓여 시위와 데모로 얼룩지자 북한을 의식한 위정자는 더욱 강한 처방으로 대처한 군사혁명시기다.
1967년 1월19일 동해어로저지선 근처에서 조업중인 우리어선을 보호하던 해군56함 당포호가 북한해안포 집중포격으로 교전끝에 승선장병 78명 중 32명이 실종되고 46명이 구조됐으나 그중 4명이 후소치료 받다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다.
같은해 3월22일 자유를 찾아 왔노라며 판문점을 통해 위장 귀순한 북한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이 북의 처조카 배경옥과 캄보디아로 탈출해 북으로 귀환하려다 우리정보원에 체포돼 압송된 후 재판을 받고 사형이 집행되면서 북의 흑심에 경고등이 켜졌다.
열거하기 조차 부끄러운 지난세월의 68년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내에 반.정부봉기를 일으키려다 실패로 끝나자 북한 잠수정으로 31명의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절규하던 어린이를 죽인 이승복사건으로 우리국민들의 안보관이 결집되자 북의 선동에 동조한 어느 저널리즘은 이승복사건은 날조라며 오보 전시회를 열고 반공구호를 만들기 위한 소설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선일보와의 소송에서 패소했지만 보이지 않는 검은 그림자는 이때부터 장막속을 누비기 시작했다.
이에 편승한 북한의 짝사랑은 간첩단 사건을 낳았고 뒤질세라 이어진 북의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에 기름에 불을 치핀 반체제 운동은 시끌법적해지면서 북한의 만행에 분노하며 국가안보를 외치는 목소리가 거세게 몰아처 중앙정보부는 공안정국 역활을 했다.
이런 과정은 남의 탓의 아닌 한반도의 운명이며 대한민국의 삶이고 우리의 숙명이기 때문에 지성인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하면서 남북한이 긴장완화를 위한 미국과 중국의 국교정상화에 맞추어서 안보정책을 벗어나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한 결과 1.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적 해결, 2.돌발적 군사사고 방지 상호간의 신속한 업무처리를 위한 서울과 평양간의 상설 직통전화 가설,3.남북적십자 회담에 대한 적극협조,4.상대방에 대한 중상비방 및 무장도발포기 5.남북간 다방면의 교류 6.남북조절위원회 구성등을 이후락 중앙정보장과 평양의 조직지도부장이 합의했다고 발표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헌법을 발표하면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국회해산,정당 및 정치활동중지, 비상국무회의에서 영구집권을 위한 후속조치를 취한 후 반대발언을 봉쇄하고 조국평화통일을 지향한다는 헌법개정을 공고했다.
자유민주주의에 반한다는 외침이 커지면서 찬.반양론으로 가열된 분열은 우리사회가 병들어 가는 수순을 제공하게 된것이다.
1974년 11월15일 음흉한 북한 김일성의 남침용 땅굴이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하고 국민들은 무섭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이렇게 북한 위정자 두목인 김일성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왕국을 만들기 위한 책략으로 북의 동포들을 기만해 혹독한 땅굴파기 노동을 시키며 체제비판의 틈을 주지않고 원하는 남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하면 모든게 해결된다고 인민들을 속이고 있다
이를 간파한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대비책으로 유신정책이란 늪지대에 빠뜨려 허우적 거리게 만든 김일성의 작품인것 같다.
1975년 국민투표에 붙혀진 유신헌법은 91.9%에 91.5%의 찬성으로 개헌안을 확정시켜 통일주체국민회의 단독후보로 출마한 박정희 후보는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유신체제정부를 출범시켜 조국평화통일과 개방선린외교를 표방한 7개항은 1.조국평화통일을 위한 노력 2. 남북한 상호 내정 불간섭 3.남북화해 성실, 인내노력계속 4.북한 국제기구가입 불반대 5.남북한 유엔동시가입 불반대 6.상호평등 원칙아래 모든국가와 문호개방 7.우방과 기존관계를 공고히 한다.는 선언으로 남북이 약속한 7.4 공동선언문이다.
이런 가운데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벌이던 김대중씨가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납치돼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려 했다는 이유로 국내외에 물의를 일으켜 김종필 총리가 일본정부를 상대로 사태설명과 사과를해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국내여론은 김대중씨의 개인적인 입장은 동정심이 가나 국위에 손상을 입힌 점에는 국민들이 비난하는 입장과 유신체제 반대론이 확산되자 긴급조치1-2호와 3호를 발령하고 민청학련 관련자와 데모가담자 내지 학교를 폐교조치하며 데모학생은 5년
이상의 유기징역과 사형에 처할수 있다며 반체제 운동을 조사한 결과 전국 민총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어 1.024명의 위반자를 조사해 180명을 군법회의 회부해 민혁당계 23명중 8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최고 20년과 집행유예가 선고되면서 북한 김일성의 반응은 더욱 거세게 대한민국을 흔들어 대려고 예상치못한 요인암살지령을 내렸다.
실패를 거듭하던 북한은 74년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려다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조총련계(문세광)에게 대일 공작선인 만경봉호에서 지령을 받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일본인이 공범으로 끼어 있다는 진술로 한-일관계가 급속히 나빠지기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975년 1월22일 유신헌법과 유신체제 유지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로 찬.반뿐 아니라 대통령의 신임여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국민이 원할 경우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임을 밝히고 국민투표에서 73.1%의 지지를 얻자 박대통령은 유신체제가 국민들의 호응을 얻은 것으로 판단, 긴급조치1-4호로 구속한 148명에 대해 구속정처분으로 전국교도소에서 석방조치 하기도 했다.
1976년 3월1일 700여명의 신자들과 재야인사들이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면서 긴급조치철폐,의회정치회복,사법권독립을 주장한 선언문에는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씨와 현역의원 정일형의원이 서명해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20여명이 입건돼 11명을 구속하고 9명이 불구속 기소된 일 또한 원인제공의 본질은 북한 김일성이 꿈꾸는 왕권에 빌붙어 목숨을 부지하려는 졸개들 술책에 대한민국박대통령은 유신정책으로 대항하려는 것이라는 설득부족이 불러온 성급한 예단도 있지만 자유민주주의 근본을 지켜내기도 했다
1976년 8월18일 북한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유엔군 초소부근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북한군의 대담성을 보여주어 유엔이 분개했고 미국은 응분의 댓가를 치르겠다고 벼르고 나왔다.
일촉측발의 전쟁위기로 가자, 북한 김일성은 발 빠르게 유엔군 측에 사과문을 전달함으로써 일단락 되었지만 이렇듯 북의 술수는 불리하면 사과를 하면서 또 다른 도발을 계획하는 이중성을 지닌 국가가 않인 두목아래 모인 조폭집단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1977년에 영화배우 윤정희씨 부부 납치미수사건을 비롯해 배우 최은희씨 납치사건은 북한공작원이 김정일의 지시를 받고 홍콩에서 화물선으로 납치해 김정일이 마중나와 환영했고 남편인 신상옥 감독도 납북됐지만 부부가 탈출에 김정일의 지시에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영화사를 만들어 13편의 영화를 제작했고 제작비를 갖고 탈출한 일화는 조폭집단이나 깡패들이 하는 짖과 같았다.
1978년 10월17일 북한의 회량용 제3땅굴이 우리측 비무장지대 4km지점에서 지하 높이73m 폭2m 간격으로 중무장 병력이 3-4열로 통과할 수 대규모로 74년에 귀순한 김부성(39)씨의 제보로 탐사작업 끝에 발견해 북한은 대한민국의 "적국임이 분명해졌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인 김재규에게 살해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면서 군사재판에서 민주회복과 국민혁명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서울구치소에서 사형당해 유신헌법속에 제10대 최규화 대통령 정부가 출범하면서 1년 안에 새헌법에 따른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정치일정을 밝히면서 유신헌법 폐기 여론이 급 물살을 타기 시작했지만 성급한 제촉이 따랐다.
이런 역사의 흐름속에서 1980년 5월18일 서울 등 주요 도시에서 유신헌법 철폐 가두시위가 점차 확산 되고 5.17 비상계엄 해제등을 요구하는 전남대의 가두시위에 시민들이 합세하며 경찰과 충돌했고 이를 저지하려는 군의 미숙한 진압으로 사태가 악화됐다.
무기를 탈취한 청년들이 광주시가지를 장악하자 총격전이 벌어져 큰 사상자를 냈으며 일부 공공건물과 차량들이 불타자 계엄군이 진입해 시위10일 만에 정상을 회복시켜 민간인 144명 군경26명 등 모두 17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하는 것을 지켜본 우리국민들의 애간장은 말도 못하고 그져 지켜보며 북한 김일성의 야욕에 신경을 집중한 전쟁걱정이 근심꺼리의 화두로 퍼져나갔다.
이시기에 탄생한 최규화 대통령을 의장으로 한 주요각료와 군수뇌부 등 26명으로 구성된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키면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위원장으로 선임해 사회개혁 운동을 전개하며 조직폭력배, 불량배 소탕 등 사회악 제거에 나섰다.
대다수 우리서민들은 폭등한 물가고에 시달리면서도 사회안정을 바라는 이심전심으로 기대치는 상승곡선을 타기도 했다.
1980년 8월16일 최규화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8월27일에 실시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2천5백25명의 투표자 가운데 2천5백24표를 얻은 전두환 국보위 위원장을 선임해 제11대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정제시로 민주주의 토착화, 복지사회건설, 정의사회구현, 교육혁신과 문화창달,평화적 정권교체 전통을 반드시 실천하고 확립한다는 다짐했고 출범한 새정부는 헌법안을 공고한 국민투표에서 95.5% 투표율 찬성91.6%라는 절대적 지지로 확정되어 제5공국 헙법을 공포발효시키며 전두환 정부를 출범시키며
경제안정에 주력한 일화로 김재익 경제수석을 임명하며 대한민국 경제 대통령이란 칭호의 의미로 심각한 서민경제를 의식했다.
1981년 1월18일 미.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전두환 대통령은 미군 철수계획 백지화,한.미안보회의 즉각 제개 등 안보문제 현안이었던 쟁점들을 타결지웠고 전임 대통령의 남은 임기가 끝나자 81년3월25일 총선거를 실시해 제11대 국회를 개원시키고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ASEAN(경재-사회-평화를 목적으로 한 아시아-태평양지역)정상회의에 참석하여 제84차 IOC(국제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각국정상들을 만나 설득한 결과 올림픽 개최지로 한국이 52표를 얻어 27표에 그친 일본을 제치고 성공했다.
1982년 1월5일에는 구회본회를 통과한 3당(민정,민한,국민당)중진들의 야간 통금해제 건의안을 받아들여 37년 간의 통금시대를 마감하면서 중,고생들의 두발 및 복장 자율화 시기로 1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친 후 83년부터 시행하기로 전격 조치했다.
1982년 3월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발생하면서 1층 도서실에서 공부하던 동아대 2학년 장덕술(23)군이 사망하고 3명이 중화상을 입는 방화사건이 일어나자 사건 12일 만에 일당4명 중 주범 문부식과 김은숙이 천주교 원주 교육원에서 자수했다.
이 사건은 광주 5.18사건 당시 미국측이 방관했다는 운동권 학생들의 미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비롯된 의식화 학습을 같이한 배후 조정은 은신 중이던 김현장이 지도 했으며 국가보안법,건물방화 치사죄,집회시위 위반으로 최기식 신부와 11명이 검거됐다
이사건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종교인 구속으로 교회와 국가간의 문제로 한국교회,선교협의회의 성명발표는 반미적 내용과 투쟁적 성격이 대담하여 오히려 국민들의 비판 대상이었고 사형을 선고받은 문부식과 김현장은 형확정 단계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최기식신부 집행유예1년 나머지 8명은 집행유예1년-2년형으로 아무 소득도 없이 국가와 종교인의 갈등만 키운 사건이 됐다.
동년 5월5일 중국민항 여객기가 승객,승무원 105명을 태우고 심양에서 상해로 가던중 6명의 납치범에 의해 피랍돼 춘천 미군기지에 불시착해 중국측이 한국과의 직접교섭을 원해 납치범 6명은 우리법원에 기소하고 승객과 기체를 송환해 대화의 물고를 텃다.
동년 7월부터 일본검정교과서에 한국침략을 진출로 왜곡시켜 정부와 국민들이 거세게 규탄하면서 독립기념관 모금운동이 이어졌고 9월1일에는 소련전투기가 미사일로 대한항공 747점보 여객기를 공격해 탑승자 269명 전원 사망하자 미국과 유엔은 서방국과 한국이 제출한 규탄결의안을 소련이 거부권 행사로 부결시키자 국제민간항공기구가 규탄안을 압도적 다수로 체텍비난 했다.
12월16일에는 국가보안법 및 계엄법 위반으로 복역중 이던 김대중씨를 석방해 가족모두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났고 내란음모 관련자 광주사태관련자 등 제5공화국 출범 이전의 사건관련자 모두 형 집행정지로 사면 석방했다.
1983년 1월11일 일본검정교과서 왜곡으로 불편했던 한일관계에 나까소네 일본수상이 1박2일 일정으로 방한해 한일경협 40억 달러중 ODA18억 5천만 달러 뱅크론 3억5천만 달러 수출입차관 21억5천만 달러로 한일간 현안을 타결지워 높은 평가를 받고 떠났다.
동년2월25일 북한공군 이웅평(29)대위가 미그 19기를 몰고 편대를 이탈해 우리공군기의 호위속에 남쪽기지에 착륙해 귀순3개월 만에 소령으로 진급하고(1996년)대령으로 진급해 가정을 꾸려가다 자신때문에 북의 가족이 픽박속에 산다는 소식에 술에 의존하다 간경화라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48세의 나이로 끝내 숨졌다.
동년 5월7일 북한군 제13사단 소속 신중철(36)대위가 휴전선을 넘어 귀순해 전후 사정을 털어냈고 12월3일 야밤에 북한 간첩선이 아군의 총격에 격침돼 부산 다대포 항으로 침투하려던 무장간첩 2명이 생포돼 조사를 받기도 했다.
동년 6월30일 KBS가 기획방송 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은 시청자들을 오열로 출렁이게 하였다.
이산가족 가슴에 멍들었던 "한"을 달래주고 전.후 33년이 흐르도록 혈육을 찾지못해 애태우는 헤어진 가족의 현실을 4개월 반동안 방송하면서 1만1백89가족이 뜨거운 헤후를 했으며 453분이란 생방송기록과 전세계의 이목도 집중시킨 이변을 연출했다.
1983년 10월9일 전두환 대통령 내외분이 버마,인도,스리랑카,및 서남아 3국 호주,뉴질랜드,부르나이 순방길 첫 방문국인 버마(미얀마)독립유공자 아웅산 묘소에 북한 테러범들이 설치해 놓은 폭탄이 터져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이 순직하고 14명이 중경상을 당한 비극적인 참사로 버마정부는 북한군 정찰특공부대 소속 진모소좌와 강민철 상위, 신기철 상위, 등 3인조 테러범들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진모 소좌와 상위 강민철은 생포하고 신기철은 총격전 끝에 사살 됐다고 발표하면서 강민철은 범행을 자백해 종신형을 받았고 진모 소좌는 사형시켰다는 발표와 증거물 제시로 폭발현장에서 수거된 폭발물 잔해와 범인들이 소지한 브로닝 권총,북한제 소음기 건전지,아연탄환, 등 증거물이 40점이며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3일전 묘소 지붕에 3개의 폭탄 중 2개는 북한제 크레모아 원격조정 폭탄이며 1개는 증거인멸용 소이탄으로 불발됐다는 증거물을 제시하며 북한과 단교를 선언했다.
버마정부의 조사발표로 우방국들과 대한민국과 국교가 없던 공산권 국가들이 규탄대열에 합류하자 중국정부도 랭군만행을 규탄하면서 북.중관계가 심각해 졌고 남.북의 국력차가 갈수록 심화되는 강박심리와 김정일 세습체제의 불만을 해소하려는 무모한 짖인 아웅산 테러와 같은 반문명적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단한 미국은 제3국(비동맹국)에서 북한외교관과의 대화조치를 철회하며
랭군사건의 진상이 밝혀져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데 있는 비동맹모임에서 북한의 실상이 폭로되 미국의 입장이 한층 강화돼 대한민국과 북한과의 수교차이가 벌어져 1백20국 대 1백3개국으로 벌어졌고 남북한 동시수교국이 68개국에서 67개국으로 줄었다.
유엔총회 72개국 법률위원회는 소련과 중국도 참석해 북한의 테러행위를 규탄하는 결의문과 방지 대책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자 항변하던 북한 대사는 참담한 몰골로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시달리며 무응답으로 도망치 듯 사라졌다고 외신들이 타전했다.
김일성의 막장드라마는 세습왕조국을 만들어 권력을 물려준 아들 김정일도 탁한 피를 이어받은 혈통을 과시하려고 추종자들과 북한 인민들에게 겁없는 모습을 보여줘 독재자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하려고 국가의 가치관도 버린 무식한 극치를 지시한 김정일이 아웅산 테러사건을 저지른 것으로 확인됐다.
이 테러사건을 북한이 저지른 사건으로 버마정부가 수사결과를 유엔에 보고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그런데 북한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인용한 AP통신은 우리(북한)은 테러행위란 있어본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잡아 때면서 자작극으로 북한이 날로 높아 가는 국제적 위신을 훼손시키려고 남한놈들이 꾸며낸 자작극이라 했다는 것이다.
웃어 넘길 일이 않이다.
이런 모습이 북한위정자들의 본색이며 이뒤에 숨어있는 악마의 손짖에 빠져 허우적대는 종북주의자들은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며 폐쇠된 우물안 개구리가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을 알고 질식사 시키든지 아니면 저들이 나팔부는 불바다 개임에 흔들리지 말고 박멸하는 길을 찾아 내야 한다.
정치지도자나 지성인의 몪이다.미친개는 몸둥이가 약이라지만 남북은 위험한 전쟁놀이를 경험해 잘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2의 도발이나 테러같은 국지전을 일으키는 북한의 속사정에 속지말아야 한다.
이런 북한위정자들의 속내 또한 권력때문이다,이 권력은 자신들을 보호 해주고 양식이기 때문에 독제자 에게 비위를 맞추며 충성심을 보이는 미친개가 되어 신처럼 떠받들다 보니 독제자의 사고는 무지했다.
미친 개들이 날뛰는 것을 때려잡는 방법은 뭉치는 길이다. 안보를 위한 결집으로 확고한 국가관을 갖고 있으면 비집고 들어올 틈새가 있을수 없다는 신념을 같이한 정치인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가는 그 잘난 정치인들 때문에 편안을 보전하지 못하고 우리사회가 혼탁의 길로가자 미친개들은 더욱 날뛰고 있다.
이런 북한의 속성을 제대로 가르처 미래가 밝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야한다.
못다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계속 할 것이며 우리시대의 누군가의 사명이다. (세상에 알려진 역사를 요악한 것임 )
첫댓글 정리되어 새로운 역사공부를 하였네 누구나 공감하고 수고한 친구에게 박수를 보내네 수소
정리 되여 이해하기 쉬웠네 수고한 진구에게 박수를 보내네......
우리시대의 우리들 이야기의 증거사진들을 찾아 확인후 손자들에게 대학민국의 역사를 들려주어 나라사랑하는 애국심을 갖게하는 것 또한 할배들이
할수있는 사명이며 영원한 대한민국을 대물림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알려진 기록을 앞으로도 힘 있을때까지 계속 쓰려고 하네, hdw1193 친구야 읽어주어서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