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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이후의 일정을 물었다. 한 스님을 뵈러 간다고 말했다. 다섯 살부터 가부좌를 틀었다는,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가족이 함께 모여 자연스럽게 반야심경을 외웠다는 웅산은 불교가 곧 생활인 가풍에서 성장했다. 부친은 불교를 공부하신 분이라고 했다. 집안에 스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열일곱에 입산했다. 웅산은 그녀의 법명이다.
입산의 이유는 다소 희미하게 들렸다. 언제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왔다는 웅산은 ‘학교 가듯’ 절에 갔다고 설명한다. 어느날 갑자기 가방도 없이 그냥 차비만 들고 늘 가던 절에 갔다. “마음대로 행동했다간 마음이 다친다고 하는데, 상처도 내 선택의 결과니까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어른이 되었다. 원래 어른은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웃음).” 참선을 하던 중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노래가 입에서 흘러 나왔다. 부처님을 앞에 두고 ‘대중음악’을 노래했던 것이다. 큰스님으로부터 죽비로 어깨를 맞았다. 아팠다. 아프기 전에 실은 깜짝 놀랐다. 다시 합장했다. 그런데 ‘나오고’와 ‘맞고’가 계속해서 반복됐다. 내려가야 했다. 몸이 음악을 원하고 있었다. 입산했을 때처럼 선택은 빨랐다. 산에서 생활한지 2년이 지나 있었다.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에 입학했다. 학교에 가서 가장 유명한 밴드에 들어가고, 보컬을 따 내고,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같이 밴드하는 남자 선배와 연애하는 것도 미션이었다. 야무진 꿈이 아니라 확고한 이상이었다. 그렇게 해서 학내 밴드 ‘돌핀스’에 들어갔고, 록커 선배와 연애도 성공했다. 이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이행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선배 남자친구랑 결국 어떻게 됐나. 헤어졌다. 내가 차였다. 헉…. 이유를 물어도 되나. 당시 내 목소리는 심하게 파워풀했다. 무대에 서서 노래하기 전까진 다 남자인 줄 알았다. 유독 남자친구가 제일 예민하게 굴었다. 내 목소리가 너무 남자 같다는 게 결별의 이유였다. 노래방에 갔는데 강수지 노래를 못 한다고 구박하는 것이다. 그걸 트집잡더니 결국 헤어지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강수지 언니 별로 안 좋아한다(웃음). 괜한 참견을 하고 싶다. 그런 남자라면 헤어져도 된다(웃음). 그는 지금, 이렇게 훌륭하고 아름다운 보컬리스트가 된 웅산을 보면서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해후 비슷한 걸 하긴 했다. 헤어지고 나서 5년쯤 지났을 때였나? 나는 막 데뷔해서 활동하던 중이었다. 한 때 같이 노래했던 시절을 보냈으니 궁금하기도 부럽기도 했나 보다. 선배는 그 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길 털어놨다. 그러니까 더 싫더라(웃음). 어릴 적엔 그리 멋있게 보이던 남자였는데 5년 후엔, 좀 완곡하게 말해서, 상황이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릴 적 내가 뭘 좀 잘못 본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선배, 됐거든요(웃음).” PART 1. “소리는 온몸에서 나온다”
지난 앨범 < The Blues >(2005)는 제목이 모든 걸 말해줬다. 말 그대로 완연한 블루스 음악이었다. 웅산의 이름에서 대번에 와 닿는 중성적인 느낌이 강했다. 앨범을 돌리기 전에 좀 긴장했는데, 이렇게 부드러운 노래가 나오다니 정말 배신이었다(웃음). 남자 잡아먹을 일 있느냐는 얘기도 들었다(좌중폭소). 순간순간 원하는 음악이 있었을 뿐이다. 누구든 한 가지 색깔만 갖고 살지는 않는다. 나한테는 아주 여성스러운 내면이 있고, 대학 밴드 시절 내지르면서 노래했던 것처럼 절규하는 함성이 있다. 왔다갔다 한다. 재즈를 하면서도 갑자기 록에 미련이 발동해 대학 졸업하고 서울예대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결과는? 떨어졌다. 재즈하면서 알게 된 선생님들이 교수로 있었고, 다들 “너 여기 왜 왔냐” 하는 분위기였다. 날 별로 안 좋아했나봐. 서울예대 가면 확실한 록커로 거듭날 수 있나? 모르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들이댄 거다. 거기 떨어져서 지금 재즈하고 있지 않나. 운명이려니 생각한다. 운명론을 믿게 된 또 다른 계기가 있다. 대학가요제에 나갔다. 나중에 듣고 보니 심사위원단이 그해 대상 수상자와 나 사이에서 갈등했다 한다. 근데 인기상이랑 가창상만 주더라. 아쉽긴 했지만 그 때 받고 기고만장했더라면 재즈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록에서 재즈로 오기까지 순탄치 않은 과도기를 거쳤을 것 같은데. 약 2~3년간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록은 디스토션이 강하고, 육성 만큼 풍성한 악기가 목소리를 지탱해 주는 음악이다. 그런데 덜렁 피아노 한 대 갖다 놓고 노래하려니 난감했다. 록의 타성으로 뭐든 직선적으로 노래했다. 그야말로 ‘샤우팅 재즈’였던 것이다. 그게 12년 전이고, 그 때만 해도 재즈가 지금만큼 풍성하지 않았으니 과격하게 재즈하는 게 신선했던가 보다. 어른들은 모두 칭찬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잘 하는 줄 알았지. 엘라 핏츠제럴드는 노래 못하는 가수라고 생각했으니, 당시는 참 앙증맞게 건방졌던 것이다(웃음). 전향의 계기가 있었나? 나는 근본적으로 소리에 호기심이 많다. 추상적인 소리든 구체적인 소리든, 내 앞에 앉은 사람의 목소리뿐 아니라 심지어 바람 소리를 듣고도 하던 일을 멈추고 많은 생각을 한다. 내가 음악을 하는 건 소리에 대한 탐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내 안에서 록의 소리를, 재즈의 소리를, 블루스의 소리를, 뮤지컬의 소리를, 그리고 지금의 부드러운 소리를 발견했다. 그 소리는 어디에서 나오나. 목소리의 발원지가 어디인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배로 하느냐 목으로 하느냐 두성을 쓰느냐 흉성을 쓰느냐 등등. 하지만 그렇게 나눌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대에서 집중해서 노래하다 보면 발가락이 찌릿할 때가 있다. 발끝에서 무언가 자극을 느끼고 몸이 감전되는 경우가 있다. 소리는 온몸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노래할 줄 아는 능력을 언제 발견했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음악의 기초적인 작업을 어느 정도는 경험했다. 독창, 중창, 합창에 브라스 밴드까지 했다. 5학년 때는 동네 노래자랑에서 3등한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때는 전인권 이선희의 노래를 따라하기도 했는데, 혼자 연습하면서도 누가 시키면 부끄러워하고 울고 그랬지. 머라이어 케리의 16단 꺾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웃음). 사실 모창을 하거나 고음 및 바이브레이션을 구사하는 능력을 연마하는 건 그리 당기지 않았다. 걸러내지 않고 내가 가진 걸 다 드러낼 수 있는 보컬리스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느낌을 표현하라는 주문에는 자신있게 응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보컬 전문가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다. 음치는 정말 구제 가능한가. 이 분야에도 반복교육이라는 것이 적용된다. 별 건 아니고 똑같은 곡 계속 시키는 건데, 그렇게 무식하게 하면 확실히 성과가 있다. 맨날 내 노래 듣고 드디어 한 발 나아간 내 동생이 산증인이다(웃음). 그보다 확실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만약 노래를 잘하고 싶거나 관심이 많다면 당신의 몸 안에 찾지 못한 소리가 많다는 걸 이야기해 주고 싶다. 앞서 말했듯 소리는 온몸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건 어느 순간 찾아낸다. PART 2. “일본에서는 팬의 집에 가서 노래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활동이 훨씬 활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소통에 무리는 없나. 중국어를 전공했고, 부전공은 일본어였다. 그리고 활동한지 벌써 10년이라 통역 없이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농담도 대강은 이해한다. 일본어도 노래하기도 하나? 보통 영어, 우리말로 한다. 의외로 한국어로 부를 때 반응이 좋다. 그런 인기넘버(?) 중에서 2집에 실린 ‘비새(雨鳥)’라는 곡이 있는데, 첫 가사가 새가 울 듯 ‘쪼로록 쪼로록 쪼로록’ 하면서 시작한다. 그 발음이 흥미롭게 들리는가 보다. 쭉 노래하고 가사에 담긴 의미를 일본어로 이야기를 들려주듯 설명해 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일본과 우리 환경을 비교하면 부럽다는 이야기부터 먼저 나올 것 같다. 1990년대 나와 서영은과 말로 같은 보컬리스트가 조금씩 활동을 시작했고, 이제야 시장이 조금 넓어졌다고 느낀다. 하지만 일시적인 뜨거움이랄까. 일본의 경우 연령층이 높고 진지하고 꾸준하다. 일단 재즈 클럽이 많다. 잘 차려진 클럽이 아니더라도, 라면 가게에서도 테이블 밀어내고 무대를 만들어 줄 만큼 음악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산다. 워낙 저변이 넓어 클럽이 없는 시골에도 재즈 마니아는 존재하고, 때때로 어느 집에서 재즈 뮤지션을 초빙하고 동네 사람들을 함께 불러 잔치하듯 음식 같이 해 먹고 노래자랑을 한다. 여기서는 볼 수 없는 문화다. 공연 끝나면 긴장 풀리고 술 생각나지 않나. (우리나라 지역으로 비유해 말하자면)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순회 공연 끝나기 전까진 절대 그럴 수 없다. 우리나라 여가수들은 공연하면 세 곡 정도 우아하게 부르고 곧장 내려와 옷 갈아입지만, 일본에서는 국내에서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한 단독 공연을 연달아서 한다. 스스로 스토리를 만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야 하니 무대에 설 때는 그게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이동하면서 서너 시간 차에서 자고 공연을 강행하는 동안 스스로 놀랄 만큼 체력과 집중력이 좋아졌다. 숱한 경험을 통해 살아남는 방법을 익힌 것이다(웃음). 여기서는 공연 스케줄도 잡기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다. 많이 하고 싶다. 크고 화려한 무대를 기대하는 게 아니다. 의외로 일본이나 유럽의 공연장은 여기보다 소박하다. 진짜 시골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장소를 경험하는 동안 무대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 거리에서 노래하는 것도 즐겁다. 홍대 놀이터에서도 그 때처럼 노래하고 싶다. 우리나라 거리에서 노래하면 다양한 세계에서, 다양한 무대에서 재즈를 겪으며 느꼈던 풍성한 감정들을 그대로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PART 3. “재즈는 고리타분한 음악이 아니다”
어제 뭐했나. 어제? 음…. 어제 내가 뭐했지? 아하, 술 마셨다. 팬클럽 미팅이 있어서 열다섯 명쯤이 모였다. 급번개였다(웃음). 세 번째 앨범 잘 되기를 축하해주는 자리였는데 새벽 세 시까지 달렸으니 발매 앞두고 과음하고 말았네. 어제 일정을 왜 물었는지 혹시 감이 오나? 글쎄…. 글쎄…. 잘 모르겠는데? 웅산의 세 번째 앨범의 제목이 < Yesterday >이기 때문이다. 동명의 수록곡이 실려 있기도 하고. 아하….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건 어젯밤 꿈에 취해서 만든 노래다. 눈을 떴는데 그 꿈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슬픈 꿈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 졸이며 기다리다가 지쳐서 결국은 놓아주는 꿈. 후다닥 피아노 앞에 앉아 코드를 잡고 그 밤의 꿈을 생각하면서 가사를 만들었다. 아하, 그런 내용이었나? 가사가 영어라서 몰랐다(웃음). 앨범 얘기를 꺼내면 음악에 대한 진지한 답으로 시작할 줄 알았는데 낭만적인 가사부터 이야기하다니, 의외다. 멜로디와 작곡은 동시에 진행된다. 나한테는 멜로디만큼, 아니 멜로디보다 중요한 게 가사다. 노래에 내 기분과 감정을 싣는 것처럼 가사 또한 내가 겪어온 경험과 다양한 생각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 아, 가사 하니까 새 앨범 수록곡 중에서 ‘미워하고 그리워하며’가 생각난다. 부클릿을 뜯어 보면 이 가사에만 수없이 물결(~)이 나온다. 일부러 넣은 것 같은데. 공들여 썼으니 느낌을 잡아서 읽으라는 사려 깊은 신호다(웃음). 세 번째 앨범 < Yesterday >의 스타일을 ‘토치 송(Torch Song)’이라고 규정한다. 이를 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 달라. 토치 송은 아주 간단하게 위스퍼링, 그러니까 속삭이고 읊조리듯 노래하는 것이 기본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20~30년대 미국 재즈의 경향이다. 나는 옛 음악에 관심이 많고, 이 토대에 지금의 내 느낌을 얹고 싶었다. 타이틀곡은 ‘아무 말 말아요’가 됐다. 많은 고민을 거쳐서 나온 결과일 것 같은데. 타이틀곡을 의식하고 작업이 진행되지는 않는다. 처음 가장 애착을 가졌던 노래는 ‘거미줄’이었는데, 녹음을 마치고 나니 딱 2% 부족하다고 느껴서 일단 접어뒀다. 모니터를 해 보면 보통 ‘미워하고 그리워하며’를 꼽는다. 그래도 ‘아무 말 말아요’를 선택하게 된 건 음반의 성격과 앞으로의 활동 방향과 가장 잘 맞는 곡이었기 때문이다. 재즈 색깔도 있고, 토치 송의 창법도 가장 강하고, 가사에서 오는 느낌도 대중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걸 고려해서 내린 판단이다. 스스로 가장 애착을 갖는 노래가 궁금하다. 꿈을 기억하면서 만든 ‘Yesterday’랑 ‘사랑이 너를 놓아준다’에 가장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사랑이 너를 놓아준다’는 예상 밖으로 빨리 만들어진 곡이다. 프로듀서 표창훈과 마주보고 어떤 곡을 쓸까 머리를 싸매고 있던 중이었다. 그가 문득 피아노 앞에 앉아 주문했다. “누나 그냥 하고 싶은 얘기 던져 봐요.” 나는 그냥 순간 생각나는 대로 ‘잊는다’라고 말했다. 갑자기 일사천리로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곡의 느낌에 맞는 가슴 미어지는 가사가 나왔다. ‘사랑이 너를 놓아준다’는 말은 사랑에 지쳐서 택한 포기일 수도 있고,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갈증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정직한 노래가 나왔다. 비밀스럽게 써 놓은 일기장을 들킨 기분이 들기도 한다. 새 앨범 자켓의 이미지는 새 앨범의 방향, 그러니까 ‘토치 송’을 추구하는 웅산의 이미지를 잘 잡아낸 것 같다. 너무 잘 나왔다. 나도 만족한다(웃음). 한편 ‘The Look Of Love’ ‘Angel Eyes’ ‘Ain’t No Sunshine’ 같은 스탠더드 곡들이 실려 있다. 워낙 많은 버전이 있어서 선택할 때 신중했을 것 같은데. 내가 희망하는 건 이런 반응이다. “이거 웅산 버전이 제일 좋더라.” 저작권이나 비용의 문제는? 백원을 쓰는지 백억을 쓰는지 모른다. 그건 회사에서 하는 일이다. 여태까지 국내 홍보는 늘 활발하지 못했다. 그동안 앨범은 매장에서보다 공연장에서 더 많이 팔린다고 들었는데. 몰랐다가도 라이브를 보면 사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덥썩 가져가는 게 눈에 보여서 홍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웃음). 조금 더 쉬운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사의 뉘앙스를 조금만 바꿔도 곡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거기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많이 재즈를 좋아할까를 고민한다. 그렇게 어렵고 고리타분한 음악은 아니라는 걸 늘 강조하고 싶다. 앨범을 들어보면 내가 얼마나 다정다감한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웃음). 애즈 원, 박효신의 앨범을 작업했던 표창훈 프로듀서와 손을 잡은 건 그런 이유에서였나?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짙은 재즈와 블루스로 뼈대를 보여주면 그는 경력자답게 보다 편안한 느낌으로 완성해준다. 앨범은 가요의 느낌을 잘 살리려고 했고, 그러니 쉽게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앨범에서 드러내지 못한 더 강한 표현들은 라이브에서 충분히 보여줄 수 있으니까. 나는 언제나 공연에 목마른 사슴이다(웃음). 오늘 갑자기 예정에 없던 공연 스케줄이 잡히면 노래할 수 있나. 아스팔트 바닥에서라도 한다.
(이민희) |
첫댓글 웅산님의 진솔한 모습이 보이는 인터뷰입니다...(이민희씨 참 인터뷰 잘하네요)
웅산님 담엔 꼭 강수지 노래 불러주세요...ㅎㅎ
언니 앞에서 보랏빛 향기 노래 해야지 ㅋㅋㅋㅋㅋㅋ
ㅋㅋㅋ
아스팔트 바닥에서라도,, 가슴이 찡하네요^^
그러실 분이죠.....
강수지 얼굴 사진에 구멍 좀 뚫어드릴까요?? (초딩버젼) 아 놔~~~ ㅋ 멋있슴... 카리스마가 ㅎㄷㄷ
어떠한 상황이든 순간순간 느낌으로 노래를 부르는 웅산언니~ 정말 빠져듭니다 !!! ^^
정말 담엔 보라빛향기 꼭 불러주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