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업역사의 막을 연 박 명예회장과 과거 그의 동료들은 허허벌판 속에
포항제철소를
건설했다.
건설을 실패하면 오른쪽으로 돌아 바다에 몸을 던지자는 ‘우향우 정신’도 그 당시 나온 말이다.
24시간 쉴틈없이 ‘깡’으로 일했고, 전국 곳곳에서 모인 근로자들과 함께 박 명예회장도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박 명예회장의 눈물은 고난의 과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후 세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느꼈던 감동이 담겨 있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적신 눈물로 남아 있다.
<김상수 기자 @sangskim>
dlcw@heraldm.com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별세/ 향년 84세]-----.
박태준 회장은 12월 13일 오후 5시께 별세했다. 사인은 급성 폐손상으로 알려졌다.
박태준 회장은 폐부종 증세가 악화돼 한달 전께부터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 11월 9일 입원을 한 박태준 회장은 지난 11월 11일 흉막-전폐절제술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 12월 5일 급성 폐손상이 발생,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계속해왔다.
[포항제철 야경]
박태준 회장은 지난 2001년 당시 흉막섬유종으로 인해 미국에서 폐에 생긴 물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이후 폐기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 등 후유증을 겪어왔다.
당시 박태준 회장의 폐에서는 모래성분이 발견돼 젊은 시절 영일만 벌판에 포스코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먼지를 장기간 흡입한 게 폐질환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나오면서 주위를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1927년 출생해 6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자란 고(故) 박태준 명예회장은
1945년 일본 와세다 대학 기계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박태준 명몌회장은 1948년 광복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육사 6기 출신인 박태준 명예회장은 육군 소위로 임관, 한국전쟁을 통해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등을 수훈했으며 이후 196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1964년 현 대구텍의 전신인 대한중석 사장 재임 1년만에 흑자기업으로 바꾼 후
68년 4월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포항제철 사장직 재임 10년만에 연 550만톤의 철강을 생산하는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현재 포스코는 연간 철강 생산규모 3,500만t으로,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 중 하나(세계 6위)로
성장했고 자동차,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국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정계에도 입문했다. 1980년 전두환 정권 때 정계에 입문해 제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 재무위원장을 역임하고 1988년에는 민주정의당 대표를 맡았다.
이후 1990년에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최고의원을 맡기도 했다.
1991년까지 포스코에 몸을 담았던 박태준 명예회장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2000년에는 총리를
역임했으며 2008년 6월에는 포스코 청암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박태준 명예회장은 포항제철을 경영하며 사원 복지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최고 수준의 주택단지를 조성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사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을 포함해
초, 중, 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1986년 포항공과대학교를 세웠다.
포스코는 박태준 회장이 포스코와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점을 고려해 최대한의 예우로
장례를 준비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