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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기상은 실로 오랜만 이었다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기다리면서 긴장 속에서 지내온 나날 탓 이었던지 지난밤 내내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이내 자명종이 울렸다
드디어 닥친 운명의 날, 마라톤 풀코스 처녀 출전,
어제 저녁 챙겨 놓은 행장을 꾸려 시청 앞으로 아내와 나섰다.
새벽 5:00시 시청 앞 버스에 시동이 켜져 있고, 삼삼오오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는 것이 전군 마라톤에 가는 버스 같았다.
일전 하프마라톤 때 뵌 적이 있는 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버스에 올랐다.
이른 새벽 단지 같은 취향의 운동을 한다는 것만으로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동질감, 동료애를 느끼며 다들 가볍게 정담을 나누긴 하나, 이른 새벽에 더구나 대장정의 결전을 남겨둔 날이라 대부분 말없이 의자에 기대어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나와 달리기, 적어도 달리기는 나의 변변치 못한 운동실력 중에선 선택 받지 못하고, 오히려 선착순이나 기타 체벌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졌던 종목이었다. 굳이 있다면 원시적 생존수단으로서의 달리기, 도망가는 소를 잡으러 간다든지, 아님 놀이삼아 건드린 땅벌의 습격을 피해서 도망가는 추억이나, 변변한 우의나 우산 없던 시절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추녀 밑으로 내달리던 삶 속에 자연스레 묻어 있는 수단일 뿐이었다.
물론 다른 운동도 잘하지 못하지만 딴에는 여러 가지 운동에 흥미를 가지고 설치고 다녔던 기억이 현재 장만하고 사용하지 않은 녹슨 장비들을 보더라도 운동은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다.
단지 달리기에 추억이 있다면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나신 아부지와 한판 달리기 겨누기가 눈물겹게 생각 날 뿐이다.
나의 아부지, 오붓한 부자지정을 나누지 못하고 떠나 가버린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애증과 가슴 깊은 곳의 회한의 그리움으로 아버지 그리고 달리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많은 형제 자매 중 제일 아버지의 외모와 체형을 닮았다고 애기 할 당시에는 아무런 느낌 없이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것이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썩 기분 좋은 애기도 아닌 그저 그런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결혼 적령기를 놓쳐버리고 해외에서, 그것도 망망대해에 떠다닐 때도 나의 결혼문제 때문에 아름아름 처녀 있는 집안과 혼담이 오갈 때도 총각이 없는데, 어떻게 결혼여부를 애기할 수 있냐고, 상대 집안에서 난색을 표할 땐, 총각 보는 것이나 그냥 아버지인 나를 보는 것이나 생긴 것이나 기타 모든 것이 똑 같으니 염려하지 말고 혼사 결정짓자고 절박한 부모심정으로 억지 아닌 떼를 써곤 했다는 것을 귀국해서 듣곤 했다.
그 정도로 외모나 체격, 체질이 너무 닮아서 각별한 정도 쏟는 듯 했으나, 당시에는 전혀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는 오히려 절대군주 같은 아버지로만 느껴졌다.
당신의 식솔과 한 많은 세월이 쏟아낸 부모 없는 사촌, 육촌들이 한 지붕아래 살며 다들 당신의 노력에 의지하며 살아가던 시절, 아버지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당신의 강한 성격으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철 같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던 분 이었고, 앞모습 보다는 내내 사업차 집을 떠나거나, 아님 돈 떼먹고 일하러 오지 않은 선원들을 잡으러 새벽길 나서던 뒷모습의 아버지만이 기억에 있을 뿐이었다.
년 중 반은 집을 떠나 멸치 떼를 쫓아 바다에서 지내시던 아부지, 이따금 아부지가 집에라도 오는 날이면, 반가움 마음 보다는 또 다른 긴장이 일어나고 했다. 바닷물과 고기 그물과의 씨름에 다져진 억센 뱃사람의 손바닥과 검은 콜타르를 부은 듯이 검게 탄 목덜미는 지친 삶의 흔적이 안타까운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무서움으로 닥아 왔다. 더구나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번득이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은 철판이라도 꽤 뚫어 버릴 듯해서, 마주치기조차도 부담스러운 강한 눈빛을 가진 분이셨다.
아마 국민학교 3~4학년쯤 되던 해에 이런 호랑이 같던 아버지와 나와의 멋진 달리기 시합 한판이, 아주 다정스럽게 벌어져 온 동네 사람들이 멋진 관람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아버지와의 달리기 첫 번째 인연되는 사건이었다.
당시 좀은 개구쟁이 였던 내가 밖에서 맞짱을, 그것도 나보다 나이 많은 상급생 하고 멋지게 뜨고 태연히 집에 왔는데, 아니 상대가 분했던지 한판 더하자고 집에까지 울면서 악에 받쳐 찾아온 것이었다.
당시 우리의 싸움 규칙은 잡고 치자, 아님 잡기 없기다는 둥, 등등의 사전 협의가 있고, 전해지는 엉터리 방송에 의하면 쌀밥 먹으면, 꽤가 많고 보리밥 먹으면 힘이 좋다 둥 등등의 사전 지식들을 안고 “됐나, 됐다”로 게임(?)이 시작되는데, 승부는 상대가 코피가 난다든지 넘어져 밑에 깔려 싸움진행이 아니 될 때, 코피가 난놈, 밑에 깔려 더 이상 싸움 진행에 어려움에 처한 놈 등이 진다는 것이었다.
이날의 싸움역시 사소한 놀이중 시비가 일어 사전 예고 없이 벌어졌고, 상대가 나보다 나이도 많고, 워낙 힘이 세고해서 논둑으로 밀어붙여 논두렁에 걸려 넘어지게 하여, 녀석을 몇 번 줘어 박고 그냥 집으로 도망친 것이 전부인데, 예상을 뒤엎고 상대가 울면서 집으로 쳐 들어온 것이었다.
하필 이날 아버님이 동네 분들과 모여 사랑채 지붕 이엉을 이우고 계시던 날 이었고, 이따금 이동공보반 영화를 상영하던 넓은 마당에 동네 어른과 머슴님들 그리고 아버님이 보고 계시는 마당 한 가운데서 쥐 방울 만한 녀석 둘이가 주먹을 불끈 쥐고 호시 탐탐 상대의 허점을 노리며 쌍심지를 세우며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더구나 동네 머슴들과 어른들이 응원 비슷하게 하면서 어서 붙어 치고받으라고 응원까지 하는데, 상대는 나에게는 벅찬 덩치라, 좀은 긴 탐색 뒤에 먼저 공격하기보다는 상대가 덤비면 상대의 거시기를 향해 앞발차기를 해야겠다고 작전을 세웠다. 그런데 윗 채 마루에서 마당을 내려다보고 계시던 아부지가 그냥 벼락같이 마루를 박차고 나를 향해 내려오시는 것이었다.
동넨 사람들이 재미삼아 부추기는 싸움에 하는 수 없이 지나치는 듯해서 본격적으로 한판 하려고 했던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거이 오늘 사건 벌어졌다, 평소 아버님의 불같은 성격을 잘아는지라, 이거 잡히면 완전 중상이다 싶어, 순간적이 기지를 발휘하여 집 뒤 농기계 보관한 좁은 공간을 쏜살같이 빠져 아래채를 한바퀴 돌아 다시 마당을 가로질러 집앞 앞 한길 논둑을 타고 올라 무릎까지 자란 보리밭을 겁에 질린 울음을 날리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보리밭에 잠뱅이 스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 오는 소리에 힐 것 뒤를 보니, 아버지의 분노에 찬 질주가 마치 호랑이 먹이 잡아채기 직전의 그것처럼 점점 거리를 좁혀 오는 것이었다.
정말 태어나서 그처럼 절대 절명의 순간에 원초적인 울부짖음의 비명을 하면서, 달리기를 고추가 떨어져라 하고 죽도록 한 적은 없었다.
평소 전쟁놀이 하던 보리밭과 이랑을 가로지르고 몇 개의 언덕을 뛰어 내려 달리는데 점점 더 좁혀오는 아부지의 모습이 호랑이 아가리처럼 뒤 덜미로 향해 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나의 울부짖음이 아침나절 온 동네와 푸른 보리밭을 뒤 덮고 있었다. 일찍이 아버지의 억샌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아픈 맛과 회초리의 뜨거운 맛을 심심찮게 보아온 지라 잡힐 땐 잡히더라도 죽자 살자 달리면서 앞을 헐깃 보니, 이웃 아저씨 아주머니가 타작마당 한가운데 마주 서서 보리인지 아님 조 인지를 바람에 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옳다구나, 저사이로 방향을 잡으면 분명 아버지를 제지 할 것 같은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나는 울부짖으면서 쏜살같이 두 분사이로 뛰어나가는 순간 이내 아버님의 질주는 그곳에서 제지를 당했고, 나는 생포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어 내가 삼촌이라 동네 친척 내에서 아버님의 분노가 가실 때 까지 몇일 그곳에서 지낸 기억이 있다.
남들은 운동회 날 아버지나 어머니 손잡고 달리기하고 엿 먹고 막걸리 마시는 게임을 했다는데, 나는 그것과는 좀은 거리가 있는 쓰라린 추억의 아버님과의 달리기 추억이 있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부자지간의 오붓한 정이라든지 이야기 보다는 그저 어르신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미덕이고 또한 아버님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며 지내던 나날이었다.
더구나 몇 년을 두고 시도하던 나의 작은 도전의 실패와 군 입대 등으로 다급해져, 차선으로 선택한 나의 진학,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을 수 있는 수산계열 학교 진학했다.
선배들의 엄격한 규율이 무섭게 있었지만, 국립이라 등록금도 싸고, 기숙사가 있어 대처에서 비싼 하숙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던지 입학식 날 평소 아버지의 모습과는 달리 어머님을 대동하시고 입학식에 참석하였다.
“그래 아부래도 뱃놈들이 쇼부(승부)가 빠르다, 일반 대학에 가서 얄라 궂은 직장에서 몇 푼 받으면서 빌빌거리는 것보다, 이 길이 역시 쇼부는 빠르다”내가 원하던 대학을 가지 못해 의기소침 해 있던 내게 용기를 주었다. 이어 내가 거처할 기숙사에 와선 같은 방 룸 메이트들의 인사를 받고는 아무런 스스럼없이 방귀를 우렁차게 뀌어 놓고는 아무 일 없는 듯이 이것 저것 묻고는 태연히 가시는 것이었다.
이후 아버지의 겁난 울타리를 벗어나 학교, 군대 그리고 해외 취업의 여행을 떠나 양주며, 양담배가 지천으로 늘린 곳에서 마치 호랑이 굴을 벗어난 토끼처럼 자유의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찔락거리며 이곳 저곳을 떠 다니고 있었다.
그런 중, 이다금 들리는 소식은 그간 아름아름 소비층을 넓혀 가던 인공조미료의 공격적 시장 확대로 멸치의 소비감소, 게다가 오일쇼크로 인한 출어비용 증가, 이어 70-80년대 급격한 산업 발달로 인한 인력난 등등으로 멸치잡이 권어망 사업은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른반 산업의 패러다임이 갑작스레 바뀌었는데 업종 전환을 하지 못하고 그냥 멸치만 쫓아다니는 꼴이 되었나 보다.
대부분의 근로자가 작업강도가 덜하면서 보수도 좋은 일반 산업체로 옮겨 감에 따라, 60년대 새벽부터 집 앞마당에 줄을 서던 승선 취업 희망자들을 이제 찾아도 구하기도 힘든 인력난마저 겹쳐 멸치 어업은 폭삭 망하고, 다행이라면 남보다 빨리 결정, 결단 처분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휴가 받아 귀국해서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예전의 번득이는 눈빛과 꼿꼿한 자세보다는 어딘가 지치고 힘없어 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었으나, 여전히 무슨 말이라도 잘못 할라치면, 예전의 그것은 아니지만, 니깐 놈이 돈 좀 번다고 까쭈거린다는 눈짓을 보내다 행하니 돌아앉아 쳐다보지도 않는 오기는 여전하였다.
아부지와 아들, 아들은 아부지의 성격을 다시 닮아 마음속의 긴 이별은 한 지붕 아래서 말없고 이어졌고, 평온한 가운데서도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오기와 상대를 인정하기 싫은 복잡한 마음들은 있었지만 그래도 오붓한 정들은 있었으리라.
먼 이국의 직장 생활에서도 그래도 제일먼저 떠 오는 것은 나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걸어온 아버지, 아버님은 내 마음속의 영웅이었고, 검푸른 파도의 생리와 위험을 누구보다도 먼저 이해하는 유일한 분이었고, 등 뒤에서 죽음의 파도와 맞서는 아들에게 측은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나는 모른척하며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귀국하여 내가 가지고 온 선물은 손도 안대고, 관심조차 없는듯하고 계시다가, 내가 출국하고 나면 선물한 시계며, 양주를 이웃들에게 별것 아닌 것처럼 자랑하며 풀어 나누어 마시고 하셨다.
이런 먼 이별과 은근한 앙금들은 내가 늦은 결혼을 하고 먼 객지에서나마 명절 때나 집안의 대소사에 참석하면서 세월 속에 자연스레 가셔졌고, 이어 이따금 피곤해 하는 아버님의 삶의 무게에 이제 보답하겠노라 다정스레 애기하는 식의 정분도 쌓고 하던 중 당뇨로 인한 합병증 이어 실로 조그마한 상처에서 감염된 상처는 결국 강철 같던 아버님도 서서히 녹슬게 하더니 마침에 부러지고 말았다.
차마 형언 할 수 없는 고통과 혼수상태에서 완전히 피골이 상접한 산 주검의 나날을 4개월이란 중환자실에서 지내다, 결국 우리 손으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불효의 통절한 짓거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양 볼에 흐르는 한줄기 눈물 이 세상을 향한 말없는 한 처럼 멈추듯 흘러 내리더니, 마치 기차가 터널을 통과하고 다리를 건너, 협곡을 지나서, 긴 여정을 마치고 나른한 기적의 한숨을 토하며, 어느 이름 모를 역사에 운명처럼 멈추고선, 열린 객실 문으로 승객들을 토해내고서는, 수증기를 품어내며 긴 휴식에 들어가듯이 영면하는 것이었다.
식은땀과 이어 긴 한숨을 내쉬며 차츰 식어 가는 모습, 이것이 나와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그해 4월 보리밭, 보리가 익어 타작하는 계절 6월에 아버지는 떠났다. 멀리는 긴 싸이렌 소리가 울렸다, 우연이겠지만 그날이 현충일 흐르는 한줄기 눈물과 가슴 깊은 곳에서 불덩이처럼 솟구치는 울부짖음 아부지와 이별이 이내 울부짖음으로 이어지는데 멀리서 싸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아침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나 보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이것은 필연이고 자연의 법칙이다, 하지만 다들 이것이 자기의 운명이고 숙명인데도 당연히 자기의 그것으로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듯하다
남의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나 자신의 그것은 뭔가 석연치 않고 억울하고 아쉽고 뭔가 이런 운명을 알고 점지하신 하느님을 원망하며, 잘못 적용된 자연의 섭리를 인정치 않고 슬퍼하며, 그리움의 정을 더더욱 되새기며 애통해 하는 것이다.
나 역시 깡과 모질기로 따지면 동네서도 알아주는 깡다귀인 데도 부모의 죽음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아픔에 싸인 인간이었다.
단지 틀린 것이 있다면 어자피 죽는 인간의 운명, 적어도 죽음만큼은 편안하게 맞이하는 것, 병들어 아프다 죽는 것이 대부분인데, 바란다면 마치 촛불이 다하듯이 자연스레 차츰 사위어 가다 어느 한순간 편안하게 그 빛을 잃듯이 인간의 생명도 이처럼 고통 없이 사위어 가야 하는 것이 얼마만한 행복인가를 아버님의 죽음 통해서 뼈저리게 느꼈다.
이어진 가족 병력은 당뇨병 소양이 다분히 있는 가계로 근친들 중에 아직도 당뇨 현상으로 투병중인 친척들이 있다면, 나는 어떨까?
더구나 제일 아버지의 체형과 성격을 많이 닮은 나의 상태는, 하지만 당시 나는 너무 말라서 집사람이랑 부근 사람들이 살 좀 쪄라는 것이 인사였는데, 어느 날 거짓말 같이 살이 쪘다는 걸 축구하다 불현 듯이 느꼈다.
그 옛날 한 가닥 하던 축구가 분명 공을 보고 날리는 발이 계속 헛발질에 왠지 몸이 무겁다는 느낌이 들어 체중을 재어보니 무려 10키로나 불어 나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 다들 살이 쪘어 보기 좋다는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아직 혈당이나 당뇨의 소양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 강철 같은 아버지를 서서히 잠식하다 어는 순간 실로 아주 경미한 상처에서 시작된 발병과, 처절한 투명은 비참하고 처절하도록 육신을 갉아먹어,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었다
아버님의 죽음이 주고 간 교훈은 설사 유전적인 요인이 있더라도 잘 관리해서 그 소양을 유발시키지 않는 것, 즉 살찌지 않고, 적당히 운동하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매사 긍정적 사고를 갖고 생활하는 것이었다.
그 후 여러 가지 운동을 병행하며 살찌지 않으려고 달리기, 등산, 수영 등등했지만, 항시 퇴근 전에 짬을 내서 지금 생각하면 2~3키로를 달린 듯하지만, 그것도 힘들고 벅찬 나날이 이어지다가 체육 대회 때 5키로 달리기 대회에 나가서 힘든 경험을 하고 선, 이게 아니다, 이왕 하는 것 뭔가 목표를 갖고 하고 싶었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산 좋고 둑 방 좋은 하남에 이사를 왔고 이어 정다운 이들을 만나서, 본격적이 달리기 코치도 받고, 많은 조언을 얻고 보니, 이제껏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힘든 달리기를 의욕만 앞세워 해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님이 주고 간 마지막 선물 달리기에 남다른 의미를 안고 달리기 시작 했다. 물론 먼저 간 아버님 보다 더 건강하게 살려고 발악하는 듯한 이기적인 마음이 아닐까하는 미안한 생각도 들었고, 달리다보면 보리밭을 잠뱅이 자락 스치면서 달려오는 아버님의 생각이 추억처럼 떠오곤 했으나, 이제 이 달리기를 아버님과 함께 영원히 할 수 없다는 것이 더한 아쉬움과 애절한 회상의 기억들로 되살아나곤 했다
봄이 오는 하남시 둑방에서 이다금 동호인들과 토요 달리기를 하다가 이번 전군 마라톤에 과감히 출사표를 던지고, 오늘 새벽 시청 앞 버스에 마누라 대동하고 이렇듯이 먼 장정에 나선 것이다.
그간 접수 후 한 달여 시간을 두고 차분히 연습한다는 게, 출전 3주를 남겨두고, 그만 무리하게 연습하다, 무릎 부상으로 뜻 되로 연습을 할 수가 없어, 고작 1중일에 한번정도 10 키로 지속주 정도와 출전하는 주에는 감각유지 차원에서 10키로 지속주, 2일 전에 5키로 지속주를 뛴 것이 전부라 완주여부도 불안했지만, 욕심은 있어 내심 Sub 4 의 기록을 염두에 두고 페이스 띠도 만들었다.
새벽 5시 30분 출발 서해 고속도로에 접어든 버스는 서해의 안개를 뚫고 군산으로 향하고 다들 새벽잠을 설쳐 온지라 의자에기대어 잠을 청하고 있었다.
먼동이 트고 휴게소에 들러 아침 식사, 주인장 카사님이 준비한 아침을 버스안에서 감사하게 먹고 휴게실에 들리니, 우리들처럼 운동복에 형형색색의 마라톤화를 신고서 벌써부터 가볍게 마라톤 폼을 잡고 스텝을 밞는 표정들이 사뭇 진진하다 못해 비장하게 까지 보였다.
아직 시간이나 도착지 군산을 멀었는데, 뭔가 불안한 구석들이 있는지 휴게소 부근은 마라톤 참가 인파로 이른 아침이지만 제법 부산하게 보였다
전주군산 간 도로는 일전 업무 차 자주 다니던 길이고 큰 오르막 없는 평탄한 길이어서 선 듯 신청했고, 계절적으로도 길가 벚꽃이 활짝 핀 계절에 벌어지는 경기라 한츰 고무된 기분으로 달릴 수 있는 분위기라서 더 좋을 것 같았다
8시 30분경 군산 공설 운동장 인근에 도착 부근은 원색의 깃발로 나부끼고 다들 마라톤 복장으로 수천의 인파가 부근을 메우고 있었다. 다들 복장을 준비하고, 나 역시 무릎통증을 대비해서 진통제 두 알과, 무릎부근에 밸런스 테이핑을 하고, 진통 크림을 발랐다
이런 인파속에서 동료들과는 어느 순간 헤어져서 하는 수 없이 운동장에 서서 가볍게 몸 풀고 트랙을 가볍게 한 바퀴 돌다 출발점 앞부분에 주인장 카사가 있어 그 뒤에 자리 잡고서, 이번만은 초반에 빨리 출발해서 인파에 걸리는 일이 없길 바라면서 계속 앞자리를 고수하면서 출발 때까지 기다렸다.
수천의 인파와 여러 크럽에서 온 사람들의 소속명칭들이 새삼 마라톤 인구의 규모를 짐작케 할 수 있었다.
드디어 10:00시 출발 손목의 초시계도 눌러면서 스타트 페드를 박차고 이제 긴 장정을 시작했다.
예의 우리의 호프 주인장 카사의 찰랑거리는 머릿결과 아장아장 주법이 생각보다 빠르게 시야에서 멀어지고, 이어 연도에 늘어선 환송객들의 응원이 대단하다. 정말 기분이 덜 뜨고, 출전에 나서는 병사의 환송을 연상케 하는 열광과 응원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지역의 축제 수도권의 각박하고 좀은 이해관계가 앞서는 깍쟁이 같은 인심보다는 뭔가 자연스레 이것도 하나의 볼거리인 듯이 연도에 늘어선 인파들은 지역축제의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레 이어진 행사를 스스로 만들고 있는 듯이 보였다
약 10 키로 정도 달렸을까, 배가 가볍게 아파오기 시작하는 것이 불안함마저도 생기기 시작하는데, 이날 제일 스포트를 많이 받았던 인민군 돌격대 방한모를 반쯤 여유롭게 걸치고, 앞 챙을 새부리처럼 곳추 세워 쓴 우리의 나사장 하남시가 낳은 우수 마라토너 나승복씨가 성큼 성큼 지나쳐 나가고 있었다.
어줍잖은 실력에 그나마 앞줄에서 출발해서 인지 매번 추월당했는데, 드디어 하남 동호회 회원들을 만났으나, 이런 대회 자주 출전한 경험 때문인지 이런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듯 옆 사람과 다정스레 애기 하며 뛰는 폼이 역시 완주를 수번 경험자답게 여유 만만한 폼이다
슬쩍 장난기가 발동하여 모른척하면서 앞을 가로 질러 일반적이 페이스를 벗어난 스피드로 앞을 스치듯이 지나가자, 오버 페이스 하면 안 됩니다 하면서 걱정스런 충고를 한다.
나는 아프다는 것과 나의 페이스대로 간다고 말하자,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는데, 역시 성큼 성큼 가는 듯이 보이지만, 이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좌우든 10키로 전후에서 시쳇말로 몸이 풀린 듯이 아픈 배도 괜찮고, 서서히 힘도 생기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군산시계를 완전히 벗어나 넓게 펼쳐진 들녘과 벚꽃의 가로수가 늘어선 아름다운 포도, 이따금 수로 옆 뚝방에는 지금의 달리기와는 상관없이 한가하게 낚시하는 할아버지, 달리는 대열에 손 내밀어 마주치는 꼬마들 다들 한낮 열기 속에서도 서로를 보며 즐기며, 달리고 응원하고 5키로 마다 마시는 물은 이내 땀으로 돌아 나왔다.
20키로 지점 화사한 봄날 잘 차려입은 어머니 아버지들은 활짝 핀 벚꽃 길 뚝방에서 거나하게 취해 농악놀이도 하고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던 곳, 20키로 지점 통과 시간을 보니 1시간 42분 예정통과 시간보다 7분이나 빨리 통과 한 것이다.
이거이 오늘 일 낸다 처녀출전에 3시간50분에 골인하면 일대 사건이다 아직 예정 페이스 유지에다 7분의 여유 시간이 저축되어 있어 내심 자신감도 생기는 것이었다.
아마 이리시 부근, 강뚝에는 마라톤의 긴 행열에는 관심이 없는 듯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노인네와 가족단위의 행락객들이 파라솔을 받쳐 들고 벚꽃핀 길을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10시에 출발한 마라톤의 행렬을 이제 반환점을 지나고 태양은 정수리에서 이글거리고, 포도에서는 가벼운 열기가 솓아 오르고 있었다.
5키로 마다 설치된 급수대에서 갈증을 느끼지 않더라도 물을 마시라는 주인장의 충고를 충실히 섬기면서 별로 갈증은 없었지만, 물 컵을 들고 시간이 아까워서 달리면서 마셨다
이제까지 부근에서 제법 떠들 듯이 애기를 하던 것이 없어지고 부근이 조용 해 지기 시작했다. 25키로 지점 아직 예상시간대의 통과, 도시와 도시의 중간지점 이라 이따금 늘어선 마을에서 한낮 땡볕아래 삼삼오오 모여 반갑게 응원해 주는데, 초반에 반갑게 응대하던 모습들이 점차 줄어들고 말없이 무거운 발걸음들을 옮기고 있었다.
나 역시 이 지역 마라톤 동호회와 같이 약 5키로를 동행하며 보조를 맞추다 결국 뒤처지고 말았는데 아마 이것이 약간 오버 페이스가 된 듯 점차 허기가 지고 자세가 흩어지고, 팔의 높이가 높아지면서, 예전 뚝방에서 주인장 카사가 전수한 아장아장 폼보다 본래의 마구잡이 폼으로 자꾸 돌아가고 예전의 폼이 편안한 같기도 한 느낌도 들었다
30키로 지점 도착 허기진 배를 뛰면서 쵸코파이와 이온음료 이것 역시 달리면서 먹고, 30키로를 넘어 서는데, 이따금 길가에 앉아 있거나,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풀거나, 걷는 사람들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이것들이 좀은 이상하게 보이고 아마 충분한 연습을 안하고 덤빈 사람들이라 생각 했다
30키로를 통과하고 얼마나 달렸을까, 이런 간혹 허벅지가 뻑 지근 하게 느껴진다 했는데, 허벅지 대퇴 사두근 부근에 통증이, 이른바 쥐가 나는 것이었다.
왠지 멈취선다는 것이 창피스럽기도 하고 해서 시피드를 낮추고 천천히 달렸지만, 점점 경직 상태가 더 심해져 오는 것이었다 저 멀리 고가 도로가 보이고, 그 밑에 시원한 그늘이 보였다,
아마 호남 고속도로인 듯, 정확히 31키로 지점으로 보였는데, 잠시 고가도로 그늘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직 기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고, 무릎 통증이 우려되어 심한 스트레칭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쭈그리고 앉아 허벅지 근육을 늘리며, 잠시 있다가 다시 기록에 연연해하며 달리기 시작했는데, 스피드는 확연히 줄어들고 통증은 여전하며, 이 통증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바로 경직, 쥐로 이어질 듯한 조짐이 느껴졌다.
천천히 달리다보니 몇 사람이 서서 물파스 액을 바르고 있어 그곳에 가서 물파스를 사정없이 발랐는데, 물파스 주인인 아주머니 왈 공식지정 의료 도움이가 아니라 마을에 사는 후덕한 아주머니로 해마다 이곳에서 사비로 물파스 사서 봉사한단다.
아마 마라톤의 한계, 마라톤의 벽이라 불리는 30키로 구간에 사는 마을에 아주머니 나름대로의 생각은 아그들이 자기 동네만 오면 헐레레하니 하는 수 없이 그런 자원 봉사를 하게 된 것 같았는데 아주머니 그거이 마라톤의 벽이라 합디다.
헌데 신기하게도 허벅지의 통증이나 뻑지근 함이 가시면서 잠시지만 다시 달리 수 있는 의지가 생겼고, 이어 들리는 곳마다 물파스를 찾아 헤매면서 있으면 양다리에 물파스를 덕지덕지 바르면서 고통을 잊고 달렸다
전주 제1관문이 보이면서 다시 주저앉아 잠시 근육 풀기, 이제 그 흔한 물파스 공급처도 없고 약간의 오르막을 기듯이 오르니 35키로 지점, 시계를 보니 그간 야무지게 꿈꾸었던 3시간 50분의 꿈은 접어야겠다는 것 아니 4시간 이내의 기록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다금 불편하게 느껴지던 허리가 이제 가눌 수 없을 정도의 묵직한 통증으로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정도로 아프기 사작했다. 마라톤을 좀 했다는 사람들이 말하길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자연 머리가 앞으로 나가고 허리를 굽히는 자세가 되어 후반부에 이르면 허리가 끊어 질 듯이 아프다고 했는데 내가 지금 그 꼴이 난 것이다
쥐가 내려 아픈 허벅지도 문제지만 허리가 너무 아파서 하는 수 없이 양손을 허리에 대고 가볍게 맛사지를 하면서 가능한 허리를 펴고 허리를 풀면서 계속 달렸다 전주 월드컵 경기장을 지나쳐 약간오르막을 쉬엄쉬엄 오르니 내리막길 반가운 내리막길이건만 내딛는 발걸음의 탄력이 오히려 더한 허벅지의 통증으로 이어져 살금살금 뛰면서 느끼는 극한, 아 이거이 장난이 아니다 내가 오기나 깡다구로 덤비긴 했는데, 이 경기 끝나면 다시 마라톤에 대해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 길가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미 37.5키로의 표지판을 본지가 옛날이건만 40키로의 표지판이 아무리 달려도 보이질 않고, 정말 포기하고 픈 체력한계로 이미 걷는 것 비슷한 달리는 흉내를 낼지라도 결코 걸어가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전주 시내를 엉금엉금 걷듯이 달렸다.
지루한 40키로 지점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리던 전주가 고향이고 길가에 장모님 이하 전가족의 응원을 행복하게 받던 사나이, 작년엔 3시간 30분에 거시기 했는데 올핸 영 기록이 저조하다면서 내내 궁시렁거리며 같이 달리던 전주 사나이에게 하는 수없이 대체 40키로 지점이 어딘지 물었다 정말 지루한 40키로 지점, 그런데 바로 저기라 손가락 질 하는데 연도의 인파에 반쯤가려 있어 일찍이 보지 못했을 뿐 바로지척에 있어 무척 반가웠다
40키로 지점 통과 이제 2키로여 차츰 차량의 행렬이 불만스레 기다리는 연도에 그래도 반기는 응원에 용기 내어 얼기설기 달리는데, 아니 이게 누구여 나의 오버 페이스를 걱정하던 낮 익은 뒷모습 인민군 돌격대의 모자를 용감하게 눌러 써고 뛰던 우리의 표준 달림이 나사장이 한가스레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뭐라 말했는지는 기억에 아름하나 아마 빨리 갑시다 하고 말을 건넨 듯 한데, 아예 손서래를 치며 먼저 가란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고, 마라톤이란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하지만 나의 체력도 이미 한계에 달하고 정신력으로 버티며 달리는 것 전주 공설운동장이 멀리 보이고 연도의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나를 보고 500미터 남았다고, 거의 다 왔어 힘내버려 해도 그 소리가 아득하게 들릴 뿐, 전주 공설운동장이 보이는 사거리에서 잠시 앉아 근육 풀고, 다시 일어서서 운동장을 끼고 돌면서 또 앉아서 쉬고 드디어 정문 통과한 후 연도의 화분대를 잡고 가만히 주저앉아 있는데, 벤치에 한가하게 앉아 있던 아릿다운 부인이 걱정스레 쳐다본다,
그대 아줌마 나는 먼길을 달려왔소
때론 그 길이 꽃길 이었다가도
이내 고통의 가시 밭 길이 되기도 했다오
오다 좋은 벗 만나 정담도 나누었고
어떤 때는 고통스러워 주저앉아 후회도 했다오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다보니
이제 결승점 아마 저 결승점 부근엔 당신보다 쪼까 더 예쁜 우리 마누라가 시원한 물 병들고 날 기다리고 있을 거요.
다시 일어섰다 이제 조금만 가면된다,
저 출입구 맹수의 아가리처럼 딱 벌리고 선 저 출입구를 통과하면 사랑하는 아내가 고통에 일그러진 서방님의 처절한 죽음의 몸부림을 보면서 다시는 바가지 굵지 않고 내내 측은지심으로 나를 받들 계기가 될 사건이 벌어질 저 출입문, 저 아가리를 향해 으그 죽자, 죽기로 하고 달려 보는 것이다.
가자 이제 일초라도 이 극한이 마지막 고통 이것을 참지 못하고,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살면서 얼마나 많은 쓴 맛을 보았던가, 지난날의 혈기, 고통 없이 얻은 작은 결실에 넘쳐나던 오만과 시건방지고 못된 생각들을 사회에 대입시켜 얼마나 잘난 체를 많이 했던가,
이 극한의 고통 속에 작아지는 자신과 겸손해지는 나를 볼 수가 있었다 운동장 붉은 트랙에 가볍게 느껴지는 쿠션,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 같은 감촉을 두발로 느끼면서 트랙 부근에 늘어선 인파 속에서 아내의 모습은 찾아보았다,
아니 특유의 억양으로 날려줄 힘내소 비슷한 응원의 소리를 기대하면서 고통에 일그러진 입술과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달렸으나 내내 아내의 숨결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대대분의 주자들처럼 결승점을 통과했다
4시간 5분 8초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결승점 내가 기대했던 이 처절한 생존의 순간을 마누라에게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도 잠간 이내 간이 울타리를 잡고 지친 몸동아리를 가누고 헉헉거리면서 내심 그간 부상으로 내내 고통을 주었던 오른 무릎을 보니 아직 다리 비슷한 것이 붙어 있고 우려했던 심한 통증도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누구하나 반겨주는 이 없는 결승점에서 미적거리니 어디선가 홍창유 사장님이 와서 반겨주면서 상태를 묻곤 간이 펜스를 넘어 운동장 잔디밭에 앉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무릎높이의 간이 펜스를 넘기가 너무 힘들어서 겨우 넘어 쓰러지듯이 눕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우리의 철각 울트라멘 강영석님이 배트멘처럼 나타나서 말하길“완주 이거이 대단한 거야, 저 봐봐 저런 젊은 놈들도 픽픽 나가 떨어지는 판인데, 이거이 완주 대단한거야, 성인병 예방에, 어쩌구 저쩌구” 실로 피로가 가시는 시원한 완주 예찬과 나의 모진 사투를 인정해주는 저 아름다운 말씀, 무릇 이제껏 저런 시원한 칭찬을 내심 태연한 척 하면서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전혀 완주한 사람의 피로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은 생생한 모습의 울트라맨, 이어 쓰려져 앉아 지쳐 꼼작도 못하는 내게 자신이 직접 신발 끈을 풀어 스피드 칩 가지고 직접 본부석에 가서 완주 메달과 간식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정말 완주를 넘어 100키로 울트라 코스를 몇 번 완주한 사람답게 이런 마라톤 풀코스에 처녀 출전 도전한 새내기의 상태를 너무나 잘 알고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이었다.
가져온 간식을 보니 갑자기 배도 고프고 목도 타는 듯이 말라 왔다
이내 물 한 모금 마시고, 사과 한입 베어 물곤 삼키니 도저히 속이 메스켜워서 삼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억지로 사과 한개 먹고 나니 계속 헛 구토가 나와 토할 것만 같은 게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잔디에 누워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간 조는 듯이 잠을 잔 듯이, 누군가가 깨우는 소리에 일어났으며, 아마 장내 방송으로 하남시 멤버의 집합장소를 정문으로 정한 듯 그곳에 도착하니 막 군산에서 도착한 가족들이 있었다.
마라톤을 출발한지 5시간 반 아직도 후미 그룹이 사력을 다해서 속속 도착하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힘내라고 박수로 격려하면서 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처녀출전의 완주 기념을 마감할 수 없었다 다들에게 기념 사진을 제의하고 먼저 나의 자랑스러운 완주 기념 메달을 집사람의 목에다 금메달처럼 걸어주며 찰칵, 사진 한방 ................
실로 오랜만에 같이 찍어본 사진이었다.
우린 늦은 나이에 맞선으로 결혼했지만, 태생이 그러하듯이 잔잔한 애정표시나 애교하고는 거리가 먼 좀은 뻣뻣하고, 아기자기한 멋없는 부부였다 결혼기념일이다 아님 생일 등등의 날이면 외식이나, 아님 꽃 선물 등등이 보통의 그것이지만, 난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산다는 것 자체가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는 것이며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며 지내왔다
하지만 오늘 나의 처절한 몸부림과 끊어질 듯이 아픈 근육의 통증 온몸의 물기가 말라 땀도 흐르지 않은 인간 한계의 극한에서 깃발 나부끼는 결승점을 통과 성취한 메달을 그간 날 위해 살아오고 근거 없는 논리로 막무가내 독선에도 살며시 궁시렁 거리며 도망가지 않고 붙어 살아온 아내에게 아기자기하고 멋대가리 없는 남편이 땀으로 일구어낸 승리의 값진 메달을 아내의 목에 걸어주면서 나는 말없이 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꿈을 쫒아서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잃어버린
긴 꿈을 생각하면서
좌절과 실패의 순간을 생각하면서
나는 속으로 울고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오늘
시방
난 오랫동안 이루지 못한 그 무엇을 이루어낸
승자의 겸손한 성취감과
그간 멋없는 남편
아기자기한 낭만없는 남편에서
아내의 목에 걸린 메달을 흐뭇하게 내려다 보면서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승리의 V를 만들었다
하나
둘
셋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