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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교육체제의 문제와 수행(09년 10월 정기법회)
현 교육체제에서 극한적인 위기감이 느껴져, 오늘은 그것과 관련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육과 관련하여 기막힌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포자기하는 마음 없이는 바라보기 힘든 이 야만과 몰상식들은 이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키워도 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은 압도적인 힘에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합니다. 심소희 라는 평범한 사람이 <씨네21> 2009년 8월 30일짜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놀이터 기구들이 부서진 것을 종종 본다. 시소나 그네 조랑말을 부수는 이는 술 취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다. 바로 아이들이다. 대략 초등학교 고학년들. 이들이 놀이터에 들르는 시간은 학원에서 학원으로 옮겨가는 10 - 20분 남짓. 짧은 시간 거칠게 논다. 논다기보다 부순다. 마구 당기고 밀어 망가지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리기라도 하듯이. 애들이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을 알았다. 한창 나이에 시간에 쫓겨 농구나 줄넘기만저 주말 체육학원에서 몰아 할 정도니, 힘을 어디에 쓰겠는가. 거친 형태로 입으로 나오고 손발로 나온다. 방학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일제고사 부활 이후 중학생들까지 강제 보충수업으로 방학을 빼앗겼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방학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방학이 사라진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이번 여름방학의 경우 많은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학습부진아 지도나 일제고사 대비 등의 명목으로 짧게는 4일부터 4주에 이르기까지 보충수업이 실시되었습니다.
서울의 한 지역교육청은 초등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매달 시험을 치르라는 공문을 내려 보냈고, 이미 초등학교 3학년에서 1년 동안 아홉 차례나 시험을 치른 학교가 있다고 합니다. 중학교에서는 7교시 수업이 의무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불과 1년 만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서울과 부산에서 15곳의 자율형사립고가 지정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과학고-외국어고-자립형사립고-자율형사립고-기숙형고립고 등 특화된 고등학교군을 정점으로 나머지 학교가 일렬로 줄을 서는 체제가 곧 완비될 태세입니다. 고교 평준화는 사실상 끝났습니다.
게다가 ‘미래형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국어ㆍ영어ㆍ수학 교과의 비중이 더욱 확대되고 음악ㆍ미술ㆍ체육 등 예체능 교과와 기술ㆍ가정 등 실과 교과들이 유명무실해지는 상황이 곧 도래할 것입니다. 근대 공교육체제가 공히 지향하고 있는 ‘전인교육’ 이라는 교육이념을 완전히 포기해 버리는, 아마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기막힐 사태입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일제고사는 공교육체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대사건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과 달리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로 하여금 이 시험을 치르게 하고 2010년부터 ‘학교알리미’라는 사이트에 그 학교 학생 중 우수 등급을 제외한 보통, 기초학력, 기초학력미달 학생의 비율을 공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학교 안에서 일어날 변화를 예상해봅시다. 교육부는 2010년으로 예정된 성적 공시까지 앞당겨 2008년 시험결과를 임의로 발표하고, 일제고사에 대한 선택권과 체험학습을 안내한 교사 10여명에게는 파면과 해임 등 중징계를 남발하면서 광분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국가 수준의 성취도 평가를 통해 학력이 낮은 학교와 학생들에 대해 엄청난 규모의 국가재정을 투여하려는 정책은 고려하지도 않고, 교육당국은 오직 학교 간에 경쟁을 불붙이는 일에만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교육당국은 각 학교의 학력을 학교 관리자와 교사를 평가하는 척도로 삼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런데 평가 결과를 인사문제와 연결짓게 되면 그때부터 평가는 학교 내의 모든 것에 우선하는 사안이 됩니다. 교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의 외형적 성적만을 올리려고 모든 수단ㆍ방법을 동원할 것입니다. 이제 교사는 자신의 교육철학에 입각하여 아이들의 조건과 상황에 맞는 순수한 교육적 수업을 준비할 수 없어질 것입니다.
일제고사의 객관식 문항과 단답형 주관식 문항으로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수-학습 과정의 교육적ㆍ인간적 의미의 성과를 거의 측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독일의 발도로프 학교에서는, 학부모에게 보내는 성적표가 성적수치가 아니라, 그 아이가 처한 환경, 발달상황의 추이, 그 속에서 이루어낸 변화가 ‘개별적으로’ 기록된 편지 한통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에게 보편적으로 통할 수 있는 평가란 사실상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일제고사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또한번 상처를 남길 것입니다. 기초학력 부진 학생들은 대개 가난한 아이들입니다. 가난한 아이들은 이제 기존에 얻었던 낙인도 모자라 “웬만하면 우리 학교에 없었으면, 혹은 입학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존재로 여겨질 것입니다. 아이들은 이로 인해 또한번 열등감과 수치심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당장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초ㆍ중ㆍ고등학교의 학군이 일제고사 성적을 기준으로 확실하게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기준에 입각하여 그 일대의 부동산 가격과 주거지의 등급이 결정될 것입니다. 학력이 낮은 학생들이 많이 입학하는 학교들은 당연히 기피될 것이고, 그 학교가 속한 지역은 ‘가난하고 피해야 할 동네’로 확실하게 낙인찍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중ㆍ고등학교의 내신성적은 상급 학교 입시에서 똑같이 대우받지 못하게 되어서, 고등학교는 자연스럽게 중학교 등급제를, 대학들은 고교 등급제를 실시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대학뿐만이 아니라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에까지 모두 세세하게 서열이 매겨지게 되고, 아이들은 아주 이른 나이 때부터 자신이 다니는 학교와 주거지로써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부여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1950 - 1970년대, 소수 명문 중ㆍ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경쟁체제보다 훨씬 부조리한, 유사 이래 가장 극악한 학벌 경쟁체제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의 고급관료들은 그 학교 출신으로만 구성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통해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요?. 예컨대, 미국에서 부시행정부를 주도한 네오콘들이 국가 수준의 성취기준을 설정하고, ‘시험’을 통해 만들고자 했던 질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럽,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에서 건너온 다양한 인종들이 섞임으로 성립하고 지탱해온 나라를, 백인들만이 유일한 정통성과 권력을 갖는 사회로 재편하려는 편집증이었습니다.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영어유치원-사립초등학교-국제중-특목고/자사고-명문대학’으로 대표되는 코스에 기득권자들의 아이들을 집어넣어려는 중ㆍ상류층의 편집증과 그대로 일치합니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5년을 지금처럼 지내고 나면 그들의 몰상식적인 바램은 거의 이루어질 것입니다.
한국의 공교육체제가 아이들에게 가해왔던 억압은 이제 일제고사로 인하여 그 극한적 정상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경제성장이 미약하던 시기에는 학교가 앞장서서 경쟁을 조장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일정 단계에 진입한 이후에는 대체로 학부모가 주도하여 사교육으로 대표되는 금전의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일제고사가 정착된다면, 학교와 학부모가 공교육과 사교육 모든 측면에서 그야말로 아이들을 죽이는 체제로 돌입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아이들이 얻는 것은 고통밖에 없을 것입니다.
작년 12월, 중학교 1ㆍ2학년을 대상으로 한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학교 앞 1인 시위에 참여했던 한 아주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지금껏 제 자식 얼굴만 보고 살았는데, 그때 학교 앞에서 한시간 동안 1인 시위를 하면서 등교하는 그 학교 아이들의 얼굴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중학생 꼬맹이들 누구도 즐겁고 기대에 찬 얼굴로 등교하는 아이가 없어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곳곳에서 출산율 저하를 걱정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이러한 인구감소 추세를 기반으로 해서는 복지국가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도, 산업국가로서의 현상체제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출산율 저하를 우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젊은이들이 출산을 단념하는 무엇보다 큰 이유는 지금과 같은 시스템 속에서는 아기를 안심하고 낳아 기르는 게 불가능하거나 감내하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핵가족이 주류가 된 한국사회에서, 안정된 직장, 소득, 집이라는 가족생활의 일차적 요건을 확보하는 일마저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아기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점점 모험에 가까운 일이 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이들이 해쳐나가야 할 극심한 교육지옥을 감안하면, 아기를 낳을 엄두를 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무책임한 범죄행위가 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아기를 낳고 기르는 부모나 어른의 입장에서 출산문제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야 할 아이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보는 것을 생략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이 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지 우리가 매일 듣고 있는 이야기들 가운데서도 실로 기막힌 최근의 한 증언에 귀를 기울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작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 때 ‘진보성향’의 후보를 지원했다고 해서 국가공무원법과 선거법 위반으로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법정에서 행한 최후진술 가운데서 나온 허 아무개 교사의 최후진술은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얼마 전 10일짜리 자원봉사활동을 다녀왔다. 학생들의 농촌체험 활동인데 교사로서 자원봉사를 했다. 그런데 자원봉사를 하는 동안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한 학생이 개미들을 밟아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가가서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왜 약한 개미들을 죽이냐고 물었다. 죽여도 된다고 대답한다. 너는 너보다 힘센 사람이 너를 괴롭혀도 좋으냐, 라고 물었다. 그래도 좋단다. 여기까지도 많이 놀랐는데 더 놀라운 대답이 이어졌다. 힘센 네가 개미를 죽이듯이 너보다 힘센 사람이 너를 괴롭히면 너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으냐고 물으니 아이는 대답한다. “나는 죽어도 좋아요”라고. 왜 그러냐, 고 물으니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학원을 안 가도 되잖아요.” 나는 너무 놀랐다. 그 아이는 8살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학원을 다섯 개를 다닌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이렇다. 이런 교육을 바꾸자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이것이 죄인가?(<오마이 뉴스> 2009년 8월 17일)
위에서 언급한 재판에서 검찰은 교사들 전원에 대해 징역 6개월에서 2년 2개월까지의 실형을 구형했습니다.
이 경악할만한 이야기는 우리가 국가니 교육이니 하는 이름으로 현재 운영하고 있는 시스템이 과연 윤리적으로 최소한이나마 정당화할 수 있는 체제인지, 심각하게 물어볼 것을 요구합니다. 지금 이 나라의 권력자들과 유력 언론과 교육기관은 입만 열면 ‘선진화’를 운위하고, 끊임없이 ‘국가경쟁력’에 대해 말하면서도 아이들의 진짜 현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있습니다. 한 사회의 인간다운 존속을 위한 기초인 자라나는 아이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과연 어떤 ‘선진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용산 참사에 보듯이 자본을 앞세운 대기업과 조직 폭력과 경찰력 등의 국가 권력이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나 아이들의 삶을 근원적으로 망가뜨리는 파괴력은 결국 동일한 시스템 작동 원리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약자들의 희생 없이는 단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자본의 논리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국가의 논리가 결합된 ‘폭력’의 메커니즘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사회적 양식과 민주주의가 성장하는 데에 가장 큰 위협은 바로 기득권층, 서민층을 막론하고 광범하게 퍼져있는 개발 혹은 경제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욕구인지 모릅니다.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 때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특목고, 뉴타운 따위 개발공약들이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성립된 것도 결국은 청계천 ‘복원공사를 통해 인정받은 ‘개발능력’ 때문이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근대국가와 자본은 계속적인 경제성장 없이는 존립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경제성장이란 간단히 말해서 자원과 에너지의 끝없는 소비를 불가피하게 하는, 한마디로 지속불가능한 개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성장개념에 끈질기게 집착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제는 ‘녹생성장’이라는 속임수의 말로 국민을 세뇌시키고 있는데, 녹색이란 무엇보다 인간생존의 자연적 한계를 예민하게 의식하는 토대 위에서 비폭력과 민주주의 지향하는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장논리와 양립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 개발이나 경제성장을 통해서 민중이 누리는 혜택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몇 푼의 임금 내지 급료를 받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대가로 민중은 자립적인 삶의 바탕을 잃고, 상호부조의 호혜적 공동체를 잃고, 자유와 존엄성의 근거를 잃습니다.
기업들은 극심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계화, 자동화를 통한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습니다. 구조조정이란 노동자들의 목을 대대적으로 자르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결국 일자리를 없애고 따라서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상품 구매력을 잃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는 위선의 언어입니다.
물론, 좀더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그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부유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크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득권자들의 횡포를 경험하고 있는 가난한 자는 그 횡포를 겪으며 나는 저런 비인간적 폭력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하기 보다는 나도 빨리 돈을 벌어 기득권자가 되리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은 이해관계를 초월한 사심없는 덕의 실천을 논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지 못하는 자들을 절대로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것은 개인의 이익 추구가 그대로 공동체의 전체적 이익과 조화 내지는 양립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민주주의 논하면서 ‘토크밀’이 ‘올바르게 이해된 자기이익’을 주장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토크빌은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덕행은 숭고하거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미국에서 위대한 것은 무사무욕(無私無慾)이 아니라, 올바르게 이해된 자기이익”입니다.
미국에서는 상업적 동기에 의해 관련되지 않은 덕행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올바르게 이해된 자기이익’이라는 개념으로써 ‘상업적 동기’의 긍정적 기능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전통사회에서의 덕행과 크게 다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현 사회체제에 대한 반성을 진지하게 해볼 생각을 가지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상류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가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회가 진행되어 나간다면 우리와 다음세대 모두는 물질적으로 풍요하기는 하나 불합리와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가난하게 그리고 황폐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사회는 지금, 사회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합리와 부조리한 일들에 대하여 확신과 양심을 지니고 항의하며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삶에서 가장 진정하게 바라는 것은 행복입니다.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행위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행복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저항 정신을 가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이치를 깨닫는 데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얻는 데 장애가 되는 것에 대하여 저항할 때 이미 행복한 삶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항은 존재의 실상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실상에 대한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은 현실속의 실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의 극명한 이치가 곧 실상의 이치이므로 얽혀진 현실 세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실상의 도리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무명에서 벗어난다고 합니다. 무명은 탐욕을 끊어야 없어지며, 탐욕은 사물을 바로 봄으로써 끊어집니다. 바로 보는 것은 일념이 되어야 하고, 일념이 되는 것을 바로 선정이 이루어진다, 라고 합니다. 선정을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물 속에 빠뜨린 구슬을 찾으려면 물결이 고요해져야 합니다. 여기 구정물이 한 그릇 있다고 합시다. 이 물을 맑히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만약 물을 맑게 하겠다고 휘저으면 물은 점점 더 혼탁하게 될 것이고 그 물 속에 있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휘졌지 말고 그대로 놓아두고 바라보기만 하면 마음은 고요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의 이치가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일 속에서 속을 태우는 일을 만나면 속을 휘졌지 말고, 그대로 놓아두고 바라만 봅시다. 그러면 속을 태우는 문제의 본질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를 얻어 지혜롭게 현실을 본 가치관으로 이 사회를 살아야만 의미로 충만된 삶을 살며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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