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전할 교회나 요양원을 세우고 개척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은 마귀이다. 그래서 사단은 갖은 궤휼과 온갖 시험으로 교회 개척 초기나 요양원 시초부터 우리를 공격했다. 영과 육의 원리를 조금만이라도 이해하고 경험한 분들은 다음의 우리 이야기에 동감하게 될 것이다.
이전 글에 밝혔듯이 교회 초기에는 한 여집사가 헌금 전체와 장부까지 가지고 도망가는 일이 있어 우리를 낙망케 한 일이 있었는데, 요양원 초기도 그 못지 않은 극심한 시험을 통과하여야 했다.
요양원을 세우기로 결심했으나 그 당시만 해도 우리에겐 단 한 평의 땅도, 건물도 없었고 자금도 여의치 않은 시기였다. 하는 수 없이 당시 온 가족과 함께 교주 조희성의 영생교를 부지런히 다니다가 나를 만나 1992년 1월 25일 개종한 우리 교회 H장로님 가정이 있었던 토지 맨 꼭대기의 산 밑 밭에다가 요양원을 만들기로 했다 산새가 아주 좋아 요양원의 위치로는 안성마춤이었다. 물론, 가진 것이 거의 없던 시절인지라 장로님이 토지를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사용하도록 허락하고 그 위에 무허가 건물을 짓는 것으로 계획을 했다.
임야나 전답을 갖고 건물을 지으려면 개발행위를 거쳐 까다롭고 돈이 드는 여러 절차와 시간 등이 필요하기에 그런 것들을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시골에서는 하우스 모양으로 짓는 건물에 대해서는 단속이 거의 없고 당시 시골만 해도 상대성(누가 당국에 고발하는 일)만 없으면, 무허가라도 공무원들이 내버려 두는 일이 허다했기에 자금력이 없었던 우리로서는 그 방법이 상책이었던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요양원을 세워야 할 당위성을 성경과 예언의 신을 통해 설교했고 교인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그 무더운 1995년 여름, 우리는 하우스 모양의 천막 요양원 두동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토지의 위치가 거의 산꼭대기에 있어 물 하나를 끌어 올리는데도 엄청난 인력과 배관 재료들이 필요했으며 그 뜨거운 뙤양볕에 허허벌판같은 땅 위에 100여평의 건물을 세우는 것은 그야말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겉 모양은 하우스였지만 그 위에는 보온덮개 등을 몇 곂으로 싸서 덮었고 안은 양쪽 옆을 블록으로 쌓았고 천정은 모두 정식 댄조를 하였고 바닥은 모두 보일러를 깔아 안에서 볼 때는 그런대로 건물처럼 아늑하게 보였다. 전기를 끌어 가설하고 수돗물이 나오도록 모터를 몇 개씩 달고 우리 교회 여집사님 몇분은 낮에는 농삿일 등을 하고 해 질 때부터 새벽까지는 일일이 도배를 하고 바닥도 옛날 시골집 안방처럼 모두 푸대종이를 붙이고 기름을 바르고 하는 정성을 기울여 아름답게 하였다.
많지 않은 우리 교인들이 당시 천여만원의 귀하고 귀한 헌금을 하였고 여러 장로, 집사, 청년들이 달려 들어 일을 도와 우리는 계획대로 1995년 8월 1일 제1차 뉴스타트 건강 집회를 열기로 했다. 수천 수만장의 광고물들을 안성, 평택, 천안, 장호원, 용인 등지에 뿌렸고 신문 삽지를 했으며 계획은 착착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런데, 당시 중학교 3년생이었던 한경섭 학생이 우리가 안성 군민회관에서 열었던 장로교회 이수영 목사와의 공개토론에 참석했다가 개종한 일이 있었다 그 학생의 모든 가족은 안성제일장로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공부 잘하고 똑똑하던 외아들이 안식일을 지킨다면서 토요일에 학교를 안가고 교회를 가는 일을 목격한 그의 부모와 친척들은 사생결단으로 아들의 신앙을 핍박하게 한 일이 있었다.
아들을 때리고 위협하고 겁을 주어도 안되니까 아들을 안방에 가두어 손과 발을 묶어 놓고 밥을 굶기는 일까지도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방에서 나온 그 학생은 한달 이상 걷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한 것 때문에 잘 걷지도 못하고 피골이 상접한 일도 있었다. 아들의 개혁한 신앙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그의 부모는 나를 미성년자 유기 혐의로 안성 경찰서는 물론, 평택 검찰청, 대검찰청, 청와대, 교육청 그리고 탁명환씨의 현대종교와 모든 일간 신문사 사회부서 등에 장문의 투서 형식으로 고발하였다. 급기야 현대 종교는 기자를 파견하여 우리의 교회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실었고 당시 고발 프로그램이었던 SBS TV [사건과 사람들]에서는 우리 교회와 사택 등에 잠입 취재 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으며 그 학생의 부모는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그 프로에 나가 우리에 대해 온갖 몹쓸 말들로 매도하고 비난하였다. 우리 교회는 사이비로 매도되었고 나는 교주로 표현될 정도였다.
사법당국의 조사 결과 나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어디까지나 중학교 3년 생이었던 그 학생이 자의로 선택한 종교의 자유였음을 사법 당국이 인정을 하였던 것이다. 더 이상 법적으로는 아들의 신앙을 되 돌려 놓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의 아버지는 이제 예배 시간마다 몰래 우리 교회의 차들과 교인들의 차들의 바뀌를 펑크내기 시작하였다. 바뀌를 떼울 수도 없게끔 칼로 완전히 바뀌들을 도려 내었다. 한번은 예배를 전도사에게 맡기고 나는 청년 한 사람을 데리고 몰래 잠복하여 또 다시 바뀌를 펑크 내는 그들을 붙잡아 파출소까지 데리고 갔지만 오히려 내 멱살을 잡고 죽일 듯이 달려드는 그를 법적으로 처벌 할 수 없었다.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었기에 그냥 용서하고 손해 배상도 한 푼 받지 못하였다. 아들을 생각하여 그냥 손해를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그 후에도 그 아버지는 교회와 사택으로 찾아와 나만 보면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욕설을 해 댔고 때로는 폭력도 휘둘렀다. 그런데... 이제 막 완공되어 가던 요양원 건물들을 그가 아들을 찾으로 왔다가 보게 되었고, 그는 곧바로 면사무소와 시청에 고발을 하였다. 겉으로는 하우스 천막 건물이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완전 정식 건물과 다를 바 없었던 건축물이 이제 불법 건축물로 당국에 알려진 것이다. 뉴스타트 제1기 집회가 막 시작하기 이틀 전이었다. 면사무소 산업계 관계자들은 즉시 불법 건축물을 철거할 것을 명령했다. ‘좀 봐 달라’는 우리 말은 어림도 없었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 산업계장은 바로 그 학생의 아버지와 친구였다. ‘당장’ 철거하라고 얼굴을 붉히면서 압박하였다. 나는 우리 집회가 있을 10일만 봐 달라고 애걸하였으나 어림도 없었다.
평생 시골에서만 사신 겁이 많은 H장로님은 벌벌 떨면서 당장 헐어야하겠다고 하였다. 내가 이러저리 알아보니 당장 헐지 않아도 되고 그러면 당국에서 정식 고발 조치를 하면 경찰서에서 조서를 받고 벌금을 내면 되는 것이고 그 후에도 계속 상대성이 있으면 시에서 강제 철거도 한다고 들었기에 그냥 집회를 밀고 나가기로 했다. 결국 불법 건물인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철거될 때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음을 교인들에게 이해시키고 집회를 강행했다. 면사무소 산업계에서는 그 집회 기간에도 몇 번씩 찾아와 우리를 압박했다. 토지 주인 홍장로님은 안절부절 못하고 하루라도 빨리 헐어야 된다고 나에게 몇 번씩이나 주지 시켰다. 참으로 불안하고 심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병자 단 한사람이 찾아 온 그 열흘의 은혜로운 집회를 마칠 수 있었다. 나는 열흘동안 3일을 금식하며 거의 매일 밤 홀로 철야하다시피 하면서 하루 4회씩의 설교와 건강 강의를 하였다.
그 경황이 없는 와중에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과 주를 향한 사모를 긍휼이 여기셔서 10년 넘게 협심증으로 고생하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김해성(당시 67세)씨를 거듭나게 하셨고 그의 병을 완전히 열흘만에 치료해 주셨다. 1995년 8월 11일, 안식일 김해성씨는 그의 아내가 참석한 가운데 침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었다. 그는 올해 80세인데도 아직 정정하게 가축들을 키우고 농삿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 경비를 서면서 차를 두 대가 가지고 손수 운전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의 손녀 딸도 침례를 받고 현재 우리 요양원의 간병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집회가 끝나자마자 겁이 많은 H장로님은 후다닥 그 건물들을 자진 철거하므로 우리의 힘과 노력과 피와 땀과 헌신이 담겨진 그 요양원 처음 건물은 꼭 열흘만 사용하고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 참으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할거나?.....” 요양원을 계속 하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다면 도대체 땅 한 평이 없는데 어디에다 하나?....
나는 요양 사업을 그만 두기에는 열흘 동안 하나님이 보여 주셨던 현저한 이적과 역사(병치료와 거듭남)의 감동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단 한명의 환자가 와서 단 열흘만에 완전히 치료되었다면 요양원의 성공 확률은 100퍼센트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빽을 믿고 무조건 내가 5년 가까이 무상으로 빌려 살고 있었던 사택 옆의 우사(소 키우는 곳)에 요양원을 계속 하기로 결심하였다. 주인이 알면 분명 문제가 있을 것이고 자칫하면 그 집과 토지에서 쫒겨 날 수 있는 위험이 있었지만, 내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인간 사정 생각하며 무시하고 거절하고 지체할 순 없었다. 큰 헌신으로 지었던 요양원 건물들이 헐리자 허탈해 하고 이제는 거의 무덤덥해져 가던 교인들의 심령을 다시 한번 말씀으로 일깨우고 앞으로의 비전을 말씀을 통해 제시해 주는 것이 나의 숙제로 남았다.
이런 나의 믿음의 결심이 실행되면서 그로부터 1년 후 하나님은 천주교인을 통해 그 토지와 건물 모두를 우리에게 선물할 계획을 진행 시키고 계셨던 것이다.... 불면불휴의 대적 사단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지만, 전능자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사랑하사 화를 복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주신다 어느 시대를 무론하고 우리의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시다!!!
* 사진 설명 : 열흘 사용하고 완전히 헐렸던 요양원 첫 건물과 건강 집회 첫째날 표정 |
첫댓글 변함없는 목사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짝...............
할렐루야..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