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동: 병자호란 당시 사대부집 여자들까지도 청나라 군사들의 포로가 되어 중국으로 붙들려 갔다. 이에 인조는
"홍제원의 냇물에 목욕을 하고 서울로 들어오면 죄를 묻지 않겠다. 만약 그런 후에 그녀들의 정조를 거론하는 자는 엄단할 것이다!"
즉, 홍제라는 이름은 청나라 병사들에게 끌려갔던 여인들을 널리(홍:弘) 구제한다는(제:濟)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청량리: 원래 청량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 절 일대는 푸른 숲과 맑은 물이 곁들여져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지금의 청량사는 1897년 재건되었으며 일제 때 우국 지사, 고승들이 즐겨찾던 곳이었다.
재동: 종로구 재동은 단종이 삼촌 수양대군, 즉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사건(계유정란)이 일어난 곳이다. 계유정란이란 수양대군과 그 심복들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 인 등 중신들을 참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중신들이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피비린내가 천지를 진동하자 사람들은 집 안에 있던 재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 재를 덮은 마을이 잿골이었고 한자로 회동(灰洞)이 되었다가 오늘날 재동(齋洞)이 된 것이다.
압구정동: 70년대만 해도 완만한 경사의 모래밭에 지나지 않았던 이 곳이 개발돼 요즘은 아름다운 건물과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옛날 이 곳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압구정이란 조선 세조 때 사람인 한명회의 호인 '압구정'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여기서 압구정은 친할 압(狎)자와 갈매기 구(鷗)자를 쓰는데 그 뜻은 벼슬을 버리고 강가에 살면서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자의 주인인 한명회는 세조(수양대군)가 왕위에 오르도록 도운 일등공신이다. 그는 볼품없고 왜소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략으로 영의정까지 지냈다. 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한명회는 생활이 사치스러워졌고 건방져졌다. 사실 압구정이란 호도 자신과 비슷한 중국 사람의 호를 빌려 온 것이다. 한명회는 한강변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매일같이 호화로운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선물 보따리로 배를 불렸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 임금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다른 신하들로부터도 따돌림받았다. 또한 갈매기와 친하다는 뜻의 압구정에는 갈매기 한 마리 온 적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친할 압(狎) 대신에 누를 압(押)자를 써서 압구정(押鷗亭)으로 불렀다.
궁정동:청와대 옆의 궁정동(宮井洞)에는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육상궁이 있기 때문에 옛날에는 '육상궁동'이라 불렀다. 그리고 육상궁동 옆으로 온정동이 있는데 이들을 합하여 궁정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궁중의 하녀인 무수리 출신이었다. 그것 때문에 늘 가슴이 아팠던 영조는
"내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실 사당을 세워야겠소. 종묘와 똑같은 모양과 크기로 짓도록 하시오! 신분이 낮긴 했어도 과인의 어머니께 그 정도는 해 드려야 하지 않겠소!?"
그러자 신하들은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어명이라 사당을 원래 집터보다 낮게 깎고 공사를 하였다. 사당이 완성되자 모양은 똑같은데 왠지 작아 보이는 것이었다. 영조는 약간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종묘와 같은 모양의 사당에 흡족해했다. 사당이 만들어지자 영조는 숙빈 최씨의 신위를 직접 모시려 하였다.
"전하! 후궁의 신위를 직접 모시다니 아니 되옵니다."
그러자 영조는 노여워하며 일을 강행했다. 상감의 앞을 차마 가로막을 수 없었던 승지(임금의 비서)는 임금의 발을 못 움직이게 했다. 결국 영조는 자신이 직접 신위를 모시는 걸 포기했다. 육상궁은 후에 비빈이 아니면서 왕자를 낳아 궁호를 받은 다른 6명의 신위를 합하여 칠궁이 되었고, 그 옆의 온정동은 뜨거운 샘물이 솟아 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영조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하여 생긴 샘물이라고 전해진다.
도화동:아득한 옛날 한 노인에게 예쁜 딸이 있었는데 마음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했다. 마을에 자자한 이 소문은 이윽고 옥황상제에게까지 들어갔다. 옥황상제는 어질고 착한 노인의 딸을 자신의 며느리로 삼기 위해 까마귀를 노인에게 찾아가게 했다.
"내 딸을 옥황상제 며느리로 데려간다구?"
기쁘기는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딸과 이별해야 하는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자 까마귀가 먹으면 천년을 살 수 있는 복숭아를 건넸다. 그러나 노인은 차마 그 복숭아를 먹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결국 복숭아는 썩어서 씨만 남았고, 노인은 그 씨를 정성껏 심었다. 이듬해 그 곳에선 싹이 트더니 나중에는 나무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노인도 죽고 그 일대는 복숭아나무숲이 되었는데, 이 때부터 사람들은 이 곳을 도화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토정동:마포구 토정동은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이지함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형 밑에서 자랐는데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 했고 역학과 천문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 재산 욕심이 없었던 그는 늘 베옷과 짚신을 벗삼아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포천과 아산 현감을 지낼 때도 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어진 관리였다. 이런 이지함의 소문을 들은 제주목사(오늘날의 제주도지사)가 때마침 그가 제주에 있는 것을 알고 시험해봤다. 제주목사는 한 기생을 불러 술상을 차려서 밤에 이지함이 묵고 있는 곳으로 가게 했다. 그러나 이지함은 기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제주목사는 감탄했다. 또, 이지함이 아산현감으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이 고을 사람들에게 애로사항이 있는가?"
"있고 말고요. 사람들이 모두 힘들어하지요. 저쪽 연못에서 고기를 잡아 관아에 바쳐왔는데 이젠 씨가 말랐습죠."
"그래? 그렇다면 그 연못을 흙으로 메워버리면 될 게 아닌가?"
진상품(임금에게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던 제도)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이다. 이런 이지함의 사람됨을 율곡 이이는
"춥고 덥고 목마르고 배고픈 것을 참을 줄 알고, 세상의 어떤 변화에도 늘 당당하게 대하며 자기 것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다."
이지함은 서경덕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연구한 끝에 그 유명한 토정비결을 만들어냈다. 이지함이 토정(土亭)이란 호를 얻게 된 것은 마포에 흙집(土亭)을 지어 살면서였다고 한다.
상도동 장승백이:옛날 우리 조상들은 마을과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여 장승을 세웠고, 10리나 15리마다 장승을 세워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마을 입구에 세워두면 악귀를 막을 수 있다는 토속신앙에 의해 장승을 세웠다. 그러나 1930년 일제는 많은 장승을 뽑아버렸다. 이 곳의 장승도 그렇게 없어졌는데 지금은 노량진동 장승백이 로터리에서 복원된 장승을 볼 수 있다.
봉천동 낙성대:예로부터 밤하늘에 별똥별이 떨어지면 큰 위인이 태어나거나 세상을 뜨는 것이라 했다. 낙성대가 바로 별이 떨어진 터란 뜻으로, 고려의 명장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다. 1973년부터 성역화되어 안국사라는 사당을 짓고 그 주위에 409m의 돌담을 쌓았는데 이 곳이 바로 낙성대공원이다. 또 이 곳 추모비에는 한 일화가 새겨져 있는데...
옛날 어떤 사신이 이 쪽을 지나가던 중 밤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하도 신기해서 별이 떨어진 곳을 찾았더니 그 집 며느리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었다. 어릴 적 이름은 강은천이었는데 키도 작고 용모도 볼품없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였고, 현종 때 서경유수(유수는 옛 도읍지나 중요한 곳을 다스리는 관리이다. 서경은 평양)로 임명되어 거란의 소배압 장군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단숨에 물리쳤다. 이것이 그 유명한 귀주대첩으로, 이후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했다고 한다.
또 다른 사건으로는 그가 한양 판관으로 있을 때이다.
"뭐?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해서 사람들을 해치고 다닌다고?"
"백성들이 공포에 떨고 있지요."
"이 편지를 그 중에게 전해라."
그 편지를 받은 중과 강감찬이 만났다. 강감찬은 이렇게 소리쳤다.
"백성들에게 자꾸 해를 입힌다면 네 껍질을 벗겨 깔고 앉을 것이다! 그걸 면하고 싶거든 당장 이 곳을 떠나거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은 온데간데없고 늙은 호랑이 한 마리만 인왕산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탄천:조선시대 강원도 등지에서 땔감을 싣고 와서 뚝섬에 내려놓았는데 이것으로 숯을 구운 곳이 탄천 주변이었고 그래서 개천 물이 검게 변했다. 때문에 숯내라고 하던 것을 한자로 탄천(炭川)이라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로는 옛날 염라대왕이
"도대체 삼천갑자를 산 동방삭이란 녀석은 왜 그렇게 오래 살게 하는 것이냐?"
"하오나 그 동방삭이 어떤 놈인지 알 수가 없어서..."
"동방삭은 호기심이 많아 남이 하지 않는 괴상한 일에 꼭 끼어드는 버릇이 있으니, 그런 녀석을 잡아오너라!"
그리하여 세상에 내려온 저승사자는 그 날부터 냇가에 나가 숯을 씻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보고 비웃었다. 그러나 염라대왕의 사자는 매일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에 한 노인이 지나가다 "정말 별꼴이군.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냇물에 숯을 빠는 놈은 처음 본다니까."라고 중얼거렸다. 이에 염라대왕의 사자가 동방삭을 잡아갔다고 해서 숯내, 즉 탄천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뚝섬:뚝섬의 옛 이름은 둑섬, 뚝도, 독도, 살곶이벌 등이 있다. 조선 태조 때부터 이 곳은 임금의 사냥터이자, 군사들을 사열하던 곳이었다. 살곶이벌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 태종 이방원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후 생겨난 이름으로 태조가 태종을 미워하며 함흥으로 떠난 때부터이다. 태종은 자신이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웠음에도 돌아온 것이 없자 형제를 여러 명 죽이고 자신이 왕에 올랐다. 이에 태조가 노발대발하여 부자의 정을 끊을 것을 다짐하고 고향인 함흥으로 떠난 것이다. 그러자 태종은 많은 사신(함흥차사)을 보내어 태조를 모셔오라고 했지만 태조가 그들을 모두 죽였기 때문에 실패했다.
"떠난 사신들은 모두 돌아올 줄 모르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신, 박순 다녀오겠사옵니다."
박순은 태조와 가까운 사이였다. 박순은 태조와 즐거이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박순이 갈 때 데리고 간 어린 망아지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태조는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제가 타고 온 말의 새끼입니다. 동물도 어미를 따르는데 하물며 사람인들 오죽하겠습니까?"
간곡한 설득에 태조도 마음을 돌렸으나 결국 박순도 죽임을 당했다. 그 후 무학대사와 함께 태조는 서울로 돌아왔는데, 뚝섬에 태종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분을 참지 못한 태조는 활을 꺼내 태종을 향해 쏘았다. 태종이 몸을 피하자 화살은 뒤에 있던 나무에 꽂혔고, 그 때 화살이 꽂혔던 곳을 살곶이벌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군사들이 활 솜씨를 겨루던 무예장이라서 살곶이벌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뚝섬에 있는 살곶이다리는 1482년 완성되어 서울과 동남지방을 연결해주는 관문 역할을 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돌다리이다. 조선시대 관아의 목장으로 쓰였던 뚝섬은 경마장으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과천으로 옮긴 지가 오래되었고, 얼마 전에는 서울숲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떠오르고 있다.
양재동 말죽거리:인조 때 이괄의 난으로(광해군을 몰아낼 때 공을 세웠던 이괄 장군이 자신에 대한 대우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사건) 서울이 아수라장이 되자, 인조가 신하들과 피난길에 올랐다. 임금의 행렬이 한강에 도착했을 때 나루터에 배가 한 척도 없었다. 배는 멀리 강 가운데에 떠 있었다. 이에 한 신하가 물로 뛰어들어 배를 끌고 와 무사히 강을 건넜으나 굶주림과 피곤에 지쳐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침 선비들이 팥죽을 쑤어 임금께 바쳤고 말에게 죽을 먹이던 곳이라 하여 말죽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