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 시인의 시집 [아포리아 숲]이
2011년 10월 책만드는집에서 나왔다.
이송희 시인은 1976년 광주에서 태어나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등단하였으며
시집 [환절기의 판화]와 평론집 [눈물로 읽는 사서함]을 낸 바 있다.
다음은 '시인의 말'에서 따왔다.
"... 상처 없는 생은 없다고 믿는다. 상처에 소독약을 들어부을 때
쓰리고 따끔하게 속살은 자라난다....
... 내게 시는 꼬리를 절망의 밤에게 뜯기고 희망의 아침으로 도망친
도마뱀 같다. 시 쓰는 시간은 잘린 꼬리의 아픔과
자라나는 꼬리의 희망을 돋시에 맛보는 시간이다."
다음은 이승하 시인의 해설 '현실 사회의 아픔을 보듬는 시인의 따뜻한 눈길'의 일부이다.
"...우리 문학사에 있어 시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1980년대의 시인 중에는
뛰어난 현실 풍자가가 있었고 재담가가 있었고 독설가도 있었다.
시의 해체를 꾀한 실험가도 있었다. 절대 순수를 지향한 이도 '무의미'의 방을 나와서
한 명 사회적 인간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들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당수 시인들의 독백에 독자들도 문학평론가들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혼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으면 정신병자로 오인되기 쉬운데,
이 땅의 많은 시인이 이 화려한 영상 매체의 시대에 영혼 없는 시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바로 이러한 때에 이송희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각별하다.
... 거의 절대다수의 시인들이 현실 사회의 아픔을 외면하고 자신의 내면세계 탐색에 골몰하고 있는
우리 시단의 현 상황에서... ...이웃에 대한 꾸준한 관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드문 현상이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 시집의 후반부에 가면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대결 의식보다는 생로병사와 희로애락 등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한다. 앞쪽의 시들이 서사성이 강한 반면 뒤로 갈수록
서정성이 강해지는 것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 현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도 좋고, 현실의 시적 반영도 좋지만 자칫 잘못하면
소재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으니 두보의 시처럼 만인의 심금을 울리면서도
'당대'라는 시간의 벽을 넘어 10년 뒤에도 100년 뒤에도 읽히는 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시대를 초월하는 시가 되기 위해서는 내공을 더욱 견고하게 다져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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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아 숲 / 이송희
적막이 우거진 길을 한 사내가 걸어간다
구불구불 이어진, 빽빽한 숲을 헤쳐
자정이 훌쩍 넘도록 잠 못 드는 젖은 눈빛
실시간 검색창을 온종일 들락거리는
별들의 이름을 습관처럼 두드린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별들의 이야기
로딩 중인 달이 뜨면 숲길도 환해질까
어둠이 울을 친 길 끝에서 흔들리는 문
실직의 문장 몇 개가 싸늘히 식는다
사내를 쳐다보는 모니터 속 아바타
얼굴의 절반을 화면 속에 담근 사내
당신의 앓는 소리도 반복 재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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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 이송희
노인이 혼잣말로 하루를 시침질하네 중얼거림에서 시작
해 중얼거림으로 홀맺는, 으늑한 골짝의 숲을 한 땀 한 땀
깁고 있네
틀어진 아귀에서 새나온 불빛들 한적한 골목을 벌겋게
달귀놓고 밤새워 지저귀던 소리 쩌억쩍 달라붙네
누군가의 두 눈에 모래를 뿌려놓고 방문 걸어 잠근 채
웅크리던 꿈들아 바늘이 돋은 자리를 헤집던 매운바람아
갈림길 저편에서 넘어오는 한숨 소리 스르르 풀린 슬픔
실꾸리에 되감네 저만치 물러간 해를 한 땀 한 땀 깁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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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간 거울 / 이송희
1
그녀의 닫힌 창에
달빛 한 조각 고인다
물기 젖은 시간이
비스듬히 놓여 있는
얇아진 생의 한쪽이
잘려 나간 일기장
2
찢어진 살갗에서
붉은 피가 흐른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
내 오랜 울음의 시간
환절기 젖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눈빛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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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그날 / 이송희
숲의 내장
메스로 갈라버린 고속도로
엄마 찾던 새끼 고라니
깜빡이던 눈망울
배 위에
트럭 바퀴 자국
파리 떼만 잉잉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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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 이송희
너는 이미 떠났을까
단단하게 잠긴 안쪽
지상의 암호들도
서성이다 돌아갔나
비틀면 열리던 사랑
등 돌린 채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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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나는 이송희 시인을 두 번 만났다.
보통 때 같으면 시간 내기 어려운 젊은 시인을 며칠 사이로 거푸 만난 것이다.
처음 만남 때는, '민속촌'에서 함께 밥을 먹었고
다음 만남 때는 '갤러리수니'에서 함께 차를 마셨다.
넉넉한 마음을 가진 '박 시인'이 우리를 에스코트해주었다.
찰그랑찰그랑, 박 시인 말대로 '요령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내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지산동 농장다리를 지나갈 때,
아직도 자연을 노래하지 않으면 시조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는
답답한 감옥을 안고 사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툭 던진 말에 이송희 시인이 까르르, 소녀처럼 웃었다.
"時調의 때 시를 춘하추동으로 보는갑네!"
뚱딴지,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행사에 늦게 된 까닭, 술맛이 있는 날과 없는 날 등등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은 두서 없었지만 즐거웠다.
시간은 흘러가겠지만, 그 만남과 이야기들은 은은한 수묵빛 추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