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생활과 사역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이라면 아마도 나의 자아가 깨어져서 하나님의 주권에 항복된 연단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내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며 집착하며 붙잡고 있었던 자아를 부인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나를 맡기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영광이며 기쁨이 되었다. 이러한 깨어짐을 통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투명하고 진실하다는 것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의지대로 살려고 내 뜻을 주장했을 때는 오히려 좌절과 실망이 가득했는데 전적으로 주님의 뜻에 순복하니까 참된 평안이 내 영혼을 주장하게 되어 진리 가운데서 참 자유를 얻게 되었다.
우리들은 참 자아가 아닌 거짓 자아나 가짜 자아를 갖고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진정한 자아를 직시하기가 두려워서 회피하고 남에게 좋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멋지게 포장하여 거짓 자아로 살아간다. 자연스럽게 진정한 자아를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어떤 경우에는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친밀한 관계로 성장할 수 없다. 즉 거짓 자아로는 진정한 영적 성장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거짓 자아를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거짓 자아로는 종교생활을 할 뿐이고, 만일 사역을 할지라도 살아있는 생화가 아닌 만들어진 조화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맏형은 동생에 비하여 인간적으로 성실하게 자신의 책임을 다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집을 나가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 방탕하게 허비한 동생이 돌아왔을 때, 사랑으로 용서하고 받아주었을 뿐 아니라 큰 잔치까지 베풀어 준 아버지에 대하여 분노하였다.
이 비유는 죄인을 사랑으로 용서해주시고 기꺼이 자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한없는 사랑을 보여 주는 비유이다. 그런데 맏형은 자신의 의로움에 꽉 사로잡혀서 자신의 교만한 죄에 대하여는 눈을 가리고 관대하지만 다른 죄인에 대해서는 사랑이나 용서가 없이 냉혹하게 정죄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인에 비유되었다. 이 비유에서 맏형은 거짓자아를 갖고 있는 사람이고, 동생은 부패한 죄의 본성을 갖은 자로서의 참자아를 발견하고 수치스러움으로 깨어진 연약한 사람이다. 즉 맏형은 자신의 죄는 숨기고 인간적인 의로 포장한 죄인이고, 탕자는 죄가 드러난 죄인이다. 숨은 죄인과 드러난 죄인의 차이일 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뜻이다.
죄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피조물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영광을 찾는 근본적인 죄를 의미한다. 모든 죄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함으로써 파생되는 결과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을 성경에서는 죄라고 정의한다. 자아란 내 중심의 핵심이다. 구원 받았다는 것은 내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옮겨졌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자아 부인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내 중심으로 사는 자아는 거짓 자아라 할 수 있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자아는 참 자아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자아가 타락하여 거짓 자아가 생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 자아를 깨뜨리시기 위하여 고난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고통이 없이는 끈질긴 거짓 자아가 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고집하고 집착해 있던 거짓 자아를 버리고 참 자아를 회복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아름답게 회복될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