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고린도후서1:1-11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저도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들의 모임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를 고민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자신이 앞으로 어떤 직업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를 하나님께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입니까?
그리고 여기에서 한가지 또한 걸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이런 것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한다면 내가 가는 길이 잘 될 것이고, 앞날이 멋지게 풀릴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또 다른 부류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뜻 물론 이 뜻이 잘못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지요. 이것과 전혀 별개로 신앙생할 하는 사람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만치 멀리 두고, 자신의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가까이 있으면 귀찮고, 무담스럽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행하기에 하나님은 너무나 성가신 분입니다.
그러니 적절한 경계선을 두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자로써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스스로 생각합니다.
목사들이 이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죄, 죄, 이야기 하지 말고, 주일날 교회에 나오면 적절한 뉘우침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설교를 내 놓으면 교인들은 너무나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헌금도 많이 되어지고 말입니다.
저 아래, 가장 잘 산다는 동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지금 그 교회 목사가 이런 목회를 한다고 합니다.
성도들이여 성경말씀을 너무 지나치게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예를 들면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지요. 그 말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이 땅을 사는 인간중에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지 않을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말씀을 그냥 마음이 너무 깊이 세겨두지 마세고, 그런대로 그냥 사세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실 죄인들은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왜 우리에게 이런 엄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어도 지옥가야 한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왜 하셨을까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의 협박으로 들리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디모데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읽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하!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면 장로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뜻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이런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목회자가 되는 것으로, 아니면 장로가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업에 망하면 목회자가 되려고 하고, 인생의 낙오자가 되면 신학교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아마 신학이 성공의 신학으로 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목회 성공과 실패를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교인수 많은 것, 대형교회가 되는 것, 사람들에게 이름을 날리는 것, 이런 것들이 목회성공이요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사람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뜻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경험을 통한 하나님의 뜻 말입니다. 바로 성공. 실패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요 요즘도 노회를 가보면 주로 당당한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보게 되면 교회당 건물이 크고 성도가 많은 교회목사들은 자기 할말을 거의 다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조그만한 교회의 목사들, 아니면 목회지가 없은 목사들은 부끄러워서 노회참석하기도 꺼릴 정도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이 목회를 하는 것, 아니면 큰 교회를 만드는 것, 성공하는 것에 있다고 보십니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 사업을 잘해서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전도를 많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죄인들의 근본적 사고방식은 많으면 좋다라는 사고방식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이것이 가득차 있습니다.
헌금도 많으면 좋고, 전도도 많이 하면 하나님의 뜻에 가깝고, 기도도 많이 하면 하나님의 뜻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과 디모데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마태복음6:10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17:11절을 함께 봅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실 것을 미리아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시지 않을 때 제자들을 살려달라는 그러한 기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거의다가 순교를 당합니다. 그러니 무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에베소서 1:10절을 보게 되면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11:36절을 봅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주님되시는 분은 바로 십자가지신 예수님이십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주님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물론 이것을 확장해서 해석을 해 본다면, 믿지 않는자들 조차도, 지옥가는 자들 조차도 예수님이 주님으로서 지옥보내시는 것이며, 구원받는 자들도 역시 예수님께서 주님으로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십자가지신 예수님 중심으로 통일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고린도 후서 1:1절을 생각해 봅시다.
바울과 디모데는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사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요 곧 그리스도 예수가 중요한 것입니다.
죄인들은 이런 본문을 보면서 어디에다가 눈을 두는고 하면 사도, 즉 눈에 잡히는 것, 자신이 할수 있는 것에다 마음을 둡니다.
그러나 고린도 후서 1:1절에서 중요한 말씀은 사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요 곧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이 말씀에 중심을 두게 되면 우리는 사도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곧 그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들은 다 죄인임이 선포되어야 하며, 그런 죄인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음이 온 땅에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3-11절을 보게 되면 위로와 고난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데 왜 위로와 고난이 따릅니까?
그 이유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주됨을 결코 빼앗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아니어도 자신은 살아갈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철저히 의지하는 자입니다.
이런 죄인들은 자신들의 행위의 열매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서론에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자신이 무엇을 행한 것, 특히 많이 행한 것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든지, 자신의 죄없음을 역설적으로 표출해 내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너무나 흔히 볼수 있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란 사실 교회라 보기 어렵습니다.
절간과 다른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절간아닙니까?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행한다 하더라도 이런 인간이 내세우는 것은 결국 자신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행했지 않았습니까라는 사고방식이 튀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바울과 디모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위로와 고난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의지하는 분은 예수님 한분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바락바락 주장을 하니 사람들이 그냥 내버려 두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했는데 사람들이 미워하고 핍박을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할 때에 그들의 죄를 고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신의 악함은 어떤 나쁜 짓을 했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용서를 모르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악함이라고 고발을 하게 되니 죄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좀더 쉽게 말하면 당신은 당신 하고 싶은데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세상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고려하지 않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것이 죄입니다 라고 하니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요.
그 다음에 이들이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복음을 이야기 하면 왕따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이야기를 하면 끼워줍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이 사실을 인정하고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행하던지, 어떤 직업을 가졌던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직장을 다니는 것이요, 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여러분은 많은 고난과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찬송의 이유
고린도 후서1:3-11
여러분들은 어떤 때에 하나님을 찬송합니까?
심심할 때 아니면 여러분의 일들이 잘 풀릴 때입니까?
아니면 어려움 속에 있었는데 그 어려움이 잘 해결되었을 때 찬송을 합니까?
여러분 장례식에 가 보았을 것입니다.
장례식에 가 보면 그곳은 눈물과 한숨과 슬픔이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장례식장을 갔다 왔습니다.
참으로 젊은 사람이, 저와 동갑인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아타까워하고, 실력 있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합니다.
죽음이란 사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내용입니다.
물론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가족들은 통곡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끝이다 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겠지요.
아니면 너무 허무해서 그럴 것입니다.
죽음이 오히려 소망임을 이들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통곡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니면 남편이, 아니면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찬송이 먼저 나오기보다 원망이 먼저 나올 수 있는 인간들입니다.
물론 늙어서 죽는 것은 그렇다고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세살, 네 살, 아니면 갓 태어나자 말자 죽는 아이를 본다면 우리의 입에서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사람들이 이 땅에서 안 되는 일을 만나게 되면 찬송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땅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땅을 바라본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산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에 두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세상을 물로써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주변 사람들은 오직 육신을 좇아 자신의 사람을 살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몸으로 겪기 전에는 결코 그것을 수납할 마음이 없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물론 이 말은 주님과 관련해서 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이 말이 지상에서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수 있는 길이라고 말해 준다면 아마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무당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그 이면에는 비과학적인 것이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이 둘은 다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의 몸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 유리한 것만 받아들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더 유리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을 믿는 세계라는 것에 대해서는 안중에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에 도움이 안 된다고 단정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죽인 본디오 빌라도나, 헤롯 왕이나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수많은 민중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추구한 것은 눈앞이 현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되지 않더라도 이 고비만 지나만 행복한 날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제거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영 엉뚱하게 저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믿는 것이 복된 자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잘 살게 되고, 건강하고, 가정이 행복해 진다는 식의 복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복된 분이며, 그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만이 복된 자라고 하니 참으로 알아듣기도 힘들고, 또한 그것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복된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된 자의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잘나가야 복된 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가난하고 취업도 못하고, 일용직에 근무하면서 겨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과연 복된 자의 모습처럼 보입니까?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사업이 잘 되어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살아갑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과연 누가 복된 자처럼 보입니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동일하게 믿으면서도 항상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이런 유혹을 받게 됩니다. 복된 자란 잘되는 것이란다라는 유혹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바울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를 보면서 우리가 참된 복된 자인가 아니면 마귀가 주는 그 복됨을 좇는 자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환난을 받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많은 환난을 받고 있습니까?
사도행전19장 23절 이하를 보게 되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우상을 만들어 팔아 부자가 된 자들이 소란을 피웁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는 복음 앞에 자신들이 만든 우상들이 다 사기임이 드러나니 결국 그들은 본색을 드러내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기장은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 바울을 보호합니다.
이럴 때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해 찬송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서기장을 사용하셔서 바울을 보호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있을 때에 어떻게 찬송을 불렀겠습니까?
물론 바울이 서기장의 도움으로 살아난 것도 하나님을 향해 찬송할 수 있는 대목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찬송의 이유가 바울이 살아났기 때문에 찬송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실 때 그를 주님의 증인으로 사용하실 목적으로 부르신 그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 바울을 고난도 받게 하심에 대한 찬송과 함께 그가 죽음의 위기를 넘긴 것에 대해 찬송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여전히 주님으로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장면이기에 우리들은 찬송을 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환난을 받았고 또한 위로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환난은 왜 받았는지 우리가 앞서서 보았습니다.
그러면 바울 일행이 받은 위로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바울 일행이 받은 위로는 계속해서 죽음의 위기를 넘기는 것일까요?
5절을 보게 되면 우리들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바울이 왜 고난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셔서 주님이 되시어 성령을 자신의 백성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주님의 백성들은 오직 예수님이 주님이심만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자신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어 주가 되시는 바로 그분이심을 증거하심과 같이, 성령을 받은 자들은 이 예수님만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그 고난, 즉 동일한 성격의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위로가 성도에게 주어집니까?
고난이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나라 백성의 증거입니다.
6절을 보게 되면 바울 일행이 받는 환난이 오히려 고린도 성도들에겐 위로와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일생이 당하는 그 고난은 곧 그들 자신에겐 위로요 구원이라는 말이 됩니다.
8절을 보게 되면 아시아에서 어떤 환난을 당했는지를 말합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환난이 위로와 구원이라는 말은 고난과 힘이 부칠 정도의 버거움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죽었구나 라고 생각될 정도로 심한 환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죽음에 직면 했을 때 이들로부터 솟아 나오는 것은 이렇게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시는 이유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을 알게 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21-23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함께 봅시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결국 바울 일행은 환난 받는 가운데 죽음의 위기로 몰리는 가운데 아들공경에 대한 사실을 더욱더 제대로 알아갔던 것입니다.
주님이 누구시냐?
바로 십자가 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성도의 모습이란 환난과 고난과 위로의 삶입니다.
이런 가운데 성도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더욱더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찬송이란 어떤 때 나옵니까?
그것은 환난 중에 있던 핍박 중에 있던 이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알아가게 하실 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몸이 건강하고 가족이 잘되고, 행복한 것, 사업이 잘되는 것, 이런 것을 두고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우상을 팔아 장사하던 자들의 사고방식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오히려 이런 자들이 바울과 같은 성령 받은 자,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자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것이 한 세트가 되어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성도의 기도
고린도후서1:8-11
오늘 우리들은 흔히 말하는 중보 기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중보 기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보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골로새서1:8절에서 성도들을 위해 얼마나 꾸준히 기도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곳 뿐만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또한 바울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말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교회모임때 마다 중보 기도라는 말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교단에서는 중보 기도라는 말이 잘못되었다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에서 가족들을 위해, 아니면 교회를 위해, 목사를 위해, 나라와 민족, 세계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기도하라고 하는데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고 말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자들도 다 기도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가 없는 자들도 자신들의 각자의 신을 향해 중보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다.
절간에 가보면, 죽은 자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입시를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가정의 평안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지난번 낙산사라는 곳에 갔습니다.
그곳엔 아주 큰 불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날은 아주 추운 날이었는데, 신발을 벗고, 시멘트 바닥에 올라가서 절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들을 볼 때 우리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불쌍한 인생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들과 같은 자들만이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일까요?
사실 중보 기도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중보 하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간구함으로 말미암아 그 기도의 성취로 주님의 백성들은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간구로 성령을 받은 자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가정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개인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업이 잘되게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라가 평안하기를 구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를 보게 되면 십자가 지는 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의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에 순종하기 위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 기도의 응답으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어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 주님이 보내주신 성령을 받은 자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가지 입니다.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고의로 위험의 길로 접어든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마음은 오직 한가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들은 이것을 증거하는 동안 인간들의 죄악을 낱낱이 들추어 냅니다.
이런 복음을 받은 자들의 반응은 각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하였고, 또한 어떤 사람들은, 회개하는 척하여 교회에 들어와 속이는 자들도 있었고, 어떤 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성령 받은 자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들이 만일 자신의 가정의 평안과 행복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면 결단코 이런 복음을 전할 수 없었고,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모임의 안정을 강구하는 자들이었다 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핍박을 받는 시기가 있었고, 오히려 교회가 군림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는 시기에 성도들의 관심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게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군림하는 시기가 되니 교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계속 지속해 갈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그 당시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대와 같은 평안, 이렇게 기독교를 옹호해 주는 황제는 만세수를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을까요?
교회가 그 황제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을까요?
그래서 기독교가 수 백년 이상을 주도권을 갖고 있었을까요?
주님의 말씀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교회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들의 기도의 내용은 주님의 기도와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그런 내용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간구와도 전혀 다른 것입니다.
중보자 되시는 분은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수 없습니까?
물론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시지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성령 안에 있는 성도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 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물론 주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기도입니다.
이제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를 봅시다.
11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도대체 바울이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도행전이나 바울 서신들을 보게 되면 바울이 가진 것들이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가지입니다.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전하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의 건강, 가정의 행복, 로마제국의 평안이 기도의 제목이 아닙니다.
물론 고린도 후서 12장에 보게 되면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문제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바울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자신의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죄인들의 근본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시는 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지신 주님이 그런 죄인들을 어떻게 인도해 가실 것인가를 십자가 지심으로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연약한 모습 가운데 자신을 합리화 하고 자신의 건강이나 평안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이런 모습은 오히려 자신이 죄인임을 더욱더 알게 되는 과정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모습조차 예수님이 왜 십자가 지시고 주님이 되셔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바울이 만일 오늘날 우리들이 기도하는 그런 기도, 가정의 행복, 사업의 무궁한 번창, 교회의 평안 등을 위해 기도하는 자였다면, 그의 지향성이 이런 모습이었다면 스데반의 죽음을 그는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요, 야고보의 죽음을 성도들에게 떳떳이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미 바울도 역시 한 죄인임을, 주님의 용서함을 받은 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위해 틀림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 닥치더라도 예수님의 주되심만 증거케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5:9절을 봅시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바울은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살 소망에서 끊어지든지 끊어지지 않든지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일행을 향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한 결과입니다.
이것이 바울 일행이 받은 은사, 곧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오늘날 교회에서, 새벽마다 , 금요일마다, 수요일 마다, 일요일마다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내용이 아닙니까?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신의 속한 집단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하는 속성을 가졌습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기도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이 돈 바치고 땅 바친 교회가 잘되지 않기를 기도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론 돈 바치지 않은 사람, 땅 바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겠지요.
자신의 장래가 걸려 있는 사업체나 국가를 위해, 세계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기도하고 있습니까?
물론 제가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시간을 기도해야 기도하는 것입니까?
기도라는 것은 성령을 받았든 받지 않았던 누구나 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더 타당하겠지요.
혹 여러분은 바라는 것도 없고,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저렇게 자신의 탐심,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러니 나는 그렇게는 기도하지 않겠다. 그러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닥치는 일을 처리하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만일 이렇게 된다면 성도의 증거, 즉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바울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지요. 성령이 함께 함께 하는 주님의 백성인지도 궁금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늘 어떤 상황을 맞이하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여러분이나 여러분과 함께 하는 주님의 백성들이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기도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누구를 믿고 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행함
고린도후서1:15-24
12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육체의 지혜로 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것이 나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들은 당연히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 우리는 결코 육체의 지혜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자로 살아가야 돼.
그러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래서 우리들은 본문을 탐색해 갑니다.
12절 끝에 보니 자신들의 양심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이, 진실된 말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행하는 일이 결코 육신의 지혜를 따라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음을 자신들의 양심까지 거론 하면서 그 진실됨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것이 자신들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자랑입니까?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음이 자신들의 자랑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본문을 보면서 우리 자신과 많은 괴리를 느끼게 됩니다.
아니 바울 자신이 예수님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자신이 행하는 일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행한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가?
우리 자신들은 항상 우리 자신들이 한 일을 생각해 보면 육체의 지혜로 행한 것이 더 많고, 가끔은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도 같은데 양심에 거리낌이 있고.
참 오늘을 사는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는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끝까지 알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바울 일행이 주님이 강림하시는 날에 자랑이 되고,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 일행에게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육체의 지혜를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행하는 자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들의 어떤 행동이 육체의 지혜를 따라 행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행했는가를 설명합니다.
15-17절을 읽어 봅시다.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에 내게 있었겠느냐”
바울의 원래 계획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획하는 것이 결코 육체의 지혜로 행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바울은 결코 육체를 따라 계획을 세우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8-22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이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성취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아멘 하는 자로, 즉 육체의 지혜를 따라 행하는 자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신 예수님께서 주님이 되셔서 성도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영을 받은 자가 육체의 지혜를 따라 행하는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3절을 보게 되면 실제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앞서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주님의 성령 안에서 행한 것임을 말해 놓고 이제 와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23절을 보면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변명과 같이 느껴지는 말이 나옵니다.
너희를 아끼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아꼈는가?
24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려든 계획을 취소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바울 일행의 본래의 계획과 모순이 있지 않습니까?
본래의 계획이 분명 성령 안에서 행한 주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결정한 계획이었다면 어떻게 나중에 와서 그 계획을 취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 바울은 처음 계획을 세울 때에는 고린도 교회에 가는 것이 그들을 돕고, 제대로 성도를 견고하게 세우는 것이라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결코 사사로운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서 고린도 교인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분명합니다.
자신이 세운 교회이니 자신이 마음대로 주관하겠다는 의도에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제 와서 그 계획이 취소되었는가?
자신이 주관하겠다는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는 것임을 안 것입니다.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가 본문을 탐색한 결과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어떤 일을 계획함에 있어서 주님 안에서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획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계획을 취소하는 경우에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취소하는 이런 모습이야 말로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이 어떤 일을 계획함과 취소함에 그 중심을 차지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이나, 탐욕 때문에 어떤 일을 결정하고 취소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것은 육체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우리들은 얻었습니다.
바울의 모습 속에 십자가의 사랑이 듬뿍 담겨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꼭 주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사실 그렇지요.
왜냐하면 주님의 영이 바울과 함께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바울이 계획하고 취소하는 그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 지신 주님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들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우리에게 적용되어질 때에는 어떻습니까?
서론에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렇다면 나는 육체의 지혜를 따라 행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자인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나는 왜 이렇게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는가?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바울을 부러워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여 하나님의 지혜로 행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나도 저런 모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런 탐심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성령 안에서 성도는 이런 모습이 분명 툭툭 터져 나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의 모습은 그런 모습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지혜를 따라 행하는 모습이 연속으로 막 흘러 나옵니다.
이것이 사실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같은 본문을 보면서, 참으로 우리가 얼마나 악한 죄인이며, 얼마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체의 지혜를 따라 행하는 그런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십자가 지신 주님께로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성도는 분명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항상 순종하는 자로, 육체의 지혜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자로 살아 갑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갈 자는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느냐고 저에게 반문하시겠지요?
바울이 가능한 것은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자신의 결심이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말이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는 말 이면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신은 육체의 지혜로 행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행할 수 있었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지 알고,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바울과 같은 그런 십자가의 사랑을 듬뿍 담아내는 모습도 보일 것입니다.
사랑
고린도 후서1:23-2:11
성도는 이 땅에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주식에 투자를 했다면 당연히 주식 동향이 어떻게 되는가에 온갖 마음을 빼앗길 것입니다. 특히 빚을 내어서 주식을 샀다면 더욱더 그러할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든, 아니든 마음은 오직 주식의 오르고 내림에만 마음이 빼앗길 것입니다.
성도란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지만 땅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열왕기상12,13장을 보면 여로보암왕이 나옵니다.
솔로몬의 범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둘로 쪼개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솔로몬 시대의 큰 용사였던 여로보암에게 유다와 베냐민을 제외한 나머지 지파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왜 여호와께서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주시려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솔로몬이 언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을 것은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이 일로 인해 열지파가 여로보암에게 속하여 북 이스라엘이 됩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이니 자신이 보존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두었고 벧엘에서는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를 대신하여 제사장도 세우고 제사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솔로몬에게서 열 지파를 떼어 자신에게 맡기셨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우매한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북 이스라엘을 사용하시어 왜 이들이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자인가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이들의 멸망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멸시한 것입니다. 이것을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했지만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덮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남유다를 통해 약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서 성도란 어떤 자인가를 우리는 분명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바울의 모습이 참으로 성도의 모습임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왕 같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왕이 되었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고, 그것을 이용해 남을 이용하거나 지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어떻습니까?
결코 다른 성도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았습니다. 단지 기쁨을 돕는 자로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이것이 어쩌면 우리들이 구분하기가 약간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 경계선이 아주 모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우리들이 받는 느낌이 어떻습니까?
바울 자기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닙니까?
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참 복음이라는 주장이 아닙니까?
이런 태도가 어떻게 남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태도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내용을 따져 들어가 보면 결국 바울이 말하는 그 내용이야 말로 믿음에 대한 것, 즉 십자가 지신 주님에 관한 내용임을 우리들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서신의 표면적인 내용만을 고려하여 그것을 목회에 적용하려고 한다거나 신앙생활에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미 믿음에 서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모두가 다 믿음에 서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존재 했듯이 고린도 교회도 여전히 이런 자가 있음이 확실합니다. 만일 바울의 말을 듣지 않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과연 그를 성도라 인정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있습니다.
바울의 관심이 하나입니다.
자신이 주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의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자로 자신은 남아 있는 것이지요.
성도들이 믿음에 섰다는 사실은, 성도들의 주관자는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결코 다른 사람의 주관을 받아서도 안 되고, 성도를 주관하려고 하는 자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주님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지만 자신의 잘남을 전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근심으로 고린도 교회에 가지 않기를 스스로 결정한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했다고 하니 우리는 여기에서 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자인데 바울 자신의 말로는 스스로 결정했다라고 표현하니,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있지 않느냐를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통으로 보세요. 부분으로 보면 그렇게 느껴지지만 바울이 지금 성령을 따라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기엔 바울이 스스로 결정한 것처럼 보이지요. 뿐만 아니라 사실 성도의 삶 자체 자체가 자신의 결정을 통해 행동하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실 결정권은 우리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데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일 그런 주장을 한다면 그는 믿음 있는 자가 아니라 믿음 없는 자, 오직 자신만이 믿을 대상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그런 결과가 됩니다.
제가 바울의 말을 옹호하려고 한 것도 아니요, 그의 말을 내 주장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읽어 보세요. 어디에 자신의 결정을 주님의 은혜로 표현하지 않는가요?
바울은 사실 자신을 기쁘게 해 줄 자들은 고린도 교인들인데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마음 아프게 하면 바울을 기쁘게 해 줄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꼴이 됩니다. 그러니 그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애통한 심정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편지를 섰다는 것으로 보아, 또한 5절에서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다는 표현을 보아, 고린도 교회의 죄악을 고발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그러한 글이었음을 우리들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죄를 범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글을 통해 볼 때 죄를 범한 사람이 회개 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죄악이 아주 심했던 모양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그런 죄악이었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에게 사랑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0,11절을 말합니다.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바울의 관심이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점이 있을 때 그곳에 끼어 들어 자신이 주관자로 행세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두를 십자가 앞으로 나가게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성도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 관심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어떤 일의 잘 잘 못을 가리려고 덤벼들어 거기에만 마음이 빼앗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은 물 건너 가버립니다.
이것은 사단에게 속는 것입니다.
그래 그래 옳다. 옳다. 네 주장이 성경적이다. 라고 사단이 우리를 꼬이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십자가의 긍휼, 십자가 세우신 새언약을 멸시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바울이 애통한 마음으로 편지를 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애통한 마음이 긍휼로 나타남으로 그 애통함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애통함임을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항상 십자가 지신 주님께 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생명과 사망의 향기
고린도후서2:12-17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함에 있어 그것을 성취하지 못했을 경우 그 사람은 실패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 속에서 사람들이 맡을 수 있는 냄새는 곧 실패의 냄새입니다.
아니면 그 일을 이루었을 경우에는 그 사람은 성공자의 냄새를 풍기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겐 이런 냄새가 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겐 성공자의 냄새, 실패자의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서 나는 냄새는 곧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향기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냄새라는 것, 향기라는 것은 홀로 존재할 때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냄새라는 것, 향기라는 것은 상대편에 존재할 때 나타는 것입니다.
과거에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산 속으로 들어가서 믿음을 증진한답시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믿음이 좋아 보이고, 세상사와 단절해서 사는 모습이야 말로 참된 믿음을 가진 듯이 보이지만, 이들에겐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놓여 있을 때에 그 향기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될 것이 아닙니까?
16절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의 향기란 다름 아니라 생명과 사망을 구분 짓는 향기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바울 일행을 통해 증거되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입으로 증거하면서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만일 바울 일행이 복음을 입으로 전하지 않고 그냥 돌아만 다녔다면 그 향기란 발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스무 살 때 즘에 경주 쪽에 있는 절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한 중이 있었는데 그는 말을 하지 않고 몇 년을 지내는 도를 닦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벙어리인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지팡이로 땅에 글을 쓰기 전 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글을 읽은 후에야 그 사람이 도를 닦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은 우리가 이 사실을 알든 알지 못하든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싸움은 자신과 하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온 것뿐입니다.
이런 사람도 분명 어떤 향기를 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만났을 때 말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을 열심히 하는 구나라는 향기를 말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와 전혀 다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영적 싸움입니다.
이것은 자신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의 싸움도 아닙니다.
오직 공중권세 잡은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12절에 보게 되면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에 열렸는데 그곳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한 까닭으로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장면을 보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주안에서 복음을 전할 문에 바울에게 열렸는데, 디도 때문에 복음은 전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갔다라고 생각해 보세요.
디도 때문이라는 것은, 즉 어떤 근심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고 마게도냐로 갔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바울을 보고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분명 복음의 문이 열렸다고 했으니,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마케도냐로 떠나 버립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과연 바울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우선인데 디도를 못 만났기 때문에 마게도냐로 떠난다. 그것이 말이 되느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태도가 과연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의 태도냐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디도가 주의 복음을 위해 고린도 교회로 가서 소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어떤 목사가 복음을 전하다고 갑자기 다른 곳으로 가버립니다.
지금 복음을 계속 듣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다른 곳의 성도들 때문에 가버린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에이, 뭐 저런 목사가 있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저렇게 무책임 할 수 있을까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에 바울이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성도라고 하는 자들 중 몇이 바울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로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성도라고 하는 자들은 워낙 고상하고,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과연 바울의 말을 동의할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이뿐 아닙니다. 바울이 자신의 행동을 무책임하게 해 놓고 하는 말이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바울의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아마 많은 말이 있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에 낙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말에 절망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자신의 행동을 통해 복음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참 성도와 그렇지 않은 자가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괴변이 어디에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14절 이하에서 말하는 것은 바울 사역전반을 다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뿐만이 아니지요.
바울이 어떤 일을 결정하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1장15,16절을 보게 되면 바울의 원래 계획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그 계획을 알고 기다리든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울은 너무 자기 마음대로야, 저런 바울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결코 자신이 사사로이 그 일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일을 결정함에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는 차원에서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까지 들으면 듣는 사람이 화가 나겠습니까 나지 않겠습니까?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일들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향기입니까?
여러분, 바울이 말하고 행동하고, 무엇을 결정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의 행동과 결정, 말들을 생각할까요. 아니면 다른 입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입장에서 바울을 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그 사람이 사망에 속하였는가 아니면 생명에 속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복음을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사에 맞춘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런 것에 기준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17절을 보게 되면 바울은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순전함으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무엇을 결정하고 행동하고 말함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합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보는 자들도 똑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순전하게 바라보게 된다면,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를 중심으로 바울을 바라보게 된다면 오히려 바울이 참으로 순전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인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이런 행동을 통해 또한 복음은 위력을 발휘합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말로만 복음을 잘 전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것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에 있어서, 사람이 반응하는 것을 통해 그 사람이 과연 생명의 냄새를 맡고 사는지, 아니면 사람의 냄새를 맡고 사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자고 설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꾸로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제대로 맡고 사는 자인지, 아니면 사망에 이르는 그러한 냄새를 맡고 사는 자인지를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해석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상식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을 받은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상식적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정신입니다.
성도는 이런 주님의 영을 받은 자입니다.
성도의 마음속에, 생각 속에 이 십자가 정신이 가득 차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 단순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기준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확신과 믿음
고린도후서3:1-18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못할 경우에 우리들은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자신을 믿어달라고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그래도 믿지 않을 경우 우리는 너무나 답답해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우리와는 사뭇 다른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성도들은 지금 바울의 사도직을 믿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과연 그가 예수님의 사도일까?
우리 같아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자를 잡아 가두는 일을 했는데, 이런 일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없이 다 믿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는 말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듣게 되면 우리는 그 말을 대부분 믿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를 들으며 그냥 그렇구나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특히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이제 그 과거의 일을 버리고 좋은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쉽게 그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특히 바울의 경우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함께 했던 사람들조차도 그냥 빛만 보았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은 듣지 못했다고 하니 어떻게 바울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바울에 대한 소개장, 즉 예수님의 사도들의 소개장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바울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사실 이 한마디로 모든 의문을 잠재워버립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누구를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율법을 믿고 있습니다.
3장 후반부를 보게 되면 물론 여전히 율법에 매여 사는 자들이 있음을 우리들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여전히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물론 이들은 표면상으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로는 율법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이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이러한 믿음, 즉 예수님도 믿고 율법을 중시하는 자들이 고린도교회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고 말입니다.
편지란 무엇입니까?
편지 쓰는 사람의 뜻을 다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모습 속에서 이미 바울의 참 뜻, 즉 바울이 믿는 바, 증거하는 바가 다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런 확실한 증거를 갖고도 여전히 의심을 갖는 다는 사실입니다.
옆에서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니, 처음에서 그렇지 않겠지 생각하다가 자꾸 들어보니 그런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의 모습은 이런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곧장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편지를 썼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겐 너무나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성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앞서서 분명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변론을 시작하듯이 보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증거하고자 한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너희들이 성도가 되었다는 말은 비록 바울이 수고하여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믿어 성도가 되었지만 이것은 바울의 수고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영의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자신이 말하는 것이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또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을 보세요.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또 이렇게 비꼴 수 있습니다.
그래 너 혼자 스스로 그렇게 확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이미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알아주느냐? 이해해 주느냐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
5절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이 말을 통해 바울이 누구를 믿고 사는 지가 분명히 밝혀집니다.
확신이 있게 되면 사람들은 스스로 만족하게 됩니다.
만족한다는 것은 교만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만족이 자신들의 수고, 애씀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고 말합니다.
바울자신이 수고하여 복음을 전해서 믿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만족스럽겠습니까?
흐뭇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주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모습이 아닙니다.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려드리는 모습이야 말로 진정으로 주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의 모습니다.
가끔 우리는 소위 간증이라는 것을 듣게 됩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이러이러 했는데, 이제는 그러한 나쁜 버릇들을 버리고 제대로 살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말을 보게 되면 마치 바울의 간증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날 교인들이 간증을 바울의 간증과 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간증을 들으면서 감동 받으면서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간증과 오늘날의 간증은 성격상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는 것입니다.
확신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확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러나 오늘날 간증은 자기가 이렇게 훌륭한 인간이 되었다, 괜찮은 인간이 되었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간증을 듣다보면 사람들의 관심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간증을 하는 인간에게 모든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어디로 흐르는고 하면, 인간의 행위로 흐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자신의 과거 행실이 이러이러했는데, 지금의 행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즉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새언약의 일군되기에 만족케 하셨다고 말입니다.
새언약의 일군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행위를 내세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새언약의 일군은 오직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실상, 의문, 즉 율법, 즉 행위를 주장하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사람을 살리십니다.
영생을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세의 수건을 언급합니다.
모세가 수건을 얼굴에 쓴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장차 없어질 것임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율법이라는 것은 죄를 범함으로 더한 것일 뿐임을 알려 주기 위해서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 수건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율법을 준수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확신이라는 것을 근거로 자신의 믿음을 내세웁니다.
그런데 그 확신의 내용을 따져 들어가 보니 그 속에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율법임을 우리들은 오늘 설교를 통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께로 돌아 온 자는 다 수건을 벗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는다고 해 놓고 여전히 수건을 덮어쓰고 그 수건을 덮어 쓴 상태에서 남을 협박하고 기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는 자들이 오늘날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를 보게 되면 자유함의 설교가 아니라 율법에 꽁꽁 묶어 매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들이 율법을 지킨다고 해 보아야 얼마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
죄인들끼리 보기에는 그럴싸하고 꽤 괜찮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행위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가 못 박는 결과로 나온다는 사실을 오늘날 성도라고 하는 자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사복음서를 열심히 읽고 또 읽어 보고, 설교를 듣고 , 또 들어도 도통 무슨 소리인지, 마음속에 남는 것은 오직 하나, 그래 착하게 살자. 나쁜지 하지 말자, 예수님을 믿으면 행실을 잘해야지, 이런 율법의식 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죄인이며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아가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통해 안심하고, 확신도 가지도, 남을 기죽이고, 그것 가지고 회개하고, 또 보충하는 모습이야 말로 아직도 모세의 수건을 벗어버리지 못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말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았다고 말입니다.
이제 18절을 봅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절에서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지금 의의 직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영광이 바울과 비교할 때 어떻습니까?
현실적으로는 영광스럽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영광은 그렇게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타난 독생자의 영광이란 십자가 지신 하나님의 아들, 순종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광된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주님과 영원히 거할 때 누리는 영광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영광의 직분이란 십자가의 길로 나타납니다.
18절에서 우리도 주님의 형상으로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과 동일하게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영을 받았기에 주님의 길을 동일하게 걷게 된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