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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민이 다 상당산성으로 모였나
청원군 내수읍과 미원면에 걸쳐 있는 구녀산에서는 간밤에 늙은
이의 안식처였던 초정약수터가 지호지간이다.
정맥 종주중에 세계 3대 광천수중 하나로 목욕재계했다는 것은
특별한 축복이 아닌가.
곧 내려선 이티재는 미원면과 내수읍 사이 511번 지방도로 상에
있는 고개마루다.
이 지역에서는 치(峙)를 티로 발음하며 따라서 이치가 이티로
바뀌면서 이티재로 굳어진 듯.
어데서나 초정약수터를 경유하는데 이 재를 염두에 두고 구간을
사려깊게 조정했더라면 비싼 택시를 타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다.
정맥은 어제와 달리 서남으로 유유히 뻗어간다.
역시 어제와 달리 넓고 멀리까지 확보된 시야에 높고도 파아란
전형적인 만추의 날씨가 신명나게 했다.
좌우 저 아래에 늘어선 마을들과 거미줄처럼 뻗은 길들이 정맥의
맛과 멋을 앗아가지만 꽉 막힌 것에 비할 소냐.
487m 삼각점봉에서 남서로 치닫는데 임도다.
내수읍 비상리와 미원면 대신리를 가까운 이웃으로 만든 것.
왼쪽의 인경산(582m)은 시간만 있으면 다녀 오고 싶은 산이다.
정맥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중 하나일 안둔병이도 인상적이다.
지도에는 '안등뱅이'로 되어 있으나 남쪽의 '개문, 둔병이'의
북 안의 마을이라 해서 '안둔병이'란다.
'둔병이'는 삼국이 정립 상태일 때 병사들이 주둔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드디어 사적 212호인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에 올랐다.
상당구 산성동 상당산 일대에 위치하며 최초의 축성시기를 삼국
시대로 추정한다.
당시의 토성을 조선조 숙종때 석성으로 개축했다는 전형적인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아직도 복원공사가 진행중이고 잔자재의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청명한 늦가을의 주말 오후다운 현상인가.
청주 시민이 모두 다 산성으로 모인 듯 북적거렸다.
491m 상당산 정상을 제외하고는 기나 긴 성곽 길과 살짝 비킨
등산로, 휴식공간 어디고 가릴 것 없이 만원사례였으니까.
따라서 소음도 장마당을 방불케 했다.
상당산성 (자료에서 전재)
해결사 김기대와 학천랜드가 있으나
아베크족에게는 늙은 이의 대형 배낭이 기이하게 보였을까.
보고 또 보다가 참지 못하겠는지 말을 걸기도 했다.
이러기를 몇차례 겪은 끝에 512번 지방도가 통과하는 산성고개
마루에 내려섰다.
어제의 보천고개 ~ 질마재도 늙은 이에게는 과중한 거리인데
연 이틀 이리 강행하는 것이 무리 아닐까.
음성의 지리한 헤맴에서 탈출함으로서 비상하는 느낌인데다
천고 만추의 날씨까지 일조한 덕이리라.
청주행 hitch-hike지점을 살피며 도로 따라 동쪽의 멋장이 대형
카페 앞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에서 서성거리며 분위기를 살폈지만 냉기류를 감지하고
자리를 옮겨 가며 갈등하는 참이었다.
방금 지나가는 초정리행 버스를 보았기 때문이다.
간 밤의 약수탕에 대한 미련이 고개를 든 것이다.
이러는 때에 한 승용차가 멎으며 행선지를 내게 물었다.
찜질방에 가려 한다는 나를 청주 시내 찜질방 학천랜드에 가기
편한 장소에 내려 주고 간 해결사는
제일은행 청주지점 차장 金基大다.
청주 토박이로 IMF 위기 때 불어닥친 명퇴에 대비해 사슴목장을
시작했는데 모든 일이 순조로워 지금은 직장(은행)보다 목장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단다.
주말을 이용해 목장에 다녀오는 길에 내게 적선한 것이다.
덕분에 어렵잖게 찾은 학천랜드는 청주의 최고 최고(最古最高)
찜질방이란다.
주인은 수완이 워낙 탁월해 충북지역의 목욕업계를 평정한 욕탕
재벌이라고.
수질은 초정을 당할 수 없겠으나 시설만은 과연 명품이다.
상당산성으로 모여든 청주시민이 밤에는 학천랜드로 몰렸나.
여기도 초만원이었다.
그런데 학천랜드는 누적된 피로를 밤새 말끔히 씻어준 또 하나의
해결사였지만 초행인 늙은 이로 하여금 새벽 고생을 하게도 했다.
이구동성으로 가르쳐 준 오답(誤答:버스노선과 시간)으로 인해
쌀쌀한 새벽 길을 마냥 방황하게 했으니까.
결국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마저 상당고개를 모른다니.
청주인들은 하나같이 도치(道痴)들인가.
요즘이라면 모두 나비(navigation)만 따라가면 되겠지만 그 땐
그것도 실용화 되지 않았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청원군 낭성면의 한남금북정맥
상당재로도 불리는 산성고개(343m)의 차량통행이 새벽인데도
적잖았고 산책하는 이들에 의해 산성의 아침이 열리고 있었다.
오늘은 일찍 마치고 귀가하려 하니까 역시 서둘러야 했다.
능선에 오르자 마자 꽤 부티나는 가족묘들의 영접(?)을 받았다.
묘역은 더 늘어날 태세다.
곧 당도한 상봉재는 비포장 임도로 다듬기 오래 전부터 지금은
남남이 된 청원 낭성면 현암리와 청주 상당구 명암동을 다정한
이웃으로 엮어 주었으리라.
한남금북정맥은 이제부터 종일 낭성면에 머문다.
청주 것대산 봉수터를 복원하려나 보다.
것대산 정상은 활공장(滑空. para-gliding)이다.
봉수대가 활공장에 밀린 건 아니지만 왜 정상에 서지 않았을까.
산 아래가 '거대'마을인 것으로 미루어 보면 산 또한 거대산이
아니었을까.
이 지역 특징이 혹 ㅅ(시옷)받침 붙이기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분저재를 분젓재로 하듯 거대산을 것대산으로....
그럼 한자 巨叱大山은?
콘크리트 포장도로인 것대고개에서 얼마 가지 않아서 정맥을
다 갉아먹은 공원묘지로 인해 겨우 남은 정수리를 더듬어서
나아가야 했다.
정맥에 대한 집착이 512번 도로를 두번 만나게 했다.
가능하면 도로를 피하려는 옹고집의 결과도 된다.
수레너미(車南里)에서 정맥으로 붙은 이후로는 요란한 차도를
만나지 않아 시시로 느끼는 단절감에서 벗어났다.
다닥다닥, 옹기종기 마을들도 뜨음해서 산속 기분이 들었다.
남하를 거듭하여 오른 547m 선도산(先到)은 청주시 상당구와
청원군 낭성면에 걸쳐 있다.
한남금북정맥에서는 높은 편에 들지만 조망이 별로다.
지산리 안건이에서 청주 상당구 월오동을 넘나들던 말구리재로
가려면 선두산 아래 정맥의 안부를 넘어야 한다.
조금 더 진행하면 성황당이고개가 있다.
안건이와 한계리 한시울을 이어주는 십자로 안부다.
다시 남동진 끝에 오른 526m 선두산(先頭)도 선도산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라면 청주시를 벗어났다는 것이라 할까.
남동진을 계속하다 지산리 미루봉으로 내려가는 임도를 만난 후
목장 경계용 철선에 잠시 시달려야 했다.
상전하울(上全夏)과 정맥 안부에 자리잡은 상촌교회, 산정말을
지나 안인동으로 해서 32번 도로로 잇는 임도도 지났다.
동으로 방향을 튼 후 제멋대로인 벌목과 산판길에 애를 먹었으나
차량들의 소음이 오른 쪽 32번 도로가 지근임을 느끼게 했다.
그 버스 기사 왜 그랬을까
동북상하며 도로와 나란히 가던 정맥이 동남으로 꺾이며 관정리
머구미 마을 앞 도로에서 끊긴다.
음성에서 시작한 3일간의 나그네길도 여기에서 마감되었다.
이른 시각이어서 인지 청주행 시내버스 기다리는 마음이 편했다.
그 보다는 잘 알면서도 개선되지 않는 부실한 섭취로 몸은 파김치
되었으나 3일에 걸친 강행군이 여의했다는 성취감 덕이리라.
그러나 이런 상승된 기분이 오래가지 못했다.
기다리고 기다려서 탄 버스의 기사는 피로가 누적될 시간이 아직
아닌데 왜 그렇게 모나고 퉁명스러웠을까.
가정 불화 아니면 다른 언짢은 일이라도?
내 말이 외국어도 아니고 어눌한 편도 아닌데 왜 못알아들었을까.
늙긴 했으나 추한 몰골은 아니라고들 말하는데 그는 왜 그랬을까.
혹 내 말투가 무례하다고 판단되기라도 한 것일까.
아침의 택시 기사는 길은 몰라도 친절은 했는데.
서울행 버스 터미널 가르쳐 주는 게 그리도 싫거나 억울했던가.
볼멘 소리로 환승하라며 내려준 데는 터미널 가는 버스와는 전혀
무관한 곳이었다.
그러고서도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결국 택시를 타면서 내뱉은 말은 "젊은 사람, 부모도 없나"였다.
그래도 중간 들-날머리였던 음성과의 연(緣)을 끊고 좀 멀어지긴
했지만 마무리 출입 관문으로 청주를 택하게 된 것은 이 정맥의
끝이 그 민큼 가까워졌다는 뜻도 되므로 곧 기분이 전환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