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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가 좀 적적한 것 같아 대단하진 않지만 제가 쓴글 올립니다. 죄송한 부탁인줄 알지만... 읽으시기만 하시고 다른 곳에 옮기시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럴일도 없으시겠지만 그냥 노파심에서 부탁드려요...글중의 인물들이 다 실지인물들이라서요...본의아니게 그분들에게 폐가 될까봐요. 조그마한 배려를 해 주시는것 미리 감사드립니다. 제 외할머니는 이글을 제가 쓰고 난후 얼마 있지않아 요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어제 늦은 저녁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더니 오늘도 하루종일 그치지 않습니다. 이곳은 비가 잘 오지 않는
지방인데다가 온다해도 보통은 무서운 폭우로 몇 분 동안 와서 물난리가 날 것 같이 하고는 몇 시간 후면 다시 해가 나는데 오늘
내리는 비는 추적추적 하루종일 좀 서글프게 내려서 제 기분까지 처지는 것 같습니다. 커튼을 걷고 침대에 누워 창 밖으로 보이는
회색하늘과 뿌옇게 보이는 야자수인지 가로등인지를 보고 있노라니 어릴 적 가곤 했던 외갓집 아랫목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는 물론이거니와 방학 때는 꼭꼭 갔었고 그사이 사이도 자주 갔었기 때문에 마땅한 고향이 없는 제게는 외갓집동네가
유일하게 떠오르는 고향입니다.
외갓집 생각날 때마다 몇 자 끄적거려 놓은 게 있는데 거기다 몇 달 전 외할머니를 20 여년만에 뵈면서 든
오만가지 생각을 덧붙여 오늘 몇 자 더 끄적거려 볼까합니다. 옛날의 그 당당했던 할머니와 지난 1월 막내삼촌댁에서 혼자 구부리고
앉으셔서 컵라면 드시고 계시던 백살의 할머니를 생각하면 참 인생이 뭔가 하는 생각뿐입니다. 기분도 그렇고 그러니 제 얘기가 어디로
튈지(?) 모르겠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겨울방학을 하는 날이면 꼭 눈이 왔더랬습니다. 저는 방학책은 그날로 거의 끝내고, 시간이
걸려야 할 수 있는 숙제들만 (일기라든지 뭐 "공작"숙제 같은 거) 챙겨 가지고 외갓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겨울이 되어 한산한 논과
밭 위로 얼음이 잘 얼었었고 그 위로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조그마한 동네, 그리고 논에 나가 가만히 앉아 쌓인 눈을 헤집고 보면
벼를 베어내고 남아있는 밑동들이 얼음 밑에서 여기저기 꽃처럼 선명하게 피어있는 것이 보이곤 했던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시골에 계셨지만 자식들 보러 도회지로 여기저기 왔다갔다하셨던 것 같습니다. 두 분은
동네에서 꽤 "유지"였던 것 같았는데 동네사람들이 아예 할먼네 와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남자들은 곰방대 물고 사랑방에 모였고
여자들은 할머니 방에서 이야기꽃을 피우셨습니다. 특히 할머니가 그중 제일 "유식"하셔서 할머니이야기를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셨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 때 할머니는 연극배우보다도 흉내를 더 잘 내셨는데 얼굴을 안보고 바깥에서만 들으면 한사람이
얘기하는 게 아니라 몇 사람이 대화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얘기를 실감나게 하셨습니다.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외갓집 친척이던지 아니면 사돈의 팔촌이라서 모두가 "아지매", "아제", 혹은
"할매"나 "할배"였습니다. 외가에 갈려면 영주에서 내려서 한참시골로 들어갔는데 외나무다리가 있는 강을 건너야했습니다.
그런데 그
외나무다리를 지나갈 때마다 꼭 까만 잠자리들이 물가를 나르고 있었더랬습니다. 보통 우리가 도시에서 보는 잠자리가 아닙니다.
온몸이 완전히 새까만 비로드(벨벳)처럼 부드럽고, 우아하고, 그리고 날씬한 잠자리입니다. 눈동자들만 이쁜 연두색 비슷한 색깔인데 한번은
제가 그 잠자리들 구경하느라 꾸물거리고 있었더니 같이 가던 상구네 엄마가 머리 위에 5일장 본 것을 인 채로 물에 들어가서
잠자리를 잡으려했으나 결국은 못 잡고 할머니한테서 혼만 나고 그냥 갔습니다.
상구네 식구는 평생을 할머니네 아래채에서 살며 일을 도와주는 분들이셨는데 그 동네의 애나 어른이나 상구부모님께
경어를 쓰지 않고 그냥 "하게"를 하였습니다. 나중에 상구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구가 컷을 때 할아버지가 외삼촌들 통해서 상구를
서울 무슨 공장에 취직을 시켜주시고 살림을 나게 해서 상구엄마도 서울에서 아들과 살게되었는데 그후 얼마 안되어 상구엄마는
자궁암말기라는 판정이 내려졌고 병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아들집에서 잘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배운 것이 크게 없다보니
서울생활하고 어머님 병구완하느라 상구가 많이 힘이 들었기는 했지만 그래도 요즘 기준으로 보면 효자였고 그걸 보면 상구엄마는 복이
아주 없으신 분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외가는 그 동네에서 무척 큰집이었는데 마당에는 살구나무, 고얌나무, 탱자나무, 감나무, 추자나무(호두나무),
배나무, 등등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꽃은 또 얼마나 많이 피는지 여름방학 때 갈 때는 키 큰 홍초꽃이 울타리보다 더 높이
피어있어서 동네에 들어서고 나면 멀리서도 집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접시꽃이며 다알리아, 개나리, 나팔꽃, 봉숭아,
채송화, 게다가 유자꽃과 꽈리, 그리고 뒤뜰에는 구기자덩굴 까지 있었습니다.
할머니한테서 혼이 나거나 동네 아지매들이 와서 수군수군하고 나를 보면 혀를 끌끌차고 했을 때면 뒷마루에 나와서
빨간 구기자를 세곤 했습니다. 그것도 싫증나면 대구에 유학 갔다 방학이라서 온 막내삼촌이 빌려온 만화 "라이파이"를 보거나
아니면 김 종래가 지은 만화를 봤습니다. 많이 삐지면 상구네 방에 가서 혼자 벽쪽을 보고 누워있기도 했습니다. 그 벽쪽은 무슨
커튼 같은 걸로 덮여져 있었는데 하얀 무명에다 소나무니 두루미니 하는 모양들로 복잡한 수를 잔뜩 놓은 후 풀을 무지하게 먹여서
걸어놓은 것인데 아마 옷에 먼지가 앉는 것을 방지하느라 그렇게 한 것 같았습니다. 경상도 말로는 "해탯보"라고 했는데 뭔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벽쪽으로 누웠다가 그것도 싫증이 나면 천장을
쳐다보았습니다. 한참 쳐다보다 보면 꼭 사팔뜨기가 된 것 같고 천장의 복잡한 벽지무늬가 바로 내 코앞에 와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보통은 거기서 그러다가 잠이 들어버리고 상구엄마가 두들기는 다듬이소리가 뚜다닥뚜다닥하고 날 때야 부시시 일어나곤
했습니다.
마당에 나와 들마루(평상이라고 하지요)에 앉아서 멀리 내다보면 산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계절마다 색깔이 다른 게 참 보기가
좋았습니다. 한번은 봄에 갔을 때 진달래꽃이 만발을 했는데 앞산전체가 완전히 진달래로 덮여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보는 그런
화려한 색깔이 아니라 한국의 전형적인 진달래색깔인 조금 슬픈 듯한 보랏빛을 뛴 분홍색으로 말입니다. 꼭 불이 난 것처럼 보였는데
그 불이, 금방 뜨겁게 타오르는 정열적이고
무서운 불길이 아니라 조용하고 애잔한 불길이었습니다. 뜨거운 빨간 불이 온몸을 태운다 치면 이 진달래불길은 치솟아 오르는 불꽃도
안보이면서 사람의 마음을 천천히 바스러지게 하는 불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는 더욱 사람의 마음을 호벼
팠습니다. 꼭, 자기가 불은 안 보이는데 불에 타서 죽노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조금 더 커서는 외갓집이 제 고향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하다보니 고향이니
타향이니 하는 노래가 나오면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 했지만 촌스럽게도 괜히 신세가 서글퍼지는 것 같습니다.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를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날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리워서인지 서러워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아이들 동요인데도 그
내용이 꼭 외갓집시절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첫댓글 Gitana님 돟은 글 감사합니다.
뚜렷한 고향이 없으셔도 그렇게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시니 참 좋으시네요.
글을 읽다보니 저의 이모와 사촌동생이 생각나네요.
그 사촌 동생의 이름은 윤진이인데 벌써 30대 초반이네요.
이모님이 젊으셨을 때부터 몸이 좋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벌써 10년전부터 무릎수술을 받으시고는 자리에 계속 누워계시는 나날들이 계속 되었지요.
해병대에서 전역한 사촌동생은 전문대를 졸업한 후 근처의 대학에 편입을 하였었는데
자신의 어머니가 누워계시니 결국 학교를 포기하고 어머니를 돌보더군요.
저도 답답했지만 별 방법이 없더군요.
근데 이 녀석이 저로 하여름 눈물나게 합니다.
벌써 거의 10년입니다.
대소변 다 받아내 드리고 식사 다 준비해 드리고 집안일 다 합니다.
윤진이는 외모도 잘 생겼고 아주 듬직한 청년입니다.
근데 이 녀석이 그런 고생을 하면서도 엄마를 요양원에 모시자는 말을 하지 않아요.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
몇달 전에 저의 아버지께서 작심하시고 이모부님께 말씀하셨다고 하더군요.
효도도 좋고 다 좋지만
우리 세대가 과연 아이들 세대의 미래를 막아서야 되겟냐고요.
그런데 이모부님이 하시는 말씀이 .
보내고 싶지만 윤진이가 엄마를 그런 시설에 절대로 안 모신다고 우긴다고 하는 겁니다.
이모님은 누어서 10년이 넘게 생활하셔서 몸이 무척 무겁습니다.
병든 부모 병수발 3년에 효자아들 없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 무지막지한 놈은 주변사람들을 울립니다.
왠만하면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만 요양원으로 보낼텐데 ...
제가 형이지만 그 사촌 동생에게 많은 것을 배웁니다.
아니 우리 아버지조차도 윤진이에게 배운다고 하시더군요.
윤진이는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거나 소심하거나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해병대를 제대한 건강하고 밝고 의욕적인 청년입니다.
장가도 가야하고 넓은 세상도 맞보아야 할텐데 그런 마음에 저는 조급하게 그 동생을 바랍봅니다.
잘은 모르지만 제 생각에는 Gitana님의 친척분들처럼 사회적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셔서 성공하시는 것 참 좋고 가치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 사촌동생처럼 자신의 젊은 인생을 아까와하지 않고 자기를 낳아주신 엄마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것도 그 만큼이나 가치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생각에는 윤진이는 마음이 부자인가 봅니다.
그 병든 어머니를 위해서 그렇게 많이 나누어 줄 만큼 사랑의 샘이 마르지 않는 부자인것 같습니다.
이번 겨울에는 동생에게 줄 무엇인가 근사한 선물을 준비하고 싶네요
사랑은 베풀고 난뒤 그 댓가를 바라지 않는것이라고 하지만
참, 쓸쓸하네요.
마치 동화 주인공이 어려운 일을 다 겪은후 해피엔딩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새드엔딩으로 끝나는것 같은 느낌.
그런데 저도 그랬어요. 엄마가 희생에 대한 댓가를 너무 요구하시니까
그게 너무 싫었거든요.
그래서 전 제 딸에게 절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류의 이야긴
일절 안해요.
그냥 잘사는 것으로 효도받는다 생각합니다.
네, 정답이 없는 것 같아요...인생이 너무 모순이라서요...하지만 그 당사자들은 (남이 뭐라고 하든) 그 판단이 자기에게 가장 적당한 결정이라고 생각을 했으니까 그런게 아닐까 해요 (그 당사자들이 제대로 된 결정을 할 능력이 없는 상태이든 아니든...). 전 제 외갓집을 보면서 느낀게 정말 많아요...반면 제 남편의 집쪽은 또 다른 쪽으로 너무 극단적이세요. 사람들이 과거를 (?)너무 쉽게 잊고 뭐라도 맺은 마음이 없어요...(제 성격은 평생가는 편이라서...좋은 건 아니지만 잘 못고쳐요..그렇다고 당사자에게 표현을 하거나 불편하게는 하지 않아요) 시집쪽 집안 어른들중 솔직히 젊어서 최선을 다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늙어서 어른입네 하고 모양값을 하시는데 그걸 자손들이 또 아무런 비판의식없이 다 받아들인다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그것역시 좋아요 자기들의 부모이고 삼촌이고...하지만 그 배우자들에게까지 그런 마음을 기대하는 건 참 너무 아니지요. 법적으로 맺어진 관계에서 자기들과 똑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정불화의 가장 큰 원인이지요. 물론 어른들이 자기들의 몫(?)을 제대로 하시고 자식들로 부터 저절로 존경을 받고 보고 싶어 지게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지요. 학력이나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지요. 물론 금전이 첨가되면 더 금상첨화지만...그런데 자기들이 해야할것은 안하고
대접만 받겠다고 방석꺼내서 폼잡고 앉아있는 것은 제 정서로는 어른 아니라 어른 할아비라도 수긍이 안갑니다. 늙었다는 것은..아니 연세가 드셨다는 것은 노력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세월이 가서 된것이지요. 말하자면 given 이지 earned 된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를 잘 생각해야 하는것이 아닐까요? 최소한 그것까지도 안바라요. 자식이 어려서 부모의 절대적인 보호나 뒷바침이 필요할때는 딴전을 부리다가 나중에 자식이 힘써 스스로 마련한 열매를 가만히 앉아서 단순히 스펌을 주었다는 이유로 유세를 부리는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 자식들은 그저 부모가 가난해도 최선을 다하는 것을 원하지요
누가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습니까? 그렇다면 누군가의 결정으로 (아니면 결정의 부재라고 해야할까요?) 이세상에 버려지는 아이들은 어떡합니까? 그러기에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고맙지않다는 말이 아니라 부모라는 단어의 정의자체가 그런거 아닌가요? 그리고 더 이상적인 것은 부모가 그렇게 할때 자식역시 당연히 고마워하고 그 은혜를 갚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구요. 그런데 전 항상 그 사항이 이루어지려면 부모에서의 최선이 자식의 효도(?)에 앞서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걸 하지 못했다면 단순히 그냥 부모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자식에게 바라는건
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부모들 스스로가 그걸 알아야 한다는 거지요. 그러기에 자식이 도움이 필요할때 잘 해야하는것이구요. 속된 표현을 하자면 곗돈을 넣지도 않고 계를 타겠다는게 말이 됩니까? 물론 저의 시집은 그런 정도는 아닙니다. 시부모님은 다 돌아가셨구요. 그런데 한국의 대부분의 남자들의 인식이 그렇더라는 것이지요. 그럼 자기만 그렇게 생각하고 잘하든지 아니면 마누라들을 감동이라도 시켜서 자기 부모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더 정상아닙니까? 그런데 자기들은 출근해 버리고 결국은 집에서 혈연관계도 아닌 마눌들에게 그 직접적인 고난을 떠 맡기는건 동방예의지국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본인이 직접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것이고 자기딸이나 여동생이 그렇기를 바라는 사람은 더욱 없을것입니다. 전 한국을 가면 시집쪽 사촌 동서들이나 다른 친척아지매들을 많이 만나는데 그런 사람들이 좀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맺힌게 너무 많은데 친척들사이에 괜히 안좋은 소리 들을까봐 그냥 참고 삽니다. 부모님이나 시부모님이 지극정성으로 자식들을 위하고 자식들 역시 부모들 생각하면 가슴아프고 저절로 더 잘 해드리고 싶게 하는 상황이 가장 이상적이겠지요. 얼마나 좋을까요? 그것이 바로 인간이 동물과 틀린점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동물들도 자기 새끼들을 보호하는 것에는 대단하지요..
그런데 늙어가면서 부끄러운줄 모르고 개나 돼지도 할수 있는 그 ....이크 전화가 와서 이만 퇴장~~나중에...말이 많았어요
님의 글에 푸욱 빠져서...아마도 님이 느끼시는 그리움 , 정겨움 , 안스러움 ,서운함, 안타까움 ...씁쓸함..?이 ... 제 마음에 그대로 전해져 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어릴때는 너무나 단순했던 목적, 선택,관계,물음에 대한 대답들..이제는 너무나 복잡하고 정답도 없고 답을 선뜻 말하기에는 몇번이고 다듬어야하고 생각해야하고 .. 그러면서 어른이 되어가나봅니다.
그래도 살만한것은 사람에게있는 보이지 않는 줄인 인간의 정이있고 사랑이 있고 ....누구나 자기 입장이라는것이 있지만 이해라는것이 있고, 양보라는것이 있고 , 미움이 있지만 사랑이 같이 존재하고, 선이 있고 악이 있고,.. 어린시절이 있고 노후가 있고 삶이 있고 죽음이 있고, 누구나가 거쳐가고 경험하고 ...고민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두가지의 길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낮은 음자리 같으신 분이 있기에 힘든 중생들 그래도 이세상 잠깐 머무는 동안 위로를 받고 살수 있지 않나 싶군요. 지극히 인간다우신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저는 그런 걸 제대로 못배워서요...다 때가 있는것일텐데... 이젠 이성적으로 자신을 설득을 시켜야 하지만 좀 어렵습니다. 아직도 가슴에 맺힌 서운함과 (특정대상도 없으면서) 온 세상이 나를 코너로 몰고 간듯한 느낌이 너무 강렬했기에 지금은 No 든 Yes든 제 맘대로 할수 있는 처지인데도...그리고 그때 저를 그렇게 힘들게 했던 사람들은 다들 80이 넘었고 이젠 제게 오히려 "약자"지만 인간의 정과 사랑에 대한 것이 나오면 회의적이고 사무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는군요.
무슨 말씀을요...Gitana님은 오히려 솔직 하신분 같아요. 저는 아직 님처럼 많은 경험도 없고 연륜도 없어 지식닷컴이신 님의 글을 보고 늘 배우는걸요. 요즘 여름철이니-- 제가 웃는 이야기로 사람속이랑 수박속은 정말 모르겠다고 하면서 늘 수박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그 속은 반을 나누어 긴장된 마음으로? 열어봐야 확인이 되더군요. 우리는 그 수박이 어디에서 자라고 언제 거두어졌고 비를 맞아서 당분이 떨어지는 수박인지 아닌지 알수 없습니다.단지 색깔과 크기,소리,꼭지의 신선도로 선택하여 기대하는것 뿐이지요.같은곳에서 수확한 것이라도 대형마트에 있으면 더 좋아보이고 작은가게에 소박하게 진열되어 있으면 소박해보이는 ...
사람들관계도 마찬가지 아닌가싶어요....
그 옛날 시장에 수박 사러 가면 아저씨들이 수박을 작게 세모로 파서 속을 볼수 있도록 배려하시던 기억이..
아마도 님의 글을 읽을때면 조각내어 속을 볼수있도록 배려해주시던 그 마음이 담겨져있는듯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솔직하시고 인간미 넘치시는 님의 글을 좋아할런지도 모르지요 ....ㅎㅎㅎ
장문에 글 잘읽었읍니다 수고 하셨읍니다
추억에 잠기게하는 정다운 이야기네요. 외할머니 어머니 다살아 계시니 부러울 뿐입니다.
상세한 기억속의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의 이야기에 가슴이 찡해옵니다. California에 사신다니 반가워요. 나는 Orange County La Habra 란 도시에 살고 있담니다, 이런 추억얘기는 항상 엄마의 추억에 눈물이 나고 다시 돌아갈수 없는 그옛날이 너무도 그리워 상념에 잠기개 하는 글입니다. 아름다운 얘기 다시 감사드려요. 그리고 이런 가슴에 담고 있는 얘기를 나누는 용기와 수고에 찬사를 보냅니다. 어 -- 보니까 이글 상당히 오래전 꺼니까 안보실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