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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5.24 13:47
입력 : 2013.05.24 13:47
여기는 수술실. 그런데 의사는 환자가 누워 있는 수술대와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의사는 비디오 게임기 같은 로봇 조종대에 앉아 환자 몸에 손가락 하나 안 대고 수술을 한다. 온몸을 감싸는 멸균 수술복도 입지 않았고, 수술 장갑도 끼지 않았다. 맨손 놀림으로 로봇 조종기를 조작하면 환자 몸 안의 로봇 손이 의사의 의도대로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로봇 손이 환자의 골반을 들추고, 암 덩어리를 제거해 나간다. 마치 비디오 모니터를 보면서 조이스틱으로 게임을 하는 듯하다. 의사는 수술의 긴장을 풀기 위해 그 자리에서 가끔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공상과학소설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다. 현재 대학 병원에서 볼 수 있는 로봇 수술 풍경이다. 환자 몸 안으로 들어간 카메라가 비추는 수술 부위는 실제보다 10배 확대된 고화질 3차원 영상이다. 위아래, 좌우 5㎝ 정도밖에 안 되는 수술 공간이 모니터를 가득 채우며 훤히 보인다. 수술이 비디오 게임으로 바뀌는 일대 혁신이 일어난 것이다.
1995년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외과 의사, 기계공학 박사, 벤처 캐피털리스트 등 전문 분야가 각기 전혀 다른 3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의 만남은 외과 의사의 손이 환자의 몸 안을 휘젓는 대신 정교한 로봇 손이 대신 들어가 의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수술하는 기계를 개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로봇 손이 외과 의사 생각대로 움직인다는 의미로 '인튜이티브 서지컬(Intuitive Surgical)'로 붙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들의 융합이 의술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스스로도 짐작하지 못했다. 미국발(發) 수술 쿠데타의 시작이었다.
그러고 나서 5년 만에 로봇 손이 수술하는 세상이 열렸다. 메스와 바늘을 쥔 의사들의 손이 배 안으로 들어가 째고 꿰매는 전통적 수술이 로봇 수술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로봇 손의 정교함에 열광했다. 현재 미국에서 전립선암 수술 5건 중 4건이 로봇 수술로 이뤄진다. 산부인과 의사가 배 안을 휘저어 놔야만 했던 난소암, 자궁암 수술의 약 70%를 이제 로봇 팔과 손이 대신한다. 미국에서 자궁근종 제거 방법 1순위가 로봇 수술이다. 마지막까지 인간 손의 영역으로 남을 것 같던 수술마저 로봇에 넘기는 것이다.
현재 한 대에 약 30억원 하는 로봇 수술 장치가 전 세계 54개국에 2710여대 설치됐다. 베네수엘라, 불가리아, 파키스탄에도 있다. 우리나라는 36대가 가동 중이다. 새로운 의료 기술 도입에 까다롭고 보수적인 것으로 정평 난 일본 외과 의사들이 최근 2년 만에 로봇 장비를 100대 들여놨다.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로봇 수술 약 45만건이 이뤄졌다. 4년 만에 4배 늘어난 수치다. 매년 로봇 수술 건수는 20~25%씩 증가하고 있다.
500년 전 다빈치가 창업 모델
2000년 인튜이티브 서지컬이 미국 나스닥(NASDAQ)에 상장될 때 1주에 18달러이던 주가는 5월 21일 현재 485달러이다. 30배 가까이 올랐다. 직원 수가 2300여명인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21억8000만달러(약 2조4000억원)이다. 순이익은 6억6000만달러로 매출의 30%를 넘는다. 기술 특허 1200여개를 소유한, 경쟁자 없는 독점 비즈니스 덕이다. 이질적 전문 분야의 화학적 융합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 것이다. 미국의 경제 주간지 포브스는 지난해 이 회사를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 6위로 꼽았다.
인튜이티브 서지컬의 사상적 멘토는 15세기 이탈리아 인물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모나리자의 미소를 그리고, 헬리콥터의 원형을 상상하고, 정교한 해부학 책을 펴낸, 예술가이자 공학자이자 의학자인 다빈치의 '융합'이 이 회사의 창업 정신이다. 그래서 로봇 수술 시스템 이름도 다빈치(da Vinci)로 붙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코에서 남쪽 101 하이웨이를 자동차로 1시간 달리면 서니베일에 있는 인튜이티브 서지컬 본사가 나온다. 로비에 들어서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책이 펴진 채 진열돼 있었다.
CEO인 게리 굿하트(Gary S. Guthart) 박사와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하늘나라에 가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면 뭐라고 인사할 것이냐?"고 묻자 "당신을 통해 로봇 수술의 영감을 얻어서 감사하다고 말할 것"이라며 "로봇 수술 시스템 이름에 '다빈치'를 쓴 것에 대한 저작권료는 다빈치 해부학 책을 많이 사는 것으로 대신했다(웃음)"고 말했다. 그는 "다빈치의 정신을 추종하는 융합적 인물들이 모여 로봇 수술과 관련된 10여 회사를 합병하거나 기술을 공유하면서 혁신적 수술 장비를 탄생시킨 것이 인튜이티브 서지컬"이라고 말했다.
군(軍)에서 태동한 기술
1980년대 말 미(美) 국무부는 전쟁터에 있는 군인 환자를 원격에서 수술할 수 있는 기술 개발 연구 프로젝트를 발주했다. 이를 수행한 곳이 스탠퍼드대의 기술개발연구소(SRI)였다. 여기서 제시한 원격 수술의 모형은 훗날 다빈치 로봇의 원형이 됐다. 환자 몸에 조그만 구멍을 몇 개 뚫고 난 후, 몸 밖에서 원격 조작하는 로봇 팔과 손이 수술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당시 기술 수준으로 원격 수술은 미완성에 그쳤다.
대신 연구진은 병원에서 쓸 수 있는 로봇 수술 상용화에 주목했다. 다빈치 로봇 수술의 태동이었다. 1990년 초반 스탠퍼드 연구진 대부분이 인튜이티브 서지컬로 합류하면서 현재의 다빈치 로봇을 만든 주축이 됐다. 굿하트 CEO도 스탠퍼드 시절부터 로봇 개발에 참여한 창업 멤버다. 그는 캘리포니아 공대 박사 출신이다.
그는 "다빈치 로봇은 아메바처럼 주변 기술을 잡아먹으면서 새로운 하이브리드 모델로 변신하며 완성됐다"며 "MIT대와 IBM, NASA(미항공우주국) 기술진과 손을 잡았다"고 말했다. MIT대는 전선 줄로 로봇 팔과 손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작동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IBM은 각종 기구 조작을 원격에서 통합 제어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기술이 있었다. NASA와 컴퓨터 모션사(社)는 사람 손목처럼 로봇 손이 꺾이는 기술이 있었다.
굿하트 CEO는 "여기에 환자 몸 안으로 들어간 비디오 카메라가 수술 부위를 10배 확대하고 3차원 HD 화면으로 띄우는 영상 기술을 얹으면서 로봇이 수술실로 입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때가 창업 2년째인 1997년경이었다.
"이질적 회사가 어떻게 잘 융합이 됐느냐?"고 묻자 그는 "개별 기술로는 비즈니스 모델이 없기 때문에 공존과 융합만이 살길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며 "기술 융합 프로젝트별로 가족 같은 유닛을 형성한 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원천 기술 개발의 판을 깔아주고, 여러 벤처가 융합되면서 새로운 하이브리드 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호기심 많은 의사들이 로봇 수술 효과 입증
다빈치 로봇이 맨 처음 노린 것은 심장판막 수술이었다. 가슴뼈 중앙을 위아래로 크게 절개하던 기존 심장 수술을 로봇이 대체하면 '대박'이라고 생각했다. 심장은 절개 수술 대체 효과가 가장 큰 부위이기 때문이다. 최고기술책임자(CTO)가 수술실을 200여 차례 들어가며 기구 개발에 노력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로봇 수술로는 1분에 70회 넘게 뛰는 심장 박동 속에서 병든 판막을 새 판막으로 갈아 끼우기 어려웠다.
4~5년간 기술 개발비를 거의 소진하던 시기, 로봇 수술은 흉곽이 아닌 골반에서 서광이 보였다. 독일의 한 비뇨기과 의사가 로봇 장비를 전립선암 수술에 써보면 좋겠다며 빌려갔는데 그것이 인튜이티브 서지컬의 운명을 바꿔놨다. 전립선암이 로봇으로 깔끔하게 제거된 것이다.
전립선은 골반 아래 깊숙이 있다. 의사 손 하나 들어가기 어려운 좁은 공간이다. 날렵한 로봇 팔이 들어가 수술하기 안성맞춤이다. 호기심 많은 비뇨기과 의사가 로봇의 가치를 찾아낸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한 미국 디트로이트대학 비뇨기과 의료진이 정식으로 로봇을 처음 수술실에 들여놨다. 디트로이트대는 배를 째는 방식 수술 100건과 로봇 수술 100건을 교대로 하면서 양쪽의 차이를 입증하는 임상 시험을 했다. 결과는 로봇의 압도적 승리였다.
이 과정을 굿하트 CEO는 이렇게 설명했다. "신기술이 나오면 처음에 이노베이터(innovator)가 나타나고 그다음에는 얼리(early)와 레이트(late) 어답터(adopter)가 등장합니다. 그러고 나서 신기술이 막 퍼져 나가 기존 기술을 잡아먹죠. 로봇 수술은 그 역할을 의사들이 한 것이죠. 이노베이터는 독일 의사, 얼리 어답터는 디트로이트대 의사인 셈이죠. 외과 의사들은 호기심과 공명심이 굉장히 강한 집단이고, 맨 처음 새로운 수술을 시도하는 것에 큰 가치를 두는 전문가입니다. 우리는 외과 의사들의 요구를 혁신 기술로 채워주며 전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 것이죠."
인간 손이 하던 수술, 로봇으로 계량화
2000년 마침내 다빈치 로봇이 미국 식품의약국(FDA) 사용 승인을 거쳐 시장에 나오자 비뇨기과 의사들은 열광했다. 배를 여는 수술보다 출혈이 적고, 입원 기간이 짧다. 게다가 확대 영상으로 수술하기에 발기(勃起) 신경과 요도 손상을 피할 수 있어 발기 부전이나 요실금 등 합병증 발생을 줄였기 때문이다. 정교한 다빈치 손은 전 세계 남성 환자의 골반 안으로 속속 뻗어나갔다.
2000년대 초반에는 또 다른 얼리 어답터가 등장했다. 이번에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자궁암 적출술, 자궁근종 제거술이 로봇 수술로 급속히 바뀌기 시작했다. 얼리 어답터에 한국 의사들이 빠질 수 없다. 2000년대 후반 고려대, 연세대 병원 의사들이 로봇을 대장암, 직장암, 위암, 갑상선암 수술에 쓰기 시작했다.
이 회사의 메디컬 디렉터인 캐서린 모어 박사는 "하루에 5~6통씩 의사들에게서 기구 개발 아이디어나 새로운 수술 대상에 관한 의견이 들어온다"며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그것이 수술 안전성에 문제는 없는지를 판단해 실용화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MIT에서 기계공학 학·석사를 받고 스탠퍼드대에서 외과 전문의 자격을 땄다. 이 역할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융합형 인물이다.
굿하트 CEO는 "스마트폰 활용도를 앱(app) 개발자나 유저(user)들이 늘려가듯이 다빈치 로봇은 플랫폼 역할을 하고 거기에 새로운 기술이 끊임없이 더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로봇 수술 남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지난해 미국 산부인과학회에서는 로봇 수술의 가치를 놓고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술의 융합은 결국 사람의 융합
지금까지 로봇 수술은 전 세계에서 인튜이티뷰 서지컬이 독점했다. 이제야 유럽과 아시아에서 새로운 로봇의 출전이 예상될 뿐이다. 굿하트 CEO는 "기술이 융합될 때마다 특허 1250개를 받아 독점 사용 권리를 갖게 된 선점 효과"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실제적 경쟁자는 다른 회사가 개발할 로봇이 아니라 기존 복강경 수술이나 배를 여는 수술, 방사선 치료기"라며 "어느 것이 환자에게 더 좋은지를 다투는 가치(value) 경쟁"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한국에서는 인튜이티뷰 서지컬처럼 기술 융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게 화두라고 전했다. 그러고는 한국의 창조경제 자문관이라면 어떤 조언을 할지를 물었다.
"아마추어들은 골프채의 품질 차이를 잘 모르지만, 프로 선수들은 금세 압니다. 전문가용 기술 개발은 최고의 명품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또한 새로운 기술은 생명체와 같아서 다빈치 로봇처럼 애초 기획한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연을 필연으로 바꿔갈 수 있는 역동성이 필요하죠. 이를 바탕으로 개발 단계부터 사용자들과 토론하고 의견을 공유하면 반드시 혁신적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기술 융합은 소규모 팀 단위로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 팀들이 다시 융합되어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거대한 하이브리드 기술이 만들어집니다."
그는 "인튜이티브 서지컬의 시작도 의사, 과학기술자, 금융 전문가의 만남에서 비롯됐듯이 새로운 융합은 기술의 융합이 아니라 결국 사람의 융합"이라며 "다양한 분야의 열정적 인재들이 특정 목적의 프로젝트별로 쉽게 뭉칠 수 있도록 유연한 인적 구조 환경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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