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뚝이
"이번엔 어떤 인형 사 올 거야?"
현수는 눈을 뜨자마자 엄마에게 물었어요.
"아, 깼니? 으음, 이번엔…."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곁을 지키고 있던 엄마가 반갑게 다가갔습니다.
"저번에 사 온 합체 로봇 같은 건 싫어."
"어찌 넌 눈 뜨자마자 인형 타령이니? 하여튼 아빠에게 이야기해 놓을게."
엄마는 조심스레 현수의 머리를 만지고 링거 줄이 달린 현수의 손목을 쓰다듬었어요.
"아직 열은 조금 있네? 그래, 지금 아픈 데는 없니?"
"음, 괜찮아. 뭐 조금씩 아픈 것은 늘 있는 일이니까."
며칠 전에 아파서 막 울고 투정 부렸던 일이 생각나서, 짐짓 어른스레 말하며 현수는 침대 곁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있는 인형을 둘러보았어요.
"모두 여덟 개지? 그럼 내가 여덟 번 입원한 건가?"
"아냐, 처음엔 아빠가 인형을 두 개씩도 사 주셨잖아? 음, 그러니깐 여섯 번째?"
이번에 병원에 올 땐 진짜 힘들었어요.
겉으론 태연히 현수와 말을 하고 있지만, 현수가 눈을 뜨기까지 엄마는 몇 날 며칠을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릅니다.
"지난번 퇴원할 때 의사 선생님과 약속한 것 기억하지?"
"음. 다시 입원하지 않기다 하며 선생님이 조심하라고 했어."
"봐. 집에 가만히 있었으면 괜찮았을 건데, 괜히 추운데 마트 따라 나오더니만……."
사실 현수가 밖에 오래 있었다고 갑자기 열이 나고 기절한 것만은 아니라고 의사 선생님에게 들었지만, 엄마는 현수를 살짝 책망하고는 복도 밖으로 나와 아빠에게 전화했어요.
"여보. 이제 현수가 깼어요.
지금은 그렇게 아프지는 않대.
열은 좀 있지만 아까 선생님이 들러서는 우선 급한 불을 껐다며 다시 항암치료를 할지는 한번 상의해 봐야겠대요."
"그래? 사흘간 그렇게 정신없이 끙끙거리더니 참 다행이다, 다행이야. 이번에는 꼭……."
".....오늘 인형 사 오는 것 잊지 말아요.
입원할 때마다 인형 사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현수가 깨자마자 인형부터 찾았어요."
"허 참, 이제 어떤 인형을 사줘야 하지?
남자애가 무슨 인형을 그리 좋아한담.
이젠 더 사줄 인형도 없는데….
테디베어랑 뽀로로도 사주었고 미미 인형, 강아지 인형에다가 헬로키티 베개도 다 있잖아.
할 수 없지. 오늘 인형 가게 들렀다 병원에 갈게."
힘없고 어지러웠지만, 방 안이 답답해서 링거액을 단 채 현수는 엄마와 함께 복도로 나왔습니다.
중환자실 쪽으로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갑자기 엄마가,
"아니, 종민이 엄마! 무슨 일이에요?"
하고 달려가는 것이었어요.
종민이 엄마가 중환자실 복도 벽에 기대어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종민이가, 종민이가 어제저녁에… 갑자기 눈을 뜨더니 밥을 달라는 거예요.
며칠간 혼수상태이던 아이가 말이에요.
이제는 회복되었는가 보다 하고 얼마나 반갑던지.....급히 밥을 지어서 먹였죠.
그런데 오늘 점심쯤에 그만……. 아마 먼길 가려고 그랬던 건지……."
어깨를 들썩이는 종민이 엄마를 엄마는 가만히 안아주고 있었습니다.
종민이라면 현수도 기억이 납니다.
제일 처음 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바로 옆 침대에 있었던 아이예요.
키티 인형 빵모자를 쓰고 있기에 현수가,
"얘, 그 모자 참 예쁘다. 내가 한번 써 봐 돼?"
하고 물었지만, 종민이는 오히려 모자를 꽉 움켜쥐고는,
"안 돼!"
라고 하는 거예요.
"에이 참. 한 번만 써보자는 건데 괜히 그러지 마."
하면서 슬쩍 종민이의 모자를 빼앗아 쓰려는데 현수는 깜짝 놀랐습니다.
종민이 머리카락이 아기 스님처럼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 미안하다. 그것도 모르고…."
동갑이었지만 자기보다 체구도 작고 말수 없던 아이였지요.
아빠는 쇼핑백을 들고 밤늦게 오셨어요.
살짝 잠들었지만, 현수는 아빠 목소리가 반가워 일어나려고 했는데 어디서 한잔하셨는지 마스크를 했지만, 술 냄새가 풍겨왔어요.
"아니, 이 이가 안 하던 술을 다 하고……. 술 먹고 들어오면 쫓겨나는 것 몰라요?"
"알아, 알아. 음, 현수는 자나?"
"금방 잠들었어요. 깨우지 말아요."
"....인형 사려고 가다가 친구를 만났어.
사업하다 망해서 연락이 잘 안 되던 친구였는데 이번엔 재기에 성공한 모양이야.
아주 멋진 옷차림으로 서 있더군.
그 친구가 우리 현수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모양이야.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길 가운데서 내 손을 꼭 잡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는 거야.
나는 좀 멋쩍었어.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창피하잖아."
아빠는 잠시 말을 멈추고 현수 손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그 친구가 나를 잡아끌더라.
주점에서 술 몇 잔 마시니까 나도 계속 눈물이 나대?
내 참 이렇게 울어보긴……. 어른 둘이서 거참, 눈물 흘리며 서로 잔을 권하는 게 창피하지도 않더라고, 나중엔."
"참, 당신도…. 걸핏하면 돌아서서 훌쩍였잖아요. 뭐 이번이 처음이라고, 쯧쯧."
"어이, 이 사람이……."
아빠는 손을 내저으며 얼굴을 붉혔어요.
"헤어지면서 내가 현수 인형 사러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이 친구가 자기 집으로 같이 가재.
자기가 현수에게 인형을 선물하겠다는 거야.
자기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거라며, 이제 네게 필요할 것이라며 이걸 주더라."
"그래요? 뭘까?"
엄마는 서둘러 쇼핑백을 살펴보더니,
"아니 이게?"
하며 현수를 돌아보는 것이었어요.
현수가 눈을 감고 자는 척하자,
"현수가 이걸 좋아하겠어요?
지난번 합체 인형 사 왔을 때처럼 떼쓰면 어떻게 하려고……."
"보기는 그래도, 의미 있는 물건이니까 현수도 좋아할 거야."
무슨 인형이기에 저럴까, 현수는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잠깐 밖에 나간 사이 재빨리 쇼핑백을 열어봤어요.
'이게 뭐야? 팔다리도 없고 배하고 엉덩이만 볼록하네?
그런데 조그만 게 왜 이리 무거워?
어라, 머리는 빡빡머리?
아니 뭐 이런 인형이 다 있어?"
잔뜩 기대한 현수는 화가 났어요.
'안 그래도 종민이처럼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화가 나는데, 아니 아빠는 나를 놀리려는 거야?'
현수는 배불뚝이 인형을 쇼핑백 속으로 확 던져 버렸어요.
그런데 그것은 그 속에서 다시 벌떡 일어서더니 끄떡끄떡하는 거예요.
'너도 아빠처럼 날 약 올리는 거지?'
현수는 손가락으로 힘껏 빡빡머리를 때리며 쇼핑백을 밀쳐버리곤, 씩씩거리며 이불을 덮고 울었어요.
처음엔 아빠가 미워서였는데 울다 보니 자꾸만 슬퍼지는 거예요.
아픈 것도 그렇고,
아파서 자꾸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친구들도 처음엔 오더니만 새 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친구가 없다는 것도 그렇고,
또 괜히 자기 때문에 엄마 아빠 한숨 쉬는 소리도 듣기 싫어서,
왜 하필 나지 하고 생각할수록 자꾸 눈물이 나오는 거예요.
'아빠도 나처럼 울었다는 거지?'
갑자기 아빠도 불쌍해져서 한창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 밖에서,
"현수야, 현수야."
하고 부르는 거예요.
처음 들어보는 소리인데 무척 보드라운 소리였어요.
살짝 이불을 들추고 머리를 내밀어 보니까 침대 끝에 밀쳐두었던 쇼핑백에서 배불뚝이 인형이 나와 현수를 부르고 있었어요.
'응? 내가 싫다고 밀치고 때렸는데….'
배불뚝이 인형이 몸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을 했어요.
"안녕? 나는 오뚝이 인형이야.
왜 내가 너에게 왔는지 궁금하지?"
"아니,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퉁명스러운 현수의 말에도 오뚝이 인형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나는 인형 파는 가게 진열장에 오래 있었단다.
오가는 사람들을 따라 어디라도 가고 싶었어.
난 나를 찾는 사람이 누굴까, 참 기대하며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렸거든.
그런데 내 곁에 있던 예쁜 인형은 자꾸만 바뀌는데 나는 늘 그 자리에만 있는 거야.
아무도 날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없는 거지.
아니, 어느 순간 난 그것도 모자라 진열장 뒤 구석으로 밀려났어.
현수야 듣고 있니?"
"응. 잘 들려."
심드렁한 현수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뚝이는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거울을 보았는데 난 참 놀랐어.
네가 보다시피 까까머리에 손도 팔도 없고 아랫도리만 커다란 나를 본 거야.
그제야 왜 내가 선택받지 못했는지 알게 되었지.
이 못생기고 무거운 엉덩이만 없으면 사람들 따라 어디로든 갈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난 생각했어.
왜 나를 만든 사람은 손과 팔과 다리를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아니 무거운 이 엉덩짝 조금이라도 떼어내어 하다못해 머리카락이나 얼굴 윤곽이라도 제대로 만들어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참 아쉬웠지.
점원이 내 어깨에 쌓인 먼지를 털며 이제나저제나 나를 치워버리려고 하는 것을 알았을 땐 정말 다 포기하고 싶었어.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나같이 이상한 인형을 좋아하겠어?"
"그건 그래. 나도 처음 네가 참 이상했어.
그런데 자꾸 보니깐 또 다르네?"
현수가 인형의 상냥한 말투를 조금씩 닮아가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난 꿈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기도했어.
그 덕분일까, 어느 날 누군가가 나를 데려갔어.
나는 잔뜩 기대에 부풀었지.
그런데 막상 포장지를 벗으니까 행색이 초라한 남자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거야.
자꾸만 머리를 툭툭 때리면서 말이지.
하는 일이 잘 안 되어 슬픔에 빠진 사람이었지.
왜 하필 저렇게 보잘것없는 사람이……."
"화가 났겠구나. 인형을 그렇게 학대하면 안 되지."
현수는 좀 전에 인형에게 한 행동이 슬그머니 떠올라 부끄러웠어요.
"그 남자는 외출하려고 거울을 볼 때마다 앞에 서 있는 나를 툭툭 건드리고는 이를 꽉 깨물고 밖에 나가곤 했지.
난 화가 났지만 참았어.
넘어져도 곧 일어나며 그나마 저 사람에게 온 걸 감사하게 생각했어.
저 사람이 날 툭툭 치면서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는다면 내가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말이야."
"너, 참.... 착하구나."
인형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일이 잘 풀렸던 모양이야.
그 꾀죄죄한 아저씨의 행색이 점차 나아지더니 어느 날 넥타이를 매고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어.
웃는 얼굴로 거울을 보면서도 내 머리를 툭툭 건드리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더군."
"다시 화가 났겠네?"
"아니. 대신 용기가 생겼지.
난 조금만 건드리고 밀어도 잘 넘어졌지.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꼿꼿이 일어났어.
그러다 보니 난 엎어져도 계속 넘어져 있을 수가 없는 거야.
새로 좋은 집으로 이사한 날, 나를 거울 옆 제일 좋은 자리에 놓으면서 아저씨는 말했어.
'네 덕분이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네 꿋꿋한 모습을 보고 힘을 얻었단다. 고맙다, 오뚝이 인형아'라고 말이야."
"으음, 좋았겠구나."
"물론! 이 무겁고 못생긴 엉덩이가 없었다면 나는 하등 만들어질 이유가 없는 인형인 거야.
나를 무겁게 하는 것들이 나의 짐이 아니라, 나를 바로잡아 주고 일으켜 세우는 무게 중심이며 추가 된다고 아저씨는 이야기해줬어.
나를 보며, 내 못생긴 엉덩이를 보며 아저씨는 용기를 가졌다잖아.
아저씨의 말대로 이 무거운 것이 나를 있게 해줬다면, 내가 나를 위해 있는 게 아니고 나를 통해 누군가에게 힘을 주려고 그렇다는 말이지."
"아이, 어려워. 그러니까 네가 못생기고 뚱뚱한 이유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고, 그래서 힘내라고 말해주러 나에게 왔다는 말이지."
"그래, 그래. 그 아저씨가 날 너에게 선물하는 이유를 알겠니?"
"음, 그렇다면 내가 아픈 것이 꼭 엄마 아빠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겠네?"
"맞아. 역시 현수는 똑똑하구나.
난 이제 네 아빠에게도 힘내라고 말하러 갈 거야. 어때, 너도 같이 갈래?"
오뚝이와 함께 엄마 아빠와 함께 한참 춤을 추고 있는데, 툭툭 엄마가 현수를 깨웠어요.
"현수야, 그만 일어나. 아침 회진 시간이야.
선생님 오시면 네가 불편한 것 다 말해드려라."
현수는 일어나자마자 침대 밑에 있는 쇼핑백을 뒤져 오뚝이 인형을 찾았어요.
엄마가 흠칫하며 뭐라고 말하려는데 선생님이 들어오셨어요.
현수는 오뚝이 인형을 가슴에 품고 선생님을 맞이했습니다.
"오, 이제 인형 대장 현수 일어났네.
지금 안 아프지?
어? 오뚝이를 안고 있구나.
그래, 그래, 힘내자, 오뚝이 박현수!"
"예!"
자신도 모르게 크게 대답하면서 선생님께 웃던 얼굴을 돌려 현수는 환하게 엄마를 바라보았어요.
오뚝이 인형을 높이 들고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