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루스 <해피 엔딩>
온갖 애환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조건은 원래 해피하기 보다 비극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해피 엔딩이라고 했군요. 그럴까요? 정말 우리네 삶은 해피한가요? 이 영화의 연출자인 돈 루스 역시 인간조건은 죽음과 비극적이라는데 동의합니다. 오프닝 신에서 웬 여자가 갑자기 차에 뛰어들더니 처참하게 죽어갑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죠. 어떤가요. 문득 ‘부조리’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부조리’(absurd)란 ‘말이 안 된다’ 라는 뜻입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오를 잠깐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작렬하는 태양빛 때문에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죽이죠? 이유고 뭐고 없습니다. 단지 태양빛 때문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이죠.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므르와 에스라곤은 애타게 '고도'를 기다리지만 끝내 오지 않습니다. 와중에 이들은 부질없는, 무의미한 행동만을 되풀이 합니다. 인간실존이란 본질적으로 부질없을뿐 아니라 말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요? 가만 돌아보면 우리네 삶 하나하나가 말이 되질 않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오래전 실습선에 재직할때 퇴직교수님 몇 분을 배에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대략 70 전후의 노 교수님들인데,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점심식사를 대접한 것이죠. 그런데 어제 아침, 이날 참석했던 교수 중 가장 정정하고 연하인 L 교수께서 세상을 떴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바다낚시 나갔다가 실족사 했다는 거예요. 이거 황당한 일 아닙니까?
보다시피 죽음은 태어난 순서, 건강 상태에 따라 맞이하는 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매사가 이런 식이어서 우리네 인생은 뒤죽박죽 말이 안 되게 되어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비극적인 죽음을 절대 피할 수 없는 부조리하고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죠. 바로 오프닝 신이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놓고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 라고 역설적인 단서를 답니다.
원래 삶은 비극적이지만 해피하다고 가정해보자는 것이죠. 아닌게 아니라 영화 속 군상들의 삷은 실로 복잡하기 짝이없고 좌충우돌 정신 없이 돌아갑니다. 웬 등장인물들이 이렇게 많을까했는데, 연출자는 명확한 내러티브, 소수의 정형화 된 캐릭터를 설정하기 보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런 애기 저런 애기를 마구 뒤섞어놓습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요?
흔히 소설과 영화는 허구적 공간을 통해 특별한 에피소드나 사건을 재구성합니다. 그러나 복잡하기 짝이없는 인생살이가 몇 개 혹은 몇 십개의 에피소드로 재현될 수 있을까요? 그러기에 돈 루스는 등장인물부터 아예 다양한 군상으로 설정하고, 음악도 뒤죽박죽, 사건도 뒤죽박죽 마구 뒤섞습니다. 아수라장 같다고나할까요. 하긴 인생살이자체가 카오스니까요. 관객으로서는 좀 혼란스런 대목인데, 뭐 사건 하나하나를, 인물 모두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보다 주제에 맞춰 전체를 두리뭉술하게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어쨌든 여러 등장인물들은 해피한 삶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고군분투합니다. 역설인 셈이죠. 말하자면 해피 엔딩이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의 가정으로서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이 영화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고민하고 갈등을 하는데, 이런 과정을 지나 비로소 해피한 삶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해피 엔딩은 애초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힘든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과물인 셈이죠.
이 점은 종교 원리와도 같습니다. 간절히, 참으로 간절히 천국을 소망하는 크리스천들의 삶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비록 신실한 크리스천일지라도 내세의 천국이 곧장 확보되는게 아닙니다. 다만 가능성만 주어질뿐이죠. 다시 말해 천국은 제 아무리 경건한 신앙, 확고한 믿음을 가졌을지라도 신앙이 없을 때보다 오히려 더 신실하게 살아야만 갈 수 있습니다.
한순간 자만하거나 실족하면 절대 불가능한 것이죠. 이 말은 결국 천국은 믿음과 함께 사전에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생활의 전 과정을 - 달리 표현하면 인생살이 - 통해 만들어져 감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인 ‘해피 엔딩’으로 귀결되는 삶과 같이 말이죠.
자, 마무리하겠습니다. 인생은 비록 비극적이되, 해피하다고 가정하고 열심히 살아보자. 그러면 결국 해피 엔딩으로 끝날 것이다. 이게 바로 이 영화의 전언인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