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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산 보광사는 신라 진성 여왕때 도선국사에 의해 비보사찰로 창건(894)된 천년고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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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자 |
| "좀 더 파야겠다. 그래야 한달음에 가서 어머니를 뵐 수 있지… 이쪽은 너무나 팠구나. 저쪽을 좀 더 파서 가지런히 낮추어야겠다. 어서 가서 어머니를 만나 뵈어야 하는데…"
'더 파서 낮추라'가 '더 파기 고개'가 되었다가 '됫박처럼 가팔라졌다'하여 훗날 '됫박고개'가 되었습니다. 강원도 깊은 산길을 떠올리게 하는 가파른 됫박고개를 '깐닥깐닥' 넘다가 보면, 오른쪽에 보광사 일주문이 문득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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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방 한칸 짜리 '어실각'입니다. 영조가 심은 향나무는 오늘도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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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자 |
| '영조(조선 21대)'는, 매월 초 생모 '숙빈 최씨(숙종의 후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파른 고개를 넘으며 더 파라고 명하고, 거듭 재촉하면서 '됫박고개'가 되었습니다. 영조는 생모 숙빈 최씨가 천한 신분의 출신이어서 중전은 물론 다른 후궁들까지 무시하고, 궁녀들까지 받들어 모시지 않는 설움을 보며 자랐습니다. 하늘같은 왕이 되어 이제는 무엇이든지 다 해드릴 수 있는데 평생 죄인처럼 천대받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을 후궁에서 벗어나게 하고, 어머니의 묘 소령원을 능으로 승격시키고 싶었지만 신하들이 번번이 반대하였습니다. 내로라하는 배경(외척)이 없던 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애끓는 마음은 그럴수록 더 깊어만 갔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 묘 가까이에 있는 보광사를 어머니의 원찰로 삼아 대웅보전과 관음전을 중수하는가 하면 만세루 등을 창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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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광사는 영조의 효심이 절절히 배어있는 곳입니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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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보전에서 내려다 본 만세루와 종각입니다. 만세루 역시 영조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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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처럼 끊임없이 정진하라." 보광사의 목어는 머리는 용, 몸은 물고기로 근래에 보기 드문 빼어난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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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보전은 보광사의 백미로 벽화가 민화풍으로 그려져 있으며 하얀 코끼리의 상아가 6개라거나 부처님이 옆으로 얼굴을 돌리고, 혹은 볼연지 등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주춧돌을 최대한 배려한 배흘림 기둥도 아름답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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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진성여왕 때 창건한 한강 이북 6대 비보사찰 중 한 곳
고령산(622m) 보광사는 신라 진성 여왕 때 도선 국사에 의해 비보사찰로 창건(894)되었습니다. 당시에 한강 6대 비보사찰 중 한 곳이었으며, 오늘날은 실천불교 수행사찰로 곧은 맥을 잇고 있는 곳입니다.
비보사찰이 무엇이냐고요? 풍수지리학의 대가 도선 국사가 보기에 우리 나라 형세가 언제 떠내려갈지 모르는 나룻배여서 단단히 매어 떠내려가지 못하게 막아야 할 필요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도선 국사는 한반도 곳곳에 이 비방을 하였는데, 그 한 방편으로 풍수학적으로 중요한 곳마다 사찰을 세워 나라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절이 비보사찰이며, 때문에 도선 국사가 창건한 절이 비교적 많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어김없이 크게 훼손되었던 비보사찰 보광사였습니다. 임진왜란과 6·25 때에도 폐허가 되었지만 사찰의 중요성과 나라의 안위를 염려하는 스님들이나 왕에 의하여 불사를 거듭하여 오늘의 모습이 갖추어졌습니다. 또한, 영조의 어머니를 향한 애끓는 효심을 숙연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며, 경기 문화재로 지정된 대웅보전의 독특한 매력은 곰곰 따져 보는 재미까지 더해줍니다.
보광사의 백미랄 수 있는 대웅보전을 몇 바퀴 돌면서 이렇게 저렇게 헤아려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흙벽을 취하는데, 3칸의 보광사 대웅보전은 나무 벽이며 벽화 역시 민화풍으로 그려진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또한 대웅보전의 천정은 동양화기법으로 화조화(花鳥畵)와 초충도(草蟲圖)를 그려 넣었는데 이런 천정화는 다른 사찰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라고 합니다.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뒷걸음쳐서 나오다가 문득 눈에 들어오는 배흘림기둥 역시 남다릅니다. 절을 한다고 법당에 들어 설 때만 하여도 언뜻 초라하였는데 삼배를 올리고 나오며 다시 보니 주춧돌을 배려하여 세워져 있음에 다시 보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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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보전 천정에는 동양화기법으로 그려진 화조화(花鳥畵)와 초충도(草蟲圖)가 있는데 이런 천정화는 유례가 드믄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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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종(경기 유형문화재 158호)에는 보광사 비보사찰로서의 창건동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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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년 전 법우로 함께 갔던, 지금은 저 산 너머에 있는 곳
청년 불자의 열정으로 자주 찾던 보광사였습니다. 지금은 보광사를 가기 위해 잠시 스치는 작은 읍내인 고양동에는 수많은 아파트와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몇 년 전만 하여도 양쪽으로 무덤뿐인 곳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철야정진을 한다고 보광사에 가면, 주지스님은 여지없이 우리 청년 불자들을 무덤 앞에 앉아 참선에 들게 하였습니다. 참선을 하다보면 인불이 수그러들려는 담력을 시험하는 듯 휙휙 날아다녔고, 겁에 질려 수그러들려는 그 순간 죽비가 밤하늘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곤 하였습니다. 이제는 두루뭉술 해져버린 청년 불자의 열정이고 서러운 초발심이 되어버렸지만,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끔 하기도 합니다.
눈 푸른 납자(중, 스님)로 구도의 길을 가고 싶어 하던 여자를 3년 동안 짝사랑하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남자 법우들 중에서 단 한 번도 눈에 띄지 않던 묵묵한 선배 법우일 뿐이었습니다. 부부의 인연, 몇 겁을 돌고 돌아서 부부로 만나 반드시 풀고 갚아야만 하는 그 무언가가 있나봅니다. 이번 생이든 다음 생이든…. 무수한 생(生)중에 단 한 번이라도 인연으로 만나 풀어야 할 고리가 있다면 반드시 풀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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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광사 처마...삶이라는 힘들고 모진 길을 함께 가는 부부는 어쩌면 함께 공부하고 이끌어주며 바라보아주는 법우(불자로서 친구)요, 도반(같이 공부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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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자 |
| 삶이라는 힘들고 모진 길을 함께 가는 부부는 어쩌면 함께 공부하고 이끌어주며 바라보아주는 법우(불자로서 친구)요, 도반(같이 공부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찾아 든 보광사. 15년 전, 청년 불자로 처음 찾았을 때도 애끓는 마음으로 어머니를 살펴드리고 있던 향나무는 여전히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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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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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됫박고개 넘고 넘다 보면 오른쪽에 보광사 일주문이 문득 나타난다. |
ⓒ김현자 | ▶자가용을 이용하여 가는 경우 1) 구파발 방향 - 통일로 1번국도- 대자동삼거리(벽제화장터)에서 우회전 의정부 방향으로 5분정도직진 좌측 고양동 방향으로 좌회전 후 벽제동 삼거리(아시아 호텔 앞)에서 우회전 후 약 2Km
2) 의정부 방향 - 39번국도 이용. 장흥유원지 지나서, 서울 시립 용미리묘지 방향우회전(315번 도로) 후 벽제동 삼거리(아시아호텔 앞)에서 우회전 후 약 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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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경우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4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33번 버스, 40분정도 소요. 새벽 5시 20분부터 밤 10시 25분까지 있음
▶가볼만 한 주변 중남미 문화원/쥬쥬 동물원/용암사 용미리 석불/소령원/ 수길원/ 성사영묘/장흥유원지내 토탈미술관과 청암민속박물관/서오릉/유일레져/서삼능과 원당종마목장/
▶보광사 종무소 전화 031-948-7700~1 홈페이지 www.bokwangsa.co.kr / 김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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