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
내가 결혼한 때는 우리 가족이 신당동에 살고 있던 1958년이었다. 남편은 아버지의 부관으로 우리 집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때부터 안면을 익히기 시작해 결혼에 이른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덕여대에 진학한 후 나는 빨리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남편의 청혼을 받고, 나는 “차라리 잘됐다. 어차피 결혼할 거면 일찍 해버리자”고 결심이 서서,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버지 월급으로 어렵게 꾸려 나가는 집안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데다, 육 여사가 임신 중이어서 몸도 편치 않은데,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우리가 쓸 이부자리만 한 채 해주시면 됩니다.”
웨딩드레스도 낭비인 것 같아, 흰색 한복을 한 벌 지었다. 흰색 한복 한 벌이면, 나중에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을 것 같아 실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제외하면, 나는 결혼을 위해 아무것도 새로 마련하지 않고 시집을 갔다. 옷장은커녕 새 옷 한 벌 장만하지 못했다. 그래도 결혼반지만큼은 백금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것이었다. 남편은 내게 결혼반지를 구리반지로 하자고 그랬다. “좋은 반지를 하면 살림이 어려울 때 팔아버릴 우려가 있지만, 구리반지라면 절대로 팔게 될 리가 없으니, 진짜 영원한 결혼반지가 될 수 있을 거요.” 그때만 해도 내가 철이 덜 들었는지, 그것만큼은 싫다고 우겨서 결국 백금반지를 마련했다. 결혼식은 지금은 없어진 서울 종로의 동원예식장에서 했다. 주례는 원용덕(元容德) 장군이었는데, 그날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도, 어쩐지 착잡하신 것 같았다.
◎ 지척에 살면서 서로 몰랐던 아버지와 어머니
대구에서 헤어진 어머니를 만나게 된 때는 결혼 후였다. 나는 외갓집에 연락해서 어머니가 부산 어딘 가에 있는 절에 살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편과 함께 부산의 그 절로 어머니를 뵈러 갔다. 절에서 재혼한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키우며 살고 계시던 어머니는 나의 갑작스런 방문에 깜짝 놀라면서 나를 붙들고 무척 많이 우셨다.
나는 어머니께 “이제부터는 내가 모실 테니 우리와 함께 가자”고 졸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셨다. “나는 세상이 귀찮으니, 그냥 절에 있겠다. 나는 사가(私家)에 살면 잡념이 생기는 사람이다. 모든 것은 업보(業報)이니, 내가 여기서 기도하며 살 수 있도록 나를 그대로 둬라.” 결국은 우리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 후로는 어머니가 가끔씩 우리 집에 찾아오시곤 했으므로, 나는 한결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었다.
나는 그때 부산의 절을 찾아갔다가 기절할 만큼 놀랐는데, 어머니가 머무시던 절이 군수기지사령관으로 계시던 당시 아버지의 관사가 지척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두 분 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셨지만, 도대체 무슨 인연인지 어머니가 계신 절에서 아버지의 숙소가 내려다보이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떠난 때는 1962년 4월이었다. 5·16이 난 지 1년도 채 안 되어서였다. 우리 부부는 이곳 한국이 우리가 있어서는 안 될 자리라는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를 둘러싸고 별의별 소문이 다 퍼져나갔다. 시아버지의 위패(位牌)를 모신 대구의 한 절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친어머니를 찾아갔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돌아다녔다.
한번은 남편의 동기생들이 당시 정보부장이던 김재춘(金在春) 씨와 함께 식사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남편 친구들이 우리 부부 이야기를 하자 김재춘씨는 “앞으로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마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점점 주변 사람들이 우리에게 거리를 두고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뜸해지면서, 우리가 고립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불안했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 있으면 아버지께 누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미국행을 택한 것이다. 결심을 굳힌 남편이 김종필 씨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우리 가족은 곧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신 후에 내가 얼마나 미묘한 입장에 서게 되었는지, 일일이 설명하기는 힘들다. 내가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받고 있다는 말이 나올까 두려웠고, 내 행동이 내 의도와는 달리 아버지와 육 여사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염려스러웠다.
한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내던 구미 상모리의 대가족이 아버지에게 갖는 불만도 컸다. “집안에서 대통령이 났는데 달라진 것이 없다”면서, 친척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냉랭한 태도에 속이 상한 친척들은 나만 보면 참았던 이야기들을 퍼 부어댔다.“아버지에게 가서 이런 얘기를 해봐라.” “저런 부탁을 해봐라.” 나에게 쏟아지는 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탓에 나는 그런 것에 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나는 친척들에게 아예 말하곤 했다. “저도 청와대에 못 들어가요.” 그러면, 친척들이 화를 내곤 했다. “딸도 못 들어오게 하더냐?” 나는 아버지와 친척들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지금도 친척들은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나는 청와대에 가서 물 한 잔 못 얻어먹었다.”
아버지가 청와대에 계실 때 내가 육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아버지를 뵙고 싶어요”라고 말씀드리면, 육 여사는 먼저 “급한 일이냐”고 물으셨다. “그렇다”고 하면 “저녁때 와서 식사나 같이하자”거나, “몇 시쯤 들르라”고 말씀해주시곤 했다. 육 여사가 돌아가신 후에는 늘 근혜를 통해 이야기를 전하곤 했다. 아버지와 직접 통화한 일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가끔 내게 용돈을 주신 적도 있는데, 그때마다 내게 말씀하셨다. “어디 가서 남이 주는 돈 함부로 받지 마라. 누구에게 함부로 손 벌리지 말아라. 그러면 네가 다친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버지에게 내색을 전혀 하지 않던 내가 꼭 한 번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울어버린 일이 있다. 1967년의 일이다. 나는 남편이 공화당의 공천(公薦)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새벽 영옥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명단에 남편 이름이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청와대로 찾아갔다. 육 여사에게 한참 하소연하고 나서 돌아서려는데, 육 여사가 “아버지 뵙고 가야지” 하시기에, 아버지 집무실을 찾아갔다. 나는 말씀드렸다. “아버지,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이렇게 됐으니, 이제 어떻게 하지요?” 아버지는 나를 달래셨다. “정치를 해봐라. 그건 결코 행복한 게 아니다. 이제 네가 코흘리개 시절의 이야기까지 낱낱이 들추어지고, 별별 이야기를 다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끝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지 않으냐? 남편이 정치를 한다는 건 여러 가지 면에서 너에게 불행이 되면 됐지 좋은 일은 아니다. 남편이 출세한다고 여자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야.” 나는 화가 나서 “그것도 아버지 생각이지요. 그래도 하려던 일인데…”라고 말하다가, 울면서 그대로 그 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육 여사는 아버지와 똑같은 이야기로 나를 설득하려 하셨다. “여자들이 남편을 성공시키려고 하지만, 그런다고 여자가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남편 출세해 봐야 그 부인은 남편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어지는데, 여자들이 그걸 몰라서 그렇게 설치는 거야.” 백번 옳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도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산 기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한때는 그토록 원망한 아버지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어머니를 이해했듯이 아버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미안한 마음도 커져만 갔다. 나는 아버지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내게 이상형의 남성 상이었다. 늘 말이 없고 조용하신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취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집에 돌아오셨을 때는 늘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고 계셨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시는 저녁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 주무시곤 하셨다. 내가 아들을 낳았을 때 “이 아이를 잘 키워 육사(陸士)에 보내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어 야지” 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큰아이가 시력이 좋지 않아 육사는커녕 군대에도 못 가게 되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 아들을 아버지처럼 만들 수 없게 된 것이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건 1978년 봄, 공관장 회의가 있어서 서울에 왔을 때였다. 물론 그때는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청와대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별말씀 안 하셨다. 여러 번을 만나도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란 것이 고작 “언제 왔나?” “언제 가나?” 정도였고, 그날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하실 때면, 그것은 늘 남편과 아버지만의 화제였다.
아버지 혼자서 동생들을 데리고 사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1974년,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이 끝나고 난 후 아버지와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는 “나는 재혼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일이 워낙 바쁘시니, 외로움쯤이야 잊고 사시라니’ 생각한 것이 불찰이었다.
◎ 凶夢
1978년 봄 이후에는 어찌 된 일인지 아버지와의 통로가 꽉 막혀버린 것만 같았다. 직간접으로 듣는 한국의 정정(政情)은 누가 보아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서울에서 날아드는 갖가지 소식과 풍문이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특히 남편은 온갖 외신들을 일일이 점검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뭔가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인지, 나에게는 충분한 설명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 혼자서 무슨 속을 그렇게 끓이는지, 꼬챙이처럼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카리브해 연안의 작은 섬나라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였다. 남편은 당시 캐나다 대사로서 카리브해 연안의 몇몇 섬나라 대사도 겸임하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아 축하 사절로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미니카공화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말했다. “캐나다 대사관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 한국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기어코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전날,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나는 꿈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꿈속에서 나는 이전에 남편이 대사로 있던 칠레에 있었다. 무슨 큰 행사가 열렸는지, 피노체트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커다란 검은색 자동차가 사람들이 모여 있던 건물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그 차에서 역시 검은색 옷차림의 아버지와 육영수 여사가 내렸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면서, 내 앞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피노체트 대통령이 아버지에게 “당신 딸이 여기 있다”고 나를 가리켰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모른 체하며 그냥 획 돌아서 가셨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검은색 옷을 입은 꿈은 좋지 않은 징조라 던데.’ 캐나다 대사관에 급히 연락을 취했더니 “유고(有故)”라는 대답이 왔다. ‘유고라니, 사고가 있었다는 뜻인 모양인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을 의미한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허리케인으로 엉망이 된 도미니카 공항이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당일로 서울에 갈 방법이 없었다. 어찌어찌 해서 미국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잡아탔다. 뉴욕에 가니, 남편 친구들이 서울에는 가지 말라고 충고했다. “아무래도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 같다. 한국의 정정이 이토록 불안한데, 지금 가서 어쩌겠다는 거냐? 여기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천천히 가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 가족도 위험할지 몰라.” 그러나 남편과 나는 그럴 수는 없었다. 뉴욕을 떠나 도쿄에 도착하니, 당시 주일대사관 공보관이던 이원홍(李元洪) 씨가 나와 있었다. 이원홍 씨의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음을 알았고, 서울 상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달려왔지만,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0월 29일 저녁, 입관(入棺)이 끝난 상태였다. 사람들은 내게 “마지막 인사이니, 아버지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싫다고 했다. ‘됐어. 나는 아버지 돌아가신 모습은 보지 않을 거야. 그냥 살아계실 때 모습만 기억하면서, 아버지가 늘 그렇게 살아계시겠거니 그렇게 생각하고 살 거야.’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계시는 동안, 나는 10년을 외국에서 살았다. 미국과 칠레, 캐나다에서 조용히 지냈다. 숨어 살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어쨌든 남 앞에 나서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고 살았다. 그 덕에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거리를 돌아다녀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니, 나는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으로 살 수 있었다.
월간조선 1995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