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는 석가모니 부처가 법을 전한 마하가섭으로부터 달마대사, 그리고 중국의 여러 조사와 선사를 거쳐온 선(禪)불교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서기 위해 참구하는 수많은 선승들로 인해 한국불교의 피가 돌고 맥박이 뛰는 것이다. 그 맥박의 중심은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등 5대 총림의 선방들이다. 이 선방을 거친 고승대덕들은 누구이며 선승들의 법맥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알아본다.
홍류동 계곡의 기암과 단풍, 가을 가야산은 지금 절정이다. 붉은 꽃과 단풍이 맑은 물에 떠내려가 홍류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계곡을 한참이나 따라 올라가면 비로소 사하촌(寺下村)이 나타난다. 여기서 걸어서 이삼십분은 올라가야 겨우 해인사 일주문 앞에 다다른다. 일찍이 선원 율원 강원을 두루 갖춘 해인사는 1967년 가장 먼저 총림(叢林)으로 지정받았다. 혹자는 해인사의 중요성을 일러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심장이자 두뇌’라고 했다. 팔만대장경을 장경각에 모신 법보종찰인 해인사는 최고의 수행도량이자 종정이 주석하고 있는 선승의 사관학교이다. 총 24교구를 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는 16개의 암자와 130여곳의 말사를 두고 있다.
▲해인삼매(海印三昧)와 해인사=삼남(三南)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가야산에 위치한 해인사는 신라시대 애장왕 3년인 서기 802년 화엄십찰(華嚴十刹) 가운데 하나로 창건되어 올해 1,200주년을 맞았다. 해인사의 ‘해인’은 ‘일렁임이 없는 바다에 만물의 형상이 그대로 비치는 것과 같이 번뇌가 없는 마음에 만물의 이치가 그대로 드러난다’는 의미로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따온 것이다.
930년 희랑(希郞)대사에 의해 중창된 후 1398년 고려대장경이 강화에서 해인사로 옮겨와 법보종찰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조선성종 19년 인수와 인혜 두 왕대비의 후원을 받은 학조대사가 크게 중창했다. 이후 순조 18년인 1818년 경상도 관찰사이자 추사 김정희의 부친인 경상도 관찰사 김노경(金魯敬)의 시주로 대적광전이 완성되어 현재의 가람배치가 이루어졌다. 불 화자(火) 모양을 한 해발 1,430m의 가야산은 화기가 높다. 그걸 잠재우기 위해 매년 단오날이면 해인사 스님들은 가야산과 마주한 매화산과 경내에 소금을 묻는다.
▲퇴설당과 선승의 자세=경허대사가 1899년 11월 퇴설당(堆雪堂)에서 동수정혜결사를 시작했을 때 전국의 사찰은 그야말로 유명무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경허대사가 나타나기 200년전 사명대사에서 끊겨버린 선맥은 해인사 선방에서 그 불씨를 지피게 되는 것이다. 당시 선방에는 17명의 대중이 결제에 들어갔으며 원주는 제산(霽山)스님이었다. 현재 선원 유나(선원의 최고 책임자)를 맡은 원융스님은 “경허스님의 제자 중 한사람인 방한암(漢巖)스님이 서기를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이 해인사 선방에서 용성, 효봉, 고암, 자운, 성철, 일타, 청담, 혜암, 법전 스님 등 쟁쟁한 선승들의 용맹정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선승들이야말로 한국불교의 오늘을 있게 한 주역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직접 경허스님이 편액을 썼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퇴설당의 당호는 철저히 선(禪)적인 유래를 갖는다. ‘퇴설’이란 말 그대로 쌓여있는 눈 무더기란 뜻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눈 무더기처럼 다른 어느 곳에도 쓸 데가 없는 스님들이 모여야만 공부에 정진할 수가 있다는 뜻”이라고 해인사의 한 스님이 귀띔했다.
▲용맹정진으로 유명=해인사는 가야산의 웅장한 산세만큼이나 스님들의 수행자세와 풍모도 남성적이다. 해인사 포교국장 현진스님은 “아무리 얌전한 스님이라도 해인사에 와서 1주일만 지나면 자세가 꼿꼿해지고 목소리가 우렁차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라고 했다. 또한 해인사의 새벽예불과 저녁예불시간에 울려퍼지는 법고와 염불소리도 어느 사찰의 것보다 크고 높고 우렁차다.
해인사 선방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찰의 선방에 비해 용맹정진(잠을 자지 않고 수행함)을 많이 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제시대를 거친 이후 생겨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허스님이 문을 연 선방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대처승들이 절집을 차지하자 유야무야 명맥만을 겨우 이어갔기 때문이다.
▲‘호랑이 노장’ 성철=그러나 선맥의 흐름은 퇴설당을 중심으로 도도히 이어졌다. 경허가 한국 근대불교의 중시조라면 성철은 한국 근대불교의 부흥조. 그 성철스님이 1936년 25세의 나이로 해인사 퇴설당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는 것이다. 이어 범어사 원효암, 통도사 백련암, 은해사 운부암, 금강산 마하연사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하던 젊은 날의 성철스님은 1940년 29세때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하안거중 오도송(悟道訟)을 읊기에 이른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문득 한 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
훗날 해인사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이후 줄곧 해인사에서 주석한 성철은 ‘호랑이 노장’으로 불리며 선방의 서늘한 선풍을 세우고 한국불교의 기틀을 다잡아 나갔다.
-경허대사‘깨달았도다 할!’-
▲한국 근대불교의 시작
‘콧구멍이 없는 소가 무슨 뜻입니까’라는 사미승의 질문에 크게 깨달은 경허(鏡虛·1849~1913)대사는 갑자기 일어나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그리고 오도송(悟道訟)을 지어 깨달음의 세계를 내보였다. 1879년 11월의 어느날이었다.
이 순간은 그의 깨달음의 순간일 뿐 아니라 끊겼던 우리나라 불교의 선맥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527년 달마가 동쪽으로 온 이후, 어언 1,500년 만의 일이다. 만해 한용운은 ‘경허집(鏡虛集)’에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경허스님은 이대로부터 육신을 초탈하여 작은 일에 걸리지 않고 마음대로 자재하여 유유자적하였다’고 적었다.
흔히 원효를 한국불교의 새벽, 지눌은 한국 간화선(看話禪·화두를 받아 끝없이 의심해 들어가는 수행법)의 효시, 서산대사는 한국 중세선의 기둥이라고 할 때, 경허선사는 한국 근대선의 중흥조라고 일컫는다.
그렇다면 경허가 되살린 우리나라 불교의 선맥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중국 조사들의 법거량에 수시로 등장하는 선문답에서 달마 동래(東來)는 항상 빠지지 않는 물음이다. 김명국의 ‘달마도’로 우리에게 눈에 익은 달마대사의 모습은 코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다. 그도 그럴 것이 달마대사는 인도 남천축국 향지왕의 셋째아들인 인도인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에게 법을 전수받은 뜻으로 금란가사와 바리때를 물려받은 가섭존자는 이 신표를 통해 선맥을 면면히 전수했다. 가섭존자로부터 내려온 선맥은 제27대 반야다라(般若多羅)에 이르렀고 그로부터 금란가사와 바리때를 받은 달마대사는 스승의 명에 의해 동쪽인 중국으로 떠난다. 중국 선맥의 초조인 달마대사에 의해 법을 전수받은 혜가로부터 전해져 온 법은 도의(道義)선사를 통해 해동(海東)에 이르러 고려말 태고보우(太古普愚)에게로 전해졌다. 그러나 조선조 억불정책으로 인해 사명대사에게까지 법맥이 간신히 이어졌으나 경허선사가 다시 그 법맥의 불씨를 일으킬 때까지 200여년간 끊어졌던 것이다.
홀로 선사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경계없는 세계를 열고 들어간 경허는 퇴락해가던 한국불교의 선맥을 잇고자 전국의 사찰을 돌며 선방을 열었다. 경상도 지역의 범어사·해인사·동화사, 전라도의 송광사·화엄사 등에 선원이 개설됐고, 지리산 천은사, 실상사, 쌍계사, 내원사, 표충사, 대성사, 파계사 등에 선풍이 일기 시작했다.
또한 경허대사는 ‘선문촬요(禪門撮要)’라는 선수행 지침서를 발간해 과거 선사들의 어록을 집대성했다. 또한 그에게서 나온 제자들은 이후 한국불교의 선맥을 면면히 이어갈 밑거름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소위 경허의 세 달이라는 만공(滿空·법명은 月面), 혜월(慧月), 수월(水月)은 중부지방과 남부, 그리고 북부 지방에서 각각 선풍을 일으켰다. 경허는 56세 되던 해 금강산과 안변 석왕사에서 법회를 연 후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부터 64세로 입적할 때까지의 행장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가 일으킨 선풍은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5대총림 禪의 현장을 찾아서]해인사(下)
3보사찰인 해인사와 통도사, 그리고 송광사는 그 절집의 가풍이 주변의 산세만큼이나 확연히 구분된다. 보통 해인사는 남성적이고 활달하며, 통도사는 점잖으면서 여유있고, 송광사는 온화하고 부드럽다고 알려져있다. 화기가 많은 가야산 산세처럼 활달하고 거침없는 해인사의 가풍은 1967년 총림지정과 함께 초대방장으로 취임한 성철(性徹)스님 이후 더욱 명성을 떨쳤다. 방장은 총림의 가장 웃어른이면서 선승들의 지도자다. 총림 안에서는 ‘방장이 곧 법’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 의미는 실로 큰 것이다. 방장은 선수행을 하는 승려들을 할(喝)과 방(棒)으로 채찍질하면서 법기가 되도록 조련할 뿐 아니라 그 스스로 끊임없는 수행으로 몸소 선승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총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둑놈들아 밥값 내놔라”-
▲초대·3·4·5대 방장 성철스님(1912~1993)
‘가야산 호랑이’ ‘호랑이 노장’으로 불리운 성철스님은 1967년 총림지정과 동시에 초대 방장으로 취임한 이후 3, 4, 5대 방장을 역임했다. 성철스님은 동산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해 한국 근대불교사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봉암사 결사’를 1947년부터 3년간 이끌었고 해인총림 방장에 취임한 이후 주로 백련암에 주석하면서 서릿발 같은 해인사 선풍의 기틀을 다잡았다.
하안거나 동안거가 되면 성철스님은 백련암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의 선원으로 하루에 한번씩 불시에 점검을 나왔다고 한다. 지금의 선원인 소림원(少林院)이 개원하기 전에는 조사전, 퇴설당, 선열당을 상(上)선원, 중(中)선원, 하(下)선원으로 각각 이용했다. 선열당에서는 하루 10시간 일반정진과 14시간 가행정진을 했고, 퇴설당에서는 14시간 가행정진, 조사전에서는 24시간 용맹정진과 가행정진을 번갈아 했다고 한다.
72년 해인사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한 유나 원융스님은 “보통 성철스님은 하선원인 선열당에 먼저 들르시는데, 한여름 수좌들이 졸고 있으면 영락없이 산이 쩡쩡 울리게 불호령을 했다”고 기억했다. “야, 이놈들아! 해인사 밥이 썩은 밥인 줄 아나! 어디서 졸기를 졸고 있노. 이 도둑놈들아, 밥값 내놔라”하며 죽비로 등짝을 후려치는 소리, 다기상을 뒤집어 엎는 소리가 나면, 퇴설당과 조사전에서 수행하던 스님들은 번쩍 정신이 들곤 했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한바탕 선열당에서 난리를 치른 후 퇴설당과 조사전에 올라왔는데, 그때 아무도 조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퇴설당에서 졸던 스님들은 불시에 이곳에 먼저 들른 호랑이 노장에게 날벼락을 맞았던 일이 있었지”하고 원융스님은 웃으며 회고했다.
성철스님은 해인사 방장뿐 아니라 조계종 7, 8대 종정을 역임하면서 한국 근대불교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거듭되는 고사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요청에 못이겨 7대 종정직을 수락한 성철스님은 그 유명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법문을 내렸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아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산은 산이요/물은 물이로다’
조계사에서 열린 종정취임 법회는 물론 일체의 외부활동 없이 가야산에만 머물던 스님은 93년 11월4일 퇴설당에서 혜암 법전 원융 원택 스님과 따님인 불필스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법랍 59년, 세수 82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가야산 호랑이 성철스님은 임종게에서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친다/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푸른 산에 걸렸도다’고 읊었다.
-공양주 소임 자청 ‘자비보살’-
▲2대 방장 고암(古庵)스님(1899~1988)
1917년 해인사에서 제산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은 스님은 22년 용성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친견하려면 삼천배를 올려야 했던 성철스님과 달리 누구라도 만났던 고암스님은 남성적 해인사의 가풍에 비해 모성적 자애로움으로 가득차 ‘자비보살’이라고 불리웠다. 또한 용성스님과 직지사 제산스님, 한암스님의 율맥을 고루 이어받아 ‘율사’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만공스님을 모시고 정진할 때, 이미 고암스님은 선방의 서열상 고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대중을 시봉하는 공양주 소임을 자청했다. 엄동설한의 금강산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한 겨울에도 언제나 남보다 먼저 일어나 다른 스님들의 신발을 남몰래 깨끗하게 닦아놓고, 세숫물을 데워놓았다.
스님은 26년 안변 석왕사 내원선원에서 참선정진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을 남겼다. ‘선정 삼매는 단지 속에 일월같고/시원한 바람 부니 가슴 속에 일이 없네’
부처님의 색인 황색을 좋아하고 한문 일색이었던 불교계에서 유독 한글로 쓰는 것을 고집한 스님은 67년부터 조계종 3, 4, 5대 종정을 역임했고, 70년 성철스님의 뒤를 이어 해인사 방장에 취임했다. 88년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법랍 71년, 세수 90세로 입적한 스님은 ‘가야산색 단풍이 짙어졌으니/이로써 천하의 가을을 알겠네/서리 내려 낙엽이 떨어지면 모두 뿌리로 돌아가고/구월 보름 밝은 달은 허공을 비추나니라’고 임종게를 남겼다.
-장좌불와·오후불식 대명사-
▲6대방장 혜암(慧菴)스님(1920~2001)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는 ‘용맹정진’과 눕지 않는 ‘장좌불와’의 대명사인 혜암스님은 1946년 해인사에서 출가한 이후 47년 성철스님 등이 이끈 봉암사 결사에 동참했다. 제방선원에서 수행하다가 77년부터 해인사에 줄곧 주석해온 스님은 유나, 부방장의 소임을 맡는 한편 하루 한끼씩 먹는 일종식과 장좌불와를 평생 실천했다고 알려졌다. 99년에는 조계종 종정에 추대됐다.
93년 성철 스님 열반 이후 방장에 오른 스님은 몸소 선승들과 함께 선방에서 수행을 함께 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선방의 대중에게는 하루 4시간 이상의 취침을 금하고, 오후에는 먹지 않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을 지키게 했다. 또한 방선(放禪, 선수행 도중 잠깐 쉬는 시간)시간에는 108배를 거르지 않고 행하게 했다.
스님은 생사해탈에 관한 법문을 통해 일반인의 수행에 관해서도 일렀다.
‘세상 만사는 분별망상으로 하는 일이기에 선악이 꿈속의 일이요 나고 죽는 괴로운 일이다. 그러니 먼저 할 일은 참 나를 찾는 일이다. 주인공을 찾는 일이 내 일이요 남을 돕는 일이니, 무슨 직업이든지 도를 닦아야 한다. 이것을 제외한 모든 인간의 소망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해 12월31일 열반한 스님은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성철스님도 놀란 ‘절구통 수좌’-
▲7대방장 법전(法傳)스님(1925~, 현 종정)
한번 앉으면 그대로 땅바닥에 붙은 채 수행에 정진했다고 하여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이 따라다니는 법전스님은 1948년 백양사에서 만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47년 백양사에서 해인사로 가던 도중 문경 봉암사에 들렀을 때, 우연히 봉암사 결사를 하고 있는 성철스님을 비롯해 청담 양곡 자운 스님을 만나 결사에 참여하게 됐다. 이것을 인연으로 성철스님을 법은사로 모시게 된 법전스님은 이후 1951년 안정사 천제굴에서 성철스님이 수행할 때 시봉을 들며 함께 수행하기도 했다.
법전스님은 5척 단구의 작은 키에 말수도 별로 없지만, 성철스님도 ‘내가 니한테 졌대이. 그만 밥먹고 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선수행 이력을 자랑한다.
-용성스님에게서 뻗은 가지 방장들 조계종 종정 역임-
◇해인사 스님들의 법맥
역대 방장들이 모두 조계종 종정을 역임할 정도로 고승들을 배출해온 해인사는 모두 용성(龍城)스님(1860~1940)에게서 뻗어나온 가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성문도회는 덕숭총림 만공스님의 제자들과 함께 한국불교계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특히 해인사는 용성스님이 출가한 곳으로 해인사 스님들은 가야산 골짜기에 있는 ‘진디밭골’이라는 지명을 따 ‘진디밭골 법손’이라고 스스로를 이르며 용성스님의 제자임에 자부심을 느낀다.
용성스님은 경허스님의 세 달 중 두 달인 혜월스님과 수월스님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879년 해인사에서 화월화상을 은사로 출가한 용성스님은 해인사와 파주 보광사, 순천 송광사 등에서 두루 수행하다가 1919년 만해 한용운과 함께 3·1운동에 앞장서 투옥되는 등의 고초도 겪었다.
해인사 초대방장인 성철스님은 용성-동산스님으로 이어지는 맥을 이어받았고, 2대방장 고암스님도 용성스님을 전법스승으로 모셨다. 6대방장 혜암스님 역시 용성-인곡스님의 제자이며, 7대방장 법전스님은 비록 백양사에서 출가했으나 성철스님을 법은사로 모셨다. 성철스님과 혜암스님은 같은 용성스님에게서 나온 법사촌지간에 해당하며, 혜암스님과 법전스님은 숙질지간이라고 볼 수 있다. 고암스님은 성철스님이나 혜암스님보다 한 세대 위가 되는 셈이다.
이들에게서도 쟁쟁한 스님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성철스님의 직계제자만 하더라도 천제(부산 해월정사 주지), 만수(대구 금탑사 주지), 원명(서울 연등국제선원장), 원융(해인총림 유나), 원택(전 총무원 총무부장·해인사 백련암 주지)스님을 들 수가 있다.
첫댓글 자료를 다시 올려서 소리향님의 댓글이 없어졌네요...^.~ 죄송합니다.. 소리향님..._()_
해인사는 절 이름 때문인지 아니면 풍수때문인지 도량 기운이 센편인듯. 그러니 신참도 정신이 바짝들고 행자 군기도 보통이 아닌듯. 본래 화엄삼매는 살아있는 삼매이므로 생기가 넘치는 법이지요. 그 화엄삼매의 핵심인 해인삼매에서 절 이름을 땄으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