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國學과 韓國哲學
1. 한국철학의 의미
철학이란 인간의 근본에 대한 물음으로써, 그에 대한 해답 역시 쉽지 않다. 이러 한 문제는 또한 나와 우리에 대한 물음에도 마찬가지이며, 단언하기 힘든 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이나 우리나 나를 파악함에 있어 주체(主體)라는 의미는 떨어질 수 없다. ‘철학은 주체에 대한 물음이다’라는 명제 역시 이러한 관계를 드러내는 가치라 할 수 있다.
철학이 여타 과학과 다른 것도 주체의 의미를 중요시하기 때문인데,
“궁극적인 主體가 主體 자신을 主體的을 파악하는 것이 다름 아닌 自覺인 것이요, 이 自覺을 통하는 主體的 把握을 意圖하는 點이, 哲學이 根本的으로 科學과 다른 특색이라고 하겠다.”
라는 지적에서 그 의미가 확인된다. 그러므로 주체를 통한 자각이 없는 철학은 주체적 파악의 의도를 잡을 수 없으므로, 자각 없는 인간;자각 없는 우리;자각 없는 나로 흐를 수밖에 없다.
또한 주체적 자각이 없는 경우는 인간다운 인간을 확인할 수 없고, 건강한 우리를 규정하지 못하며, 너에 대한 나도 구별할 수가 없다. 이런 상태에서는 모방(模倣)이 자칫 가주체적(假主體的)인 위상으로 자리 잡게 되며, 타자(他者)의 암시도 자발적 의도로 포장될 수가 있음이 다음의 주장에서도 나타난다.
“模倣은 강제가 아니다. 강제에 있어서는 他者의 강압적인 힘에 내가 굴복하는 것이나, 模倣에 있어서는 나 자신이 스스로 他者에 끌리는 것이니, 움직이는 者는 나요 他者는 오직 암시를 줄 뿐이다. 나는 마치 夢遊病患者와도 같이, 强制的 威壓이 아닌 暗示的 誘惑에 빠져 他人의 模倣을 일삼는다. 暗示된 槪念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장 자발적인 것으로 錯覺한다.”
즉 주체적 파악이 없이는, 착각에 의해 모방이 주체로 자리 잡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말한다면, 모방적 주체가 무의식적으로 그림자를 형성하게 되고, 그러한 지배가 오래 지속되면서 주체적 자아를 대체하게 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주체적 자각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어느덧 모방적 주체라는 그림자가 자아를 동화시켜 자아의 참모습인 듯 착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방적 주체에 의해 응시된 철학은, 주체에 대한 물음 또한 건강하게 던져질 수가 없으며, 그에 대한 해답 역시 바람직할 수 없다. 불완전한 인간의 열매에 대한 책임이 여기에 있고, 정체성(正體性) 혹은 자아를 잃어버린 우리와 나의 초래는 여기서 기인한다. 주체적 자각에 의한 철학의 응시가 중요한 것도 이러한 왜곡에 대한 교정안(矯正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체성에서 강조되는 자주의 명분은 주체의 미래지향성과도 연결된다. 주체성이란 민족의 자기모습(national identity)인 역사와 전통 위에서 재창조 되는 주체의 활력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결국 주체성이란
첫째 민족이 살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찾아야 할 절실한 생존의 원리이며,
둘째 민족이 보다 잘 살기 위하여 추구되지 않을 수 없는 적극적인 행복의 의지이며,
셋째 민족이 자기를 주체로 하여 넓은 세계사로 뻗어나가면서 보다 나은 미래사를 창조하기 위한 더 없이 진취적인 재창조의 활력으로 요약된다.
는 점에서, 민족의 생존과 민족 행복의 추구, 그리고 민족의 미래의 창조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국학적 관점에서의 한국철학의 의미’를 접근함에 있어서도 주체라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기존의 한국 철학이 주체적 자각에 의한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 한국의 철학사상 연구가 미개척의 처녀지로 그대로 있다52)는 지적도 주체적 자각에 의한 철학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보면 우리 민족 삶의 흐름과 관련된 지적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고, 공간적으로 말한다면 지구촌 속에서의 우리라는 정체성을 외면하는 것도 된다. 즉
“자아를 망각한 빈 마음은 이리 쫓고 저리 달리어 새로운 思潮를 유일의 진리인 양 받아들이기에 바쁜 것도 같으나, 이를 소화해서 내 것으로 만들 겨를을 가지지 못한 채로 거기에 남는 것은 공허한 모방에 지나지 않는 形骸 뿐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른바 事大主義의 병폐요, 자각을 갖지 못한 나라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안타까운 약점이다.”
라는 탄식처럼, 시간적 흐름 속에서의 자아상실은 공간적 개방 속에서의 자아망각으로 연결되며, 자아망각에 의한 공간적 개방은 다시 시간적 흐름에 따른 자아상실의 층을 더욱 두껍게 만들 뿐이다.
한편 우리 민족 구성원들 중에 많은 분들이 ‘과연 우리에게도 철학이 있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의문을 던지는 주체들이 우리의 지식층들이라는 점인데, 그 중에서도 철학을 전공하고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의 입에서 적지 않게 나온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불교나 유교& #8228;도교철학과 관련된 연구와 업적은 그 종주국들에 버금간다. 또한 서양의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름과 함께, 그들의 철학적 양태와 가치는 풍요를 넘어 범람의 상태다. 외우고 이해하기도 힘든 수많은 철학 사조도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다. 오늘 혹은 이번 주에는, 어느 학자가 어떤 학설을 우리나라에 소개하는가에 대한 경쟁도 치열하다. 아무튼 그것이 모방이든 어떻든 간에, 철학에 대한 열정적 탐구는 어떤 나라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주체의 시각으로 우리의 유구한 역사를 볼 때, 우리는 어느 민족보다도 일찍이 민족적 자기신원(自己身元:national identity)을 확인해온 민족이라 할 수 있다. 동이(東夷)라는 고유한 문화적 주체에서부터 출발하여, 단군이란 민족의 상징체계에서부터 자기를 확인하여 온 시간만도 4천년이 되고, ‘나[個我]’라는 주체를 민족이란 전체와 동일화시켜 역사 앞에 민족이란 통일된 주체를 완성시킨 것도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삶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위하여, 남의 것을 알기 위한 열정의 일부만이라도 할애한 적이 있었는가라는 다음의 탄식에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혹자는 한국사상이란 게 뭐가 도대체 있었느냐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만 그 분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외국 것을 알기위하여 허비한 시간과 노력의 얼마를 우리 것을 찾기 위해 바쳐 본 일이 있느냐고. 알아본 일도, 아니 관심조차도 가져본 일이 없으면서 단안부터 내리는 용기와 의아심은, 자기의 일을 남의 일같이 대하는 너무나 딱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철학이나 논리 이전의 문제로, 우리의 주체적 자각의 의도와 관련된 것이다. 모든 의식(意識)의 내용은 자아와 연결되어 있고 자아는 의식영역의 중심 역할을 한다는 심리학적 해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심지어는 현대과학에서도 주체의 의도에 따라 대상의 가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인데, 인과론적 고전물리학을 뒤엎은 W.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론’이란 논리가 그것이다. ‘관찰자의 관찰행위 자체가 관찰의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 요지라 할 수 있다. 즉 주체(관찰자)의 정신이 모방적이라면 그 결과 역시 모방이 될 수 있고 주체의 정신이 창조적이라면 그 결과 역시 창조로 나타남을 말한다. 하물며 과학이 아닌 철학이라는 가치학문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철학사상이 결국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습관;전통의 전부를 의미하는 것이며,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멀리 상고시대부터 선조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 흐름의 얼마가 분명히 계승;전수되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도, 한국철학의 무의식적 혹은 잠재적 실체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모방적 주체에 의해 설계된 한국철학의 재구상 문제를 다시금 재기치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주체적 자각에 의한 의도가 없이는 진정한 한국철학의 본령을 세울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또한 “내가 나를 否認하며, 나를 犧牲하며, 나를 克服하는 것도 其實은 眞情으로 나를 살리기 위하여서일 것이다. ‘나’라는 主體를 떠나서 歷史를 만드는 建設的인 산 現實을 생각할 수 없다.”는 주장처럼, 주체적 자각은 현실을 위한 것이다. 또한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우리의 살길을 찾는데 있고, 한국의 철학사상 역시 우리가 살아나가야 할 앞길을 밝혀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올바른 한국철학의 세움은 우리 미래와도 직결된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미국이나 일본;영국 같은 선진국들 모두가 그 나라의 민족적 자아(역사;역사정신;고유문화) 속에 흐르는 구심적 이상을 국시(國是)로 하여 정치를 하므로, 국민들은 무한한 자긍심과 함께 자발적으로 국가의 질서에 스스로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외래 의존적이며 맹목적 추종이라는 타성에 의해, 고유한 우리 문화와 끝없는 마찰이 지속되기만 하고 창조적인 가치 창출이 어려운 상황이다. 철학이나 역사;정치학과 같은 학문을 보더라도, 외래 학설이나 이론;가설에 함몰되어 외국 학문 이론의 전도사 역할만 하고 있다는 지적은, 주체성이 붕괴된 우리 학문의 위기를 그대로 말해 준다.
이렇듯 한국철학을 바라봄에 있어 주체적 자각에 의한 의도는, 선택이 아닌 필수의 가치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주제인 ‘국학의 관점에서 본 한국철학’이란 말도 ‘주체적 자각에 의한 한국철학’이라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 장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줄기로 연면히 이어온 문;철을 연구하는 학문이 국학이라고 이해했다. 또한 철학의 일반적 정의는 자연과 인생 그리고 지식에 관한 근본적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개념화 된다.
따라서 국학으로 본 한국철학의 의미 역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토대로 형성된 우리 민족의 실체와 삶과 지식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정체성이란 모방적 주체가 아닌 주체적 자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적 자각을 위한 요건에도 국학의 내적 속성인 ‘사상적 정체성’;‘공간적 차별성’;‘시간적 연속성’ 그리고 ‘보편적 개방성’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 우리가 그 구성원으로 태어난 이 공동체는 선험적(先驗的)으로 주어지는 것이요, 개인으로서의 나도 그 공동체 속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공동체는 나의 모태(母胎)요 운명적인 기체(基體)이기 때문이다.
2. 한국철학의 논리
인간은 옳음과 그름;착함과 악함;아름다움과 추함;성스러움과 속됨의 가치를 판단하는 주체다. 이러한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해명은 철학의 사명인 동시에, 그 철학은 우리의 목표를 또한 지시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철학적 해명을 위한 논리 접근의 도구로써 존재론;가치론을 동원하고 있다.
존재론이란 형이상학적인 물음에 대한 서양철학적인 응답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실체에 대한 물음으로써, 가장 높은 단계의 추상적 사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주관독립적인 세계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고, 이 세계의 보편적 존재 기초 및 존재 원리를 탐구한다.
인식론이란 인간의 지식에 대한 물음으로써, 지식의 본질;기원;근거;한계 등에 관한 철학적 연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식론은 사고의 본성 및 그 내용을 설명하고 인간이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한 체계적인 노력을 중요시한다. 또한 인식론은 대상을 측정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인간 지식의 정밀성이나 그 범위를 비교;평가하는 판단이 중요하다.
가치론이란 인간 삶의 가치에 대한 물음인데, 그 연구 대상은 주로 지(知)를 통한 가치 판단인 진위(眞僞) 문제와, 정(情)을 통한 가치 판단인 미추(美醜) 문제, 그리고 의(意)를 통한 가치 판단인 선악(善惡) 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지적(知的)능력;감성적(感性的) 능력;행위적(行爲的) 능력이 더불어 요구되는 부분이다.
여기서도 국학을 토대로 한 한국철학의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위의 존재론;인식론;가치론적 측면을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방법은, 인간의 보편적 삶의 논리를 파악하는데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장치라는 점과, 한국철학을 논구하는 방법으로도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 대상으로는 ‘한(Han)철학’과 ‘삼일철학(三一哲學)’ 그리고 ‘홍익인간’을 설정해 보았다. 존재하는 것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분야인 존재론에서는 우리 민족 사고의 존재태(存在態)라 할 수 있는 한철학이 대표적이며, 사고의 규칙과 인식에 대하여 탐구하는 인식론에서는 우리 철학에 있어 인식의 기준과 판단이 되는 삼일철학을 상정했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가치를 탐구하는 가치론에서는 우리 민족 최고의 윤리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꼽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존재론으로서의 한(Han)
아마도 지구상에서 존재의 근원을 ‘한’이라는 한 글자로 표현한 집단은 없을 것이다. 이 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를 보면,
“한[桓]은 全一이며 光明이다. 天一을 三神의 지혜와 능력이라 하고 光明을 三神의 참된 德이라고 하니, 곧 우주만물에 앞섬을 말함이다.”
라고 함으로써, ‘한’은 ‘전일’과 ‘광명’이며 우주만물에 앞서는 것으로 이해했다. ‘한’은 우리 민족 믿음의 근원이요 삶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태양은 광명이 만나는 곳이며 삼신(三神)이 계시는 곳으로, 인간은 빛을 얻음으로써 농사를 짓고 스스로 교화된다는 말도, 이와 통하는 말이다. 이것은 북애노인(北崖老人)의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 “桓이란 밝게 빛나는 그 형체를 말하는 것이며, 因이란 본래의 근원이며 만물이 이것에서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환인(桓因)의 의미를 설명한 것도, ‘한’의 만물의 근원성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의 존재설을 우주만물의 근원이 크고 높은 하늘에 있다는 존재설이라 할 수 있다는 말도 결코 동떨어진 주장은 아니다.
또한 ‘한’은 존재로서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존재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 이해되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의 존재 개념이 어떠한 경우든 다른 개념의 종개념(種槪念) 혹은 종차개념(種差槪念)으로 쓰이지 않는 최대의 유개념(類槪念)에 속하는 것으로, 그 개념 자체로 자기 존재의 근거를 삼을 수 있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한’은 오직 ‘하나’로서의 일자(一者)이고, 그 ‘한’은 세계의 근원이며,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근원인 동시에, 오직 하나의 필연적 존재로서, 그 자신이 다자(多者)이고 분할되지 않는 속성을 갖는다.
‘한’이 절대자와 만나 ‘하느님’이 되고, 종교라는 종개념으로 엮으면 ‘한검수’가 된다. 그것이 세계와 만나면 ‘한(온)누리’가 되고, 우리나라와 만나 ‘한국’이 되었다. ‘한’이 무한공간의 종개념으로 안으면 ‘한울(하늘)’이 펼쳐지고, 인간의 본성을 안으면 ‘한얼’로 영근다. 그것을 우주의 근본 질서로 엮어 ‘천부경’이 펼쳐지고, 우리의 글자를 만나 ‘한글’이 된 것이다. ‘한’은 처음이자 끝이요 중심이자 원심이며 점선(點線)이자 입체공간이라는 역설적 존재의미를 조화롭게 승화시킨 유일한 하나다.
‘한’은 ‘하나’이면서 ‘크다’라는 속성을 통해 군장지국(君長之國)의 의미를 안고 있으며, ‘바르다’;‘곧다’;‘해[日]’의 의미를 통해 광명정대(光明正大)를 드러내기도 한다. ‘한’이 내포한 우수한 실천력은 ‘하다[爲]’;‘한창[最盛]’의 뜻으로 발현되는가 하면, ‘많다’;‘모든 것’ 등을 통해서는 대동이상(大同理想)과 번성발전(繁盛發展)의 가치로도 새길 수 있다. 또한 ‘한’은 한국인들의 원초적 종교;철학적 원리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 이래로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 원리에 의거해서 살아 왔는데, 한마디로 ‘한’은 과거 수천 년간 한국민의 ‘에토스’였다. ‘한’은 수학적으로도 비시원적 수학이라 할 수 있는데, 수학적으로 비시원적 공간이란 밀집성(compact);연결성(connected);계속성(continous);역동성(dynamic);무한성(infinite);보편성(universal)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렇듯 ‘한’은 ‘완전한 존재’로서 무한하고 절대적이며 나뉘어지지 않고, 비공간적이며 비시간적이며 온동도 정지도 없고 구체적이지도 않다. 또한 크기도 성질도 없으며 사유도 의지도 없고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더욱이 문화인류학자들의 언어체계를 말하는 문화목록(文化目錄:Inventory)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의 문화목록어를 알;감;닥;밝;무(巫);선(仙);법(法);연(然)의 8층(層)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한’은 이 모든 층의 근저(ground source)가 된다고 말한 것에서는,74) 우리 민족의 모든 사유를 ‘한’이 떠받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은 문화적 양상에서도 언제나 주체와 세계성을 조화시킨 존재다. 즉 ‘한’문화의 경험을 보더라도 우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동양의 모든 것을 아우르려 했다. 일찍이 접화군생의 가치로 유;불;선을 통섭한 것이 ‘한’이다. 19세기 말, 중국은 중체서용(中體西用)으로 자기정체성을 지키려 했고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를 네세워 서양에 대비할 때에도, 우리는 ‘자기만[吾]’이 아닌 ‘우리[東]’를 내세워 ‘한[東道西器]’을 외친 것이다.
더불어 그 ‘한’은 우주만물의 원인이 되지만 결코 만물이 ‘한’의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은 가장 작고 가장 크며, 지극히 좁고 지극히 넓은 까닭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을 에워싸고 있는 동시에 현실세계의 조그마한 미물(微物)까지도 ‘한’에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철학에 있어서의 ‘한’은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사유의 존재태(存在態)’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인식론으로서의 삼일철학
일찍이 동;서양에서는 인간의 조화적;통합적 삶의 질서를 가장 효과적으로 인식하는 수단으로 삼(三)이라는 숫자가 많이 사용되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우리의 전체 우주가 수(數)로부터 온 존재로 믿고, 일(一)이라는 신(神)은 이(二)를 만든 창조주이고 두 수가 합쳐 삼(三)이 되므로, 삼(三)은 바로 우주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도 전체에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사상(事象)을 삼수분화의 논리로 이해했으며, 트리아드(Triad: 3)는 만물의 완성태라고 니코마코스는 말한다. 특히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인 이암블리코스는 “트리아드(3)는 모든 수를 능가하는 공정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주된 이유는 트리아드(3)가 모나드(Monad:1)의 잠재성이 최초로 현실화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미합중국(United State of America)의 건국도 3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음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鼎立의 통일성 원리는 미국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적용되었다. 건국자들은 안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이고 지속적인 체계를 만들려고 하면서, 프리메이슨단에게 그 기초를 구했다. 18세기 秘儀的 단체였던 프리메이슨단은 고대 이집트로부터 전해 내려온 자각과 내적 발달에 관한 지식을 ‘(Peter Gower: 피타고라스를 약간 변형시킨 이름)’와 고딕양식의 성당 건축가들이 포함된 일련의 계통을 통해 건축의 상징성으로 전달했다. 정부를 설계하면서 건국자들은, 각각 독립적이지만 서로 얽혀져 있는 세 개의 보로메오 가지 사이에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는 민주제도를 고안하였다.”
더욱이 불가능한 것조차도 삼(三)이 필요하다는 주장에서 삼의 오묘함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즉 트라이바(Tribar:세 개의 면이 서로 직각으로 만나게 그려지는 것)의 모양은 3차원 공간에서 나타나는 최초의 불가능한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물리학의 메카니즘도 삼일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주장까지 대두됨을 볼 때, 이 세상 모든 이치가, 삼의 운용수인 팔십일과 삼의 완성수인 삼백육십육, 즉 일과 삼이 곧 ‘萬往萬來 用變不動本’이라는 『천부경』의 천리(天理) 속에 있음을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 민족의 삶도 삼(三)으로 시작하여 삼으로 일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돌아감의 섭리까지 삼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쓰임[用]인 삼신(三神)의 점지로 삼가르고 태어나, 삼신줄(검줄;금줄)의 보호로 삼칠일을 넘기고, 삼(삶)을 삼(살)다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는(뒈지는;죽는) 것이 그것이다.『삼일신고』‘진리훈’의 가르침에 나오는, ‘하느님(三神)→삼진(三眞: 性;命;精)→[삼진↔삼망(三妄: 心;氣;身)]→삼법(三法: 止感;調息;禁觸)→하느님(三神)’의 이치와도 부합하고 있다.
인식론적 측면에서 한국철학이, 직관에 의한 총체적 진리 파악과 상대적 입장에서의 해명이라는 성격을 갖는다는 것도 이러한 질서와 무관치 않다. 이것은 한국철학이 절대적 통찰이라는 일(一)과는 거리가 있고 대립적 인식이라는 이(二)와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그 둘을 질서 있게 끌어안으면서 창조(一)와 확산(三);조화(三)와 통섭(一)으로 무한 반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민족 고유한 철학적 심성의 틀로서의 삼은,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執一含三 會三歸一)는 것과, ‘셋에서 하나로 돌아감을 체로 삼고 하나에서 셋으로 나뉘어 짐을 용으로 삼는다’(三一其體 一三其用)는 삼일철학의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철학코드는 한 마디로 삼수분화의 원리를 횡으로 하고 삼진법의 공리(公理)를 종으로 하는 ‘현묘지도의 섭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일찍이 단군사화 혹은 그 이전부터 나타나는 삼신신앙의 철학관에 기초한 것으로, 인간의 삶을 가장 완전하게 영유케 하는 원리인 동시에 인간사회의 질서를 가장 옹글게 협화하는 가치가 되는 것이다. 까닭에 인간사를 아름답게 운용한다는 것은 그러한 수리(數理)를 얼마만큼 잘 활용하느냐와 일맥하는 말도 된다. 독일의 대수학자인 레오포드 크로네커가 “신은 자연수를 창조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인간의 작업이다”라고 말한 것도, 수의 질서가 곧 삶의 섭리임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신지비사(神誌秘史)」에 “서로가 균형을 이루면 나라가 흥하고 태평을 유지할 수 있다(首尾均平位興邦保太平)”라고 한 구절도 삼일철학에 나타나는 치도(治道)의 섭리로써 형상화한 가치라 할 수 있다. 『태백일사』에 나오는 다음 기록이 이것을 말해 준다.
“三韓의 지세로써 여러 가지의 저울돌에 비유해 보면, 부소량은 나라의 저울대와 같고 오덕지는 나라의 추와 같고 백아강은 나라의 저울 그릇과 같아,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빼면 저울은 물건을 달 수 없고 나라는 백성을 보전치 못하리니, 옛날 三神께 제를 올려 誓願한 것은 삼한의 관경에 있는 백성을 기쁘게 하는 데 뜻이 있는 것으로, 「신지비사」의 전하는 바도 역시 이에 벗어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 민족의 철학적 사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천부경』과 『삼일신고』, 그리고 『참전계경』에서도 삼일철학의 원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먼저 이 경전들이 조화;교화;치화의 삼대경전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또한 『천부경』이 81자로 이루어진 것이나, 『삼일신고』가 360여 글자로 엮어졌고, 『참전계경』 역시 360 여사의 훈적(訓蹟)으로 짜여졌다는 것은, 삼의 운용과 완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경전 모두 일;삼;삼;일( 一;三;三;一 )의 원리를 충실히 보여줌으로써, ‘하나를 나눠 셋으로 퍼지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一而分三 會三歸一)는 삼일철학적 인식에 충실히 부합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 민족의 삶의 원리인 삼은 하늘과 땅과 인간이 어울려 조화;섭리;통일;완성의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즉 ‘삼일철학으로 완성되는 삶의 질서(神;物;人이 어울려 사는 삶)’라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천부경』의 수리철학인 ‘대(大)→합(合)→생(生)→운(運)→성(成)→환(環)→묘연(妙衍)→만왕래(萬往來)’의 묘리가 그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삼의 원리는 우리 민족의 삶의 체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인식해온 수리(數理)이며, 한민족 생활원리와 정서 속에 흥건히 농축된 민간철학이기도 하다.88) 삼의 생활에 나타나는 어우러짐의 삶은 우유부단이 아닌 조화통섭이며, 대립모순이 아닌 변화지양이다. 모든 것을 세 번으로 결정하려는 행동양식이 그렇고, ‘엇비슷하다’;‘두서너 잔’;‘시원섭섭하다’ 등의 수많은 모순적 언어의 통용이 그것을 말해 준다.
심지어 풍류와 흥의 장단 또한 삼박자다. 지금 우리 전통음악에 널리 쓰이는 대부분의 장단 즉,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굿거리;세마치;타령 등이 모두 그렇다. 이(二)박자 계통의 중국음악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다. 또한 진동하는 현이나 공기의 기둥에서 나는 자연적 7음계를 만들기 위해서도, 단지 세 가지의 일차음(一次音: 온음정;4도음정;5도음정)만 있으면 된다는 것은 삼수(三數)야말로 자연의 운율임을 알려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수철학(二數哲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주(周)나라 이전의 중국문화도 삼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사실이다. 동이족이 세운 은;상시대(殷;商時代)의 각종 청동제삼족기(靑銅製三足器)와 갑골점(甲骨占) 등의 유물에서 이러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으며, 심지어 『도덕경』에 드러나는 삼일철학적 가치는 『천부경』의 수리를 보는 듯한 착각이 일고, 그 구성 또한 『천부경』81자와 동일한 81장으로 이루어졌음이 주목된다. 이것은 아마도 허짜오광(曷兆光)의 지적대로, 중국 도교가 은문화(殷文化)의 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초나라 문화권에서 발생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삼일철학은 배달민족의 선험적 규범으로서, 인간 본연의 깨달음을 알려주는 지침(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인 동시에, 인간의 삶의 질서(조직;규범;체제)로도 작용하고, 한민족의 생활방식을 시;공을 넘어 규제하는 최상의 틀로써 자리잡고 있다.
한편 이러한 전래의 삼일가치(三一價値)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집단이 대종교라 할 수 있다. 대종교는 우리 고유의 신교(神敎)를 계승한 집단으로, 삼일철학이라고 처음 명명한 것도 대종교였다.94) 여기서 우리의 고유철학이 전래의 신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게 되는데, 중국의 국학적 철학이 유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일본의 국학적 철학 역시 신도(神道)와 뗄 수 없는 것과 일맥하는 것이다.
본디 삼일철학이라는 말은 1949년 국어학자 정열모95)가 『삼일철학(三一哲學-譯解倧經四部合編)』이라는 책을 편찬하면서 처음 사용된 용어다. 이 책은 신교(神敎)에 전래되어 오는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 홍암 나 철의「신리대전(神理大全)」, 그리고 백포 서 일의 「회삼경(會三經)」등의 네 편을 엮은 책이다. 「삼일신고」는 「천부경」의 삼일원리를 구체화시킨 글이며, 「신사기」는 일신(一神)의 쓰임인 환인(造化主;환웅(敎化主;환검(治化主)의 삼화(三化)에 대해 기록한 글이다. 「신리대전」은 삼신(三神:因;雄;儉)과 삼종(三宗:父;師;君)의 관계를 신위(神位;신도(神道;신인(神人;신교(神敎)로 나누어 설명했으며,「회삼경」은 「삼일신고」‘진리훈(眞理訓)’의 내용을 일이분삼회삼귀일(一而分三會三歸一)의 원리로 풀이한 글이다. 특히 나 철은 「신리대전」에서
“하나만 있고 셋이 없으면 그 쓰임이 없고 셋만 있고 하나가 없으면 그 몸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는 셋의 몸이 되고 하나는 셋의 쓰임이 된다.”
라고 밝혔는데, 이것은 왜 삼일철학인가를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종교의 교리체계도 철저하게 일(一;삼(三;삼(三;일(一)의 원리, 즉 일이분삼(一而分三;회삼귀일(會三歸一 혹은 執三合一)의 이치로 엮어져 있다. 이것은 대종교의 주요경전인「천부경」이 ‘一始無始一 析三極…(중략)…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로 쓰여진 바와 같이 삼일철학의 원리로 짜여져 있을 뿐만 아니라,「삼일신고」와 「신리대전」, 그리고「회삼경;「삼법회통(三法會通)」등이 모두 일(一;삼(三;삼(三;일(一)의 원리에 의해 운용되고 있음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삼일신사상(三一神思想)이야말로 대종교사상의 핵심이라 는 주장도 이러한 이치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다음의 설명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大倧敎의 眞理는 三一이다. 곧 一生三하고 歸三一함으로 一神께서 造化로써 天;地;人을 낳으심에, 天;地;人의 最後에 다시 神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無形한 자리에서 有形한 三極이 되고 도로 無形한 根本으로 돌아감이 三極一本이요, 一神께서 敎化로써 性;命;精을 賦與하심에 인물은 다시 心;氣;身으로 變遷하였다가 다시 性;命;精을 모아 一神께 돌아감이 三眞歸一이요, 一神께서 治化로써 萬物에게 能力과 權技를 주어 相殺相害의 弊가 없이 고루 살게 하신 바 萬物은 神生;體生;均生의 三生一致로 報本의 길을 다함이니, 神의 主體는 一이나 用은 造化;敎化;治化의 三이니, 이것을 分三合一 즉 三神一體라고 神의 자리를 말하고 人間的으로는 君도 되고 師도 되고 父도 되시니 三宗一統이라고 神人의 大本을 말하고, 敎法으로는 儒家의 率性과 仙家의 鍊性과 佛家의 見性을 竝行하니 三敎包一이라 하고, 敎法은 一로써 三을 起하여 萬으로 變하고 萬으로 化하되 마침내는 一에 歸하니 쌓여서 無限한 것이 一이요 나누어서 無盡한 것이 三이라, 一이 三이 되고 三이 九가 되고 九가 마지막 얻은 數가 八十一인 故로 三用一體가 宇宙萬有의 眞理가 되느니라.”
이 인용문에서는 대종교의 철학을 삼일이라고 단정하며 시작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단정의 배경에는 「천부경」과 「삼일신고」에 삼일원리와 홍암 나 철이 대종교의 근원이 삼일(三一)임을 밝힌 것, 그리고 “대종의 이치는 삼일일 뿐이다.(大倧之理 三一而已)”라고 천명한 것과 직결된다. 또 위의 예문에서는 하느님에 의해 만유(萬有)가 운용되고 다시 하느님의 근본 자리로 돌아가는 삼극일본(三極一本)의 조화원리를 밝힘과 함께, 하느님이 품수하신 삼진(三眞: 성;명;정)을 온전히 하여 하느님께 돌아가는 삼진귀일(三眞歸一)의 교화진리를 설명함은 물론, 하느님의 권능을 삼생(三生)의 이치로 고루하여 일신보본(一神報本)하는 삼생일치(三生一致)의 치화이치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하늘에 있어서는 조화;교화;치화의 삼신일체의 권능으로 자리하고, 인간에 있어서는 신인(神人)으로서 군;사;부의 삼종일통(三宗一統)으로 나타남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미 나 철의 신리(神理)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는 논리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삼일철학적 인식은 삼교합일적 수행론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즉 유교의 수신(修身)을 통한 솔성(率性:「삼일신고」에서 본다면 禁觸法)과 도교의 양기(養氣)를 통한 연성(鍊性:「삼일신고」에서 본다면 調息法) 그리고 불교의 명심(明心)을 통한 견성(見性:「삼일신고」에서 본다면 止感法)이 삼일철학의 질서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국사기』「신라본기」‘진흥왕 37년’의 기록에 나타나는 고운 최치원의「난랑비서(鸞郞碑序)」의 현묘지도(혹은 풍류도)와 일맥하는 것으로, 이 또한 나 철의 주장과도 접맥된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삼일철학적 수리 운용은, 일(一)이 곧 삼(三)이요 삼이 곧 구(九)이며 구가 곧 만유무진(萬有無盡)의 원리인 팔십일(八十一)로 완성되고, 다시 일로 돌아가 질서순행(秩序循行)을 계속한다는 삼용일체(三用一體)의 철학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이미「천부경」의 이치에서도 드러나며 「삼일신고」의 운용 질서와도 철저하게 부합된다.
삼일철학적 인식과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모든 도형과 수리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원;방;각(△)을, 삼일철학과 결부시켜 풀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방(□);각(△)에 삼일철학적 원리를 처음으로 연결시킨 인물은 고구려 국상 임이상이라고 하는데, 그는 「삼일신고」‘진리훈’에 나오는 삼진(三眞:性;命;精)과 연결하여 해석하고 있다. 그는 참[眞]이란 유일무이한 것으로 성(性)은 ○이요, 명(命)은 □이요, 정(精)은 △이라고 정의했다.
서 일은 또한 원(○);방(□);각(△)을 만상(萬象)의 근원으로 인식하고 모든 수가 여기서 기인한다고 하였다. 그는 체수(體數)로서 원(○);방(□);각(△)이 각각 육(六);사(四);삼(三)이요, 용수(用數)로서 원(○);방(□);각(△)이 각각 육(六);팔(八);구(九)로 사용되며, 약수(約數)로서 원(○);방(□);각(△)이 일(一);이(二;삼(三)이므로, 이 수리의 묘합(妙合)에 의해 태원수(太元數)인 36이 나타남을 밝히고 있다. 서 일은 선천수(先天數)와 후천수(後天數)의 묘리(妙理)도 이것에 의해 나타남을 말하면서, 이를 토대로 소회수(小會數)인 72가 만들어지고 중회수(中會數)인 216이 엮어지며 대회수(大會數)인 360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강(神降: 開天이라 해도 무방)은 대회(大會)에 부합되며, 반어(返御: 御天이라 해도 무방)는 중회(中會)와 만나고, 중광(重光: 전래의 神敎가 다시 빛남)은 소회(小會)와 조응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원(○);방(□);각(△)을 천체(天體);지평(地平);물형(物形)의 삼묘(三妙)가 담긴 형이상의 진리로 인식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삼일철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또 하나는 귀일(歸一)이란 용어다. 귀일이란 반진일신(返眞一神)을 말하는 것으로 신교(神敎)의 진리에 핵을 이루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늘로부터 받은 삼진(三眞: 性;命;精)을 온전히 하여 무선악(無善惡;무청탁(無淸濁;무후박(無厚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반망즉진(返妄卽眞: 거짓을 돌이켜 참으로 나감)이요 성통공완(性通功完: 성품을 트고 공적을 완성함)으로, 인간의 참본성인 하느님께 귀일하는 첩경이 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의 핵심 역시 삼일철학적 수행관(修行觀)과 연관이 되는데, 그 방법으로 서 일은 삼십육종묘화상(三十六種妙化相)을 제시하고 있다. 즉 서 일은 천지(天地) 간의 변화가 수(水;화(火;풍(風;전(電)으로 나타나며 성품[性]과 몸[身]의 되어 감은 명(命;정(精;심(心;기(氣)일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전자의 여섯 요소(天;地;水;火;風;電)와 후자의 여섯 요소(性;身;命;精;心;氣)가 서로 움직이는 고동[機]에 의해 36가지의 하늘과 사람의 길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따라서 서 일은 밝은이[哲人]가 도를 닦음에 있어서도 반드시 이 여섯 요소(天;地;水;火;風;電)의 이치를 헤아려 취사(取捨)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탄생이 위의 여섯 기질(天;地;水;火;風;電)의 요소와, 신리(神理)의 원소가 합성되어 일어난다는 다음의 주장과도 상통한다.
“性은 虛靈한 理요 命은 生存의 氣요 精은 元素의 核의 힘이다. 人間이 한 사람 出生하려면 神理의 元素와 氣質의 要素가 合成되어야 한다. 神理의 元素로 父母의 性感이 일어나는 同時에 三眞을 받고 父母의 善惡因果와 祖先의 善惡報應과 宿命의 善惡變幻이 그 하나요, 氣質의 要素는 父母의 精血이 氣胞되며 天;地;水;火;風;電의 氣候와 山川;草木;巖石;平野의 모든 環境의 感情과 氣品이 連結함이 그 둘이다.”
이 또한「삼일신고」‘진리훈’에 기록된, 마음이 성품에 의지하여 선악으로 나타나고 기운이 목숨에 의지하여 청탁으로 드러나며 몸이 정기에 의지하여 후박으로 표현된다는 내용에 근거를 둔 것이다. 「삼일신고」에서는 마음[心]과 기운[氣]과 몸[身]을 세 가달[三妄]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세 참함[三眞: 성품;목숨;정기] 의 상대적 표현으로 수행을 통해 물리쳐야 할 요소다. 마음은 길흉(吉凶)의 집이요 기운은 생사(生死)의 문이며 몸은 정욕(情慾)의 그릇이라는 선철(先哲)의 가르침과, 마음에는 호생오사(好生惡死)가 상정(常情)하고 기운은 흡청호탁(吸淸呼濁)이 상례(常例)이며 몸은 혹후혹박(或厚或薄)이 원칙이라는 지적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것을 보다 구체화하면, 참[眞]의 반면에는 가달[妄]이 있고 가달[妄]의 이면(裡面)에는 참[眞]이 있는데, 참이라 함은 형이상의 존재요 가달은 형이하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참된 성품과 목숨과 정기는 선악과 청탁과 후박이 나타나지 아니한 원리이며, 마음과 기운과 몸은 선악과 청탁과 후박이 이미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과 연관된 삼일(三一)의 절묘함을, 『유심기법(唯心奇法)』과『정법륜(正法輪)』에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이 주목된다.
“이 두 가지 책으로 말하면 다만 하나가 근본이 됨만 알고 셋이 쓰임이 됨을 알지 못하며, 다만 사람이 부처가 되고 신선으로 화함만을 알고 하느님께 돌아감을 알지 못하며, 다만 성품과 목숨의 기질만을 알고 정기가 성품과 목숨과 더불어 같은 참함임을 알지 못하며, 다만 철인의 공능만을 알고 뭇사람이 착함을 행하고 악을 없이 하는 상도(常道)를 알지 못하니…….(上書二種論之只知一之爲本而未知三之爲用只知人之爲佛化仙而不知歸神只性命之理氣而不知精之與性命同眞哲人之功能而不知衆人之行善滅惡之常道…….)”
이것은 넓게 보면 다른 동양종교의 한계를, 삼용(三用)의 부재;반진일신(返眞一神)에 미달(未達;삼진(三眞: 성품, 목숨, 정기)의 미비(未備) 그리고 화중성철(化衆成哲)의 외면(外面)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묘삼변(一妙三變)의 이치를 삼대도(三大道;삼대동(三大動;삼대정(三大靜;삼대도(三大度;삼대통(三大通)의 원리로 설명하면서, 삼용삼변(三用三變)의 삼일철학적 묘리(妙理)를 다음과 같이 극찬하고 있다.
“크도다 셋의 보배됨이여! 천지를 휩싸고도 흐르지 아니하고 억만 가지를 헤아려도 다함이 없고 사람의 도리를 행하여도 어긋나지 아니 하도다.(大哉三之爲寶彌綸天地而不流推算萬億而不盡施行人道而不違)”
(3) 가치론으로서의 홍익인간
우리 민족의 삶에 있어 홍익인간이라는 가치만큼 포괄적인 의미규정도 드물 것이다. 홍익인간이라는 말은 단순히 철학적 가치를 넘어, 우리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모든 분야에 나타나는 궁극적 가치덕목으로, 우리 민족의 정서적 국시(國是)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인보는 홍익인간을 우리의 개국정신으로 우리 민족 전체의 공통적 교의(敎義)로 파악했고, 조소앙;안재홍 등은 홍익인간을 민주;평등;복지;평화와 같은 현대정치적 이념을 함축하는 고유적 이상으로 해석했으며 나아가 통일된 신국가 건설을 주도하는 기본 이념으로 내세웠다. 또한 해방 후 교육이념 심의 당시 홍익인간이념을 교육이념으로 적극 주장한 백낙준도, 홍익인간이념의 유래를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보다 훨씬 옛적부터 전해온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민족의 이상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으므로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으로 손색이 없음을 강조했다. 최남선 또한 최고의 인간의식(人間意識;국가원리;인생철학이라고 홍익인간을 풀이했다.
역사(H)를 인격(P)과 자연(N)으로 파악한 이홍범 역시, 일찍이 ‘역사(H)〓인격(P)자연(N)’의 등식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위의 공식에 의해 인격(N)이 제로(0)인 경우는 역사 자체가 제로(0)가 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아상실의 원인을 인격(P:언어;역사;역사정신)의 붕괴에서 찾았다. 특히 이홍범은 우리 민족의 국시(國是)로서 홍익인간이념을 제시했는데, 그 이유로써 세 가지를 꼽았다. 즉 홍익인간이념은, 첫째 우리 민족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 둘째 종교적 차별이나 배타 그리고 국교(國敎)의 위험성을 넘어 종교적 자유가 보장될 수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외래의 정치이념;사상;문화를 끊임없이 흡수;융화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익인간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와 관심은, 주로 교육적 측면이나 정치적 측면에서의 홍익인간 연구가 주종을 이루어왔다. 홍익인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종교 혹은 철학적 방면에서의 분석연구는, 홍익인간의 윤리관과 종교관 그리고 민본주의적 측면을 분석한 것과, 삼일사상 및 동학의 인내천사상과 연결하여 접근한 것, 그리고 홍익인간의 철학론을 생활철학과 교육철학적으로 분석한 것 외에는 특별한 성과가 없다. 『삼국유사』로 하여 나타나는 단군에 관한 기록이 종교철학적인 성격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우리 민족 소박한 삶의 체계적 표시임을 강조하는 주장이나, 홍익인간의 구현이 종교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보더라도 홍익인간의 철학적 가치에 대한 관심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홍익인간에 대한 철학적 연구의 필요성은, 홍익인간의 추상적 구호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근본적 대안이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아무튼 한국철학의 가치문제는 문화가치창조자로서의 실천적인 근본태도에 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정신적인 존재로서, 문화를 창조하는 생활 가운데에서 무엇을 최종 목적으로 삼고 있는가 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민족의 문화가치창조 요소로 홍익인간만큼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가치철학은 없을 것이다. 우리 민족을 넘어 인류적 이상가치(理想價値)로서, 홍익인간의 문화적 가치를 최고의 덕목으로 주창한 백범 김구의 소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홍익인간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가치론적 측면에서 처음 분석한 인물은 최민홍이다. 그는 『한국철학』에서, 한국철학의 가치문제를 홍익인간의 윤리관과 연결시켜 접근했다. 물론 가치론이라는 개념이 윤리학보다는 포괄적 개념이지만, 인간의 진;선;미와 연관된 정신적 가치를 궁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할 수 있다.
최민홍은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단군사화를 토대로 홍익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네 가지로 제시했다. 그 첫째가 ‘순수한 인간애’다. 홍익인간이란 남의 요구에 의해서 홍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인간 본래의 본성에서 생기는 자발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선타후아(先他後我)의 미덕’을 들었다. 홍익을 위해서는 이기주의나 개인주의적 윤리관이 용납될 수 없는데, 윤리적 가치 기준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평화와 자유의 애호(愛好)’를 꼽았다. 이것은 겸애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평화를 가지려면 다른 사람의 자유와 평화를 귀중하게 여겨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세운 것은 ‘인도주의사상’이다. 여기서의 인도주의는 불의나 부정을 배격하는 사상으로, 대의를 위해서는 불사조의 정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속에 드러나는 홍익인간의 철학적 가치는 단군사화의 핵심어로써, 종교적 성격과 불가분의 연관을 지닌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단군사화(檀君史話)야말로 우리 민족 전래의 종교철학적 원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화소(話素)가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고대 조선에서 단군을 종교적 교조로 존봉해 왔음을 강조한 신채호의 주장이나, 단군 기록의 그 구성재료가 부인[符印(Fetish;기도[祈禱(Player;주력[呪力(Magic;기[忌(Taboo;신시[神市((Sanctuary;신단[神壇(Altar;신단수[神檀樹(Sacredtree)]와 곡(穀)과 병(病)과 형(刑)과 선악(善惡) 등에서 보는 것처럼, 모두 종교적인 것과 밀접하다는 견해를 보더라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원문을 차분히 더듬으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앞뒤 내용들이 모두 홍익인간을 중심어로 하여 연결됨을 파악할 수 있다. ‘환웅(桓雄)’이라는 존재는 홍익인간이라는 천상의 가치를 지상의 이상가치로 옮겨 놓은 주체인 동시에 지상의 가치를 천상의 가치와 일치시킬 수 있는 명분과 가르침을 새겨준 주인공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하늘의 아들인 환웅의 후예가 지상에서 천도(天道;천리(天理)를 따라 만물에게 광명과 생명과 평화를 주는 지상천국의 뜻이 바로 홍익인간이요 그 속에는 천계화(天界化)된 인간계(人間界)를 더욱 넓힌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환인의 인간 세상을 다스릴 목표가 홍익인간이었고 환웅의 치세 방향이 홍익인간을 구현하는 방법에서 이화(理化)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삼위태백’은 천상에서 지정한 천국(天國)의 출장소(出張所)로서, 홍익인간을 구현할 수 있는 선택된 공간이라 할 수 있으며, ‘천부삼인’은 지상에 홍익인간을 구현할 수 있는 천권(天權)의 상징이요 인치(人治)의 천부(天符)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견왕리지(遣往理之)’의 ‘리(理)’라는 글자는 간단한 한 글자지마는, 이 문구 앞에 나오는 홍익인간과 뒤에 나오는 재세이화에 전후 조응하는 글자로, 강세(降世)의 목적이 혼란과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인간세를 천국적 태평으로 인도한다는 뜻을 함의(含意)하고 있는 묘자(妙字)이기도 하다. ‘도솔삼천(率徒三千)’도 홍익인간의 구현에 있어 떼어놓을 수 없는 구절이다. 이것은 삼천이라는 숫자적 정확성보다는, 인세홍익(人世弘益)을 위해 삼위태백의 거점 완성을 뜻하는 것으로, 인치교화(人治敎化)의 균형과 완성을 의미하는 삼천단부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태백산정(太伯山頂)’은 우리의 고대신앙으로 볼 때에는 소도신앙(蘇塗信仰)의 효시(嚆矢)요 중심이 되는 곳으로, 산이 갖는 종교적 상징의 의미가 무한하다는 의미로도 알 수 있다. 즉 산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으로 상징되는데, 그 곳은 ‘중심점’;‘세계축’이 지나는 점, 성스러운 것을 낳는 지역, 우주의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지나갈 수 있는 장소로 여겨진다. 상징수학에서도 전통적으로 원(圓)을 신성한 공간으로 보고, 원의 중심을 가장 영광스러운 장소로 여겼다. 그 점(點)은 바로 신화 속의 세계축, 세계산맥, 많은 문화의 신성한 중심지, 창조를 지지하는 상징적인 기둥 또는 척추를 나타내며 모든 것은 그 주위를 경배하며 돈다고 한다. 태백산정은 우주의 배꼽으로서, 하늘과 만나는 최초의 성소(聖所)이며 홍익인간을 위한 성역의 중심에 있음은 물론, 천지화합;신인합일의 대칭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신시(神市)’ 또한 성역의 중심이며, 천국적 이상향(홍익인간)을 실현해 놓은 우리 민족의 소도(蘇塗)요 경배소(敬拜所)다. ‘풍백;우사;운사’는 하늘의 명을 이 땅에 실천(홍익인간)하는 신령의 기능으로, 종교적으로 본다면 자연의 운도(運度)를 담당하거나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기능신(機能神)으로서의 역할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주곡;주명;주병;주형;주선악(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역시 인간 주생활과 관련된 오사통치(五事統治)를 말하는 것으로, 먹고 사는 것;삶 속에서의 위계(位階);삶의 생노병사(生老病死);삶의 질서;삶의 도덕과 윤리 등을 관장한 통치질서라고 할 수 있다. ‘삼백 육십 여사’ 또한 종교적으로 본다면 단순한 숫자의 의미를 떠나 질서의 완성, 교화;치화의 실현, 이상향 구현이라는 의미와 밀접하다. 즉 홍익인간을 숫자의 운도로 가장 크게 표시한다면 삼백 육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홍익인간을 한글자로 표현한 ‘한’을 어음적으로 고찰하더라도 ‘한’은 ‘크다[大]’에서 출발하여 ‘하나[一]’라는 개념에서 종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 ‘하나’는 다시 ‘큰 하나[全]’를 수반하기에 그것은 곧 ‘온[全]’이며 ‘온[全]’을 전제로 하지 않는 자기 ‘하나[一]’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홍익인간사상인 것이다.
한편 단군사화에 나타나는 무수한 숫자들은, 단군신화가 단순한 추상적 신화와는 구별된, 우리 민족의 체계적 종교사상이 배태된 모습을 보여주는 근거라 할 수 있다. 종교수학(宗敎數學 theomatics)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클리퍼드 픽오버가 “신(神)이 우주라는 천을 짜 내려갈 때, 수학이 그 베틀 역할을 했음이 틀림없다”고 말한 것처럼, 종교와 숫자의 연관성이 깊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즉 그러한 숫자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군사화가 자연의 역사에서 인간의 역사로 옮겨가는 최초의 의식으로도 볼 수 있으며, 그 숫자 속에는 생활의 질서규범과 삶의 가치가 종교적으로 상징화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재세이화’ 역시 홍익인간구현과 같은 것으로서, 종교적 심성이 온 세상에 실현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볼 때 세상을 인간의 자유의지대로만 살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적극적으로는 초월적;자연적인 것에 대한 외경심으로 인간과 자연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지니고 신의 뜻을 이 땅에 펼쳐 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홍익인간사상을 민족사상의 뿌리요 민족문화의 원천으로 볼 때, 재세이화의 정신은 그 가지로서 만인평등과 인류평화의 꽃으로도 평가된다.
이 밖에도 단군사화에 나타나는 동굴, 그리고 금기(禁忌)와 관련된 내용들(쑥과 마늘;백일 간의 遮光;이십 일일 간의 忍苦)은, 홍익인간의 가치 실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신교(神敎)의 수행(修行)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환웅의 이신화인(以神化人)을 통한 결혼과 단군의 출생은 천지화합(天地調和);신인합일(神人合一)의 전형적 모델이며, 단군의 아사달 어천(御天)은 반진일신(返眞一神)의 성스러운 본보기요 홍익인간인(弘益人間人)의 효칙(效則)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위와 같은 홍익인간이라는 가치를 가장 본질적으로 접근한 인물이 홍암 나 철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나 철이 신교(神敎)의 중흥을 통하여, 그 교의(敎義)인 홍익인간이라는 가치를 처음으로 보편화시킨 인물이라는 점과, 홍익인간의 가치와 그 실천논리를 체계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즉 홍익인간의 인간관을 제대로 개념화하기 위해서는, 일신(一神)이 지닌 삼진[三眞(德;慧;力)]을 온전히 물려받은 존재가 인간으로 보는, 삼신일체 인간관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수 있고 종교적 입장에서의 단군신화는 삼일신화(三一神話)로서 삼일신사상(三一神思想)이야말로 대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철의 이러한 체계 확립은, 홍익인간의 의도와 염원을 ‘천인화합(天人化合)의 생존대도(生存大道)’로 본 안재홍이나, 또 홍익인간을 ‘천인상여(天人相與)의 심인(心印)’으로 규정한 정인보, 그리고 홍익인간의 가치지향을 ‘활동목표의 전일적(全一的) 인도완성(人道完成)’이라고 파악한 최남선의 의견 등을 용론(用論)으로 볼 때, 체론(體論)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즉 나 철은 1911년 직접 저술한 「신리대전」이라는 글을 통하여, 하늘의 삼신[三神(桓因;桓雄;桓儉)]과 인간의 삼종[三宗(父;師;君)]을 하나로 보는 천인일여;신인합일;천인동리(天人同理)의 가치를 제시했고, 거짓을 돌이켜(返妄) 참에 이르러(卽眞) 인간이 하늘과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다. 또한 그 화합의 당위로써 인류동근동족(人類同根同族)의 근원을 내세우고, 화합의 방법으로써 다섯 가르침(五訓)을 제시했으며, 그 화합의 실행으로써 다섯 일(五事)이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근대에 들어 홍익인간이라는 가치 표현을 처음 사용한 집단이 대종교라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즉 신교(神敎)의 전래 경전인 「신사기」에서 ‘홍익인세(弘益人世)’라는 말로 처음 사용한 것으로, 홍익인간이라는 의미가 대종교 중광(1909년 1월 15일) 이전에 이미 배태되어 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특히 ‘홍익인간’에서의 ‘인간(人間)’이라는 의미가 이 시대에 우리가 이해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세상’의 뜻으로 해석됨을 본다면, 「신사기」에 표현된 홍익인세의 의미는 더욱 흥미를 끄는 부분이다.
특히 「신사기」에서는, 인간 세상을 홍익하기 위한 실천논리로 오사(五事)가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즉 「신사기」를 보면 개천(開天)을 통하여 오물(五物:가고;날고;되고;헤엄질치고;심는 다섯 가지 사물)을 만든 것과, 입도(立道)를 통하여 오훈(五訓:天訓;神訓;天宮訓;世界訓;眞理訓)을 가르친 것, 그리고 건극(建極)을 통하여 오사(五事:곡식;목숨;병;형벌;선악)을 다스린 것이 구체화되고 있다. 그 중 다스림의 도구로 등장하는 오사가, 홍익인간을 위한 가치논리로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오사가 홍익인간의 가치논리로 매우 중요시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태백일사』에 을파소의 말을 빌려, “神市理化의 세상은 八訓으로써 날줄[經]을 삼고 五事를 씨줄[緯]로 삼아 교화가 크게 행해져 弘益濟物하였으니, ;佺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 없다.”라고 나오는 내용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또한 오사는 경제(곡식;후생(목숨;의료(질병;정치(형벌);도덕(선악) 등, 인간 생활과 관련된 모든 가치의 중심으로, 옛적에도 다스림의 전부였음이 다음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른바 五事란 牛加는 농사를 주관하고, 馬加는 목숨을 주관하고, 狗加는 형벌을 주관하고, 猪加는 병을 주관하고, 羊加(혹은 鷄加)는 선악을 주관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상고 제정일치 때의 정치적 목표가 홍익인간의 구현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인데, 도덕정치;군자정치;광명이세;이화세계;이도여치(以道與治) 등과도 통하는 말로, 치세를 통한 윤리적 세상의 구현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되는 윤리적 세상의 가치는 인의사상(仁義思想;결백성(潔白性);사양심(辭讓心);효사상(孝思想) 등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우리 민족의 협동;단결;권선징악;국가안보와 같은 국민정신의 기초로 해석되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 홍익인간의 의미를 되살려 놓은 나 철이, 홍익인간과 동의적 의미를 가진 유사 표현을 수없이 사용한 것도 그가 꿈꾸던 배달국이상향(이화세계)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었다. 즉 홍암(弘巖)이라는 그의 호(號)에서도 암시 받을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홍익홍제(弘益弘濟) 또는 홍제(弘濟) 그리고 홍제일세(弘濟一世), 증제천하(拯濟天下), 독성홍포(篤誠弘布) 등을 사용하여 홍익인간의 가치실현을 갈구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평화사상적 의미를 홍익인간으로 단정한 최창규는, 이러한 홍익인간의 정신이 신라사상에서 현묘지도(玄妙之道)라는 일종의 풍류도;선도(仙道)로 표현되었으며, 이 현묘지도가 우리 민족의 풍류적 특성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조선조말, 자기를 찾으려는 국학에서는 ‘태양(明;白)’과 ‘하늘’로부터 상징화된 ;애’ 등으로 설명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홍익인간이 경천사신(敬天事神)의 가치와 밀접함을 암시한다. 즉 홍익인간을 위해서는 하늘을 공경하고 하느님을 지성으로 섬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천상(天上)의 연장이 지상(地上)의 국가라는 관념과 함께 천상의 천제(天帝)에 의해 인사백반(人事百般)이 지배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며, 지상 국가의 제왕은 한결같이 천제의 자손이라는 자긍심이 있었기에 그 조신(操身)을 지성껏 받들게 되고 그에 의해 불가침의 권위도 부여받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의 『삼국유사』권1 「고조선」조에 나타나는 홍익인간의 가치가, 지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의 질서와 무관치 않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古記』에 이르기를, 옛날 桓因의 아들 桓雄이 있었는데,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탐하였다. 아버지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가히 弘益人間 할만 하였다. 이에 天符印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즉 위의 인용문은 하늘의 질서(환인)가 지상의 세계(삼위태백)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연결자는 환웅이며 치화의 수단물이 천부삼인이다. 특히 하늘의 질서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목적이 바로 홍익인간임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을 돌려 말한다면 지상의 인간들이 홍익인간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질서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로도 이해할 수 있다. 경천사상이 중요한 것도 여기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부여;예;맥;마한;신라;고구려;고려 등에서 각각 영고(迎鼓;도천(禱天;무천(舞天;제천(祭天;교천(郊天;동맹(東盟;팔관(八關)이라는 제를 행한 것도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는 홍익정신의 발현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고려조에 성제사(聖帝祠)나, 요나라 때 목엽산의 삼신묘(三神廟), 금나라의 개천홍성제묘(開天弘聖帝廟), 그리고 조선조의 단군묘[檀君廟(崇靈殿)];삼성사(三聖祠) 등도 경천사신(敬天事神)의 중요한 증적(證迹)들이며, 마니산의 제천단을 위시한 산악 제단들 또한 경천의 성소라 할 수 있다.
고대 삼한(三韓)의 멸망이 그 건국의 기초가 되는 삼신설(三神說)을 망가뜨림이 그 원인이요,164) 발해의 고왕 또한 꿈에 신인(神人)이 금부(金符)를 주어 말하기를 “천명이 네게 있으니 우리 震域을 다스리라”고 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건원(建元)을 천통(天統)이라 하며 항상 공경하여 하늘에 제사 지내다가 자손에 이르러 교만해져 차차로 이를 폐지하고 유교와 불교를 숭상하므로 나라가 드디어 시들어졌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것은 삼신에 대한 경천사신의 예가 쇠퇴하면서 보본(報本)의 순리가 역리로 작용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사람이 하늘을 공경치 않으면 하늘도 사람에 응답치 않으니, 풀과 나무들이 비;이슬;서리;눈을 받지 못함과 같다(人不敬天 天不應人 如草木之不經雨露霜雪)”라는 가르침도 이것을 경계한 말로서 이해할 수 있다.
가치론적 홍익인간을 논함에 있어 수행가치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경천사신이 홍익인간 구현을 위한 보본(報本)의 노력이라면, 수행가치는 홍익인간 실천하기 위한 인간완성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홍익인간을 교의로 하는 전래의 신교(神敎)는, 「천부경」과 「삼일신고」등을 통해, 이러한 수행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삼일신고」‘진리훈’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성(性);명(命);정(精)의 세 참함[三眞]을 심(心);기(氣);신(身)의 세 가달[三妄]에 함몰되지 않고 온전히 하여, 성품을 트고 공적을 마침으로 얻어지는 신인합일;천인일여의 경지로 들어가는 가르침을 적은 글이다. 여기에서 가달을 물리치고 참을 지킬 수 있는 방법론이 바로 신교수행의 근본이 되는 삼법수행(三法修行)이다.
삼법수행의 궁극적 지향은 성통공완(性通功完)인데, 성통공완이란 홍익인간과 같은 의미로 ‘인간다운 인간으로의 완성’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성통(소아적 수행의 완성)과 공완(대아적 수행의 완성)을 통하여 신인합일(神人合一);홍익인세(弘益人世)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삼법이란 지감(止感);조식(調息);금촉법(禁觸法)을 말하는 것으로, 「삼일신고」‘진리훈’에 나타나는 가달[妄] 십팔경(十八境)을 벗어나는 방법을 말한다. 즉 느낌 지경 여섯[喜;懼;哀;怒;貪;厭]과 숨쉼 지경 여섯[芬;爛;寒;熱;震;濕], 그리고 부딪힘의 여섯 지경[聲;色;臭;味;淫;抵]을, 그침[止];고룸[調];금함[禁]의 방법으로 물리치는 것을 말한다. 서 일이 제시하는 다음의 구체적 방법 설명을 참고할 만하다.
“정성으로 수행하는 사람은, 기뻐하되 얼굴빛에 나타내지 아니하며 성내되 기운을 부리지 아니하며 두려워하되 겁내지 아니하며 슬퍼하되 몸을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탐하되 염치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싫어하되 뜻을 게으르게 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止感法이다. 풀과 나무의 기운은 향기로워 시원하고 숯과 송장[屍]의 기운은 더러워서 썩으며 번개의 기운은 급하여 줄어들며 비의 기운은 느려서 새며 찬 기운은 능히 독하고 모질며 더운 기운은 능히 마르고 답답하게 하니, 이 여섯 가지는 하나도 없을 수 없으며 다 갖추어 있는지라, 심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기운을 흐리게 하여 도리어 그 해로움을 받게 되므로, 밝은 눈은 이것을 살피어 능히 삼가고 조절하니, 이것이 調息法이다. 교묘한 말이 귀에 들리지 아니함은 나의 귀 밝음을 생각함이요 아첨하는 빛을 눈에 접하지 아니함은 나의 밝음을 막을까 두려워함이요 입에 시원한 맛을 들이지 아니함은 병을 삼감이요 코에 비린 냄새의 기운을 맡지 아니함은 더러움을 막음에서요 음란한 욕심을 절제함은 그 몸을 사랑하는 까닭이요 살에 닿음을 미워함은 그 몸을 보호하는 까닭이니, 이것이 禁觸法이다.”
한편 대종교의 지감법은 느낌을 그치는 마음공부로써 불교의 명심견성(明心見性)과 연결되고, 조식법은 숨을 고루는 숨공부로써 도교의 양기연성(養氣煉性)과 관련되며, 금촉법은 부딪침을 금하는 몸공부로써 유교의 수신솔성(修身率性)과 밀접하다. 서 일의 「회삼경」에 나오는 다음의 삼법일묘(三法一妙)에 관한 풀이가 이를 뒷받침한다.
“고요히 꺼짐[寂滅]을 구함은 마음을 밝혀 성품을 구함에 있고, 날아 오름[飛昇]을 구함은 기운을 길러 성품을 단련함에 있고, 크게 같음[大同]을 구함은 몸을 닦아 성품을 거느림에 있느니라(求寂滅 存乎明心見性 求飛昇 存乎養氣鍊性 求大同 存乎修身率性)”
여기에서의 적멸(寂滅)은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열반(涅槃)의 법을 일컫는 것이고[示其圓寂], 비승(飛昇)은 도가(道家)에서 내세우는 우화(羽化)의 이치를 표현한 것이며[在乎成丹], 대동(大同)은 유가(儒家)에서 추구하는 치평(治平)의 도를 나타내는 것이다[至於至善]. 수행적 측면에서도 대종교가 유;불;선 삼교합일의 묘리(妙理)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을 근거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견성(見性)하기 위하여는 청정(淸淨:불교에서 마음의 번뇌를 떨쳐 버리는 것)에 도달해 막힘이 없어야 하며, 연성(鍊性)하기 위해서는 희이(希夷:도교에서 듣고 보지 않는 것)를 초월하여 저절로 되어야 하며, 솔성(率性)을 위하여는 중화(中和:유교에서 道와 德에 통달하는 것)에 이르되 펴지 않는 것이 성통(性通)의 길이라고 말한다. 최창규가 「난랑비서」에 나타나는 삼교포함(三敎包含)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유교는 충효출입의 윤리로써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으나 느끼어 마침내 통한다(寂然不動感而遂通)’는 논리요, 불교는 선악봉행부작(善惡奉行不作)의 감화로써 ‘열반의 고요에 들어 가림이 없이 저절로 있다(涅槃寂靜無碍自在)’는 논리며, 도교는 무위불언(無爲不言)의 처행(處行)으로 ‘비어 굴하지 않으나 움직여 시나브로 나타난다(虛而不屈動而愈出)’는 논리라고 말한 것도,172) 신교의 삼법에 들어 있는 삼교포함의 속성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국상(國相) 임아상도, 삼진(三眞)의 성(性)은 원[圓(○)]이고 명(命)은 방[方(□)]이며 정(精)은 각[角(△)]이므로, 천원(天圓);지방(地方);인각(人角)의 어울림은 곧 신과 물질과 인간의 조화요 이것은 바로 세 참함을 바르게 세우는 삼법수행의 묘리와도 상통한다. 삼법수행의 묘리(妙理)를 설파한 고려말 이 암의 『단군세기』의 다음 기록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性;命;精(三眞-필자 註)이 잘 어울려서 빈 틈이 없으면, 삼신일체의 하느님과 같아서 우주만물과도 잘 어울리고 心;氣;身(三妄-필자 註)도 있는 듯 없는 듯 자취없이 오랫동안 존재하게 된다. 感;息;觸(三途-필자 註)이 잘 어울리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다를 바 없으니, 온누리에 두루 그 덕을 베풀고 함께 즐기어, 天;地;人(三妙-필자 註)이 절로 조화를 이룬다.”
안재홍 또한 삼법수행을 강조함에 있어, 소아적 자수련(自修鍊)과 대아적 선봉행(善奉行)이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수련과 봉행은 표리본말한 것으로, 자수련에만 정진하면 소승독선(小乘獨善)에 그치므로 홍익인간의 대도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즉 홍익인간이 성통공완의 표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안재홍의 논리인데, 대아적 수행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삼법수행이 인간혁명(성통)이요 사회갱생(공완)의 방법이라는 것도 이런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서 일도 지[知(性通)]와 행[行(功完)]의 일치(一致)를 주장하면서, 성통(性通)과 공완(功完)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능히 나의 본연의 참됨을 아는 것을 性通이라 이르고, 능히 나의 당연함을 행하는 것을 功完이라 이르니, 알고 행하지 못함이 아는 것이 아니요, 알지 못하고 행함이 행하는 것이 아니니라.(能知我本然之眞 曰性通 能行我當然之極 曰功完 知而不行非知也 不知而行非行也)”
이것은 성통이 없이는 공완이 없으며, 공완이 없는 성통 또한 의미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성통과 공완이 하나가 될 때 진정한 홍익인간구현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안재홍의 표리본말론(表裏本末論)과 일치됨을 확인할 수 있다. 홍익인간과 삼법수행이 불가분의 관계가 되는 연유를 설명한 이 맥의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 나오는 다음의 기록을 보면 더욱 수긍이 간다.
“三神一體의 氣를 받아 이를 나누어 性;命;精(三眞-필자 註)을 얻으니, 光明을 마음대로 하고 昻然하여 움직이지 않으나, 때가 되면 감동이 일어나니 道가 이에 통한다. 이것이 體가 되어 三物인 德;慧;力(三大-필자 註)을 행하고 化하여 三家인 心;氣;身(三妄-필자 註)이 되며 즐겨 三途인 感;息;觸을 채우는 이유이다. 그 중요함은 날마다 在世理化하고 고요히 境途(三法-필자 註)를 닦아 弘益人間함을 간절히 생각함에 있다.”
아무튼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사대신기[四大神機(見;聞;知;行)]가 발(發)하여, 하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見神機), 하늘과 자연과 인간이 소리교감을 할 수 있으며(聞神機), 하늘과 땅의 질서를 알 수 있음(知神機)은 물론, 속세의 힘을 넘어 하늘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行神機) 안재홍은 이 사대신기를 원(圓;진(眞;미(美;선(善)과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원(圓)은 백[百(온)]으로써 구전(俱全);원융(圓融)의 의미로 온전하게 보는(見神機) 것이요, 진(眞)은 천[千(즈믄;참)]으로써 충실부만(充實溥滿)의 뜻으로 참(즈믈)되게 듣는(聞神機) 것이며, 미(美)는 만[萬(골)]으로써 균제(均齊);조화(調和)를 나타내는 것으로 고루(골) 아는(知神機) 것임과 함께, 선(善)은 억[億(쟐)]로써 최고의 경지까지 가는 일단(一段)의 신시원(新始元)을 말하는 것으로 잘(쟐) 사는(行神機)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런 논리로 본다면, 온전히 보기(圓見);참되게 듣기(眞聞);고루 알기(美知);잘 살기(善行)를 하면 홍익인간적 삶이 저절로 실현되는 것이다.
철학에서의 가치론이 인간의 지(知);정(情);의(意)를 통하여, 지적 능력인 진(眞);위(僞)와 감성적 능력인 미(美);추(醜) 그리고 행위에 관한 능력인 선(善);악(惡)의 가치를 판단하는 분야임을 생각한다면, 삼법수행이야말로 홍익인간의 가치실현에 필수적인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홍익인간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부터의 혁명을 말하는 것이며, 나아가 인간의 수행을 넘어 자연과 하늘이 함께 교감하는 이치로 홍익인간의 중요한 가치 도구임을 알 수 있다.
끝으로 가치론적 홍익인간을 말함에 있어 홍익인간의 인류적;보편적 가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홍익인간을 교의로 하는 우리의 전래 신교는 태생적으로 사해일가나 만교합일의 대아적 성격이 강하다. 이것은 홍익인간이라는 말이 개별성(Individualism)을 갖고 있음을 말한다. 즉 개별성은, 보편성(Universalism)의 상대어인 특수성(Particularism)과는 다른 것으로, 특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가지고 출발한다.181) 그러므로 이 개별성에서 출발하는 홍익인간의 가치도 우리 민족의 정서적 국시라는 특수성과 함께 인류대동을 지향하는 보편성을 동시에 안고 있다.
근대에 들어 홍익인간의 가치를 처음으로 언급한「신사기」는 인류의 출현에서부터 문명을 잡아가는 과정을 만듦[造化]과 가르침[敎化]과 다스림[治化]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이 글에서 보면, 우리 민족에 국한된 사상이나 족보와 같은 폐쇄적인 흔적은 추호도 없다. 더욱이 근대 이후 우리 민족사회 전반의 중요한 담론이었던 ‘단군’이라는 용어가 하나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래 신교의 경전인 「삼일신고」와 「신사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인류 보편적 가치인식은 「삼일신고」의 ‘신훈(神訓)’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나 철의「신리대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오히려 나 철은 일반포고문이나 문서에서는 우리의 국조이자 족조(族祖)이며 단군신앙으로 본다면 교조(敎祖)가 되는 단군을 내세워 민족의식을 고양하면서, 한편으로는 인류보편적인 신을 수용하고 사용함으로써 민족이라는 특수성과 종교라는 보편성을 조화시켰던 것이다.
특히 이와 같은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은 전래의 신교 규례에서도 잘 드러나 있는데, 다른 종교나 종교인에 대해 지극한 존경의 예로 대하라는 것과 타종교의 선열들에게도 공경히 대할 뿐만이 아니라, 일반 교인들에게도 종교와 종교의 벽을 넘어 이단(異端)이 없는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를 갖추라고 일러 주고 있다. 이것은 실로 현금 회자되는 종교다원주의의 가치보다도 그 단계를 훨씬 뛰어 넘는 대아적 종교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철이 대종교를 세운 뒤에 발포한 ‘오대종지’에서도 ‘사랑으로 인류를 합할 것(愛合種族)’이라는 항목은 이러한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홍익인간적 가치와 관련하여 나 철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하늘의 뜻에 의해 인간이 사이좋게 지냄을 뜻하는 ‘호생(好生)’이라는 표현을 썼다. ‘호생’이란 우리 민족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로써, 중국 송나라 때 범 엽이 쓴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에 『왕제(王制)』를 인용하여 나오는 말이다. 그 기록을 보면 “夷는 抵다. 즉 그들은 어질어서 만물을 잘살게 하며 大人으로서 땅위에 살고 있다(夷者抵也 言仁而好生萬物 抵也而生)”고 나타난다. 여기서 저(抵)라는 글자의 의미는 ‘대(大)의 뜻과 아울러 땅에 접(接)한다’는 의미로써, 군자(君子)의 의미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이 우리를 상징하여 ‘대인(大人);‘호생(好生)’;‘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이라고 호칭한 배경에는 우리 고유의 홍익인간의 가치 기반이 크게 작용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철은 ‘호생’이 인간관계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덕(天德)으로 엮어지는 사이좋은 인간의 삶으로 이해했다. 천덕은 달리 표현한다면 하늘의 아량이요 신의 섭리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신교의 전래 비서(秘書)인 『신교총화(神敎叢話)』에 ‘호생이 하느님의 마음(上帝好生之心)’이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이해가 간다. 또한 『참전계경』「숭덕」조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보면, 천덕의 의미가 인간의 의지로만 엮어질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덕은 천덕이니, 천덕이란 가문 땅에 단비요 그늘진 골에 봄볕과 같다. 잠시라도 천덕을 품지 않으면 사람은 사람되지 못하고 사물은 사물되지 못한다. 까닭에 밝은이는 부지런히 천덕을 칭송한다.)”
이것은 사람이 사람답고 사물이 사물다우려면 천덕과 어울려한다는 말로, 여기서도 천;지;인 조화사상이 발견된다. 까닭에 홍암의 ‘호생사상’은, 인간이 서로 사는 관계로 통용되는 상생(相生)을 넘어, 천리(天理)와 철학이 깃들어진 승화된 인간의 삶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호생사상은 하늘정신에 따라 어질게 사는 것과 직결되는 것으로, 이러한 정신은 우리의 국토나 우리의 민족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의 대동이상(大同理想)이자 사해일가를 위한 정신적 조화의 기반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렇듯 ‘호생’은 홍익인간과 상통하는 말로써 단순한 인본주의(Humanism)가 아니며, 우리 민족의 조화로운 삶을 전래적으로 표현해 온 접화군생의 가치와도 일치한다 할 것이다. 이것을 나 철의 가치로 달리 표현한다면 홍익인간이나 접화군생도 천덕과 연결이 안 되면 이룰 수 없다는 논리가 된다. 안재홍은 접화군생의 가치가 홍익인간과 표리본말 관계로써, 접화군생의 기상이 없이 홍익인간의 염원이 생길 수 없고 홍익인간에 대한 바램이 열렬하면 저절로 접화군생의 감격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정인보도 홍익대도의 교조(敎祖)는 단군으로써, 홍익이란 그 대도의 교의(敎義)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홍익인간 정신이야말로 전래 우리 민족 공통의 교의로서, 홍익인간의 교(敎)가 접화군생의 도(道)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의 인류적;보편적 가치는 접화군생의 가치와 동일한 것이며, 인종;민족;국가;종교;이념 등을 초월하는 개방적;상생적 가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홍익인간의 가치론적 동의어인 접화군생은, ‘한’의 존재론적 속성의 외연이며, 삼일철학의 인식론 사고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그 바탕에는 조화와 통섭이라는 현묘한 질서가 끊임없이 숨쉬기 때문이다.
Ⅳ. 맺음말
철학은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포괄적 질서를 다루는 학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철학은 우리 민족의 삶을 규정하는 질서 구명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국학과 한국철학’이란 이 논문의 주제를, 이 글에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통한 삶의 질서를 구명하는 작업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여기서는 한국철학의 의미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토대로 형성된 우리 민족의 실체와 삶과 지식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해했다. 여기서의 정체성이란 모방적 주체가 아닌 주체적 자각을 의미하는 것이며, 주체적 자각을 위한 요건에도 국학의 내적 속성인 ‘사상적 정체성’;‘공간적 차별성’;‘시간적 연속성’ 그리고 ‘보편적 개방성’을 그대로 적용시켰다.
또한 한국철학의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철학의 일반적 접근방법인 존재론;인식론;가치론적 측면을 동원했으며, 그 대상으로는 ‘한(Han)철학’과 ‘삼일철학(三一哲學)’ 그리고 ‘홍익인간’으로 나누어 살폈다.
먼저 존재하는 것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분야인 존재론에서는, 우리 민족 사고의 존재태(存在態)라 할 수 있는 한철학을 설정하여 접근했다. ‘한’은 우주만물의 원인이 되지만 결코 만물이 ‘한’의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은 가장 작고 가장 크며, 지극히 좁고 지극히 넓은 까닭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을 에워싸고 있는 동시에 현실세계의 조그마한 미물(微物)까지도 ‘한’에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다. 한마디로 우리의 철학에 있어서의 ‘한’은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사유의 존재태(存在態)’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사고의 규칙과 인식에 대하여 탐구하는 인식론에서는, 우리 철학에 있어 인식의 기준과 판단이 되는 삼일철학을 설정했다. 삼일철학은 우리 민족의 선험적 규범으로서, 인간 본연의 깨달음을 인시하는 지침인 동시에 인간의 삶의 질서(조직;규범;체제)로도 작용함은 물론, 한민족의 생활방식을 시;공을 넘어 규제하는 최상의 인식장치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가치를 탐구하는 가치론에서는, 우리 민족 최고의 윤리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내세웠다. 우리 민족의 삶에 있어 홍익인간이라는 가치만큼 포괄적인 의미규정도 드물며, 그것은 단순히 철학적 가치를 넘어 우리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모든 분야에 나타나는 궁극적 가치덕목으로, 우리 민족의 정서적 국시(國是)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은 우매한 필자의 시론(試論)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국학의 의미규정에 대해 다양한 이론이 있을 수 있고, 한국철학의 의미와 논리에 관해서도 수많은 생각이 상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성격의 선행연구가 전무한 상황에서, 국학과 연결된 한국철학의 실상을 말한다는 것이 필자의 무지한 만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향후 고매한 현학들의 채찍과 가르침을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