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암울했던 시절..
세상이 쳐놓은 울타리를 과감하게 부숴버리고 제도보다는 인간을 중시한
일군의 멋쟁이들이 등장했습니다.
말을 타고 칼을 찬 게 아니라 붓과 악기를 들고 있었지만
그들은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이자 영웅들이었습니다
1770년 8월 22일 남산자락 永禧殿 북쪽 담장에 위치한 ‘봄이 머무르는 언덕’(留春塢)이라는 멋진 이름
의 담헌 홍대용의 별장. 뜰이 깊어 대낮에도 정적이 감도는 곳. 한낮의 바람이 꽃잎 몇을 섬돌위에 사뿐히 올려
놓으면 일순 정원의 고요함을 부수는 풍류객들의 발길이 이어져 가야금과 거문고, 퉁소와 洋琴이 어우러지고,
생황 반주에 노래가 곁들여 현악기가 중심이 된 줄풍류, 음악회가 벌어졌습니다
홍살문 옆 숲에서 본 건릉 (정조와 효의왕후김씨의 합장릉)전경
조선시대 르네상스
조선 정조(正祖·1752∼1800) (재위기간 1776∼1800)시대는 한국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
로 통한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희망과 변혁의 꿈틀거림이 마치 중세의 암흑에서 깨어나는 유럽 문예부흥기의
열기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변혁의 중심축은 정조 자신이었고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밑에서 학문에 정진, 엄청난 성과를 냈다.
정조시대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정약용
과 유득공이 등장한다
규장각 사검서, 시대를 주름잡다
영조43년 이덕무가 백탑 부근으로 이주하면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등 모두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으나,
서얼이란 이유로 세상의 쓰임을 받지 못하던 음지의 실력
자들이 모여들었다.
영조 45년(1769), 박제가는 백탑으로 향하며 박지원을
만났다. 박지원의 나이 서른셋, 박제가는 열아홉이었다
박지원은 박제가가 왔다는 말을 듣고 옷깃도 제대로 여미
지 못한 채 뛰어나와 어린 박제가의 손을 잡았다.
큰절골(大寺洞)은 노론 출신의 양반 사대부인 박지원과
같은 양반과 서얼 출신들이 어울리는 신분 타파의 장이
기도 했다.
상풍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을 알기를 바라며 뵈온 지가 오래되오니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봉서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우며
할아버님게서도 평안하시다니 기쁩니다. -원손(元孫)이 외숙모님게
첫댓글 나라와 정치와 사회와 인간을 괴로워하는 동안 청춘은 가고 내 안의 '정조' 또한 늙어가는구나. 세상에 자연을 사랑하고 그 안에 다친 몸 누이며 적적한 사이, 벗들은 잊혀지고 '의기' 또한 허물었는가! 아, 그러나 사랑하기론 지금이 적기로다. 잊혀지고 흩어지기 직전에서 추락하는 한톨의 씨앗처럼 어쩌면 유춘오의 아름다운 음악처럼 어느 낯선 길모퉁이든 어느 고인 웅덩이라도 이제 촉촉히 새봄을 피워내야 하느니!!
아~!..새롭게 부활할 우리들 인생의 르네상스를 위하여!! 새로운 생명의 봄을 위하여!!
정말 재미있네요. 정조가 조금 더 오래 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습니다. 그랬으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권력은 예술가의 재능을 키우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만 같습니다. 작품을 수집하고 후원하는 속에서 교양미 넘치는 관람객들이 삼삼오오 그림을 감상하는 광경을 상상합니다. 어쩌면, 나는 단지 그들 옆에서... 그들과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정도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잠깐!!^0^ 기왕 마음이 따뜻하고 여유있는 사람들 함께라면 시로 감사하고 노래로 화답하는 분위기라면 더욱 좋을 것만 같습니다. 조르바는 할 말 없으면 그저 맨날 노래,,,노래... 썰렁^^이젠 내일을 위해 기타음악들으며 취침에 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