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독誤讀과 해독解讀
──김경욱, 『위험한 독서』
김나정
책 속에서 천국을 찾든 지옥을 발견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인 당신의 몫이다.
──「위험한 독서」에서
독서를 앞두고 책 표지를 보니, 난감하다. 『위험한 독서』라니.
제목이 독약병의 해골 라벨 같다. 처방전 하단의 부작용 문구가 도드라져보일 때 우리는 망설이게 된다.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허나 위험한 것은 매혹적이다. 금기의 문구는 되레 우리를 유혹한다.
위험한 독서는 뭘까. 작가는 왜 독서에 ‘위험한’이란 수식어를 붙였을까.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 아니었던가. 허기진 영혼의 배를 채워주는. 게다가 우리는 늘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배워왔다. 책은 다른 사람이 지나온 삶의 궤적을 활자로 밟아가게 한다.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길을 만난다. 책은 우리의 갈 길을 가늠하게 해주는 네비게이션이 되어주지 않았던가.
직사각형의 종이뭉치인 책은 그 자체로는 위험하지 않다. 책장에 얌전히 꽂혀있는 책은, 칼집에 꽂혀있는 칼처럼 안전하다. 칼은 누구 손에 쥐어져 있느냐에 따라 살인도구 혹은 김장도구가 된다. 책은 ‘읽힘으로써’ 살아난다.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책의 운명도 달라진다. 같은 책이라도 독자에 따라 천차만별로 읽힌다. 이를테면 『젊은 베르테르』를 읽고 짝사랑을 접고 새 사랑을 찾는 계기로 삼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총을 잡을 용기를 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자는 노란조끼를 사 입을 수도 있고. “요컨대 독서의 성패를, 운명의 존망을 결정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태도’다.”(20쪽) 그렇다면 독서의 올바른 태도는 무엇인가?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는 책에 대한 책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책에 대해 이야기하며 삶에 대해 말한다.
■치명적 오독
어떤 태도가 독서를 위험물로 둔갑시키는가? 이정표를 잘못 읽으면 길을 잃는다. 부산을 ‘오산’으로 읽으면 엉뚱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 오독은 종종 우리를 헤매게 한다.
시 구절 하나를 잘못 외워 첫사랑과 결별한 여자가 있다. 「공중관람차를 타는 여자」의 수진은 연애편지에 릴케의 ‘엄숙한 시간’을 베낀다. 보내고 나서야 시의 마지막 구절을 잘못 외웠음을 깨닫는다. ‘지금 세계의 어디선가 죽고 있는 사람/ 세계 속에서 까닭 없이 죽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를 수진은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죽고 있다’라고 바꿔 쓴 것이다. 수진은 수치심을 느낀다. 건망증이나 빈약한 암기능력 때문은 아니다. 꿈이 무의식을 누설하듯, 말실수 역시 무의식을 드러내 보인다. 그 실수 속에는 그녀의 속내가 담겨있다. 사랑이 죽음과 함께 한다는 깨달음이 담겨있다. 죽음과 결부된 사랑은 치명적인 것이다. ‘나를 위해 죽고 있다’로 바꿔 부른 ‘자신의 속내’가 수치스러운 것이다. 그녀는 첫사랑의 선배와 결별한다.
그 뒤로 그녀는 구혼자들에게 묻는다. 오디세우스는 왜 구혼자를 모두 죽였을까요? 남자들의 해석은 제각각이었다. 수진은 ‘딸꾹질’로 대답을 대신한 남자를 선택한다. 가장 창조적인 해석이었다고 말하나, 실은 그가 치명적인 사랑과 무관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감 있는 사람과 해야 한다.”는 속셈에서였다. 그렇게 자신의 내적 진실을 외면한 결과는 무엇인가. “수진은 스스로를 속인 대가로 자신이 얻은 것과 잃은 것에 대해 따져봤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지 장담할 수 없었으나 아무리 많은 것을 얻었다 하더라도 뭔가를 잃었다는 사실만큼은 지울 수 없을 것이었다.”
한낮 공중 관람차에 앉아있는 저 여자는 누구인가. 그녀는 홀로 울고 있다.
「달팽이를 삼킨 사나이」의 아내는 볕이 드는 전세방을 얻겠다고 불임부부에게 자궁을 빌려준다. 방을 빌려주듯, 자궁을 빌려주고 돈을 받으면 된다는 계산속에서였다. 어려울 게 뭐 있담. 허나 배가 불러감에 따라 그녀의 생각은 달라진다. “더 받기로 한 천만 원 포기하고 하나는 우리가 키우면 안 될까?” 남편은 기겁한다. 아내가 자궁을 대여해주는 동안, 사나이는 달팽이를 실수로 삼켰다. 고작 달팽이 한 마리를 삼켰다니, 대단찮다. 그러나 달팽이를 삼킨 사람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의 “사연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고작 달팽이를 삼키고 나서 삶이 어떤 식으로 달라졌다는 점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별것 아닌 것, 속셈과 다른 일들이 생에는 비일비재하다. 속셈과 다른 방향으로 삶은 흘러간다. 삶이 우연한 실수로 엇나간다. 인생의 아이러니를.
■창조적 오독
「게임의 규칙」 퀴즈대회에 한 남자가 출전한다. 새 텔레비전과 아버지와 자신의 삶을 갱신할 기회를 노리고서. 승패를 가를 마지막 한 문제 앞에서 그는 과거를 회상한다. 어린 시절 그는 독학으로 한글을 뗀 영재였다. 소년이 맨처음 또랑또랑하게 읽어낸 글자는 ‘안주일절’이었다. 맞춤법에 맞추자면 ‘안주일체’라 해야한다. 그러니 소년은 훗날 “자신이 최초로 읽은 글자가 잘못 표기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비범한 재능이 과연 축복일까 하는 형이상학적 의문에 사로잡”(109쪽)히게 됨직하다. 여하간 문자 해독력이 생긴 소년은 닥치는 대로 읽어나간다. ‘글자 그대로’ 읽기의 남독은 그를 점점 별종으로 만든다. 그는 자신 속의 심연,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을 문장으로 채운다. 옆방에 대학생이 세 든다. 소년은 대학생의 책을 읽고 문장의 매력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이때 그의 독서는 문자 그대로 읽기다. 글자 자체를 읽는 것일 뿐, 문장의 속뜻이나 문장이 자리 잡은 맥락은 모른다. 하숙방 청년이 불온서적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간다. 소년은 무색무취의 문장이 불온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그는 문자 그대로 ‘문장’만 읽었지, 그 문장을 둘러싼 맥락을 읽지 못했다. 단지 앵무새처럼 문장을 암기했다는 사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 뒤 소년의 열정은 숫자로 옮아간다. 문자의 세계와 달리, 숫자는 맥락과는 무관한 순수한 기호다. 한국의 ‘1’이 태평양을 건너간다 해도 안데스 산맥을 넘어도 ‘1’은 언제나 ‘1’이다.
그러나 야구경기 관람 후 그는 숫자도 버린다. 숫자는 현실의 이면에 대해 침묵하기 때문이다.
긴박했던 순간 그라운드에 떠돌았던 긴장과 탄식과 분노와 번민을 스코어보드는 1이라는 숫자로 기록할 뿐이었다. 숫자가 표현하는 것은 고작 결과로서의 승패에 불과했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것도 해명하지 못하면서 침묵을 모르는 숫자가 그에게는 뻔뻔하게 여겨졌다. (…)문장이 위험하고 불결했다면 숫자는 뻔뻔하고 가증스러웠다.
그 후 소년은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지 못한 채 평범하게 변한다. 영재는 몰락한다. 심연을 채울 새로운 말을 찾지 못한 채 그 자신이 하나의 심연이 된다. 심연은 늪처럼 그를 빨아들인다. 부모는 영재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광수네 분식, 천제 분식’이란 분식집 이름이 적힌 쪽지를 쥐고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는 카드 빚에, 아버지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다시 퀴즈대회장. 자, 이제 마지막 문제다. 그의 생을 한번 뒤틀었던 ‘야구’에 관한 문제다. 그는 버저를 누르고 엉뚱한 답을 한다. 안타까워할 만한데, 그는 아쉬워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는 상투적인 승리 대신 독창적인 패배를 택한 셈이다. 난생처음 느낀 승부욕이 그에게 일깨운 것은 승리에 대한 강박이 아니라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독창성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일견 슬픔에 잠긴 듯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니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133쪽)
문장을 문자 그대로 읽고 암기하며 생의 심연을 메워왔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읽지는 않았다. 마지막 문제를 앞두고, 그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최초 오독의 순간부터 그 문장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로 인해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거슬러 짚어간다. 그런 과정 끝에 그는 ‘창조적 실패’를 단행할 수 있었다.
가장 창조적인 읽기의 방식이 ‘쓰기’다. 글쓰기는 독서를 자양분삼아, 독서거리를 생산해내는 작업이다. 「천년여왕」의 주인공은 소설가 지망생이다. 아내는 글을 써서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 자신”이란 대답에 아내는 선선히 찬성한다.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귀농하여 소설집필에 열중한다. 허나 독서광인 아내는 그의 작품에 딴죽을 건다. 어디서 본 것 같다며 다른 작품을 들먹인다. 표절과 모방의 덫을 피해 그는 고군분투한다. 독창적인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는다고, 독창적인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좀처럼 아내가 읽은 ‘고전’의 무게를 이기고 자신만의 글을 쓰지 못 한다. 그는 아내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는다. 어릴 적 보았던 만화영화의 주인공 ‘천년여왕’과 아내는 이모저모로 닮았다. 그는 창조성의 열망에 사로잡힌다. 그런 아내에 대한 글을 써보면 어떨까? 소설의 제목은 「천년여왕」. 창작의 고뇌에 시달리던 작가가 찾아낸 생뚱맞지만 발랄한 결론.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작품 안에 적극적으로 끌어온 작가의 이력을 떠올리게 한다.
「맥도날드 사수대작전」에는 이런 자기 식대로 읽기가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 있다. 비 오는 날 맥도날드 매장 앞에 전단지가 깔린다. 비에 젖고 발에 밟힌 전단지의 글자들은 뭉개져 알아볼 도리가 없다. 직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빠진 글자를 채워 넣는다. 이를테면 ‘XX세 X성 X자를 X취하지 마라.’는 ‘너무 세게 동성애자를 갈취하지 마라.’ 혹은 ‘망할세상 만성적자를 고취하지 마라’로, ‘아 XX의 X강을 XX지 XX.’는 ‘아우들의 요강을 넘보지 버리지 마라.’ 또는 ‘아시아의 최강을 넘보지 마라.’로 탈바꿈된다. 이 어처구니없는 해석은 테러의 위협이란 상황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비판적 의도를 가지고 사용된 전유專有는 테러의 심각성과 이를 이용하여 체제(여기서는 맥도날드)를 유지하려는 음모를 드러낸다.
■독서의 해독解毒
‘독서를 통해 당신이 발견해야 할 것은 당신 자신이다.’
표제작인 「위험한 독서」의 화자는 ‘독서치료사’다. 책으로 치료제를 삼는다.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하듯 나는 피상담자의 심리상태를 체크한 뒤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한다.’ 처방전은 다음과 같다. 방화범 청소년에게는 『금각사』를, 원조교제하는 소녀에겐 『롤리타』를, 짝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에겐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일독할 것. 한 여자가 찾아와 묻는다.
“선생님, 어떤 책을 읽으면 칠 년 사귄 남자친구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읽어야 할 책은 달라진다. 당신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먼저 자기 자신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에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권한다. 작가의 개인사나 메시지를 걷어내고, 당신 자신을 발견해보라고 한다. 다음 권장도서는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이다. 몰락한 귀족의 딸이 파경을 겪은 후, 처자식이 딸린 작가에게 구애한다는 내용이다.(화자가 여자에게 딴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이 권장 도서는 수상쩍다.) 어쨌든 상담이 거듭되며 당신은 자신을 발견하고 표현한다. ‘자기 발견’이란 독서의 궁극적인 목표가 성취되어 나가는 듯 보인다.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빵집도 열겠단다. 독서는 당신을 바꾼 것이 분명하다. 책은 그녀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고, 욕망을 갖게 만들었다. 능동적인 독서. 감춰진 저자의 뜻을 읽어내는 것보다, 내 식대로 삶을 읽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책은 거울이 된다. 당신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당신을 읽는다.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나’도 변한다. ‘당신은 나에게 어떤 책이었을까.’ 그녀는 나에게 ‘텍스트’로 다가온다. 독자가 책을 통해 변하듯, 독서치료사인 나는 피상담자인 ‘당신’을 읽으며 변화한다. 당신이 책을 읽을 때, 책은 당신을 읽고 있다. 앙드레 지드는 말했다. “나는 책 한 권을 책꽂이에서 뽑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을 책꽂이에 꽂아 놓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조금 전의 내가 아니다.” 책이 한 사람의 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는가. 당신에게는 당신의 인생을 바꿔 놓은 한 권의 책이 있는가. 지도는 당신이 길을 찾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당신의 두 발로 걸어야만, 길은 비로소 당신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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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정 /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나 상명여대 교육학과, 2000년 서울예대 문창과를 졸업했다. 2003년 좮동아일보좯 신춘문예에 소설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가 당선되었으며, 2006년 『문학동네』에 평론 「성난 얼굴로 돌아보지 마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