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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1일
해가 바뀌어 새벽 5시에 일어나 해맞이를 가려고 준비했다. 영하 10도가 된다는데 그래도 날마다 자는 잠을 더 잘 수는 없다. 아내와 둘이 5시40분에 집을 나서 북한산에 오르려고 구기동에 도착하여 대남문으로 출발하는 시간이 6시15분이다. 아내와 새벽에 산행하는 것은 처음이고 물론 해맞이를 한다고 동행하는 것도 처음이다. 컴컴한 새벽에 끊임없이 줄을 지어 걷는 등산객들을 보니 부지런한 사람이 이렇게나 많아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1시간을 걸어 승가사에 도착했고 20분을 더 올라가 비봉 정상에 섰다. 원래는 대남문과 문수봉을 목표로 산행을 시작했는데 컴컴한 탓으로 중간에 방향을 잃어 승가사 비봉 사모바위 쪽으로 온 것이다. 아무렴 문제가 없고 오전 7시50분이 되자 빨갛고 장엄한 새해 태양이 동쪽 멀리서 떠 오른다. 영하 10도의 북한산 정상에서 가족의 건강과 아들과 딸에 대한 사랑 그리고 나의 절제 있는 삶도 다짐했다. 컵라면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둥실 뜬 해를 머리에 두고 출발했던 구기동으로 내려와 집에 돌아왔다. 오전을 보내고 떡국 점심을 먹고 첫 번째 일정으로 아들과 요양원에 어머니를 뵈러 갔더니 새해가 왔는데도 어제와 다르지 않게 초췌하여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산행을 했다는 영식이는 우이동 도선사 근처라고 하면서 정초부터 과음을 했는지 횡설수설한다. 집에 와서 쉬다가 저녁에는 식사를 하고 감기 기운으로 먹은 약이 목에 걸려 밤새 고생을 했다. 아들은 밤이 늦도록 컴퓨터를 하여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정초부터 마음이 불편하고 뒤숭숭하다.
2일 어제 늦은 밤에 먹은 감기약 2알이 목에 걸려 침을 삼킬 수 없을 만큼 식도가 아파 거의 밤을 새우며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 약이 녹아 자연스럽게 해소되리라 생각했는데 오래 지속되어 고통이 심했고 숨도 제대로 못 쉬어 겁도 났고 새벽에 간신히 잠이 들 정도였다. 119라도 부를까 여러 번 생각했지만 약이 녹아내리는지 통증이 약해져 그나마 아침에는 식사도 사골국물로 마쳤다. 아들은 학교에서 일부만 뽑아서 담당 선생이 하루 2교시 수업을 해 준다고 오늘도 등교하는데 말이 그렇지 보충수업 비용도 8만원 지불하고 하는 수업이다. 짧은 시간에 어린 학생들을 모아 놓고 무엇을 가르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시간을 내어 학교에 방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오전에 체육관에 나가 운동을 하고 점심을 먹은 후에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 컴퓨터에 대하여 단단히 주의를 시키고 학원으로 출발했다. 학원에서는 고등영어 선생이 늦게 오고 감기 몸살로 고생하는 내가 수강생 상담까지 하면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신설동 1층 임대문의가 와서 강의를 마치고 택시로 갔더니 옷을 세탁하는 거대한 공장을 한다고 바로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한다. 생각보다 엄청난 시설과 물의 사용으로 인한 하수도공사 등 우리 건물 용도와는 맞지 않아 어렵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3일 기침이 계속되어 일찍 일어나 공기가 맑은 거실에 나와서 신문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나와 아내가 수업이 없어 모처럼 청주에 내려갈 계획을 세웠다. 나는 여름에 다녀오고 그 동안 한 번도 못 갔으니 무심하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식사를 하고 아들과 딸까지 태우고 집을 출발하여 일단 경기학원에 가서 일처리를 하고 신설동에서 1층 임대현수막을 설치한 후에 11시에 요양원에 들어가 어머니를 뵈었다. 휠체어에 모시고 점심식사 하시는 것을 보고 중부고속도로에 나오니 새해 첫 주말이어서 그런지 한가하고 기온도 올라 마치 봄을 맞는 느낌으로 오후 2시에 복대동에 도착했다. 장모님을 뵙고 아파트에 따로 계시는 장인어른을 뵈러 봉명동아파트에 들어가니 내일이 처가 어르신 생신이라고 재규 아빠는 제천으로 출발하고 미리 준비해 둔 고등어조림과 미역국으로 식사를 했다. 오후에는 내가 왔다는 소식에 처가 외삼촌이 달려와 소주를 마시고 삼촌이 산다는 용암동까지 갔다. 삼촌의 딸과 사위 그리고 어린 손녀까지 모여서 노래도 하고 시간을 보내다 돌아왔는데 삼촌과 재규네가 사이가 좋지 않아 대화를 하는 동안 입장이 난처하기만 했다.
4일 금년 나의 화두는 술도 돈도 성격도 절제다. 그런데 어제 외삼촌과 만나서 절제와 거리가 먼 시간을 보냈으니 작심삼일이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일요일 오전에 북어국으로 식사를 마치고 청주에서의 시간이 무료하여 서울로 가려고 나섰다. 어제 봉명동 아파트에 차를 두고 간 삼촌도 와서 인사를 나누고 나오면서 장모님을 복대동에 모셔드리고 중부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어제 와서 하루 자고 돌아가는 길이지만 얼굴 뵌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것은 없고 비용만 20만을 넘게 사용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평소에 먼 거리는 운전하지 않고 조용히 산에 가서 건강이나 챙기고 맑은 공기 마시는 일이 경제적인 생활임이 분명하다. 나이가 들어서 몸이 아프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생기면 산을 다니고 전국을 걸어서 답사하는 나의 시간을 만들어 볼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려 집에 도착하니 오후 1시가 지났고 점심을 먹고 피곤하여 쉬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후가 되어 학원에 간다는 아들이 공부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머리를 하늘로 올려 한껏 멋을 내고 나가서 아들에게 더 신경을 써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오후 3시가 지나서 아내와 안산에 올라 2시간 이상을 걷고 내려오니 역시 컨디션이 날아갈 듯 좋았고 저녁에는 동태찌개 식사를 하고 초저녁에 일찍 잠이 들었다
5일 어제 일찍 잤는데 아들이 새벽 1시에 오는 바람에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학원은 학생들이 방학 중이니 오전이나 오후에 수업을 해야지 입시생도 아닌 중학생을 추운 새벽에 보내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한 이 늦은 시간에 아들도 수업이나 제대로 하는지 염려가 되지만 일일이 따라다니며 확인할 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특히 요즘에 멋이 들어 정신이 딴 곳에 있는 것 같은 아들인데 오늘은 아들을 생각하여 친구 호성이랑 스키를 타러 가라고 하니 거절하며 안 가겠다고 한다. 청개구리가 되어 버린 아들로 인하여 요즘에 사사건건 힘들고 화가 나는 시간이 많지만 나로서는 더 인내심을 발휘해야 될 때이다. 오전에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11시30분에 요양원에 갔더니 추운 날씨만큼이나 어머니의 기력이 떨어져 보인다. 오늘 점심은 간병인 대신 내가 직접 떠서 입에 넣어드리고 요양원을 나와 1시에 학원에 도착했다. 7시가 되어 집에 오니 아내는 비만형이라 몸 관리에 신경을 쓴다고 요가를 간다. 제발 신경 써서 꾸준히 했으면 좋겠는데 1시간도 안 되어 돌아왔고 그것도 배워왔다고 딸에게 시범을 보인다. 내가 보기에는 자세부터 요가와는 전혀 다른 허우적거리는 동작에 불과한데도 계속 잘난 체를 하여 딸은 그만두고 본인이나 더 잘 하라고 했다.
6일 새벽 3시에 거실에 불이 켜져 있어 나가보니 아들이 컴퓨터를 하고 있다. 공부를 하다가 휴식 중인지 아니면 낮잠을 자서 이 시간까지 잠을 안 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 말도 안하고 다시 들어왔는데 잠시 후 아내가 나가서 큰 소리를 내니 아들은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고 컴퓨터를 방으로 들여놓자고 제안을 한다. 새벽에 늦게 방으로 들어간 아들이 일찍 일어나더니 식사를 하고 소리도 없이 학교로 출발한다. 학교 보충수업이 15일이라고 해도 주말을 제외하면 10여일이고 수강료를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데 엉뚱한 짓만 하고 제 멋대로 행동을 하고 다니니 이제는 아들을 보면 내가 정신병자가 되어가는 것 같다. 다행히 아들에 비하면 딸은 오전부터 청소를 한다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어제는 엄마를 도와서 세탁기도 돌리고 밥까지 했으니 대견함이 말할 나위 없고 같은 자식인데도 아들과 정반대의 감정을 갖게 한다. 일이 많아 학원으로 가서 어제 결석한 예비고1 학생들 상담을 하고 요양원에 가서는 어머니를 뵈었더니 오늘은 어제와 달리 만사가 귀찮은 표정으로 아들인 나의 기분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근무하는 경기학원은 성북동 대로에 위치한 건물로 임대보증금이 2억 원이고 임대료가 월800만 원이나 되는 대규모 학원이다. 그런데 임대료 연체가 2달 이상이 되어 건물의 주인이 남은 보증금을 압류하고 명도소송을 한 상태다. 장원장이 자신의 아파트를 담보로 융자를 받아 얻은 것인데 만약 계속 임대료 해결이 안 되면 건물주는 강제집행을 신청하여 학원을 내보내고 남은 보증금으로 미납된 임대료와 공과금 및 철거비 등까지 처리할 것이다. 야속하기는 해도 대부분의 건물주들은 보증금이 남아 있을 때 법적 조치를 취해서 결과적으로 자신이 손해를 보는 일은 없게 한다. 어수선한 하루를 보내고 10시경 집에 와서 절제하는 생활이 금년 나의 목표라고 아내에게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해를 못하고 건성으로 듣기만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무절제의 연속으로 살아가는 나의 생활이라 절제라는 말이 생소했을 것이다. 아들은 밤 12시 지나 수학학원에서 돌아왔고 속을 썩이는 놈이라 야속하기는 했어도 일단 추운데 수고했고 어서 자라고만 했다.
7일 새벽에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오늘 결정하여 바로 강의를 할 수 있는 새로운 고등영어 선생 면접 광고를 내고 아침에는 영식이네 동창이 경상도 구룡포에서 과메기를 판매한다고 하여 4박스를 주문하여 우리를 포함 재규네 그리고 장원장 등에게 보내려고 주소와 함께 8만원 입금을 했다. 오늘도 신설동부터 일이 많아 오전에 부지런히 다니고 학원에 들어와 모의고사 문제정리 등 수업을 준비하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으로 집에서 가져온 홍시감이 있는데 너무 커서 혼자 먹기 불편하여 밖으로 나가 얼큰하고 시원한 콩나물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오후에 강의를 마치고 저녁에 친구들 모임을 예정하였는데 영식이가 부산에 가는 바람에 취소되어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멍하니 있다가 요가를 가는 아내를 보내고 혼자 저녁을 먹는 중에 아들이 들어와서 식탁에 불러 앉혔다. 아들 때문에 내가 요즘 살기가 싫다는 말과 함께 나도 중2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혼자 살아왔으니 아들도 이제부터는 아빠인 내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간섭으로 여기고 눈에 보이는 아들의 행동은 자제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를 만들어 가니 나로서는 가급적 마주치지 않는 것이 상책일 수밖에 없었다. 고통의 심정으로 말을 해도 아들은 듣는 둥 마는 둥 씩씩거리며 밥만 먹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어디에 하소연 할 수도 없는 밤이었다.
8일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보고 사골국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오늘도 아들은 학교로 가는데 집에서도 공부 안하는 놈이 얼마나 효과적인 방학 특별수업을 하는지 아무튼 수학은 월요일, 영어는 다음 주까지 수업하는 기간이다.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우연히 만난 링컨선생과 요즘 학원 상황을 이야기하고 집에 왔다. 학교에서 돌아와 말도 없이 혼자 점심을 먹는 아들을 두고 집을 나서 요양원에 갔더니 어머니께서 주무시고 계신다. 시간이 흐를수록 의식이 흐려지고 기력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지만 오늘은 특히 심하여 안타까운 마음이었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원에 가려고 나왔다. 오늘 임대료를 보낸다는 신설동 3층은 다음 주로 미룬다는 연락이 오고 학원을 그만 둔 영어선생은 장원장과 나한테까지 강사료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여 언쟁을 벌였다. 아무튼 누구나 이기적인 존재로 만드는 탐욕스런 것은 더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양면을 가진 돈이다. 6시에 학원을 나와 독립문 근처에 차를 두고 택시로 남영동에 가서 영식이와 그의 동업자인 이정렬을 만나 영식이의 채무관계를 정리해 주었다. 해물탕으로 식사를 하는 자리에 정식이와 대신고 강선생도 달려와 함께 자리를 했는데 말이 너무 많은 강선생 때문에 결국 시끄럽고 피곤한 저녁이 되었다.
9일 아침에 아들과 딸은 사골국 나는 무국으로 식사를 했다. 어제 두고 온 차를 가지러 독립문에 갔다가 차를 몰고 돌아오니 엊그제 주문한 구룡포 과메기가 아파트에 도착했다. 일찍 학원에 나가서 일처리와 교재준비를 해 두고 오늘도 점심은 콩나물 라면으로 해결했다. 학교에 보충 수업을 나간 아들이 학교에서 전화를 하더니 선생님을 바꾸어 주어 얼떨결에 통화를 하게 되었다. 어떤 선생인지도 모르고 잘 부탁한다고만 했는데 사교성을 발휘하여 선생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좋지만 자칫 버릇이 없는 행동이 나올 수도 있다. 선생님도 학생들을 자상하고 부드럽게 대하고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엄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나의 청소년 시절을 생각하니 선했던 선생보다 과제도 많이 내주고 종아리도 많이 때린 선생님이 당시에는 원망스러웠지만 가장 보고 싶은 스승으로 현재까지 생각이 난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오늘은 강의가 힘들어 수업을 마친 뒤에 어머니도 뵙지 않고 아파트에 돌아왔다. 입구에서 경비아저씨들이 수군거리며 19층 중학생 아들이 여자친구와 아파트를 휘젓고 다녔다는 표현으로 나를 걱정한다. 집에 들어와 아침에 도착한 과메기를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고 있으니 아내가 들어왔고 둘이 앉아 아들을 걱정하며 저녁을 보냈다.
10일 어제 아들의 일로 일부 주민들까지 소문이 나서 엉뚱한 아들을 둔 아버지로 나를 생각하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시선이 곱지가 않다.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서 담담했지만 그것보다 제멋대로 살아가는 아들로 인하여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요즘 내 심기가 말할 수 없이 불편하고 아내 또한 실망스러움으로 연일 어둡고 우울한 얼굴이 지속되고 있다. 영화관을 위안으로 선택한 아내는 이른 아침에 식사도 안 하고 나가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지 아들도 거실에 있는 나를 외면하고 밖으로 나간다. 혼자 있다가 아들에게 일찍 들어오라고 전화를 하니 대뜸 저녁에 온다고 하여 당장 들어오라고 호통을 쳤다. 한참 후에 들어온 아들은 금방이라도 덤빌 듯 불만이 가득하여 일단 요양원으로 가자고 했더니 또 나가겠다고 거절을 한다.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아들의 요즘 문제를 이야기하니 말대꾸를 계속하고 상관하지 말라는 투의 이야기를 하여 소리를 지르고 먹던 밥그릇을 식탁에 던졌다. 15년 동안 아들을 키워왔지만 가장 실망스럽고 화가 난 오늘이고 마침 논술학원에서 점심을 먹으러 들어온 아내는 바라만 보다가 딸이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혼란스런 생각으로 집을 나와 학원의 일처리를 마치고 요양원으로 가서 어머니를 뵈었더니 집에서의 감정이 조금 누그런진다. 저녁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우리 아들이 공부도 잘하고 달리기도 잘한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했다. 마음이
심난하니 허세가 생긴 것이고 술과 함께 억지로 시간을 보내고 12시에 들어왔다.
11일 아무 감각이 없고 왜 사는지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갑자기 삶이 혼란스러워진 아침이다. 작년에 어려움 속에서 살아왔는데 해가 바뀌니 이제는 아들로 인하여 순탄치가 않다. 추위가 매서운 1월의 한겨울이지만 밥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홍제역과 풍림아파트 뒤를 걸어서 북한산에 올랐다. 탕춘대 길을 지나 비봉을 통과하고 사모바위에 이르니 12시가 되어 서울이 한 눈에 보이는 바위 아래에 앉아 누룽지탕을 먹었다. 사모바위를 출발하여 문수봉 쪽으로 산행을 하는데 겨울 가뭄으로 먼지가 심하게 일어날 정도였고 청수동암문 대남문 대성문에 다다르니 1시30분이 되었다. 계속 북한산 능선을 걸어 보국문 대동문 용암문을 거쳐 3시에 우이동 도선사 방향으로 내려왔는데 산 아래라서 금방 어두워 질 기세다. 이 곳 도선사는 과거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와 영부인 육영수 그리고 정주영 현대 회장의 위패가 있을 만큼 한 눈에 보아도 재력이 넘치는 사찰인데 오늘도 석탄일처럼 화려하고 흥성스럽다. 오늘 홍제동에서 반대방향 우이동까지 고통을 잊고 나를 찾기 위한 마음으로 4시간 이상을 걸었는데 의미와 보람이 있어 좋았고 사찰 아래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어머니를 뵈러 출발했다. 시내 외곽을 통과하여 도착한 요양원에서 식사를 도와드리고 바짝 마른 어머니의 등과 어깨를 쓰다듬어 드렸다. 오늘은 잠이 잘 오겠다는 말씀을 뒤로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와 딸은 음악회에 갔고 적적한 거실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 일찍 잠이 들었다.
12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컴퓨터로 신설동 3층 명도소송 내용을 작성하고 다시 자다가 8시에 일어나 참치찌개로 식사를 했다. 오늘은 아침 기온이 영하 10도 체감온도는 영하 15도라니 매서운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1월의 중순이다.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전에 아내는 동사무소로 영어를 배우러 가고 나는 체육관으로 가면서 새벽에 작성한 내용증명을 우체국에서 발송했다. 12시30분에 운동을 마치고 집에서 점심을 한 뒤에 새로 채용한 고등영어 선생을 만나러 일찍 학원으로 나갔고 다행히 오늘부터 첫 수업이 가능하다고 하여 안도를 했다. 아들의 학교에서 얼마 전에 통화한 선생으로부터 오늘 아들이 연락도 없이 결석했다고 전화가 온다. 학교에 간다고 아침에 나가더니 중간에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고 보내는지 또 걱정스럽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하니 여동생 식구들과 그리고 오늘 학교도 가지 않은 아들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음악회 감상을 한다고 응답을 한다. 저녁에 집으로 모두 들어와 일전에 주문한 과메기를 함께 먹으며 대화를 나누다보니 벌써 원석이는 고등학생, 유진이는 중학생이 된다고 하고 결국 여동생 가족 때문에 오늘 아들 문제는 꺼내지도 못했다. 늦은 밤 여동생과 조카들이 떠나고 음식이 많이 남은 식탁을 돌아보면서 내 여동생을 환대해 준 아내가 나로서는 고맙기만 했다.
13일 저녁에 방이 너무 더워 거실에 나와서 잤다. 밖은 영하 10도인데 안방은 더워서 땀이 날 정도이니 낭비가 심하다는 인식으로 바로 온도를 줄였다. 잠이 깬 컴컴한 새벽에 나와 아내의 핸드폰 소리가 동시에 요란하게 울려 놀라서 보니 장모님이시다. 이 새벽에 무슨 전화인가 싶어서 연락을 하니 충전을 하려다가 잘못 눌러 입력된 사람들 모두에게 연락이 갔다고 한다. 아침식사를 하고 조사장을 만나러 개봉동에 갔다가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곧장 학원으로 돌아와 김치찌개로 점심을 사 먹었다. 오후에 원장과 미팅을 하며 현재의 수강생을 파악하니 초,중,고 경기학원 원생이 전체 80명이다. 최하 100명은 되어야 임대료 강사료 등 기본적인 유지를 할 것인데 규모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이 아닐 수 없다. 수업을 마무리하고 날이 추워 바로 집으로 돌아와 어제 남은 과메기를 먹었다. 체질에도 잘 맞고 소화도 잘 되고 맛도 있어 다음 주에 다시 신청하리라 생각을 했다. Tv를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새벽 2시에 시끄러운 소리에 거실에 나가보니 아들이 들어왔고 늦게 들어온 것에 대하여 화가 난 아내가 노발대발 분을 삼키지 못하고 있다. 이 늦은 새벽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온 것인지 아들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고 집안의 큰 고민거리다.
14일 어제 새벽 2시에 들어온 아들 때문에 잠을 못자고 더구나 아침에 식사준비가 안 되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다. 노래방이나 PC방도 학생들은 밤 10시면 마치는데 아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여자 친구를 사귀고 학교도 안 가고 자기 멋대로 놀아나는 아들에게 현재는 무슨 말을 해도 대화가 어려우니 우선 나를 지키는 일이 필요하다. 분노를 참지 못하면 병이 생기고 집안도 시끄러워질 뿐만아니라 아들과 감정의 골도 깊어지는 뻔한 상황이니 가급적 거리를 두고 각자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했다. 아들이 나이가 어려서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오늘 고등영어 선생이 정규수업을 처음으로 했는데 학생들 반응도 좋고 실력도 있는 것 같아서 한 걱정을 덜었다. 녹번동에 산다기에 함께 와서 집에 차를 두고 한양상가 1층 호프집에 들어가 강의에 대하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해보자고 자리를 한 것인데 이력서 내용과는 달리 대학교를 중간에 그만두었다고 하여 약간 난감한 상황이 생겼다. 졸업장이 있어야 교육청에 신고를 하는데 실력이 있다고 해서 계속 맡기자니 불안하고 그만두라고 하자니 혼란을 수습하기가 쉽지 않아 당분간 시간을 두기로 했다.
15일 새벽에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8시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답답하여 일찍 학원에 나갔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이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로 인하여 무미건조한 일상이 되어가지만 건강하게 일을 할 수 있는 현재가 즐거운 시간임은 분명하다. 학원에서 커피를 마시고 거리로 나와 성북동 주변에 있는 학원을 돌아다니며 기웃거려 보았는데 가는 곳마다 수강생들이 생각보다 많다. 만약에 경기학원이 건물주의 소송으로 강제로 철거가 되고 강의를 못하게 되면 남아있는 수강생들을 인솔하여 다른 학원으로 가서 강의를 하든지 아니면 내가 직접 새로운 학원을 만들어야 한다. 다행히 SLS학원에 빈 공간이 많고 대화도 잘 되어 강의실 임대를 약속했는데 학원 전체를 매수도 하라기에 긍정의 답변을 남겼다. 날이 쌀쌀하여 밖으로 나와 동태탕으로 점심을 사 먹고 학원에 들어가서 장원장을 만나니 강사료 일부를 입금한다. 고등부는 내가 전체 받아서 배분하기 때문에 일부분씩이라도 수시로 나에게 입금을 하는 중이다. 오후에 수업을 마치고 요양원에 갔더니 여동생이 삶은 고구마와 사골국을 가지고 와서 어머니와 여러 간병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집으로 오면서 장안동 정식이를 만나러 갔다가 그의 사무실 건너편 제일모직 아울렛 매장에 들어가 147,000원을 지불하고 색과 디자인이 좋은 반코트 하나를 선뜻 샀다. 옷을 잘 사 입지 않는 내가 날씨가 워낙 추워서 필요했던 것이고 이후 정식이를 만나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16일 어제 늦은 밤에 아무런 기상 변화가 없었는데 아침에 거실에 나와 보니 눈이 많이 내려 건너편 아파트 지붕 위와 안산 정상이 흰 눈으로 장관이다. 대조적으로 식탁에서는 원수처럼 으르렁대는 가족끼리 눈도 마주치지 않고 각각 김치찌개로 식사를 마쳤다. 창 밖에는 2009년 들어서 처음 내리는 눈이 답답한 내 마음을 식혀주었고 그렇게 오전의 시간이 흘러갔다. 신설동 3층은 임대료를 계속 연체하여 한전에 연락하여 단전을 건의하니 건물주 마음대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전 세입자도 임대료를 지체하더니 이번 세입자도 만만하지 않아 일전에 다녔던 북부지원 앞 법무사에 가서 또 상담을 하고 대책을 의논하였다. 건물주인 내가 악한 사람이었다면 세입자들도 쩔쩔매었을 것인데 젊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이니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법무사는 이야기한다. 임대업은 역시 돈을 받아야 하는 일이라 매서운 마음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고 아무튼 현재 나로서는 법대로 하는 길뿐이다. 차를 몰고 요양원 가서 어머니를 뵙고 1시간 이상을 보내다 학원으로 돌아와 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에 수업을 하고 마쳤다. 어제 정식이와 술을 해서 오늘은 바로 돌아와 고등어조림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피곤하여 일찍 잠이 들었다. 오늘 정리하기를 이제부터는 아들에게 간섭이나 관심을 멀리하고 스스로 살아 보게 하는 것이다. 아들도 좀 자랐는데 아버지라고 구속하고 어린애처럼 보살피는 일은 서로 혼란스럽고 결국 부딪치는 것밖에 없으니 당분간은 거리를 두고 생활하는 것이 좋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17일 아침 식사하고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마친 뒤에 신설동으로 갔다. 옥상에 있는 물탱크가 혹한기에는 문제가 있다기에 도착하여 올라가니 완전히 얼어서 노란 물통 중간에 금이 갔고 물이 넘쳐 옥상은 물바다가 되었다. 설비업체에 가서 상담하며 대책을 합의하고 요양원에 갔더니 언제 왔는지 아내와 딸이 거기에 있다. 내가 들어서자 그래도 아들이 와야 든든하다고 말하는 어머니 때문에 옆에서 어깨를 주물러 주고 있는 아내에게 미안했다. 휠체어에 모시고 대화를 하며 보내다가 4시에 동태와 양파 그리고 감자 등을 구입하러 경동시장에 들어갔더니 구정 전이고 주말 오후라서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장사꾼들의 목소리까지 겹쳐서 글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된 시장바닥이다. 저녁에 불광동 킴스클럽에 들러 일전에 맡겨둔 아내의 구두를 찾고 집에서는 동태찌개를 만들어 먹었는데 아들은 오늘도 어디에 갔는지 흔적이 없다.
18일 새벽에 일어나니 배가 고픈데 모두가 잠을 자고 있어 혼자 밥을 챙겨서 먹고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언제부터인가 충주 근처에 있는 수안보와 미륵사탑 그리고 월악산을 가 보고 싶었는데 오늘 내부순환도로를 달려 동서울 톨게이트를 9시9분에 벗어났다. 평소에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계속 되더니 여주를 거쳐 충주를 지나 괴산 IC까지 가는데 하필 오늘 비가 많이 내려 아쉬움이 생긴다. 괴산 근처는 내륙 산간이라 비대신 눈이 많이 내려 천천히 운전을 했는데 역시나 여기저기 사고가 많다. 11시경 수안보에 도착하여 미륵사탑으로 들어섰는데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하여 차를 돌려 상록온천에 들어가 온천 목욕을 했다. 오후 2시에 점심도 할 겸 밖으로 나오니 해가 쨍쨍하여 마치 나에게 훼방꾼과도 같은 오늘 날씨다. 3시에 미륵사지탑에 도착하니 아직도 탑과 귀부 등은 지난날 화려한 시간을 말하여 주는 듯 했고 하늘재 고개를 30분을 올라 문경시내가 보이는 포암산 중턱까지 눈밭을 걸어 도달했다. 하늘재는 문경과 충주, 경상도와 충청도룰 나누는 고갯길인데 삼국시대에 생겨 아직도 신비로운 자연으로 옛사람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호젓하고 아름다운 길이다. 왕복 1시간 이상을 인적도 없는 눈길을 걷고 내려오니 탈속의 세계를 다녀온 듯이 정신이 몽롱하고 황홀하다. 4시30분에 월악산 송계계곡을 지나 충주를 거쳐 서울에 8시에 도착했다. 오늘 나만의 의미가 있는 하루였는데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하면서 마음정리도 하는 시간은 누구나 필요할 것같다.
19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컴퓨터하고 신문을 보고 나니 7시가 지났고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1시간을 보냈다. 일찍 일어나면 새벽의 시간이 아까운데 악기나 골프를 배우든 외국어를 배우든 적절하게 시간을 활용하는 계획을 세워볼 것이다. 8시30분이 되어도 아들과 딸은 잠을 자고 아내는 바쁜 것 같아서 혼자 식사를 준비하여 해결하고 체육관으로 나가 운동을 마쳤다. 바로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 식사하시는 것 도와드리고 신설동으로 나와서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사 먹었다. 오후에 1층을 임대하겠다는 사람을 만나 보증금 1천만 원에 월세 150만 원으로 의류디자인 사무실 계약을 하고 계약금 100만 원을 먼저 받았다. 학원에 도착하여 수업을 하고 오늘도 인상을 찌푸리며 다니는 장원장과 긴 시간 미팅을 했다. 현재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것보다 학원에서 나오는 수입을 가지고 그 동안 차용한 금액이나 연체된 임대료 그리고 공과금 등을 지급하다 보니 골을 메우는 시간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는 1월의 중순, 영식이를 비롯하여 여러 친구들과 통화를 하고 홍제동에 도착하여 오랜만에 링컨학원을 방문하였더니 커피를 대접한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는 순간에 자신의 고향 경남 남해의 특산물이라고 유자차 1통을 전해 주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집에 들어오니 아내는 요가를 갔고 썰렁한 거실에서 아침처럼 나 혼자 저녁식사를 마쳤다.
20일 새벽에 일어나 신설동 3층 세입자에게 사무실에 설치한 주거시설을 철거하라는 내용증명을 작성했다. 기존의 임차인이 3층을 임시로 막아서 침대를 두고 숙식을 해결하여 화재위험 등을 감안하여 불가하다고 여러 번 지적을 했는데 아직도 시정이 되지 않았다. 2002년 10월 22일 건물을 매입하여 세입자들을 관리해 오고 있는 중인데 사람도 여러 종류고 임대료 받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모르는 사람들은 때가 되면 임대료가 자동으로 들어오는 줄 알지만 세입자들은 요구하는 것도 많고 금전적이 부분으로 대부분 임대인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평소에 나는 7시30분만 지나면 배가 고프고 또 반드시 아침식사를 하기 때문에 주로 늦잠을 자는 가족들과는 떨어져 혼자 먹는 시간이 많다. 오늘도 내가 밥을 만들어 8시가 지나서 먹다 보니 인생은 혼자 왔다가 가는 것이 분명하고 동행하는 가족이 있다지만 그것은 순간의 발맞춤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체육관에 나가서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이번에는 라면으로 혼자 점심을 하고 학원에 도착하여 강사료 일부를 받았다. 학원 근처에서 우연히 대일학원에서 함께 강의했던 추경문 선생을 만나니 고향의 후배처럼 반가웠고 인물은 못 생겼어도 순수하고 인품을 가진 비상에듀 대표 국어선생이다. 오후에 요양원에 영식이가 딸기와 제과점 빵을 많이 사 가지고 방문을 했는데 1년 동안 빠지지 않고 매월 문안을 오는 고마운 친구 놈이다. 함께 요양원을 나와 신설동에서 유명한 해장국집으로 왔다가 다시 장안동으로 이동하여 근처에 있는 정식이를 불렀다. 많은 친구들 중에서 특히 정식이와 영식이는 나와 대화가 잘 되어 오늘도 희희락락 맛있게 먹고 내가 비용을 지불했다. 밤 10시에 들어오니 아내는 깊은 잠에 빠져 있고 아들과 딸은 어디에 있는지 쥐죽은 듯 조용하고 썰렁한 거실이다. 안락한 공간이 되어 가족 누구라도 머물고 싶은 곳이라면 좋을텐데 텅빈 창고에 들어오는 기분으로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부족한 가장인 내 탓일 수 밖에 없다.
21일 어제 장안동 정식이 사무실 부근에 차를 두고 전철을 타고 와서 아침에 3호선과 5호선을 갈아 타며 장안평역에 내렸다. 10여분을 걸어 친구 사무실에 들어가 녹차를 마시고 요양원에 갔더니 벌써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특이하게 식사가 국수로 나와 분식을 좋아하시는 어머니께서 맛있게 잘 드신다. 학원에서는 강사료 일부를 지급받았는데 날마다 들어오는 수강료를 고등부가 모두 가져간다고 카운터에서는 불만섞인 소리를 내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가는 중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한바탕 눈을 퍼 붓는다. 돌아가신 형님이 5년 만에 어젯밤 꿈에 보여서 그런가 하루종일 기분이 우울하고 불안하다. 꿈에서 만난 형은 패기도 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어 힘을 내라고 붙들고 외치면서 잠을 깼다. 살아 있을 때는 꿈속의 모습과 반대로 박력이 넘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형이었는데 그립고 보고 싶은 오늘이다. 7시경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설날에 선물을 전하려고 평소 고마운 분들의 명단을 만들어 보았고 연휴에 만나려는 계획도 세웠다. 의미있게 1월을 보낸다는 생각을 하는 중에 용산역 재개발 과정에서 저항하는 세입자에게 정부가 공권력을 발동하여 많은 사망자가 생겼다고 TV뉴스 속보가 나온다.
22일 어제 밤 9시에 잠을 자고 새벽 3시에 거실에 나오니 아내가 앉아 있고 다시 들어가 자다가 6시에 일어났다. 신문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여 8시가 되어서는 내가 아침식사를 준비하여 콩나물국으로 해결하였다. 9시가 지나도 아들과 딸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자고 있고 TV에서는 유명한 작가가 나와서 중년의 삶을 이야기 한다. 결론은 현재의 삶을 소중히 하고 매사에 만족하고 살아가라는 원론적인 당연한 내용이다. 세월이 빨라 조금만 다른 일에 신경을 쓰면 금방 일주일 열흘이 지나 버리는데 오늘은 보름만에 안산에 올랐다. 산을 걷고 나무를 보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집에 돌아오니 아들은 컴퓨터를 하고 나를 외면하고 있어 딸하고만 점심을 먹었다. 1시에 학원에 도착하여 업무를 보고 수업도 하며 오후를 보내고 경동시장으로 가서 서울에 오신 영식이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로 일본에서 만든 물렁한 과자를 많이 샀다. 곧바로 서울역 근처에 사는 영식이 형님 집으로 가서 인사를 드리고 영식이와 방배동으로 이동하여 부산에서 운반선을 운영하는 신영재 사장을 만났다. 춘천에서 자라고 외대를 나온 우리와 나이가 같은 선박의 실질적 소유자인데 투자자인 영식이와 발을 맞추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8시경 만나서 베링해의 큰 파도를 헤치고 랍스타를 운반해 오는 과정과 미래의 계획까지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왔다.
23일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고 잠을 3시경 잤다. 눈을 뜨니 아침 8시가 되었는데 토종닭 국물을 만들어 놓은 아내가 아침 식사를 청한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 나를 꼬박꼬박 밥을 챙겨주고 논술수업까지 하며 살림을 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TV에서 소설가 박범신 씨가 나와서 아내와 맞는 것이 하나도 없어 많이 싸웠는데 나이가 들어 보니 그 아내가 측은하다는 강연을 한다. 아직은 나이가 많지 않은 나지만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고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고마운 계기가 될 수 있었다. 10시가 지나 안산에 오르니 영하 8도의 기온으로 바람까지 불어 차가운 산 속의 시간이다. 정상을 돌아 산악회 운동장에서 기구운동도 하고 12시에 집에 들어오니 일주일 째 말을 하지 않은 아들이 혼자 점심을 먹고 있다. 인사나 식사하라는 말은 고사하고 고개도 돌리지 않는 아들을 보면서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인사는 존경의 마음이 있을 때 고개 숙임이 가치가 있는 것이지 억지로 아버지라고 강요하고 윽박지를 수는 없다. 집을 나서 지하철로 학원에 1시에 도착하니 영어선생이 따뜻한 둥글레차를 가져다 주어 가뜩이나 쓸쓸하고 허전한 상황에서 고맙게 잘 마셨다. 술을 마신날 다음에는 확실히 강의가 힘들어 오늘도 그렇고 가급적 절주를 하고 건강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명절이 4일 남은 오후에 고향 경상도에 내려가는 영식이는 괴산 휴게소를 지난다고 전화가 오고 장원장은 밀린 강사료를 일부 입금해 준다. 오늘이 금요일이니 내일부터 연휴로 접어들어 당분간 학원수업도 없는데 명절이라고 선생들 선물도 준비하지 못한 초라한 분위기의 오후다. 20년 이상 학원생활을 하면서 명절날 선물이 없는 경우는 나로서는 이번이 처음이고 교무실에서 선생들한테 면목이 없어 밖으로 나오니 체감온도가 영하 15도는 되는 것 같고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다. 연휴가 시작되는 금요일 밤 거리는 차량으로 주차장을 이루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고향으로 향하는 TV의 귀성 차량행렬을 부러움으로 시청했다.
24일 눈이 내리고 기온은 영하 10도의 새벽이다. 어제 저녁부터 밤새도록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뉴스가 나오지만 한편으로 눈이 많이 내려 교통대란을 예고도 한다. 아침에 아들과 딸은 늦게까지 자고 혼자 식사를 하고 있노라니 집안 분위기도 그렇지만 마음도 춥고 어수선하다. 나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생활하는 아들과 각각 살아가는 듯한 식구들, 얼마전 아내가 말한대로 콩가루같은 집안이다. 옛날 어른들이 말하기를 부모가 부족해도 자식이 따라주고 들어주는 것이 도리라고 배웠는데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고 살아가는 현재의 아들에 대한 대책이 아무 것도 없어 무기력한 내 모습이다. 나에게 아들은 큰 사랑이고 가장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였는데 요즘은 그것들이 멀어져 가는 느낌이어서 서글픈 느낌도 없지 않다. 점심을 먹고 어머니에게 가서 1시간 넘게 보내고 신설동으로 와서 라면을 먹었다. 오늘 수업이 없다는 아내와 딸은 불광동 킴스클럽으로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고 주말이라 나도 일찍 5시가 지나서 집에 오니 생소한 운동화가 현관 입구에 놓여 있다. 아들과 함께 다닌다는 여자친구가 온 모양인데 당황스러웠고 내가 잠깐 방으로 들어간 사이에 재빠르게 현관을 나간다. 이제 중학교 2학년을 마쳐가는 아들을 어찌해야 하는지 창밖을 보면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밖으로 나간 아들은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고 내 자신의 무력함을 견딜 수가 없어 홍제역 근처까지 걸어가 술을 마신 춥고 긴 밤이었다.
25일 최근 들어서 나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아들과 대화가 없는 삭막한 하루를 시작하는데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과 고민이 많다. 아침 식사를 조금하고 베낭을 메고 집을 나서 북한산성 아래에 도착하니 12시가 지났다. 최정상 백운대를 향해 오르는데 눈이 펑펑 내려 위험한 정상을 포기하고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능선을 걷는 중에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내 평생에 이렇게 휘몰아 치는 눈보라는 처음인데 산 정상에서의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 지경이다. 어제와 오늘의 우울함이 한 순간에 날아가는 듯하여 정신을 놓고 바라 본 오늘의 장관이 오랫동안 기억이 남을 것 같다. 오후 4시에 눈 덮인 산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오늘 내린 눈으로 교통대란이 생겨 고향에 가는 사람들이 고생을 한다는 뉴스가 나온다. 내일 차례를 지내기 위하여 신내동에 준비하러 간 아내와 딸은 아직 미도착이고 아들은 컴퓨터 앞에만 꼼짝 안 하고 앉아 있다. 산에서 점심을 커피 한 잔으로 해결한 터라 배가 고프고 촐촐하여 생오징어를 익혀서 먹었다. 오후 6시에 딸이 들어왔고 아내는 내일 중계동 여동생에게 줄 설날 선물을 산다고 킴스클럽에 갔다고 한다. 저녁에 동네에 사는 차용곤 연락을 받고 나가니 나에게 줄 차용액 일부를 현금대신 주유소 상품권으로 전한다. 안 받을 수도 없었지만 금전 거래는 서로 못 할 일이고 해서도 안 되는 어려운 일이다.
26일 구정 명절이다. 새벽에 누워서 지난 날을 생각해 보니 동화 책처럼 선명하다. 설빔을 준비하는 흥겨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까지 바쁘게 오가며 명절을 준비하고 양 손에 떡을 들고 뛰어다닌 그 시절이 그립다. 차례를 마치기가 무섭게 상위에 놓인 곶감을 차지하려고 형과 싸웠던 일, 아침에는 세뱃돈을 받는다고 동네를 다니면서 어른이라면 무조건 절을 했던 영악한 내 모습도 있었다. 이른 아침에 아내와 딸을 태우고 요양원에 8시30분에 도착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신내동으로 들어갔다. 차례를 지내고 식사를 하고 세배를 드렸는데 어머니께서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앉아만 계신다. 아마 오늘이 어머니에게 올리는 마지막 세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에 착찹함이 다시 일어난다. 점심 쯤에 요양원에 모셔드리고 집으로 오는데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서울 시내가 완전 주차장이다. 신설동을 거쳐 성북동과 삼청동 청와대 앞 길을 돌아 집에 들어와서 저녁을 먹었고 정월 초하루도 이렇게 빠르게 보냈다.
27일 구정 명절 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이제는 엊그제와 반대로 고향에서 돌아오는 행렬이 서울쪽으로 이어진 화면이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아침 식사를 하고 북한산에 오르려고 10시경 집을 나서 오늘은 처음으로 구파발 근처 진관사 입구에 차를 몰고 도착했다. 진관사 사찰은 크지는 않은데 오래도 되었지만 역사적인 사연을 간직한 곳으로 6.25때 불탄 것을 다시 보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관사 옆을 돌아 북한산 서북쪽으로 오르니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아 내린 눈으로 길조차 구별을 못할 지경이다. 나도 처음으로 가는 코스의 산길이지만 북한산은 어디에서 올라도 1시간을 오르면 능선에 도달할 수 있다. 오늘도 사모바위에 도착하여 커피를 마시고 오후 3시가 지나서 삼천사 길로 내려왔다. 삼천사는 일제 때 승병들이 기거하며 항쟁을 주도한 사찰로 특히 마애불이 인상적이고 진관사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로 두 사찰이 북한산 서북쪽을 지키고 있는 형국이다. 홍제동으로 돌아와 그랜드호텔 앞 전주콩나물 해장국 집에서 늦은 점심을 사 먹고 서점으로 가서 책을 보려다가 추워서 집에 들어오니 아들은 없고 아내와 딸만 TV를 시청하고 있다. 저녁에는 닭국물로 식사를 마쳤고 고향 영덕에 간 영식이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나를 자랑하며 이사람 저사람 통화를 시킨다. 안방에서 TV를 보다가 12시가 지나 불이 켜진 거실에 나오니 그 때까지 컴퓨터를 하던 아들이 말도 하기 싫다는 듯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간다.
28일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보고 거실에서 보내다가 다시 잠자리에서 꿈을 꾸다가 아침을 맞이했다. 연휴 명절을 마치고 출근하는 차량 행렬이 무악재 고개에 가득하다. 오늘은 예년과 달리 서울의 낮 최고 기온이 영상 10도까지 오른다니 멀리서 봄이 오고 있는 신호를 보내는가 싶고 미역을 넣은 닭국물로 식사를 하면서는 모두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어 잠깐 사이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우리인데 지금 같아서는 모두 부질없는 관계가 아닌가 생각이 될 정도였다.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학원에서는 장원장과 미팅을 했는데 연휴 다음의 반가움보다 강사료 등 금전문제로 신경전을 벌였다. 1월도 거의 다 가는데 내 인생이 험한 산길을 걷는 것 같아 집에 도착하여 차를 두고 홍제천 순대국집에 가서 소주를 마셨다. 밤이 깊어 학원에서 아들이 12시에 들어오고 코를 골며 잠을 자던 아내가 벌떡 일어나 아들을 맞이하러 나가는데 야속하고 미워도 아내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29일 양력으로는 1월 말이고 음력으로는 설날을 보낸 정초인데 어제와 마찬가지로 낮 기온이 영상 10도를 오르는 따뜻한 날이다. 일찍 일어나 임대료가 계속 지연되는 신설동 3층에 대하여 명도소송 내용을 내가 직접 작성했다. 법무사에 맡기려다가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터넷에서 작성절차와 내용을 익힌 것이다. 식사 후에 평소 내가 좋아하는 오한진 의학박사가 생방송으로 늙지 않는 방법을 설명하다가 칠판에 직접 쓴 미未자를 말末자로 잘못 기록하여 해프닝이 생겼다. 박사라는 잘난 사람도 어렵지 않은 글자를 가지고 실수하는 것을 보면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함 속에 살고 있다. 오전에 차를 몰고 북부 지방법원에 가서 작성한 명도소송장을 제출하니 법무사에서 36만원 요구하던 비용이 10만원으로 끝난다. 소액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생기는데 몇 억원 단위의 소송비용 차이는 얼마나 심할지 또한 변호사 비용이 수 백만 원씩 하는 우리의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다. 요양원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뵈면서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나이가 들면 누워서 지내는 이 과정이 누구라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1시에 학원에 도착하여 점심을 사 먹고 수업을 마친 저녁에는 남영동에서 영식이와 시간을 보내고 들어왔다.
30일 어제 늦게 술이 많이 취한 영식는 잘 갔는지 모르겠다. 나도 택시를 탔는지 시내버스를 탔는지 가물가물한데 요즘에는 마음이 피곤하여 내가 취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아침에 갈치구이와 감자국으로 혼자 식사를 했고 아들은 9시가 지나서까지도 방문 밖을 나오지도 않는다. 오전에 안산을 올라 정상을 거쳐 집에 내려온 12시까지도 아들은 방에서 두문불출 기척도 없다. 학원에 나가면서 따져보니 자식을 가르치고 키우는 일이 어렵다는 말이 실감이 되고 모든 것은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다고 해도 자식만은 마음대로 안 된다는 말이 전혀 틀리지 않는다. 오늘도 장원장은 수강료 입금액 중에서 거의 절반을 고등부 강사료로 입금시켰지만 전체가 한꺼번에 나오지 않아 나 역시 넉넉하게 분배를 못해 선생들에게 미안했다. 수업을 하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거실에 앉아 있으니 9시에 들어오는 아들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가버려 내가 목석같은 존재가 되었고 허탈감이 말할 수 없었다. 무자식이 상팔자인가 요즘과 같다면 자식이 없는 사람이 더 행복할 것이고 나도 세상의 사람들에게 무자식의 행복을 외치며 다니고 싶다.
31일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보고 6시에 잠깐 다시 잠이 들었다. 오늘 조선일보 1면에 경기남부지역 연쇄살인사건 용의자가 실렸고 신문 표제에 '그도 영혼이 있는가'라고 적혀 있다.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을 무작정 살해했으니 그는 인간일 수 없다는 표현이다.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청국장으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내 삶을 돌아보았다. 식사를 하면서도 오늘의 일정도 이야기하고 밤새 안녕했는지 얼굴도 헤아리는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는 완전히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집안이다. 마음을 진정하려고 북한산에 오르기 위해 정릉에 도착하여 칼바위로 오르다가 중턱 능선을 걸어 보국문 근처에 다다르니 10도를 넘는 기온으로 땀이 흐른다. 다시 대성문으로 출발하면서 가져온 누룽지탕과 김치로 점심을 해결하고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삶과 죽음을 비교해 보았다. 아무리 봐도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은 순서만 다를 뿐 모두 한 줄에 서 있음이 분명하고 대문 밖이 저승이라고 삶과 죽음 그것은 종이 한 장의 차이에 불과하다. 정릉 주차장으로 2시가 되어 내려와 아내의 심부름으로 제기동 경동시장에 들어가 무와 김 그리고 동태를 샀다. 근처에 위치한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 뵈고 오는 중에는 광화문 시위로 퇴계로를 거쳐 서울역으로 돌아서 집에 도착했다. 저녁에 오늘 구입한 동태를 끓여서 식사를 했고 9시에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들어온 아들이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폼으로 문을 꽝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들에 대하여 15년 동안 기쁨도 많았는데 이제는 반대로 아들을 두어 힘든 세월을 보내야 할 것 같은 혼란한 1월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