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니거트의
제5도살장
/박 병 주
제5도살장에 나타난 풍자적 요소
제5도살장(1968)은 보니거트(Kurt Vonnegut)를 미국의 중요한 작가로 부상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준 작품이다. 그의 6번째 작품인 이 소설은 로날드 수케닠(Ronald Sukenick)이 소설의 위기를 경고하는 소설의 죽음을 출판한 해에 발표되었다. 사실 1960-70년대 미국문단은 전통적 사실주의나 모더니즘 문학이 강한 도전을 받고 있던 시기로 주제나 기법 면에서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수케닠은 “실재란 우리의 경험이며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성격이란 것도 우리경험의 궤적에 불과하다”(41) 라고 지적하듯이 절대적이고 확실한 삶의 실재를 불신하고 전통소설의 무의미성을 비판했다. 그래서 현대작가들은 새로운 소설 쓰기를 모색했고 이런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는 작품이 바로 제5도살장이라고 하겠다. 제로미 클린코비츠(Jerome Klinkowitz)는 이점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1960년대말 보니거트는 제5도살장을 써서 출판했는데 이 소설은 이야기나 구조면에서 새로운 시대를 요구하는 미국의 변화의 물결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Literary Subversions, xix)
사실상 보니거트의 초기과학소설들은 대중의 매체와 영합하는 통속소설로 간주되어서 비평가들도 그를 훌륭한 작가로 꼽기를 꺼려했다. 래리 맥카퍼리(Larry McCaffery)도 이 소설이 기존의 다른 작품들을 버스정류장이나 슈퍼마켓에서 구해주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3). 오늘날 이 소설은 대표적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로 꼽히고 있다. 사실이지 이 소설은 작가자신이 2차 세계 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해서 얻은 전쟁경험을 토대로 쓴 반전소설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공상과학소설처럼 보이는 이 소설은 환상적 세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 비판적인 풍자적 요소가 많다. 헤밍웨이가 1차 세계대전의 부조리한 경험세계를 바탕으로 실존주의적 비전을 작품에 투영시켜 허무주의와 그 극복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보니거트는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기 실존주의적 비전을 다루었다. 전자가 모더니스트라면 후자는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보니거트는 헤밍웨이가 사용한 방법으로 도저히 자기 경험세계를 재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소설형식을 창조했다.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조화시켰으며 인물의 창조가 소홀하고, 인과관계의 서술이 철저히 붕괴되었다. 또한 작가가 작품속에 등장해서 다른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며 수많은 단속적 에피소드를 제시해서 꼴라쥬(collage) 수법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요소 때문에 바흐친(Bakhtin)이 말하는 다성적 소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비현실 세계를 다룬 환상적 요소이다. 역사적 사실을 환상의 세계와 연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기법과 주제가 잘 연결되어 있다. 토니 태너(Tony Tanner)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지적한다.
이 소설은 사실과 환상의 조합으로 작가 자신이 기억하는 전쟁경험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이 창조한 환상의 세계를 수반한다. 빌리 필그림이라는 인물을 창조해서 결과적으로 사실과 허구가 적절히 투사됨은 물론 역사적 사실과 환상의 세계가 감동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195)
이런 이유 때문에 보니거트를 공상과학소설가라고 범주화하기 쉬우나 결코 흥미위주의 SF소설가가 아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사회적 규범보다는 개인의 자유추구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적 저항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개인의 정체성 상실이라는 주제를 다룰 뿐만 아니라 사회 비판적 주제를 위해서 풍자를 사용한다. 그는 경멸이나 조롱이 심한 18세기 신고전주의자인 스위프트식 풍자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음과 악행을 유머스럽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풍자는 스위프트식 풍자보다 훨씬 부드럽다 (Hipkiss, 69). 가령 고상하고 정의로운 것으로서 전쟁을 바라보는 점을 풍자한다든지 삶을 고통스럽고 위험하고 파괴적으로 만드는 악을 조롱 섞인 태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우리가 어리석음만 피하면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논문에서 제5도살장에 나타난 사실과 환상의 조화가 어떻게 풍자적 요소를 드러내고 인본주의 전통에 기여하는지 이 점을 구체적인 작품분석을 통해서 도출하고자 한다.
Ⅱ
보니거트는 이 소설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1장에서 다음과 같이 소설 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새로운 형식에의 도전을 시사해 준다.
대학살사건에 대해서 쓸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누구나 죽을 수 있고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으며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대학살사건 후 모든 것이 침묵이다. 나뭇가지의 새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침묵이다. 대학살 사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새소리 같은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Kurt Vonnegut, Slaughterhouse-Five (New York: Dell Pub. Co., 1969) , p.17. 앞으로 이책에서의 인용은 본문속에 페이지수만 명기함.
총 10장으로 되어있는 이 소설은 1장과 10장에서 각각 작가자신의 목소리로 서술한다. 그래서 자서전적 성격을 지니며 서문과 발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중심인 빌리의 이야기를 둘러싸고 있어서 이야기의 틀을 마련한다. 그러니까 빌리의 이야기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인 셈이다. 페트리샤 워는 그녀의 저서 메타픽션에서 소설의 틀짜기와 틀의 파괴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역사와 실재가 결국은 인간의 구조물이며 모든 인간의 삶과 예술이 틀을 통해서 구성된 것임을 지적한다(29).
이처럼 1장은 형식면에서 소설의 기본틀을 만들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창조물임을 자의식적으로 보여주지만 내용면에서 작품의 주요모티프를 압축하여 제시하고 있다. 표면상으로 보면 최근의 일상생활, 대학에서의 강의 등 주변적인 것을 적고 있지만 2장에서 전개되는 내용이해에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가장 중요한 모티프는 이 소설의 제목으로 3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첫째 소설의 제목으로 채택한 제5도살장은 이차세계대전 당시 드레스덴 지역의 미국포로수용소를 의미하고 둘째 부제로 제시된 어린이 십자군 (The Children’s Crusade) 은 인간의 잔인성을 감상적 영웅주의로, 타산적인 것을 순수한 것으로 변형시켜 줌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셋째는 죽음과의 춤 (Dancing with Death)은 소설전반에 어두운 인간조건을 내포하면서 죽음과 재생의 순환구조를 함축한다. 따라서 이 제목은 단순히 표면적인 건축물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는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모티프는 소돔성과 고모라성의 파괴에 대한 성서에서 인유(allusion)이다. 보니거트는 다음과 같이 소돔성과 고모라성의 파괴를 이야기한다.
나는 내 방에서 대 파괴에 관한 이야기를 읽기 위해서 성서를 살펴 보았다. 롯이 zo-ar로 들어갔을 때 태양이 떠올랐다. 그때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성에 비를 내렸고 하늘로부터 불바다를 만들었다. 그는 모든 도시와 모든 평원 그리고 지상에서 자라는 모든 것에 그리하였다. (19)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 작가는 성서의 주제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주제를 고양시킨다는 점이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한다. 즉 작가는 의인을 구하기 위해서 소돔과 고모라성을 파괴하는 하나님의 자비를 긍정하기보다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버린 롯의 부인 입장을 긍정함으로써 인도주의적 태도를 밝히고 있다. 이 모티프는 소설 전편에 흐르는 풍자적 태도와 나아가서 주제적 요소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2장에서부터 9장까지는 실재소설의 내용으로서 허구적 인물인 빌리 필그림(Billy Pilgrim)의 이야기이다. 보니거트는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염세주의나 결정론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참된 자유의 추구에서 희망을 찾는다. 보니거트가 공상소설형식을 취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제로미 클린코비치는 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상 상대적이고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불행한 운명에 대해서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다. 대신에 자신의 욕구에 맞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제5도살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삶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자신의 우주를 재창조하려고 해야 한다. 공상과학 소설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30)
무엇보다도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빌리의 시간여행이다.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이 빌리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들으시오: 빌리 필그림은 시간의 속박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20).” 그는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자유롭게 시간여행을 하며 공상의 세계인 ‘트랄화마도르’(Tralfamadore)라는 혹성에 납치되기도 한다. 또한 빌리는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살아나기도 하는 것이다. 시간 여행자로서 빌리는 그자신의 죽음을 여러 번 본다. 그는 그것을 테이프에 녹음시켜서 다른 귀중품과 함께 은행보관소에 맡겼다. 테이프에서 빌리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다. 빌리는 미래에 대한 기억으로 그 도시가 파괴되어 불에 타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131). 이렇게 수시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또는 미래로 시간이동을 해서 과거와 현재를 통합하는 방법으로서 상상과 실재를 혼합하는 형식은 상상력에 의해서 현실세계를 더욱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작가인 보니거트는 작품 속에 직접 개입해서 다음과 같이 이 소설의 성격을 설명한다.
이 소설에는 등장인물이 거의 없다. 극적인 갈등도 거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약하고 거대한 힘 앞에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가장 중요한 효과 중 하나는 개성을 가지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140- 141)
이처럼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전통소설에서 볼 수 있는 인식론적 실체를 지닌 주체적 인물이 아니라 흔적으로서 제시된다. 따라서 플롯의 진행에 강조 점을 두기보다는 서술자체에 강조점을 둔다. 다시 말해서 절대적 주체가 해체되고 담론으로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작가자신이 소설 속에 끼어 들거나 스스로를 기록하는 작가를 브라이언 맥헤일(Brian McHale)은 권위가 실추된 종이 작가로 부르면서 저자가 이제는 자신의 작품에 기여하는 허구의 일부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125). 이처럼 은닉되었던 저자가 표면에 부상함으로써 전통소설에서 볼 수 있는 저자의 정체성이 해체되었다. 즉 창조자로서 저자의 역할을 박탈당하고 단순히 담론기능으로 격하되었다. 저자의 죽음은 저자의 단음조적 권위를 버리고 다원적 글읽기가 가능한 열린 소설을 만들었다. 언어와 인간행위에 있어서 소설문학의 우위성을 주장한 바흐친은 소설에서 다성성을 강조한다. 바흐친의 대화이론에 따르면 열린 소설이란 여러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곳이며 고정된 목소리를 지니지 않는다. 고정된 목소리는 늘 타자의 목소리에 방해받으며 절대적 목소리를 부정하고 복수적 목소리의 담론이 존재한다. 제5도살장에서 작가의 목소리란 많은 목소리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바흐친이 주장하는 다성성 소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플롯의 전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발단, 전개, 절정, 해결이라는 전통적 플롯구조를 철저히 파괴하고 수많은 단편적 에피소드들이 시간순서를 무시하고 제시된다. 일화, 조크, 노래, 그림, 그리고 통계 자료 등이 단속, 병치, 반복 등의 수법을 통해서 다양하게 제시되기 때문에 꼴라쥬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Giannone 84).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작가가 꼴라쥬 수법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잇는 것은 주로 빌리라는 인물의 창조에 기인한다. 주인공 빌리 필그림의 이름은 17세기 영국작가 존 버년(John Bunyan)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연상케 한다. 인간의 일생을 하나의 여행이라는 원형적 주제로 보고 파괴의 도시에서 구원과 천국으로의 여행을 알레고리적 수법으로 그린 것이 천로역정이다. 한편 보니거트가 창조한 빌리는 파괴의 도시 드레스덴에서 정신적 평화를 주는 천국의 상태로 순례하는 현대판 순례자로 볼 수 있다(Reed 181). 빌리는 고통을 당하는 현대인의 대변자(Marguerite 156)이다. 죄 없는 빌리가 신경쇠약에 걸리고 가끔 발작적으로 눈물을 흘린다. 이에 반해서 인간가치에 대해 냉담한 룸후르트(Rumfoord) 교수는 역사를 왜곡하면서도 추호의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빌리 같은 인물이 불필요함을 주장한다. 이처럼 이 소설은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병치시켜 현대사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빌리가 본래부터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빌리가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에서 전쟁포로로 있을 때부터이다(23). 본래 뉴욕주 일리움(illium)에서 이발사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2차 세계대전 유럽전선에 보병으로 참전했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드레스덴의 화염폭격을 겪고 가까스로 살아나 명예제대 후 고향인 일리움에 온다. 가벼운 신경쇠약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뚱뚱하고 못생겼지만 부잣집 딸과 결혼해서 성공적 검안사 생활을 한다.
1968년 그가 46세 되던 해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국제 검안사모임에 참석하러 가다가 비행기추락사로 모든 탑승객이 사망하지만 그는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그후 라디오방송에 출현해서 자신이 비행접시에 납치되어 트랄화마도르라는 행성에서 6개월이나 머물렀고 거기서 왕년의 여배우 몬타나와 성적환희도 즐겼다고 말함으로써 딸 바바라에게 노망한 사람취급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빌리에 대해서 프레드릭 칼(Frederic Karl)은 “빌리는 자본주의, 정치적 탐욕, 군사적이며 호전적 사회, 황금만능주의 등 현대사회의 단순한 희생자로 제시되지 않고 독자의 도덕적 각성을 위해서 마련된 인물(347)이라고 한다.” 칼의 지적처럼 빌리를 단순히 전쟁과 물질만능의 비인간적 사회의 희생자로서만 볼 수 없으며 시간여행을 하고 환상적 혹성에 납치되는 사건의 설정은 20세기 현대 삶의 부정적인 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독자에게 제공한다고 보겠다. 이런 점에서 보니거트의 두번째 소설부터 등장하는 상상의 세계 트랄화마도르는 지구인과 지구인의 삶을 자기 반성적으로 돌이켜보는 역할을 해준다. 즉 지구인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역할을 하는 환상적 요소는 드레스덴의 파괴를 둘러싼 사건들을 객관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닐 매키원(Neil McEwan)에 의하면 트랄화마도르의 설정은 “일종의 거울장치로서 순진한 사람을 허울좋은 이념하에 살해한 드레스덴 파괴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93).
이렇게 볼 때 보니거트가 창조한 환상적 요소는 우리의 삶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고 과거의 역사를 재평가하는 자기 반성적 문학장치로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비현실적 요소의 사용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문제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참여임을 역설적으로 반증해 준다. 다시 말해서 비현실적인 공상적 이야기 형식은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매체로서 좋은 문학적 장치가 된다. 로버트 스콜즈(Robert Scholes)는 “보니거트의 작품이 냉소적 유우머(black humor)이지 풍자가 아니다”(The Fabulator 40) 라고 주장하지만 보니거트의 작품에는 함축적인 도덕적 규범 다시 말해서 비정상적 행동의 교정을 바라는 요소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풍자의 요소가 있다. 클린코비치의 지적처럼 작품의 톤이 비록 염세적이고 절망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우머와 긍정적 요소로 사회풍자가 분명히 내재한다(Vonnegut in America, 136).
제5도살장에서 풍자는 전쟁을 고상하고 정당하며 영광스런 것으로 간주한 이념성을 공격하는 점에 있다. 그러나 더욱 핵심이 되는 풍자는 고통스런 현실을 회피하는 것을 넘어서 연약한 인간 집단에 적응하며 생존하는 법을 배우는 모습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악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결코 허무주의나 현실도피가 아니라 삶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인 것이다.
보니거트가 이 소설에서 명백한 도덕성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도덕적 구조를 함축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빌리는 검안사로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Marguerite 158). 즉 단순히 잘못된 시력을 고쳐주는 물리적 치료뿐 만 아니라 현실사회의 부조리 때문에 고통 당하는 현대인들을 치료하는 정신적 치료도 함축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요소는 작품의 전반에 걸쳐 제시되기 때문에 이 작품의 풍자적 성격을 더욱 짙게 해준다.
검안사로서 빌리의 직업은 2가지 의미를 함축해 준다. 물리적 의미에서 시력이 나쁜 사람에게 교정렌즈를 처방해주는 일 이외에 검안사로서 빌리의 직업은 지구인들의 영혼에 맞는 렌즈를 처방해 준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 점에 주목해서 토니 태너는 “빌리가 지구인의 시간관을 버리고 트랄화마도르식의 새로운 시간관을 제시해서 지구인 모두에게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게 하려는 것은 그의 직업과 보조를 맞추는 일(198)이라고 설명한다.” 빌리는 단순히 검안사로서 상업적 돈벌이에 몰두하는 것보다는 보다 높은 정신세계 추구를 꿈꾸며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즉 빌리는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비참하기 때문에 지구인들의 영혼에 맞는 정신적 렌즈를 처방해 주려고 하는 것이다 .
빌리는 태너의 지적처럼 검안사로서 물리적 처방뿐만 아니라 트랄화마도르에서 배운 시간관을 가지고 지구인의 오류를 바로 잡아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가 지역신문에 기고하려고 작성한 편지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트랄화마도르인에게 과거, 현재, 미래는 영원하며 보고 싶은 순간을 언제든지 볼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지구인이 과거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장례식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된다(23). 누가 죽으면 “삶은 그런 것” (so it goes)이란 표현으로 슬픔을 극복한다. 이 표현은 186페이지에 불과한 적은 분량의 소설 중에 무려 100번 이상 등장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모든 생물의 죽음을 언급할 때마다 사용하는 이 말은 작품전체에 허무주의적이며 비관적 분위기를 나타내줄 뿐만 아니라 형식과 내용 면에서 순환구조를 제공한다. 죽음과 재생의 모티프인 이 표현은 운명론적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재생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Giannone 94).
트랄화마도르식 시간관을 갖고 있는 빌리는 드레스덴시의 파괴를 미리 알 뿐 만 아니라(131) 미래의 자신의 죽음도 볼 수 있는 것이다(124) . 이러한 4차원적 시간관은 매우 비현실적이며 이 소설을 로맨스 계열의 작품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빌리의 환상적 태도는 현실도피라기보다는 양심이나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현대인의 부조리한 삶에 대한 적극적 자세이기도 하다. 마가릿 알렉산더(Marguerite, Alexander)는 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빌리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방어책은 탈출할 수 있는 사적 수단을 만드는 일 즉 혹성 트랄파마도르로 탈출하는 일이다. 그곳의 주민이 자기를 납치해서 -마치 독일 군이 자신을 포로로 삼듯이- 빌리에게 재공한 독특한 철학은 유쾌한 것이다. 그 혹성을 변별시켜주는 것은 그 곳은 4차원의 시간관을 사용한 사실이다. 어떤 순간도 복원 가능하다. (156)
이처럼 고통 당하는 인간의 대변자인 빌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함에 대처하기 위해 그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듯이 트랄화마도르인의 포로가 되지만 그 곳은 전적으로 유쾌한 장소이다. 빌리가 전쟁의 공포에서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은 기린의 이미지(85)로 제시되는 죄 없는 빌리가 신경쇠약에 걸리고 군사원칙의 부조리함이 만연하는 현실의 극복책이기도 하다. 이처럼 환상의 세계로 이동은 단순히 유토피아적 이상향으로 도피가 아니라 현실세계를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극복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이다.
이 소설의 또 하나의 도덕적 구조를 함축하고 있는 것은 빌리의 친구 더비의 부조리한 삶과 룸후르트(Rumfoord)라는 인물설정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이 드레스덴 폭격으로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폐허화된 드레스덴 지역의 지하묘지에서 찻주전자를 하나 훔친 죄로 총살당해야하는 동료죄수 더비의 삶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한편 빌리와 같은 병실을 사용했던 하버드 대학 역사학 교수 룸후르트는 70세의 노 교수로서 군사적 권위를 대변한다. 그는 군사적 태도로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빌리를 정신질환자로 몰아 부친다. 그는 빌리를 “그가 죽기를 몹시 바라는 불필요한 사람으로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165)으로 간주 한다. 23세의 젊은 여자를 다섯번째 아내로 둔 그는 퇴역한 장군이며 현재 역사학 교수로서 드레스덴 폭격은 군사적으로 필요한 조치였음을 강조한다(162). 더욱이 역사학자로 그는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그 것이 너무 많은 희생자를 냈기 때문에 기록할 만한 것이 못된다”(165)고 정당화한다. 이런 사람이 아내 릴리에게 주인공 빌리를 진지하게 대화할 사람이 못되는 사람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자신의 이익과 욕구를 위해서 타자에 대한 인식을 철저히 도외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룸프르트 교수에 대해서 화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무도 룸푸르트의 진단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병원의 직원들도 룸푸르트는 해로운 노인이며 사기꾼이고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약한 사람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사람들에게 떠벌린다. 물론 대부분의 직원들은 약한 사람들은 도와야하며 아무도 죽어서는 안된다라는 생각에 동의한다.(166)
성서적 모티프는 이 소설의 풍자적 요소를 이해하는 또 다른 중요한 열쇠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성서적 인유는 신약의 복음서이다. 그러나 보니거트는 20세기 후반의 과학 만능주의, 물질 지상주의로 생기는 비인간화 현상의 극복책으로 사랑과 구원의 계시록인 복음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약성서의 복음서를 이념적 허구성의 차원에서 비판하며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는 것이다. 조이스(Joyce)의 대작 율리시즈(Ulysses)가 고대의 작가 호머의 오디세이(Odysses)형식을 빌어 20세기 현대인의 정신적 방황을 형상화했다면 20세기 후반부의 현대인의 삶의 방황을 신약성서의 복음형식을 빌어 제시한다. 극도로 부조리한 현대인의 삶에 대한 해결책으로 트랄화마드르식 삶을 제시한다.
신약의 복음서에서 예수가 되풀이 사용하는 아멘(Amen)이란 표현이 이 소설에서 “그렇게 가는 것 (So it goes)”이라는 표현으로 대치된다. 전자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엄숙한 긍정이라면 후자는 하나님 부재의 고발이기도 하다(Giannone 94). 오랜 세월에 걸쳐 성서의 복음이 인간의 역경과 고난의 삶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정신적 지주가 되어온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사랑이라면(고린도 전서: 13장 13절) 성서의 복음은 이 덕목을 실천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악과 투쟁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물에 넣어 끓여 죽이는 잔혹상을 목격한(100) 보니거트는 사랑과 인도주의를 부르짖는 인간이 얼마나 비인간적일 수 있나를, 기독교도들이 얼마나 쉽사리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지적한다(94). 이처럼 보니거트는 수많은 단편적 에피소드를 상상과 현실의 조화를 통해서 제시하면서 현실과 유리되지 않고 오히려 현실사회를 비판적으로 유머스럽게 보여 준다. 빌리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로즈워터가 소개해 준 작가 킬고르 트라우트(Kilgore Trout)에 의해서 쓴 공상과학 소설 외계에서 온 복음서 를 통해서 보니거트는 성서의 허구성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복음서를 제시한다. 이 새로운 복음서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 이 순간부터는 영원히 친척이나 연고가 전혀 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엄벌에 처한다”라고 적고 있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시사한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새로운 복음서를 통한 참사랑의 구현이 작품의 주제로 작용하는 듯하나 사실상 작가 보니거트는 과학중심주의, 물질만능주의가 창궐하는 비인간적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복음서에 의존하기보다는 공상과학소설과 같은 우화의 세계에 의존한다. 빌리와 엘리옷 로즈워터와의 대화를 통해서 이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드러내 준다.
그들은 둘 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부분적으로는 전쟁경험 때문이다. 가령 로즈워터는 그를 독일병사로 잘못 알고 14살 짜리 소방대원을 저격했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빌리는 유럽역사상 가장 큰 대학살사건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그들의 세계를 재창조하려고 한다. 아마 공상과학소설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87)
이처럼 무수한 일상의 잔혹성들, 가치고갈 현상이 팽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삶을 유지하려면 자유의지를 버리고 (74)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수용해야한다. 즉 행복한 순간만을 즐기며 불행한 순간을 무시하는 트랄화마도르식 사고에 익숙해야 한다. 그래서 행복이란 내적 욕구달성에 있다기보다는 지독한 순간을 무시하고 좋은 순간에 몰두하는 것(102) 이라는 지적처럼 외부적 선택에 있다. 빌리에게 갑작스럽게 떠오른 자신의 묘지명은 “모든 것이 아름답고 아무 것도 나를 마음 아프게 하지 않는다“ (106)이다. 특히 한 페이지 전체에 비문을 그려 넣고 있어 전통적 글쓰기의 형식에서 과감히 벗어나 있다.
이런 작가의 태도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3년째 되던 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같은 병실을 쓰던 로즈워터의 말을 통해 나타난다. 빌리보다 두배나 영리한 로즈워터는 4차원적 상상력의 세계를 그린 윌리엄 브레이크라는 대표적 낭만주의 시인을 좋아한다(87). 병원에서 같은 병실을 쓸 때 빌리는 로즈가 정신과 의사에게 “지속적으로 삶을 유지하려면 훌륭한 새로운 거짓말을 창조해야 한다“(87)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다시 말해서 인간 삶의 비극적 양상에 심적 고통을 당하지 말고 모든 부조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수동적 인간이 되어야한다. 트랄화마도르에서 성적유희도 즐긴 몬테나의 은목걸이에 새겨진 내용이면서 빌리의 생활신조인 다음과 같은 귀절은 작가의 이런 사상을 압축시켜 제시한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명석함을
바꿀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두 가지의 차이점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52)
이상의 분석에서 알 수 있듯이 보니거트의 제5도살장에서 보이는 우화적 요소는 결코 유토피아적 환상의 세계로 도피가 아니라 환상적 요소를 사용해서 현실을 더욱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며 단순한 관찰을 넘어서서 사회 비판적 요소를 통해서 현실에 더욱 깊숙히 참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니거트는 염세주의적인 작가라기보다는 유머감각이 있는 작가(comic writer)이다(Lundquist 17). 그래서 그의 사회풍자는 비관적이라기 보다는 개선이 가능한 희망적 요소를 담고 있다. 2차세계 대전 후 드레스덴 지방은 폐허의 모습이지만 마지막 장면은 봄이다. 나뭇잎이 나고 희망적인 것이다.
Ⅲ
이상에서 필자는 보니거트가 우화의 세계를 도입시켜 현실세계의 비인간적 요소들을 블랙 유머를 통해 제시하고 있으며 한 걸음 나아가 풍자적 요소와 관계성을 규명해 보았다. 소설 전체에 걸쳐서 빌리의 전쟁포로생활과 전후 미국에서의 삶을 병치시키고 있으며 지구와 혹성간의 상호 반영적 관계를 통해서 20세기후반의 삶의 부조리와 비인도적 상황을 단속적으로 제시해준다. 드레스덴 지방 폭격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비현실적인 환상적 수법을 사용해서 비인도적 상황을 탈신비화 시켜 준다.
소설 전편에 깔린 체념적 분위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컬하게 의미 있는 희망적 요소를 전달한다. 삶에 대한 중요한 문제는 체념, 전쟁, 가난, 편견에 이바지하는 허위적 요소들에 대한 반응이다. 이런 이념성들에 대해서 작가는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함으로써 현실적 대응책을 구한다.
보니거트는 아이러니나 부조리함을 다루는데 있어서 상상력에 의한 공상적 태도를 보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 진지함을 추구한다. 보니거트는 사실주의라는 미명하에 허구성을 주입하는 잘못된 믿음을 조롱한다. 이런 점에서 보니거트는 풍자가이며 사회의 악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제공한다. 삶을 불필요하게 고통스럽고 위험하고 파괴적으로 만드는 위험한 요소들을 제시하지만 우리가 어리석음만 피하면 해결할 수 있는 요소들임을 시사한다. 우리가 의지나 용기만 있으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절망이나 허무가 아니라 희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니거트의 풍자적 요소는 상당한 정도까지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만 불필요하고 고통스런 삶을 야기 시키는 악의 세력은 피할 수 있다는 상반된 두 가지 태도의 공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은 보니커트는 허무주의로서 현실도피자가 아니라 우화적 형식을 도입해서 현실사회를 좀더 객관적으로 보고 자기반성을 요구하는 풍자적 요소를 담고 있는 작가라는 점이다.
(국립충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