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과 추월
남도 사람이 만들고자 한 세상은 무엇일까. 무등(無等)의 사회가 아닐까. 무등은 계급도 없는 사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유토피아다. 무등의 정신은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아우성을 거쳐 광주학생운동에 이어 5.18항쟁에서 절정의 꽃을 피운다. 그러나 현실에서 무등은 유토피아일 뿐이다. 무등을 지향하다 지친 선구자들이 찾아간 곳이 담양의 추월(秋月)이다. 무등이 봄이라면 추월은 가을이다. 무등이 이상을 꿈꾸는 젊은 혈기로 끓는다면 추월은 이상을 향해 달리다 쓰라린 실패를 거친 중년이 돌아와 가을 달 아래서 세상을 관조하는 것이다.
남도 지방에서 시방도 허벌라게 쓰는 징한 토박이 사투리가 ‘거시기’다. 고상한 말로 "예~ 그러자면"인데 말 사이에 뜸을 들이는 뜻이 없는 연결어다. 몇 해 전에 영화「가문의 영광」에서 나는 ‘거시기’를 처음 들었다. 배꼽을 잡았다. 추석이나 설에 나오는 TV영화까지 포함한다면 이 영화를 서너 번 봤다. 징한 남도 사투리에 묻어나는 가족애를 다룬 줄거리다. 아! 사람 사는 게 관계인데, ‘거시기’는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관계어이다.
〈죽녹원 연못〉
〈죽녹원 찔레곷〉
담양 여행을 산과 물, 사람과 사람 사는 일까지 보기에 반나절로 턱없이 짧다. 죽녹원에 마침 봄비가 내린다. 비 맞은 중처럼 대숲은 봄비가 댓입에 떨어지는 소리로 중얼거린다. 대를 구경하기 안성마춤이다. 우후죽순(雨後竹筍)이란 말처럼 산 전체가 여기저기 대밭이다. 죽녹원은 마을 사람의 생필품이거나 읍장에 내다 팔기 위한 상품이거나 관청에 진상할 물품을 만들기 위한 재료이었던 것 같다. 죽녹원 산기슭에는 찔레꽃 향기가 너무 진해 차라리 서럽다. 장미와 찔레는 같은 장미과지만 진한 화장을 한 것 같은 붉은 장미와 달리 하얀 찔레꽃은 기초 화장만 한 것 같다. 찔레꽃은 불쌍한 민초들이 굶주리며 밤새워 진상품을 만든 한이 서린 꽃 같다. 가수 장사익은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이라며 아픔을 노래한 꽃이다.
〈관방제림〉
죽녹원에서 본 관방제림은 키 큰 푸조나무와 팽나무로 강숲이다. 봄비가 내리는 강에 운무를 더하니 한 폭 그림이다. 가랑비는 강에 물을 더 한지만 강은 언제나 받아들인다. 여기 담양 들은 해마다 여름철이면 홍수로 농사를 망친다. 추월산 깊은 골짝에서 한꺼번에 영산강으로 물이 모여든 이유일 것이다. 1648년 담양부사 성이성(成以性)이 제방을 처음 수축했고, 1854년 부사 황종림(黃鍾林)이 관비(官費)로 연인원 3만여 명을 동원하여 만들었기에 관방제라 한다. 이 둑에는 물에 강한 푸조나무와 팽나무를 심었는데 나이가 이백 살이 넘었다. 이 둑을 만든 후로 담양은 살기 좋은 마을로 크게 탈바꿈 되었던 것 같다. 한 사람의 안목과 백성을 사랑하는 관료의 실천이 얼마나 큰 가 두려울 따름이다. 대한한국의 걷고 싶은 길 다섯 손가락에 드는 ‘메타스콰이어 길‘도 그렇다. 나무를 심은 해가 1975년도로 봐 한창 새마을운동을 할 때다. 당시 담양군 관료 중에 한 분은 농대 임업학과 출신인가 보다. 관방제림 길에 딱 맞는 가로수 나무, 이름도 생뚱맞은 메타스콰이어 나무를 심은 그 분의 안목에 감탄할 뿐이다.
〈메타스콰이어 길〉
이번 담양 여행은 마침 이곳 대전면이 고향인 분의 도움을 받았다. 여행지와 숙박지, 음식점을 소개받아 찾아갔다. 사람 사는 게 먹고 자고 누는 것인데 맛깔스런 음식을 먹는 것은 여행에서 재미다. 읍내 「택시부」 옆에 맛있는 고기 집을 찾아가야 했다. 「택시부」를 찾는데, 택시부가 건물 이름일까? 택시가 서는 정류장일까? 우리 일행 둘은 제 각기 해석을 하느라 고민에 빠졌지만 읍내 사람에게 물어보니 답이 나온다. 시골에서 급하게 택시를 부르는 연락처 겸 택시가 정차하여 기다리는 곳이다. 겨우 찾아 간 고기집이에는 손님이 붐빈다. 주인이 대전면 ‘한재중학교‘ 출신이란다. 시치미 떼고 한재중학 출신이라며 갈비살을 주문했다. 양을 더 줄까. 질 좋은 고기를 줄까 기대하면서.
북 추월과 남 무등, 넓은 들을 휘돌아 흐르는 영산강을 껴안는 담양은 단연코 인물이 나게 마련이다. ‘왕대 밭에 왕대 난다‘고 담양은 인물을 배출하기에 조건을 갖춘 터다. 인물의 평가는 승자 쪽에서 만들지만 정의로움과 지조, 학문의 깊이에서 보면 하서 김인후는 조선 인물에서 단연 뛰어나다. 친구인 퇴계 이황이 자문을 할 정도로 박학하며 학문의 넓이와 깊이에서 백미지만 당시 현실이 실천할 바탕이 되지 못했기에 낙향하여 대나무를 벗 삼아 평생 지조를 지키며 후학을 가르친다.
소쇄원 광풍각(光風閣)에 휘황한 가을 달이 댓잎에 일렁인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스승 조광조가 사사된 후 고향으로 물러나 계곡에 세운 정자다. 이후 이곳은 호남 유림의 산실로 학문과 정치를 토론했던 곳이다. 더욱이 김인후는 이곳을 좋아해 제자와 자주 찾았던 것 같다. 소쇄원 광풍정자 현판에는 담양이 배출한 인물들의 글이 걸려 있다. 십리 길에 송강 정철, 의병장 고경명, 미암 유희춘 같은 당대 지식인들이다.
한재중학교 출신이라며 정겨운 거짓말을 했던 담양을 떠난다. 무등에서 추월까지 어림잡아 반나절이지만 내 머리에는 오백 년이나 천 년 전 선배 민초의 숨결을 듣고자 과거와 현재를 몇 번인가 오간다. 적어도 죽순 장아찌를 먹을 때까지는 담양을 생각하며 담양과 가까워 질 것이다. 가을에 오고 싶은 담양을 떠나는데 봄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라디오엔 장사익이 부른 ‘찔레꽃’ 노래가 달처럼 서럽게 다가온다.
2011.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