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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창세기 40:23~41:1
제 목: 잊혀진 2년의 세월동안
오늘은 송림중학교 예배실에서 예배할 수 없어서 이곳까지 오는데... 고속도로에 진입하면서 부터 차가 막혀서 9:40에 도착했습니다... 모든 준비하는 것이 끝이 난 상태입니다...
이게 인생이다 하는 많은 생각을 합니다.
우리 계산으로 나오는 계획가운데 복병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고속도로 막히는 것을 계산하지 못해 우리의 모든 계획을 어긋나게 만들기도 합니다.
결혼도, 취직할 때도 ... 열심히 생각하고, 준비하지만 중간에 예상치 못한 일. 당황스런 일이 끼어들더란 말입니다.
건강의 문제가 생기고, 자녀가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가서 가슴 아픈 일이 생기고, 부부간의 어려운 일이 .. 인생항로에 차질이 생기는 일이생깁니다.
본문의 요셉의 인생만큼 복병을 만나고 항로에 차질을 겪는 케이스도 쉽지 않다 생각합니다.
약 17세로 추정되는 나이에 형제들에 의해 웅덩이에 갇혀 살해의 위협을 당하는 복병. 인신매매를 당해 다른 나라로 팔려가는 인생궤도에 이탈되는 괴로운 일이 생기고 그곳에서 어떻게 잘 살아보려 애쓰지만, 주인집 아내의 성적인 유혹의 복병을 만나 감옥에 가게 되는 ....
하루는 감옥에 술 맡은 관원으로 바로왕의 측근인 고위관리와, 떡 맡은 관원이 같이 감옥에 들어왔는데, 이상한 꿈으로 힘들어 해서 요셉이 해몽해서 도와줍니다.
떡 맡은 관원장은 3일만에 목숨을 잃고, 술 맡은 관원장은 3일만에 복직이 될 것이다.
요셉의 해몽이 정확히 들어맞아 술 맡은 관원장은 3일뒤 출옥하게 됩니다.
요셉마음에 얼마나 기대한 마음이 컸을까요? 술 맡은 관원장에게 한 말입니다.
(창세기 40:14 ... 당신이 득의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 그러나 요셉을 기억치 않고 잊었습니다.
(창세기 40:23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있었더라)
저는, 창세기 40:23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치 않고 잊었더라’. 는 말씀과 창세기 41:1‘만 2년만에’란 말씀이 오버랩 되면서 제 맘을 말로 다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생각으로 밀고 갔습니다.
* 왜 입니까? 이게 인생입니다.
주목받고 싶은 인생이었는데, 궤도 이탈 없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면서 살고 싶었는데, 잊혀진 인생이 되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고 오래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포인트 하나가 있더란 것입니다.
우리인생길 가운데 ‘요셉을 기억치 않았더라’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기대했던 사람에게서 실망하게되는 상황, 만 2년이란 상징적인 숫자, 감옥에서 잊혀진 세월을 보내고 있는 요셉을 보면서 이게 인생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인생이라면, 요셉과 같이 그것을 수용하고, 그것이 요셉인생을 가로막지 못했더라면... 우리도 그렇게 살았으면 하는 ....생각합니다..
성경에 요셉을 보면서 느낀 신비한 생각은, 요셉에겐 상처. 원망.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 무너져서. 함몰되어져 궤도를 이탈해서 인생에 어려움이. 불평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요셉에게서 깨달은 것은, 요셉은 잊혀진 시간 속에서 극심한 고통의 순간 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려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제 나이 45, 46년 되는 인생 속에서 ... 뒤돌아보아도 요셉만큼은 아니어도 당황스럽게 만든 예측하지 못한 복병이 많았지만, 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가? 하나님이 뭘 교훈하기 원하시는가? 그것은 상처로 받지 않고 우리인생에 더 다듬어진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기 위해 배려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받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 요셉에게 잊혀진 2년 동안 고난을 통해 그에게 다듬고 깨닫기 원하신 것은 무엇인가?
(1) 적응의 대상으로서 주변 환경을 수용하고 이해하기 원하십니다.
‘이 땅은 우리가 누리고 즐기기 위한 곳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 땅은 우리가 훈련받고 섬기기 위해 있는 곳입니다.
어떤 훈련을 받기 원하시는가?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고 함몰되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 적응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기적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꿈에 부푼 그들에게 기다린 환경은 마라의 쓴물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으로 몰고 가셨습니다..
왜입니까?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가나안에 들어가선 안 되겠기에 환경을 통한 훈련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해서 얼마나 형들이 상처를 입었겠습니까?
평생 아버지의 사랑만 받고 좋은 환경에서 살았다면, 나중에 위기가운데 요셉이 이스라엘과 주변나라를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극심한 고난의 환경으로 몰고 가셨기에 극복하고 싸워 이길 힘과 능력을 길렀기에 요셉의 요셉 됨이 드러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저는 23세에 미국에 건너갔습니다. 제 기질에 안주하기 좋아한 제가 7년간의 극심한 환경의 고통에 상한 마음에 좌절하고 연단 받지 않았으면 결단코 죽어도 목사 될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주변의 어려운 환경가운데 자란 사람들(갑자기 부모님이 이혼을 했거나, 아버지의 사업실패를 경험 했거나, 너무 어려운 상황..)을 보면 ‘저분의 어린시절에, 저분의 앞길에 두갈래 길이 주어졌겠구나‘생각합니다.
극복하면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극복하지 못하면 내 인생을 몰락시키는 저주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환경의 장애물이 찾아오면, 즉각적으로 이 사실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내 앞에 두 갈래길이 있다. 이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면, 날 침몰시키는 저주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극복하면 하나님께 다듬어지는 축복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 다듬고 계십니다.
제가 청소년 사역을 할 때,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즐겨 말한 것은,
“피할 수 없니? 그렇다면, 그것을 즐겨라.”합니다..
애들은 “약 올리십니까?”하는 표정이지만, 잘 수용하시기 바랍니다.
(2) 이 고통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정복의 대상으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기 원하십니다.다.
우리자신은 정복의 대상입니다.
(로마서 7:18~24 내 속 곧 내육신에 선한것이 거하지 아니하는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지체 속에서 한 다른법이 내마음의 법과 싸워 내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사망의 음침한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더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무서운 적은 블레셋이 아니라, 이스라엘 내면의 불순종을 버리지 못하는 그것, 적이더란 말입니다.
제가 5000명 성도들을 목회하는 것보다, 이찬수라는 저 한명을 목회하는 게 어렵습니다. 진실한 고백입니다.
부부간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배우자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정도 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내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남을 가르치고 다스리려 애쓰지 마시고,
나를 다스리고 내안에 있는 적을 통제하고 싸우려 전의를 가다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많이 쓰임받기전에 나를 콘트롤 하고, 다스릴줄 아는, 고난을 통해 훈련받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다윗에게 사울은 철천지 원수입니다...
그런데, [새왕 이야기]라는 책에서 ‘짐 에드워드’의 결론은 “사울왕의 그 극심한 공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기 원한것은 ... 내안에 잠복해 있는 무서운 사울왕을 죽이는 과정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이해되십니까?
다윗자신에게도 사울이 가지는 그 더러운 질투심, 더러운 비교의식, 비열하고 더러운 탐욕적인 모습이 그대로 자신 안에 있었는데, ‘밖에 있는 사울을 통해’ 다윗내면에 다윗왕을 죽이는 훈련과정이 ... 다윗이 연단 받는 과정이었다. 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을 많이 대합니다...
성질 더러운 사람에게 성질 더러운 사람을 붙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질 더러운 사람을, 성질 더러운 사람이 제일 힘들어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고집 센 사람을, 고집 센 사람이 제일 싫어합니다. 제일 힘들어 합니다.
고집 세지 않은 사람은, 고집 센 사람을 쉽게 수용합니다. 쉽게 받아들입니다.
말 많은 사람을 힘들어 하는 사람은, 말 많은 사람입니다... 견딜 수 없는 격분을 가집니다..
“내가 말 많이 해야 하는데...............”
여러분, 왜 그런 부인을 만난 지 아세요?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남 탓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사울을 죽이기 위해 바깥의 사울을 동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극심한 고통의과정을 통해 연단, 다듬어서 다윗안의 사울왕을 죽이게 될 때 (이땅에서 죽이는일은 없습니다.)- 잠재울 때 위대한 다윗으로 쓰십니다...
(3) 신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입니다......
‘고난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린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옳은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내면에는 원래 하나님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고난이 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그러나 그내면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40: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
요셉을 보세요. 이런 하나님을 향한 무한 신뢰를 하나님이 그를 외면한 2년이란 기간동안, 무서운 성적충동으로 강간미수범으로 감옥에 밀어넣은 그 상황으로부터... 승리하고 이긴 고백입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실망을 안겨주었나요?
그런데 그 무서운 감옥에서 무한 신뢰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통이. 고난이야 말로 인간의 잊혀짐. 인간의 배신이야 말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너무나 좋은 통로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찾아올 때, 자꾸 하나님이 의심됩니까?
여러분이 신앙의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날 잊혀진 존재로 취급하고 외면할 때.... 그때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경험하고 깨닫기 바랍니다...
욥을 보세요... 욥기는 42장으로 된 긴 성경입니다.
욥이 고난의 의미를 어떻게 결론냅니까? 이후에 여러분 자식의 복을 2배,3배 주었어도 내가 낳은 자식이 먼저 죽었는데.. 뒤에 낳은 자식이 더 똑똑해도 ‘할렐루야’하면... 정상입니까?
욥의 축복은 그게 아닙니다...
욥은 고통의 의미를 (창세기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가 들리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고난전에는 하나님을 귀로 듣기만 했는데, 고난후에는 눈으로 주를 뵙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고난이 없어서, 제 설교를 귀로만 듣는 분이 어디 한 분 뿐입니까? 성경에 갇힌 하나님을 머리만 끄덕이지만, 내 삶에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고난이 주는 유익이라 믿습니다...
토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적으로 큰 기쁨이 있을 때는 많은 신앙을 요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 축복의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성품보다 우리자신의 기쁨을 더 의지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자상하게 돌보시는 하늘아버지께서 가끔 그 내적 위로를 우리에게 거두셔서 -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신뢰의 바탕을 두어야할 반석이신라는것을 가르치시는 것이 필요하다..”
인생의 복병이 찾아왔습니까?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막혀서 예배에 지장이 생깁니까?
요셉처럼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굴하지 않고, 무한신뢰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삼으며 살아가
는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마라의 쓴물이후에 물샘이 12, 종려가 70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라에서 11킬로미터 너머에 엘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내 눈에 마라의 쓴물밖에 보이지 않아도, 엘림의 물샘과 종려가 보이지 않아도, 내가 마라에 와 있지만, 믿음의 눈을 갖고 이 연단을 이기기만 하면, 훈련받은 자 만이 누리는 기쁨의 인생이 펼쳐질 것이란 확신으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5:3~4 다만 이것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가 늘 드리던 송림중고등학교 예배실에서 예배할 수 없어서 이곳으로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즐길 수 있는 맘 주셔서, 예배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마음껏 누리고 기뻐하며 즐기는 저희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마라의 쓴 물가에 서서 고통 하는 중에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열 두 샘물을 마음에 그리고 기뻐하며 달려가는 저희되게 하옵소서
인도해 주실 걸 믿고 감사하며 예수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피할수 없는 것이라면 즐길 수 있는 맘을 달라는 이찬수목사님의 기도가 정말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귀한 말씀 잘 정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내일 새벽에 교회에 나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어서 자야지요 ^^
사랑하는 집사님...정말 감사해요.귀한 말씀 정리 진짜 감사하구요. 한말씀이라도 땅에 떨어지는게 없는 거 같아요.집사님의 귀한 정리 은사가 이런데 한몫을 하시는거 같아요.집사님!! 늘 감사해요.오늘 커피..땡유 땡유~~^^*(두번 맞죠? ^^*)
새벽예배 말씀이 나를 위해 준비하시는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저도요....
저두요~~
저두유!!!(새로 나온 두유!, 앗...급 썰렁....)
지난 주일 낮에 목사님께서 그러셨나요... 결국은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관점이 중요한 것이라고...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예수님 처럼....
맨날 양집사님께서 편집해주신말씀을 듣다가... 혼자 들었더니... 제 능력으로는 어디를 가위질 해야할지 몰라서.. 죽을듯이 받아적고, 다시 들으면서 빠뜨리지 않으려 노력했답니다... 얼마나 말씀이 귀한지? 버릴 말씀이 없어서 죄다 적었네요... 얼마나 은혜가 되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