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공리, 도덕 공리 그리고 진리
이덕하
2010-03-21
문학에서 진리라는 단어를 어떤 식으로 쓰든 그것은 작가 맘이다. 선동적인 연설에서 진리라는 단어를 수사적으로 쓰는 것에도 시비를 걸 생각이 없다. 하지만 논문과 같은 글에서 진리라는 용어를 함부로 쓰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나는 진리라는 용어는 오직 과학의 교권에서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과학의 교권은 과학뿐 아니라 수학과 과학 철학도 포함된다. 나의 용어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진리라는 용어는 오직 과학의 교권, 수학의 교권, 과학 철학의 교권에서만 써야 한다”는 식으로 고쳐 표현하면 될 것이다.
나는 문명이 엄청나게 발달한 외계인이 있다면 그들의 수학과 우리의 수학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학의 발달 정도야 다를 수 있지만 그 근본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예컨대 외계인의 수학이 충분히 발달했다면 그들의 기하학도 우리의 기하학과 공리 체계가 사실상 같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한 직선 m과 그 직선 밖에 있는 점 A가 있다고 하자. 이때 A를 포함하며 m과 평행인 직선 n은 단 하나다”라는 식의 공리를 바탕으로 한 기하학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에우클레이데스 기하학(Euclidean geometry)이라고 부른다.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한 직선 m과 그 직선 밖에 있는 점 A가 있다고 하자. 이때 A를 포함하며 m과 평행인 직선 n은 없다”라는 식의 공리를 바탕으로 한 기하학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타원 기하학(Elliptic geometry)이라고 부른다.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한 직선 m과 그 직선 밖에 있는 점 A가 있다고 하자. 이때 A를 포함하며 m과 평행인 직선 n은 많다”라는 식의 공리를 바탕으로 한 기하학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쌍곡 기하학(Hyperbolic geometry)이라고 부른다.
물리학이나 생물학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에게도 이름은 다르겠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인슈타인이 꿈꾸었던 식으로 두 이론을 통합한 거대 이론을 완성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도 자연 선택 이론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수학이나 과학의 이론을 “진리” 또는 “진리에 근접한 것”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반면 도덕 철학의 교권에서는 외계인에게서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의 도덕 공리는 우리의 도덕 공리와 상당히 다를 수 있다. 물론 외계 생물의 진화에도 친족 선택이나 상호적 이타성의 논리가 적용될 것이기 때문에 양쪽 도덕 공리 체계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똑 같지는 않을 것이다.
수학이나 과학의 영역에서는 외계인과 우리의 이론이 똑 같거나 수렴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반면 도덕 철학이나 예술의 영역에서는 기껏해야 비슷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도덕 철학의 교권이나 예술의 교권에서 진리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다.
비슷한 논리가 인류 내에서도 작동한다. 충분히 똑똑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충분히 오랜 기간 동안 토론을 한다면 과학의 교권에서는 동의에 이를 수 있다. 즉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 반면 도덕 철학의 교권에서는 양측이 모두 매우 똑똑하고 양심적이라 하더라도 동의에 이를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예컨대 매우 똑똑한 정신병질자가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밝히면서 토론에 임한다고 하자. 이 정신병질자와 비정신병질자와 도덕 철학의 영역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토론을 한다 하더라도 동의에 이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 철학의 교권에서 진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진리 개념의 남용이다. 수학 공리는 진리지만 도덕 공리는 입장일 뿐이다. 과학의 교권에서는 우월과 열등을 말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즉 진리에 좀 더 가까운 이론이 진리에서 좀 더 먼 이론보다 우월하다는 말이 의미가 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은 뉴턴의 중력 이론보다 우월하다. 반면 도덕 철학의 교권에서는 진리는 없고 입장만 있기 때문에 우열 또는 선악을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서로 입장이 다를 뿐이다.
첫댓글 이덕하님이 생각하시는 진리가 뭔지 조금 알고 싶네요
저는 진리라는 말을 매우 싫어하는데
저에게는 이 말이 매우 종교적으로 들립니다
인간은 진실 조차 알 수 없지만 진리라는 말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무생물에 눈코입을 그려넣는 것처럼 느껴지며 (대다수) 인간 특유의 인지왜곡에서 비롯된 인간 사고의 오류라고 생각됩니다 기독교에서 특히 진리라는 말을 좋아하더군요
진리가
영구불변의 어떤 것이고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혹은 영원히 살더라도 진리라는 것이 정말 있는 지 조차 알 수가 없지 않나요?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고통이고 참지 못하기에 종교인들이 생겨나고
"체계 내에서의 일관성"을 "진리"라고 보는 견해로 이해하면 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도덕 체계에 일관성이 있다 하더라도 진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도덕 공리가 임의적이기 때문입니다(지구인과 외계인이 서로 다르다는 의미에서). 반면 수학 공리의 경우에는 임의적이지 않습니다.
뉴턴의 중력 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이 일관성의 측면에서는 같다 하더라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진리에 더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우주를 더 잘 설명하니까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실제'' 우주를 더 잘 설명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인식론적 공격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하시나요? 도킨스의 경우엔 "그냥 쌩까죠" ㅋ
"인식론적 공격"을 무슨 뜻으로 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좀 길게 질문을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질문의 의도를 잘 이해 못한 저로서는 그냥 "수 많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아인슈타인의 모델이 뉴턴의 모델에 비해 더 현실 세계에 부합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 궁금한데 이덕하님은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모르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믿는 마음이 있나요?
본문에서도 썼듯이 저는 진리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그 믿음이 절대적인 확신은 아닙니다.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 조금 궁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왜 믿는 마음이 생기는지도 궁금해집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나 존재하고 있을지 그것도 궁금해지고요
이 글을 그저 소박하게 바라본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겠지만, 진리 자체를 세분화 하고 그것의 의미를 따지고드는 철학이라는 테두리에선 수용이 어려운 너무 순진한 입장이겠죠.
일단 "전통적"인 의미에서 진리 자체를 일관성, (현실과의) 대응성이라는 2차원으로 구분하게 되는데, 수학이나 논리학같은 순수사변적 분야를 제외하면 과학의 모든 분야가 이 두개 차원을 함께 갖는다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과학은 이 두 기준을 충족시키는 지식체계를 총칭하는겁니다.
하지만 이런 의견조차 케케묵은 옛 이론이고, 현재는 진리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나와있는 상태죠. 진리는 (관측된 결과에 대한) 사람들간의 합의에 불과하다는 의견, 역사에 따라 변화한다는 의견, 어떤 명제가 참임을 조작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의견, 어떤 명제의 내포에 관한 함수식이라는 의견 기타등등의 다양한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개념은 홀로 논의되는게 아니라 설명(explanation), 지향성등과 같은 주제와 같이 연계 논의되는게 보통입니다.
이처럼 철학분야에선 진리개념을 대단히 세분화시켜 논합니다. 상식의 수준에서 이글에 표현된 의견이면 충분하지만, 전문적으로 진리개념을 파고들어야 한다면 이 정도의 의견으론 어림없는 이유가 바로 이거죠. 그런면에서 이 글은 그냥 덕하님이 인식하는 진리에 대한 대략적 입장표명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것 같습니다.
참고로, 수학에서 공리는 더 이상 "자명한 것"이 아닙니다. 최근의 흐름은, 수학에서의 공리는 그저 수학자들끼리 "합의한 사항"에 불과하다는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수학자들은 공리에서 시작한 정리들이 상호모순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어느 정도는 품고 있습니다. 그냥 합의한 사항일 뿐이라면 모순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죠. 무모순성에 대한 믿음이 곧 자명한 것 또는 진리라는 믿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덕하 / 그거야 수학자체의 특성이니 누구보다 수학자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제 말은, 공리라는게 어떤 고정된 진리인것처럼 취급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죠. 언급하신, 비유클리드 기하가 그런 편견을 깨면서(즉, 꼭 평행선 공리를 긍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오게 된 실제 결과물이기도 하고요.
제 개인적 입장은, 진리라는 거창한 개념(그리고 논란많은)을 빌리지 않고도 무엇이 보편적인 참이고, 거짓인지를 의미있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것입니다. 하지만, 지면이 좁아 여기서 그걸 말씀드리긴 곤란해 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