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산수 선생 연보를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1920년대와 30년대 부분입니다.
살펴 보시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바로 잡아 주십시오
장동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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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 이종률선생 연보
▸ 1905년. 6월 6일 경북 영덕군 남정면 남정동 126번지 동대산 아래에서 경주 이씨 퇴하 이규환과 벽진 이씨 이점실의 3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 아버지를 스승으로 한문과 경전을 익혔으며, 벌겋게 달군 쇠로 고문하는 세조에게 “이 쇠 차다, 다시 달구어 오라”고 항거한 성삼문의 기개를 배움.
▸ 1918년.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을 피해 경북 의성으로 이주.
▸ 1920년. 중앙고보 학생 박명진이 결성한 소년운동조직 호경체육회에 참여하여 민족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
▸ 1921년. 4월 의성 점곡공립보통학교 2학년 편입. 얼마 후 안동지역 민족혁명가 이형국 등이 설립한 동명학교로 진학하여 민족독립투쟁의 학문과 인도주의적 또는 자연주의적 낭만을 배움
▸ 1924년. 서울 배재중학 보결시험에 합격하여 2학년으로 진학. 12월 경성청년회 창립 주도.
▸ 1925년. 5월에 창립된 최초의 사회주의 학생단체이자 북풍회 계열 공학회(共學會) 대표. 배재중학 퇴학. 경성경신학교 4학년 편입, 7월 퇴학. 11월에 공학회 해산에 불복하여 검거. 도중 부친 이규환 사망.
▸ 1926년. 6․10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예비검속에 체포되어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구금됨. 이때 만해 한용운 선생을 만나 크게 감화됨. 7월 경신학교 중퇴 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감.
▸ 1927년. 4월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 입학. 5월 신간회 동경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정치문화부 부원으로 활동. 재일본 조선청년총동맹 위원. 이 해 여름방학 때 의열단비밀단원 박시목의 주선으로 밀양에서 신간회 본부 서기장 황상규를 만나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할 것을 권유 받음.
▸ 1928년. 4월 신간회 동경지회 간사가 됨. 5월 이현철, 박야민 등과 조선의 교육상황을 보도하기 위해 동경에서 조선교육신문사 설립. 7월 ‘우리말연구회 사건’으로 와세다 대학에서 출학 당함. 9월 경성 숭인동의 사립 고학당(苦學堂) 교원으로 활동. 11월 동경, 서울, 대구를 잇는 학생맹휴 지원하는 ‘전국학생맹휴옹호동맹사건’과 관련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0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
▸ 1929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 11월 성진회(醒進會)를 통해 광주민족항쟁을 배후에서 지원.
▸ 1930년. 4월 서울 숭인동 상춘원에서 열린 근우회 경동지회 설립대회 참석
▸ 1931년. 4월 형평사운동에 참여하기 시작. 6월 국내외 정치경제 분석과 사회운동 현황을 보도하는 사회실정조사소(1930년 4월 결성) 기관지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월간『이러타』창간호를 냄. 『이러타』는 1936년 1월 56호로 종간됨.
▸ 1932년. 경성제대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의 사회과학교실에 학습하면서 교유. 12월 충남 예산농업학교 독서회 사건 배후 지도로 투옥.
▸ 1933년. 7월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과 관련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광주형무소에서 3년 6개월간 복역.
▸ 1938년. 출판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공주형무소 수감.
▸ 1939년. 출옥 이후 일제 말기까지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에 의한 보호관찰 대상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음.
▸ 1940년. 경기도 가평군 용문산에서 목탄사업을 하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군수물자 불출하투쟁을 전개.
▸ 1944년. 조선건국동맹과 연계하여 정보 수집 활동을 하면서 일제 패망을 대비.
▸ 1945년. 8․15 직후 조선학술원(위원장 백남운)의 정치실천 노선과 관련하여 위원장으로 홍명희가 적임자라는 주장전개. 조선학술원 서기국(위원장 김양하) 상임위원.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고, 밤에는 민족문화연구소(소장 백남운, 1946.5.6 창립)에서 근로대중과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정치학과 노동문제 강의.
▸ 1946년. 1월 5일 박진의 집에서 김창숙, 이시영, 안경근, 조윤제, 문한영 등과 함께 민족혁명 전위당 건설을 위한 사전조직으로 민족건양회(民族建陽會)를 결성하고 민족건양사론 제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대한 의견서 건으로 체포됨. 3월 14일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주최 맑스 서거 63주년 추모강연회 강연. 민주일보(1946.6.1 창간) 편집국장과 주필 역임.
▸ 1947년. 이극로, 정이형 등과 함께 ‘李鈞’이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독립전선을 결성하여 영구 분단을 막기 위한 단정수립 반대투쟁 전개.
▸ 1949년. 가을에 용공분자 명목으로 투옥되었다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풀려남.
▸ 1951년. 대구청구대학 재직 중 경남 함양군 안의중학교 교감으로 옮겨 잠시 봉직하면서 부산대, 동아대 출강.
▸ 1952년. 1월 최익환, 박진목을 중심으로 하는 종전운동에 논책 제시. 2월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시영후보 선거운동을 통해 평화통일운동 전개.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1961년까지 재직.
▸ 1954년. 부산대, 동아대의 제자들과 민족문화협회를 결성하여 반외세 민족자주사상을 고취시키는 활동.
▸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때 평화통일론 방향의 신익희 후보진영에 참여하여 후보단일화운동 전개 .
▸ 1958년. 자신을 찾아온 간첩 불고지죄로 부산형무소 수감. 이 무렵 국제신보 편집고문과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면서 ‘백만독자의 정치학’ 등 많은 논설과 칼럼 등의 원고 집필.
▸ 1960년. 6월 12일 민주민족청년동맹 결성하고, 대구와 서울로 조직 확대. 6월에 ‘李一九’라는 필명으로 ꡔ現瞬間政治問題小辭典ꡕ(국제신보사)이라는 소책자를 출간하여 운동의 옳은 방향을 제시함. 10월 30일 “민족통일대강연회”를 시작으로 자주적 통일운동 전개.
▸ 1961년. 1월부터 민족일보 창간 주도(민족일보 명명). 쿠데타 이후 ‘민족일보 사건’으로 5년 구형되었으나 무죄 선고. 2월 25일.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을 주도, 통일방안심의위원회 위원으로 남북협상론 주장.
▸ 1962년. 군사혁명 특별재판소에서 ‘'민자통 통일방안심의위원회사건’으로 군사쿠데타 정권의 ‘군사혁명 특별재판소’에서 사형을 구형 받고 10년형을 선고받음. 수감 중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많은 원고를 남김.
▸ 1965년. 12월 25일 형 면제로 석방.
▸ 1966년. 경남 양산의 개운중학교의 교장으로 일하며 민족사와 인간사 방향의 민족교육사업 전개.
▸ 1971년. ꡔ祖國史의 分裂과 統一의 主潮ꡕ를 출간.
▸ 1973년. 위의 책 연장 집필물 ꡔ옳은 史學과 그 嶺南 및 그 祖國의 認識을 위하여ꡕ를 인쇄 직전에 수사기관에 압수당함.
▸ 1974년. 경남 의령의 백산 안희제 선생 사적 답사 중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1989년 서거하기까지의 투병 기간 중 후학을 양성하고 민족혁명운동에 대한 방대한 구술 유고를 작성하였으며 그 가운데 일부를 간행.
▸ 1979년. 3․1운동 60주년을 맞이하여 ꡔ己未를 알자ꡕ(茂林社 간행)
▸ 1989년. 3월 13일 부산 동래 수곡의 수일원에서 “민족건양사로(民族建陽史路)” “사책당(史責黨)”을 유언으로 운명. 향년 84세. 6월 유고 일부를 ꡔ민족혁명론ꡕ(도서출판 들샘)으로 엮어 출간.
▸ 2000년. 3월 12일. ‘산수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 창립.
▸ 2001년. 3월 1일. 유고집 ꡔ山水李鍾律著作資料集ꡕ 제1집 발간.
▸ 2002년. 3월 1일. 유고집 ꡔ山水李鍾律著作資料集ꡕ 제2집 발간.
첫댓글 1924년 경성청년회 창립을 '주도'했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습니다. 창립 당시 집행위원도 아니었어요. 창립에 '참여'라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입니다.
출생지역이 영덕군이 아니어서 확인 중에 있습니다. 다음주 무렵이면 좀 더 확실해질 것 같습니다.
1925년 공학회에 대표라는 직함이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주도'라고 하면 적절할 것입니다.
경성경신학교와 경신학교는 같은 학교인데, 1925년 퇴학, 1926년 중퇴라고 두 번 나오네요. 확인이 필요해요.
1927년 재일본조선청총의 '위원'은 아닌 듯. '회원'이라고 하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와세다 시절 '우리말사건'은 근거가 무엇입니까? 연구자들도 모르는 사건이고, 산수 선생님의 글에서도 본 적이 없는데요. 혹시 제가 놓친 것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1930년 근우회 경동지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했습니다.
'이러타'는 1933년 선생님이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으로 구속되기 이전까지 발행인으로 간여했습니다.
1932년 12월 '충남 예산농업학교 독서회 사건 배후 지도로 투옥'이라는 것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누구에게서도 이야기 듣지 못했고 당시 동아, 조선의 관련 기사에도 산수 선생님의 이야기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