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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6일 신문에 보니까 남편에게 '손녀 유괴 살해' 협박편지 보낸 50대 女 입건이라는 제목을 보았습니다. 53살 아내가 '손녀를 유괴해 살해하겠다'고 남편 회사로 남편에게 공갈 협박 편지를 3차례 보내고 현금 5000만원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참 세상에 돈이 좋기는 좋은가 봅니다. 돈에 대한 유머가 많이 있는데 돈이 변기에 빠졌을 때의 자세 사자성어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십원 짜리가 변기에 빠졌을 때는 수수방관한다고 합니다. 오백원짜리가 빠졌을 때는 자포자기한답니다. 오천원 짜리가 빠졌지면 안절부절하고, 십만원 짜리가 빠지면 사생결단하고, 백만원 짜리가 빠지면 뽀싸삔다고 합니다. 그려면 남편이 변기에 빠졌을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리삔다”랍니다.
오늘 2014년 둘째 주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올 한 해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나온 바나바는 초대 교회에서 중요하게 쓰임 받은 인물입니다. 초대 교회의 첫 번째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서로 돕고 사는 모범적인 교회가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초대 교회의 두 번째 교회인 안디옥 교회의 첫 번째 사역자로 세계 선교를 감당한 안디옥 교회를 만드는데 쓰임 받은 인물입니다. 바나바로 인하여 날마다 믿는 사람이 많아졌고, 바나바로 인하여 안디옥 교회에서 최초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았고, 바나바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서로 유무상통하여 핍절한 사람이 없었고, 바나바로 인하여 바울이 사도들에게 인정받고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바나바는 세 가지 충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고, 성공하였고, 승리하였고, 인정받았고, 좋은 세상을 만들었고, 선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쓰임받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1. 우리가 올 한 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기 위해서는 먼저 착함 충만으로 시작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아가도스 아네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참함은 윤리성, 도덕성의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악함의 반대 개념입니다. 악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는 말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배려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윤리성 도덕성이란 결국 자신에게 있는 재능이나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에 집약됩니다. 바나바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성경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4장 36절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 4:36-37)” 자기 부동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하였습니다. 요즈음 용어로 말하면 레인 메이커입니다.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 그 물질이 필요한 사람이 나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자신보다 더 크게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와 돌봄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고 실제적으로 결단하여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착한 사람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본래 그의 이름이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이 그의 별명을 바라바라고 지어 준 것입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주는 사람, 다른 사람의 결핍을 채워주는 사람,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이런 착함 충만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4장 32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고 제 것이라 하는 이 없이 서로 도우면 행복하게 사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그 원동력을 불어 넣은 대표적인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이러한 바나바의 착한 헌신이 예루살렘 교회에 부흥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쓰임받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보면 당시 바나바의 헌신으로 바나바가 존경 받고 칭송을 받으니까 "나도 바나바처럼 존경을 받아 보았으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금방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바나바처럼 살아보자는 “바나바 붐”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나바 신드롬”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올 한 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착함 충만으로 이런 바나바 붐을 일으키는 주인공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종종 보면 교회 다녀도 고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회사 다녀도 고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 생활하여도 고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착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제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모든 중심이 자기에게 있는 사람들입니다. 남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나바처럼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처럼 사람들 보는 앞에서는 믿음 좋은 채 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지극히 자기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딴 짓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하면서 교회에서 누가 주방장이 되면 그 사람 잘 되게 하기 위해 협조하는 것이 아니라 교묘한 방법으로 골탕을 먹이는 것입니다. 김장을 할 때도 자신이 볼 때 너무 짠 것을 알면서도 주방장 골탕을 먹게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 씀씀이가 아주 고약한 사람들입니다. 꼭 우리나라 정치인들 같이 행동을 합니다. 상대 당이 망하고, 상대 당이 비난 받고, 상대 당이 잘 못되는 것을 자신의 성공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고기 두 마리가 작은 공간에 같이 살다가 한 마리가 죽으면 그 오염으로 같이 죽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해도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 앞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착한 체 하는데 너무 자기 중심적이고 지배욕이 강해 다른 사람을 다 자기 손에 쥐고 흔들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는 목회자도 사모도 자기 손에 쥐고 조정하고 싶어 합니다. 착함 충만이 아닙니다. 착함 충만은 남의 입장이 되어 어떻게 하면 남을 살리고, 도움을 주고, 세워주고, 성공하게 해 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오랜 전에 우리 교회에 부모님은 다른 교회에 나가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형제만 교회에 나왔습니다. 5월 어린이날 아이들이 감사 헌금을 하였습니다. 헌금을 하면 헌금 봉투를 가지고 제가 개인적으로 기도하는데 1000원씩 감사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봉투에 형이 “제 동생을 바보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 제목을 써 놓았습니다. 동생은 “하나님 감사해요 우리에게 많은 좋은 지능을 주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나이다. 아멘”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동생은 착함 충만이지만 형은 착함 충만이 못된 것입니다. 남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착함 충만의 핵심입니다. 남 위주로 얼마나 사느냐가 착함 충만의 척도입니다.
교회 다니지만 늘 자기 욕심만 채우는 착함 충만이 없는 교인이 교회에서 기도를 드렸답니다. 칼 들지 않은 강도처럼 착함 충만도 없이 이것저것 자기만 달라고 하나님을 협박하고 있는데 누군가 자기 옆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었답니다. "하나님 아버지 100달러만 주세요. 100달러만 주세요." 자기 만 아는 착함 충만이 없는 이 사람이 자기 기도를 방해하는 사람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답닏. 그래서 지갑에서 100달러를 꺼내서 기도하던 사람의 손에 쥐어 주었답니다. 기도하던 사람이 응답된 줄 알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나갔답니다. 그러자 착함 충만 없는 이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높이 들고 이제 "하나님 이제 제 기도에만 집중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올 한 해 기도하든, 봉사하든, 전도하든, 회사에서 일하든, 사업하든, 섬기든, 설교하든, 가르치든, 공부하든 착함 충만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하면 경쟁력이 없고 착해 빠지면 손해만 본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착하다고 결코 손해 아닙니다. 성경에 착한 사람이라고 직접 언급한 경우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첫 번째가 예수님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1)"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까지 주실 정도로 착함 충만이 있었습니다. 굶주린 사람을 먹이십니다.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상처난 인생을 어루만져 주어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평생 이 땅에 사시면서 온통 다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실패한 삶입니까? 어리석은 삶입니까? 얼마나 많은 선한 영향력을 미쳤습니까? 착함이 경쟁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나오는 인물이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나오는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예수님은 두 달란트와 다 섯달란트 받은 이 착한 종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람 하나님께 인정받고 더 쓰임받는 것입니다. 세 번째 나오는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경쟁력이 없습니까? 바나바처럼만 살아도 행복한 인생이고 성공적이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착함 충만한 바나바의 영향력을 보십시오. 2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대로 당시 온 지역에 흉년이 들어 먹고 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지역의 흉년이 더욱 심해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안디옥 교회 사람들이 자신들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헌금을 모아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도운 것입니다. 자신들도 어렵지만 더 큰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돕기 위해 각각 힘대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는 아름다운 선행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가 잘 되고 이런 회사가 번창하고 이런 가정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실제로 착함 충만한 레인메이커(rain maker)가 잘 산다는 것입니다. 맥시멈제너러시티 등 미국 교계 단체들은 미 전역의 십일조 준수 교인 4413명의 신앙· 헌금· 경제생활을 조사, 분석한 '스테이트오브더플레이트' 연례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미국에서 1000만명의 교인이 매년 500억 달러(55조6000억원) 이상을 십일조로 낸다고 밝혔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의 11∼20%를 십일조를 내는 크리스천의 80%는 신용카드 빚이 없고, 74%는 자동차 할부 미납금이 없으며, 48%는 모기지(주택담보대출) 미납금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28%는 어떤 종류의 빚도 없다고 답했답니다. 십일조 생활을 시작한 시기는 20대 이전이 63%로 가장 많았습니다. 이는 어릴 때부터 십일조를 생활화 한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경제적 여유를 갖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보고서는 미국이 200년 만에 세계 최강국이 된 비결은 자선과 나눔에 있다고 말합니다. "존경받는 부자들"이라는 책에 의하면 미국의 보통사람들은 70% 이상 자선활동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매년 2,000억 달러 이상이 자선기금으로 모인다고 합니다. 기부금만 내는 것이 아니라 연 인구의 1/3인 7,000만 명이 자원봉사에 나선다고 합니다. 20세기 초 록펠러와 카네기가 재단을 만들며 시작된 자선재단 활동은 2000년 5만 6,582개로 불어났고, 총자산은 4,861억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영혼의 문제로만 끝나는가 아니면 경제생활에도 영향이 있는가를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경제학과의 조너선 그루버가 조사를 해보았답니다. "예배 출석률이 2배가 되면 가계소득이 9.1% 증가하거나 복지지원금 수혜가 16% 감소하고 이혼확률이 4% 줄어든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는 사막과 같은 이 시대에 이런 착함 충만의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지으셨습니까?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라고 말씀합니다. 돕는 것은 창조질서의 원리요. 돕는 사역이 회복될 때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가정은 천국처럼 되며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갈 6:10)”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시편97:11)“
세상에 오래도록 영향력을 주고, 좋은 세상을 만들고, 교회에 오래도록 영향력을 주고 좋은 교회를 만들고, 회사에 오래도록 영향력을 주고 좋은 회사를 만들고, 가정에 오래도록 영향력을 주고 좋은 가정을 만드는 사람들은 착한 사람입니다.
2. 우리가 올 한 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기 위해서는 믿음 충만으로 시작하여야 하겠습니다.
바나바는 믿음이 충만했다고 오늘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믿는 대상에 대한 신뢰입니다. 바나바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가 충만하였다는 말입니다. 충성도가 높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다는 말씀입니다. 바나바의 믿음 충만이 어느 정도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충성도, 신뢰도가 어느 정도입니까? 그는 예루살렘 교회 교인입니다. 급격히 부흥된 예루살렘 교회에서 인정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사람을 파송하였습니다. 누구를 파송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바나바를 보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여러 사도가 있지만 바나바가 믿음의 적격자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에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 때 바나바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비해서는 아주 작은 교회입니다. 8천여 명이 나오는 대형 교회에서 10여명 나오는 교회로 파송한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스데반 일로 핍박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이방 땅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곳에 유력한 사람 바나바를 보낼 때 바나바가 믿음을 순종을 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 충만의 모습입니다.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도 바나바처럼 이런 믿음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믿음 충만한 사람들은 삶의 조건이나 환경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믿음 충만한 바나바는 그곳에 가서 무엇을 봅니까? “성가대가 얼마나 되는가? 사람들이 몇 명이나 모이는가? 교회 시설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사람들의 구성원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목사님은 어떤 사람인가?” 이런 것을 봅니까? 항상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믿음 충만한 사람은 그런 것을 보지 않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임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신앙의 간증이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어떻게 사람들이 변화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교인은 적고, 건물도 없고, 이방 사람들이고, 힘겨운 길을 왔지만 이 방 땅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고 기뻐한 것입니다. 똑같은 환경인데도 불신 충만한 사람들은 안 되는 조건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대를 움직인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 두 가지를 든다면 첫째가 전체를 보는 안목이고 즉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둘째가 긍정적 해석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모세와 백성들을 보십시오. 백성들은 안되는 것만 보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갑니다. 백성들은 골리앗을 보며 두려워 떨지만 다윗은 그 위기의 순간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왕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가데스바냐에서 10명의 정탐꾼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을 보고 와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보지 못하고 크고 장대한 적들만 보고 원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이 하시면 넉넉히 이길 것으로 믿고 나아가 결국 그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2) 믿음 충만한 사람은 나와 관계보다는 믿음의 주인인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더 동행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믿음 충만한 바나바가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23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말합니다. 주님께 사람들을 연결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 진 것입니다. 바나바에게 더해 진 것이 아니라 주님께 더해 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충만한 바나바의 삶의 결과입니다.
믿음 충만한 사람들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더 예수님께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 충만한가 불신 충만한가를 보려면 나 때문에 내 주변 사람들이 더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가 나 때문에 주변사람들이 더 예수님을 멀리하는가를 보면 알게 됩니다. 내가 믿음 충만하면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더욱 예수님께 가까이 갑니다.
3) 믿음 충만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 충만한 바나바를 통해 큰 무리가 주님께 더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 2:12)"
뿐만 아닙니다 믿음 충만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8)"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받은 것처럼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목욕탕에 가면 귀중품을 맡기세요. “맡기지 않는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쓰여 있는 것을 봅니다. 자꾸 의심하고 맡기지 않으면 잃어 버려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목욕탕 주인보다 못 믿으면 되겠습니까? 기도할 때도 받은 것으로 믿고 감사기도를 드려보세요. 우리 하나님이 넉넉하게 채워 주십니다. 믿음의 사람 엘리야도 아직 비는 오지 않지만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변화되기 전에 우리 마음이 먼저 변하여야 합니다. 말이 있고 마차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믿으면 믿는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히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막9:23에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믿음 충만하면 믿음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3. 우리가 올 한 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으로 시작하여야 하겠습니다.
바나바는 성령 충만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1) 성령 충만하면 인격적인 면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어 집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갑니다. 다소는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지금처럼 비행기나 기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레비게이션이나 스마트 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곳에 가서 이곳 저곳을 방문하여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찾는다는 말은 한 집 한 집을 뒤져가며 세밀하게 찾는 것을 말합니다. 수고를 감당하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비위 상한 일도 있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감당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사울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행9:29,30). 유대에서 여러 번 신변의 위협을 받았습니다(행9:23,29) 그러나 바나바는 달랐습니다. 바나바는 어떻게 합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자신의 경쟁자로 생각하여 자객을 보내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로 사울을 대리고 와 함께 큰 무리를 가르쳤습니다. 지금 말하면 담임 목사는 바나바입니다. 부목사는 바울입니다. 만약 바나바가 자기밖에 모르고 옹졸한 목회자였다면 자기의 인기에 치명타를 줄지도 모르는 바울을 초청하여 함께 사역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금만 자신보다 인기가 있으면 제거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못 견디며 시기하며 질투합니다.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9장27절을 보면 사울은 살기등등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런 바울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꺼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사울의 신원을 보증해 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그의 보증과 변호 덕분에 바울은 비로소 사도로서 첫걸음을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을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가 데려옴으로 말미암아 바울이 안디옥 교회를 발판으로 세계선교를 감당하였습니다. 12장부터는 선교의 주체가 바나바에게서 바울로 옮가기 시작합니다. 바나바가 목회의 선배입니다. 한 때 날린 사람입니다. 나이도 많습니다.(행 14: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그러나 한 번도 바나바는 이 일에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서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꼭 내가 해야만 하고 나를 통해서만 교회일이 이루어 져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기나 명예, 목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 주님의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의 교회가 부흥되지 않더라도 주님의 교회가 부흥되면 그것으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통하여 교회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고 다른 성도님을 통하여 교회일이 잘 될 때 그것으로 감사하며 감격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성숙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 조용히 자기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의 결과입니다. 성령 충만한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라고 말씀합니다.
바나바의 인간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비단 바울의 경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행 15장에 기록된 마가에 대한 바울과의 의견충돌이 생겼습니다. 1차 전도 여행기간 중 떠나간 마가를 바울은 데리고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려고 열심히 변호합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만약 이 때 바나바도 실수하나 마가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마가는 인생의 낙오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바나바가 있었지 때문에 마가는 후에 훌륭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2) 성령 충만하면 사역에서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바나바를 통해 어떤 사역의 열매가 맺히게 되었습니까?
많은 사람이 주께로 나왔습니다.(24) 안디옥 교회를 참으로 모범적으로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26) 사울을 선교의 중심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교회가 부흥되고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나바가 부임한 그날부터 안디옥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소문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시대를 변화시키고 세상의 문화를 바꾸는데 쓰임받았습니다. 무엇으로 이런 역사가 가능하겠습니다. 성령충만한 바나바를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능력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성막을 짓는 브사렐을 보십시오(출31:3).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충만히 임하니까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를 발휘하여 성막을 짓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안수를 받을 때 지혜의 영이 그에게 충만히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 충만하여 백성들을 다스리니까 어떻게 됩니까? "(신 34: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시니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습니다(삿 14:6)" 능력의 한계를 초월하게 합니다.
성령 충만한 부모 밑에서 낳아 성령 충만한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눅1:15, 41, 6) 담대하게 천국을 전하고 그 악한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보십시오(사도행전 6:5절 행7:55).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합니다. 담대하게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충만하여 엘루마의 본성을 알았고 그를 꾸짖은 결과 엘루마는 소경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행13:9)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게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성령 충만한 바울은 아시아에서 전도하고자 했으나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시자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인식의 한계, 능력의 한계 앞에서 좌절하지 말고 올 한해 기도하고 사모하고 순종하고 회개함으로 성령 충만받아 능력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시기 질투 충만, 돈 충만, 쾌락 충만, 욕심 충만과 같은 잠시 있다 없어질 것 충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것에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님 충만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만족이 있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사라집니다. 희망과 기대가 있습니다. 지지치 않습니다. 지혜가 솟아납니다. 끝이 좋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바나바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 올 한 해 착함 충만, 믿음 충만, 성령 충만으로 교회를 부흥시키고 가정을 행복하게 하고, 사업을 성공시키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쓰임 받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