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 월드컵 16강 진출의 국가적 대업을 이룩한 거스 히딩크 감독. 축구협회에서 받은 공식 보너스 2억원에 각종 후원금이 밀려들어 적지 않은 돈을 손에 쥐었지만, 그래도 좀 부족한 듯 싶었다.
'이제 이름은 충분히 날렸으니 돈도 좀 원하는만큼 벌어야겠다...달러가치도 계속 떨어지는데 지금 귀국할게 아니고...그래 이거다. 한국증시에서 돈 벌어서 나중에 달러로 바꾸는 거다. 얼핏들으니까 종합주가지수가 800선에서 옆걸음을 계속하고 있다더군. 경제는 좋아지는데... 이제 진짜로 한번 뜰때가 됐다잖아'
축구감독이 무슨 투자냐고? 자고로 한 분야에 도통하면 세상이치가 다 보이는 법. '히딩크 경영학'에 '히딩크 대통령론'까지 나오는데 주식시장이라고 안 통할리가 없다. 객장을 향해 달려가는 히딩크의 손에는 경기장 벤치에서 틈틈히 정리해놓은(아마 TV시청자들은 히딩크가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중얼거리며 요즘 유행하는 펜형 녹음기에 메모하는걸 눈치못챘으리라) 비장의 투자비법 7가지가 빼곡히 적힌 노트가 들려있었다. 다음은 본인에게서 직접 단독 입수한 히딩크의 투자노트(제목은 원문을 그대로 살렸음).
1. Miss Korea? NO!(모두가 쳐다보는 미인주로는 안돼)
나만큼 잘나갔던 케인즈라는 경제학자가 주식투자는 미인대회라고 했다나?. 그렇다고 이미 대회에서 뽑힌 미인을 골라서는 성공할수 없지.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얼마나 이뻐질수 있느냐 이거지. 내가 뽑은 선수들은 모두가 칭찬하는 미인이 아니었어. 1998년 프랑스 월드컵때부터 스타가 된 이동국이를 안뽑은 것도 그때문이야. 고종수도 설사 부상을 안당했다 하더라도 난 별로였어. 홍명보 안정환 윤정환이도 바닥까지 가서 다시 올라왔기에 뽑았지.
반면에 박지성 차두리를 보라구. 처음 뽑을땐 다들 '저게 물건 될까'했잖아. 역시 고수익은 남들이 미처 눈을 돌리지 않은 성장주에서 나오는거야.
2. Hips Make Money(돈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번다)
처음 한국대표팀을 맡았을땐 암담하더군. 반짝 하는가 싶더니 또 촥 가라앉아서 바닥을 기는데, 정말 중간에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한두번이 아니었어. 특히 평가전에서 박살나고 올때마다 겉으로야 '한국축구는 발전하고 있다'고 했지만 나라고 왜 돌아버리지 않겠어. 그래도 버틸수 있었던 건 장기계약이 돼 있었기 때문이지.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가격에 팔수 있다는건 주식투자에서도 마찬가지야. 월드컵 보너스덕에 여유자금도 충분하니까 아무리 장이 흔들려도 최소 1년반 쳐박아둔다는 생각으로 해보는거야. 앙드레 코스톨라니라는 헝가리 영감도 돈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번다고 했다잖아.
3. Shut your Ears(남들이 뭐라든 신경쓰지 말라)
한국사람들, 특히 언론은 대단해. 조금만 잘하면 '역시 히딩크'했다가 다음날엔 '쟨 안돼' 하잖아. 5대0으로 한번 졌다고 이름을 오대영이라고 부르질 않나. 마이 달링 앨리자베스를 들먹이면서 사생활 까지 난도질할땐 나도 흔들리더군. '그래, 내가 잘못 고른 것 같아. 남들 말대로 선수 바꾸고 다시 시작할까'
하지만 결국 어땠어. 내 원칙대로 고른 선수들은 제몫을 했잖아.
주식 브로커는 고객 돈이 완전히 없어질때까지 끊임없이 주문을 내도록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특히 한국의 (일부 악덕:편집자)투자상담사한테 잘못 걸리면 뼈까지 발라먹는다는데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4. Fundermental and Fundermental !(역시 기초체력:두번 강조)
월드컵이 몇달남았다고 아직도 기초체력훈련이냐고 말들이 많았지. 하지만 월드컵 며칠전까지도 예외없이 20미터 쇼트런(Short Run)을 반복하도록 한 것은 기초체력이 없는 선수는 언제든 순식간에 무너진다는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지. 야구건 축구건 아니 세상 모든 일이 하체가 탄탄해야해. 우리가 폴란드나 미국하고 싸울때 끝까지 밀착마크와 빠른속공으로 몰아부쳐 결국 이길수 있었던 것도 체력없이는 안되는 일이야.
김남일 송종국이 대표적이지. 관중들 눈에는 잘 안띄지만 특히 김남일이 같은 지칠줄 모르는 수비형 미드필더가 없으면 시합못해. 종목도 마찬가지야. 재무구조가 튼튼하고, 수익을 내고, 자산가치가 높은 종목을 골라야 낭패를 보지 않아.
5 Never Hesitate to Losscut(과감히 손절매하라)
공격을 잘하는 팀은 분명 강팀이야. 하지만 수비를 못하면 큰대회에서 절대 우승할수 없다는건 스포츠계의 철칙. 아흔아홉번 공격을 잘해도 한번 수비가 뚫리면 골을 먹고 질수 밖에 없지. 한국기자가 그러는데 삼성화재가 배구에서 6연패한 것도 점수를 덜 먹는 뛰어난 수비 덕이라고 하더군.
투자에서 손절매는 일종의 수비같은거야. 더 이상 손해보기 전에 자르는 거지. 한국시장은 변동폭이 크니까 한 20%를 손절매 폭으로 잡아야지.
마지막 엔트리 결정 직전까지 훈련장에 따라왔던 심재원이나, 부상에서 도저히 회복될 것 같지 않던 고종수는 자를수 밖에 없었어. 그동안 들인 공과 정을 포기하고 대표팀에서 제외한 것은 팀전력 약화를 막기 위한 일종의 손절매였지.
6. Mind Your own Stock(다른 주식 가격을 쳐다보지 마라)
월드컵 시작하기 직전까지 일본팀 트루시에 감독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어. 한국 친구가 '배고픈건 참아도 배아픈건 못참는다'고 하던데..정말 가슴에 팍팍 와닿더군. 하지만 남 잘나간다고, 또 남이 이 종목에 돈 벌어서 갑부됐다고, 덩달아 초조해지면 백전백패야.
결국 월드컵을 4일 앞두고 어느 신문에서 월드컵출전팀 감독들 순위를 매긴 걸 보니까 트루시에는 22위고, 나는 9위에 올랐잖아. 운전하고 가다보면 항상 옆 차선이 잘 빠지는 것 같지만, 여기저기 기웃거리다보면 나중엔 제일 뒤로 쳐지게 돼. 옳은 선택이다 싶으면 내종목이 오를 차례를 기다리면 되는거지. 참, 트루시에 그 친구는 지금 뭐하고 사는지 궁금하네. 전화한번 넣어볼까.
7.Gees! Hiden Card(한 종목에 의존하지 마라)
내 이름이 뭔가..히딩크. 난 남들이 내 이름을 히든카드의 약자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한 선수한테 의존하지 않고, 항상 대체가 가능한 히든 카드를 갖는다' 이게 바로 나의 리더십과 승리의 비결이지. 월드컵 전부터 "우리팀은 안정환 설기현 황선홍 최용수 네명이 모두 스트라이커"라고 누차 말했잖아. 또 때로는 유상철을 미드필더에서 수비로 내리기도 하고 말이야. 그렇다고 포트폴리오 한답시고 고만고만 비슷한 스타일 선수들로 숫자만 채워두면 상대팀에 따라 적절한 전략을 쓸수 없지. 남미식 포루투갈과, 유럽식 미국 폴란드와 싸울때 똑같은 스타일의 선수로 맞서서 될 턱이 있나. 블루칩만 몽땅 갖고 있다가 기관이나 외국인이 'SELL'로 나가면 대책이 없지. 그렇다고 IT벤처쪽에만 몰빵했다간 어떻게 되는지는 2000년 증시가 잘 보여줬다고 하더군. 업종별 규모별 경기사이클성격 별로 서너종목씩 포트폴리오를 짜두는게 기본이야.
이런 '필승(必勝) 7계'를 들고 한국 증시에 뛰어든 히딩크, 당연히 승승장구할수 밖에.
물론 여기에는 히딩크만의 프리미엄도 있었다. 외국계 증권사의 고객이라는 점이다(외국계 국내지점은 개인고객은 안받지만 히딩크가 계좌트겠다는데...). 덕분에 외국인 동향을 잘 알수 있고, 한국 기업들이 외국계 증권사에만 때때로 흘려주는 사전정보도 짭짤했다.
하지만 히딩크가 미처 챙기지 못한 결정적인 리스크가 있었다. 펀더멘털을 보고, 새로 코스닥시장에 등록한 성장주들을 골라서, 온갖 유혹 이겨가며, 눈 딱감고, 1년반이나 보유했는데..사둔 종목이 부도가 나고 만 것이다. 알고보니 분식회계에다가 등록주선을 맡은 증권사까지 엉터리 분석을 했다는 것 아닌가. 그제서야 2002년 5월인가 '부실분석 26개 증권사 중징계..'어쩌고 했던 한국신문들의 기사가 떠올랐다.
파파라치 못지 않은 극성팬들과 인터넷 언론도 투자자 히딩크의 적이었다. 히딩크의 투자비법을 따라하려는 개미들때문에, 종목을 좀 연구해보려고 몇군데 문의라도 할라치면 어느새 시장에 소문이 나버렸다. 머니투데이에 '히딩크 오늘 OOO주식 5000주 매수 사실입니까'라고 루머문의가 올라와서 주가가 저만큼 달아나버리기 일쑤였다. 물론 스스로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주식투자까지 잘한다'니까 방송 오락프로그램까지 여기저기 끌려나가 떠들다보니 평상심을 잃고 말았다.
'방어투자' 개념으로 사둔 삼성전자와 국민은행 덕에 원금을 겨우 건진 히딩크 감독...다음엔 진짜 잘할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2006년 월드컵때 돈 벌어서 다시 투자하기 위해 내키진 않지만 한국국가대표 감독직을 수락한다. 값비싼 수업료 치렀다고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