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집 문집 제7권 / 비명(碑銘)
경기 관찰사 심공 신도비명 병서(京畿觀察使沈公神道碑銘 幷序)
지난 임진년(1592, 선조 25)에 섬 오랑캐가 침범하여 한양으로 들이닥쳤다. 선조(宣祖)께서는 갑자기 의주(義州)로 피난하시고, 조정의 고관들은 모두 사방으로 달아나 숨었다. 이때 청송 심공(靑松沈公)이 호조 정랑(戶曹正郞)으로 있었는데, 미처 식량을 마련하지도 못한 채 곤경에 처한 임금을 호종(扈從)하여 끝까지 부지런히 노력하였으니, 재능 있는 신하로 불리었다.
만력(萬曆) 임인년(1602)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재임 중에 운명하고, 3년 후 어가를 호종한 공과 선무(宣武)한 노고를 추록(追錄)하여 다시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 청계부원군(淸溪府院君)에 추증하였으며, 겸관(兼官)은 실직(實直)과 같이 하였다.
아아, 혼란한 시절을 만나 뛰어난 활약으로 그 공을 환히 드러내어 맹부(盟府 충훈부(忠勳府))에 이름이 올랐으니, 공은 거의 조최(趙衰)와 신포서(申包胥)에 비견되는 분이라고 하겠다. 국가에서 보답으로 내린 은전(恩典)도 또한 성대했다고 할 것이다.
살피건대, 공의 휘(諱)는 우승(友勝), 자(字)는 사진(士進), 호(號)는 만사(晩沙)이다. 위로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는 7대조인데, 이분이 온(溫)을 낳아 그의 아들 회(澮)와 함께 3대가 상상(上相)의 지위에 올랐다. 판관(判官) 휘 원(湲), 사인(舍人) 휘 순문(順門), 통례(通禮) 휘 달원(達源), 경기 관찰사 휘 전(銓)은 모두 높은 벼슬에 추증되었는데, 이 분들이 공이 제사를 받드는 4대 선조이다.
심씨 집안에서 두 분의 왕후(王后)가 나셨으니, 가문의 높고 화려한 명망은 다른 가문과 비교되지 않는다. 그러나 유독 공은 예법을 지키고 유자(儒者)의 품행을 돈독히 행하며 학문을 쌓았다. 계유년(1573, 선조6)에 진사가 되었고, 경진년(1580)에 문과 급제하여 처음 성균관에 배속되었다.
병술년(1586)에 감찰(監察)로 옮겼고, 이후 호조(戶曹)와 예조(禮曹)의 좌랑(佐郞), 경상도와 경기도의 도사(都事),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의주(義州)로 몽진하는 어가를 호종하던 도중에 정언(正言)과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당시 전란의 형세가 치열해져 온 나라가 더욱 놀라 술렁이니, 우러러 의지할 것은 오직 명(明)나라의 원조 뿐이었다. 공이 서장관(書狀官)의 신분으로 연경(燕京)에 달려가 지극한 정성으로 호소하니, 명나라 조정에서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출전하게 하여 평양의 왜적을 섬멸하였다.
임금께서 곧바로 공을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로 발탁하셨다. 얼마 후에 부모를 봉양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여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나갔다. 병신년(1596, 선조 29)에 호조 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나라가 막 전쟁을 겪은 터라 공사(公私) 간에 창고가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었는데, 조달하기 어려운 일들은 번번이 공에게 맡겨 처리하게 하였다.
영의정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공을 중시하였으며, 임금께서도 공을 인재로 여겨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특진시키셨다.
명나라 군사가 서울을 가득 메우고 기세를 부리며 공공연히 약탈을 일삼았지만, 백성들은 감히 말 한마디 하지 못하였다.
마침 명나라의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공에게 병사들의 만행에 대해 물었다. 공이 앉은 자리에서 그 실상을 직접 수백 자로 써서 보였다. 양공이 크게 장려하고 추켜세웠으나 아래 사람들이 혐의를 품고 비방하니, 임금께서 공을 파직시키셨다. 그러나 공의 민첩함과 문장력에 대해서는 매우 감탄하셨다.
경자년(1600, 선조 33)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있으면서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다. 이듬해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나갔다. 오랜 노고가 쌓여 차츰 병이 되었는데, 임인년(1602)에 대부인(大夫人 어머니)이 운명하자, 공이 상례를 극진하게 치르다가 병이 끝내 깊어져서 그해 6월에 운명하였다. 광주(廣州) 퇴촌(退村)의 계좌(癸坐) 등성이에 안장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활달하여 강직하면서도 각박하지 않았고 변별하면서도 까다롭지 않았으며, 청명(淸明)하고 꼿꼿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았다.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었으며, 친척들을 인자하게 대하고 벗들과 사귈 때 시종 한결같이 성의를 다하였다.
처음 관직에 나갔을 때, 요로(要路)에 있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아 하급 관료로 전전했지만, 애당초 난색(難色)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때를 만나게 되자 충절을 다해 공무를 봉행하였으니,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맡겨도 해내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특히 번잡한 일을 처리하는 데 뛰어나, 일을 만나면 정밀하게 분석하여 능수능란하게 해결하였다.
경기도는 큰 도(道)라서 위로는 막부(幕府)의 장좌(將佐)로부터 아래로 하인에 이르기까지 수레가 하루에도 천 대, 백 대나 오갔다. 관리들이 형벌을 동원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고 공급 물품을 비축하니, 백성들은 발이 파이고 뒤꿈치가 닳도록 분주하게 다니다가 도로에서 서로 밟혀 죽고 이리저리 도망쳐 매우 소란스러웠다.
공이 생각하기에 큰 고을도 있고 작은 고을도 있는데, 부역(賦役)은 편중(偏重)되어서 지방관들이 매번 자기들 마음대로 조발(調發)하기 때문에 호리(豪吏)들이 그 편의를 독점하여 작은 고을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여겼다. 이에 경기도의 전부(田賦) 전체를 파악하고 결수(結數)로 나눈 다음, 많고 적음을 비교하여 부역 할당을 고르게 하니, 백성들이 비로소 쉴 수 있게 되었다.
그 후에 드디어 이 방법을 따라 관례로 삼게 되었고, 조정에서 바야흐로 공에게 의지하여 폐단을 고치려고 하였는데, 공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공은 23년 동안 조정에 있었지만, 국정을 들은 것은 9년이 채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계획하고 시행하여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이와 같았다.
만약 하늘이 공의 수명을 더 연장해 주어서 뜻한 일을 다 행할 수 있었다면, 공효(功效)의 미친 바가 어찌 이 정도에 그쳤을 뿐이랴. 애석하도다! 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현감 용(容)의 딸이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어서, 새벽에 일어나 꼿꼿하게 앉아 일을 지시하면 비복들이 머리를 숙이고 할 일에 대해 들었으니, 집안이 엄숙하게 다스려졌다.
공보다 10년 뒤에 운명하였고 공과 합장(合葬)하였다.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액(詻)을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서자 보(譜)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판서(判書 심액(沈詻))는 2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장령(掌令) 광수(光洙)와 현감 광사(光泗)이다. 딸들은 허뢰(許賚), 감사(監司) 오단(吳端), 안천건(安千健), 유명(柳蓂), 이암(李巖)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광사는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장백(樟柏)이고, 진사 상백(相柏)은 장령(掌令 심광수(沈光洙))이 후사로 삼았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감사 오단의 다섯 아들은 참판(參判) 정일(挺一), 수찬(修撰) 정원(挺垣), 좌랑(佐郞) 정위(挺緯), 정벽(挺璧), 진사 정창(挺昌)이다.
네 딸 가운데 장녀는 봉사(奉事) 이상정(李象鼎)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인평대군(麟坪大君)의 부인이며, 셋째는 진사 이수번(李壽蕃)에게, 막내는 유이태(柳以泰)에게 시집갔다. 안천건은 현감 광욱(光郁)을 낳았고, 유명은 인의(引儀) 승배(承培)를 낳았고, 이암은 천한(天漢)을 낳았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54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사적이 사라진다. 나의 외조모가 바로 공의 누이이시다. 내가 일찍이 어려서 공을 모신 적이 있기에, 대략 한두 가지를 기록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청송 땅에 심씨 있어 / 惟靑有沈
그 근원 깊으니 / 有濬其源
두 분 왕후가 임금 받들었고 / 二后承乾
세 분 재상이 임금 도왔도다 / 三相贊元
면면히 쇠하지 않고 이어져 / 繩繩不替
이에 우리 공이 탄생하니 / 乃有我公
우리 공이 떨쳐 일어나 / 我公爰發
매진하는 자취를 몸소 만들었네 / 邁跡自躬
낭관으로 침체했지만 / 潛于郞署
곤경에 잘 대처하여 형통하였네 / 處屯乃亨
변방으로 어가 호종하며 / 從其牧圉
우리 임금과 뜻이 맞았어라 / 契我天明
호조 참판을 거쳐 / 掌貳邦賦
드디어 경기 관찰사로 나가니 / 遂殿畿服
대를 이어 맡은 관직이라 / 由茲世職
이룬 공적 진실로 이와 같았네 / 奏功允若
충성하고 효도하느라 / 旣忠旣孝
수고롭게 일하다 몸을 상해 운명하니 / 勤顇毀終
숭봉하고 추증하였지만 / 崇封寵贈
어찌 임금의 슬픔 풀리랴 / 豈釋宸恫
다만 명예와 가문은 / 惟名與閥
영원히 빛나리니 / 載烈于永
단단한 빗돌에 이 시를 새겨서 / 刻詩于堅
솥에 새김을 대신하노라 / 以代銘鼎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강원모 오승준 김문갑 정만호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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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京畿觀察使沈公神道碑銘 幷序
越歲執徐。島寇內躪逼京邑。宣廟卒起幸龍灣。達官咸奔逬四竄。時則靑松沈公方任戶曹正郞。未及具粱糗。從衛艱難。卒效其勤力。號才能臣。萬曆壬寅。卒官京畿觀察使。後三年。追錄從駕勳及宣武勞。再贈公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靑溪府院君。兼官如眞拜。嗚呼。遭時板蕩。雲蒸龍變。昭其功載。策名盟府。庶幾趙衰. 申胥其人。而國家錫報之典。亦可謂盛矣。按公諱友勝。字士進。號晩沙。上距靑城伯德符爲七代。是生溫。與其嗣澮仍三世都上相。判官諱湲. 舍人諱順門. 通禮諱達源. 京畿觀察使諱銓。俱贈崇秩。卽公之祀也。沈氏再儷宸極。門戶高華。異於它族。獨公服禮敦儒行。績學居業。擧癸酉進士。庚辰文科。初隷成均館。丙戌。轉監察。後歷戶禮曹佐郞. 慶尙京畿都事,刑曹正郞。及從衛西遷。道拜正言,持平。時兵氛益熾。邦域益駴。所仰賴唯中朝拯援。公膺使介。疾馳赴燕都。血誠號籲。中朝爲發李如松提大軍東出。殲西京賊。上卽擢公承政院承旨。已而乞養得春川府。丙申。拜戶曹參議。國家新罹鋒焰。公私赤立。至事難調集。輒委公辦釐。西厓相重之。唯上亦以公爲材。特晉公本曹參判。天兵塞都下作氣勢。公肆剽劫。里閭無敢出聲。適經理楊公詢公兵士陵藉狀。公於座手疏其實累百言。楊公大加奬詡。而門下嗛意發惡言。上爲罷公職。然益歎公敏而有文。庚子。以右尹兼管備邊司。明年。按邦畿。積久勞。浸以成病。至壬寅。太夫人棄諸孤。公執禮自盡。疾遂革。以其年六月捐館。葬廣州退村負癸之原。公天資開達。剛而不劌。辨而不煩。淸明介立而不忤於物。事親孝。友於晜弟。仁於宗黨。與朋友交。終始一於誠。始釋褐。被當路沮閼 。陸沈下僚。初無坎窞色。逮其遭契。竭節以奉公。用之盤錯。施無不可。尤長於剸劇。遇事精解。剖決游刃。畿輔孔道也。大而督府將佐。下至輿隷。結轍日千百。率以敲撲濟欲。儲胥供億。蹄穿踵踣。交跖斃道路。散亡繹騷。公以爲邑有大小。役有偏重。而長吏每臆調而意發。故豪吏占其便而小邑受其病。乃算一道田賦總計。劑爲分數。視其多寡而均其科役。民始息肩。其後遂踵爲故事。朝廷方倚公更革弊條。而公遽沒矣。公立朝二十三年。聞國政未滿九載。其猷爲己犖犖彰著如此。使天假以齡。究行其志業。功施所及。詎但止此而已。惜哉。夫人順興安氏。縣監容其考也。御家有法。晨起岸坐莅事。婢使俯首聽職。閫以內肅而治也。後公十年卒而祔焉。無子。取兄子詻爲後。位輔國崇祿大夫吏曹判書。庶子譜。武科縣監。判書二男五女。男掌令光洙. 縣監光泗。女適許𧶘. 監司吳端. 安千健. 柳蓂. 李巖。光泗七男。樟柏. 相柏進士。掌令子之。餘幼。監司五男。挺一參判 。挺垣修撰。挺緯佐郞。挺璧. 挺昌進士。四女。長奉事李象鼎。次麟坪大君夫人。次進士李壽蕃,柳以泰。千健生光郁。縣監。蓂生承培。引儀。巖生天漢。自公歿五十四年。事日以闇昧。不佞外王母實爲公姊。不佞嘗以童子事公。略紀一二。以爲銘曰。
惟靑有沈。有濬其源。二后承乾。三相贊元。繩繩不替。乃有我公。我公爰發。邁跡自躬。潛于郞署。處屯乃亨。從其牧圉 。
契我天明。掌貳邦賦。遂殿畿服。由茲世職。奏功允若。旣忠旣孝。勤顇毀終。崇封寵贈。豈釋宸恫。惟名與閥。載烈于永。
刻詩于堅。以代銘鼎。<끝>
東州先生文集卷之七 / 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