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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허조(許稠)
1369년(공민왕 18) - 1439년(세종 21)
[고려문과] 공양왕(恭讓王) 2년(1390) 경오(庚午) 경오방(庚午榜) 병과(丙科) 2위(5/33)
[고려사마] 창왕(昌王) 즉위년(1388) 무진(戊辰) 생원시(生員試) ○등(○等)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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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하양(河陽: 경산시 하양읍).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판전객시사 허수(許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관정랑(都官正郎) 허윤창(許允昌)이고,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허귀룡(許貴龍)이며, 어머니는 통례문부사 이길(李吉)의 딸이다.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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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30권 / 묘지(墓誌)
유명조선국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영집현전경연춘추관사 세자부 증시 문경 허공 묘지명 병서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領集賢殿經筵春秋館事 世子傅贈諡文敬許公墓誌銘 幷序)
남수문(南秀文)
정통(正統: 1439 세종 21) 4년 기미 겨울 12월 임인일에 의정부 좌의정 허공(許公)이 병으로 사제(私第)에서 졸하니, 나이 71세였다. 태상(太常)에서 문경(文敬)이라 시호를 내렸고, 명년 봄 3월 경신일에 유사가 의위(儀衛)를 갖추어 원평부(原平府) 북쪽 향양리(向陽里)의 언덕에 장사를 치를 때 사자(嗣子) 승지 후(詡)가 묘지명을 청하였다. 내가 일찍이 승지와 더불어 실로 두 차례나 동방(同榜)이 되었던 만큼 의리상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성은 허씨(許氏)요, 휘는 조(稠)요, 자는 중통(仲通)이니, 경상도 하양현(河陽縣) 사람이다. 먼 조상 강안(康安)이 서충(徐冲)을 낳고, 서충이 작린(綽麟)을 낳고, 작린이 신(愼)을 낳고, 신이 세통(世通)을 낳고, 세통이 혁부(赫富)를 낳고, 혁부가 득서(得諝)를 낳고, 득서가 휘 유(裕)를 낳았는데 벼슬이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성격이 엄하고 법도가 있어 삼가 가업(家業)을 지켰다. 그가 한양의 명망 있는 집안 판태복(判太僕) 한균(韓均)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 유(綏)를 낳았는데,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로서 조용한 성격으로 물욕이 적었으며, 늘 의관을 갖추고 방에 단정히 거하였다.
그리고 시중(侍中) 문성공(文成公) 휘 안향(安珦)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 윤창(允昌)을 낳았는데, 윤창은 엄격하고 정직하였으며, 감찰어사 전법전리좌랑(典法典理佐郞)을 거쳐 벼슬이 도관정랑(都官正郞)에 이르렀고, 대사성 휘 이직(李稷: 조선 전기 영의정을 역임, 星州人)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 귀룡(貴龍)을 낳았다.
귀룡은 공손하고 민첩하며 관대하여 큰 도략이 있더니, 산기상시(散騎常侍) 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쳐 봉익대부(奉翊大夫) 개성윤(開城尹) 상호군에 이르렀으며,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휘 이길(李吉)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았으니, 맏아들 주(周)는 자헌대부 판한성부사로, 시호는 간숙(簡肅)이요,
다음은 바로 공이요, 막내아들 척(倜)은 전 가선대부 중추원부사였다. 공이 홍무 2년 기유 4월 11일에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우뚝히 어른과 같았고, 조금 자라나서는 양촌(陽村) 권문충공(權文忠公)에게 학업을 배워 뜻을 가다듬어 학문에 힘쓰더니, 계해년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또 을축년 사마시에 올랐다.
무진년에는 음직으로 중랑장에 보직되었고, 경오년에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과 송당(松堂) 조준(趙浚)이 예부(禮部)에서 시험할 때, 공이 병과(丙科)에 뽑혔는데, 두 공이 매우 중하게 여겨 전의시승(典儀寺丞)이 되었었다. 임신년에 우리나라가 천명을 받자 특별히 좌보궐(左補闕) 지제교에 오르고, 얼마 안 되어 봉상시 승(奉常寺 丞) 지제교가 되었다.
이때에 예악(禮樂)이 흩어지고 태상(太常)의 관직이 폐지되자, 공은 폐습을 힘써 버리고 모두 전고(典故)를 따르게 하였다. 양촌(陽村)이 자주 말하기를, “훗날 우리나라의 예법을 주관할 이는 반드시 이 사람이리라.” 하였다. 계유년 5월 아버지 상을 만났고 명년 10월에 또 어머니 상을 만났다.
당시 풍속으로는 상례를 치르는 자가 불법(佛法)을 숭상하였는데, 공은 한결같이 문공가례(文公家禮)에 따라 슬픔과 예법이 함께 극진하였다. 우리나라 선비와 서인들이 가례를 따른 것은 모두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정축년에 성균전부(成均典簿)가 되어 석전의식(釋奠儀式)을 수정 간행하여 중외(中外)에 선포하였고, 건문(建文) 기묘년에 두 번이나 좌보궐(左補闕) 지제교가 되어 엄연히 이름이 있었다.
경진년에 태종이 왕위를 물려받자 사헌잡단(司憲雜端)이 되어 국시를 논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렸다. 임금이 노하여 중형에 처하려고 친히 심하게 국문하였으나, 공이 항변하여 굴하지 않자, 임금이 그 강직함을 아름답게 여겨서 완산 판관(完山判官)에 좌천시켰다. 일을 맡 은지 몇 달 만에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병으로서 사직하였다.
임오년 가을에 이조 정랑에 결원이 생기자, 임금이 전선(銓選)이란 책임이 중대한데 마땅한 인재가 없자 친히 관부(官簿)를 검열하다가 공의 이름을 발견하고 이르기를, “적당한 사람을 얻었구나.” 하고는 곧 맡겼다. 겨울에 조봉대부 내서사인 지제교(朝奉大夫內書舍人知製敎)가 되었으니 역시 특명이었다.
영락(永樂) 계미년 가을에 일이 있어 영월군에 좌천되었는데, 겨울에 병으로 사임하였고, 갑신년 호군(護軍) 집현전직(集賢殿直)이 되었다가 을유년에 본직으로서 세자좌문학(世子左文學)을 겸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세자에게 묻기를, “관료 중에 누가 현명하냐?” 하니, 세자가 공을 거론하여 대답하였다.
병술년에 경승부소윤(敬丞府小尹)이 되었고, 정해년에 예문관직(藝文館直)으로 문학(文學)을 겸하였더니, 세자가 명나라 서울에 갈 때, 중훈대부(中訓大夫) 사헌집의(司憲執義)로서 서장관에 보충하여 여행에 필요한 물품에 관한 일을 일체 담당하게 하였는데, 공이 약속이 밝고 명령이 엄격하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금령을 범하지 못하였다.
공이 명나라로 조회하러 들어가자, 모든 제도에 관한 사안을 모두 물어서 상세히 기록하였다. 동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궐리(闕里)에 들러 선성묘(宣聖廟)에 배알하던 중 강도상(江都相) 동씨(董氏)와 노재(魯齋) 허씨(許氏)가 종사(從祀)되고, 양웅(揚雄)이 쫓겨 났음을 보고 모두 우리 조정에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무자년에 통훈(通訓)으로 판사섬시사(判司贍寺事)가 되고 세자우보덕(世子右輔德)이 되었더니, 세자가 듣고서 좌우에 말하기를, “허 문학(許文學)이 다시 오느냐.” 하였으니, 이는 평소에 그 엄격함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이해 평양군(平壤郡)의 옥사가 일어나자 체포된 자가 실로 많았기 때문에 대관(臺官)이 이루 다 고문할 수 없었는데 무고하게 공을 이끌어 춘주(春州)에 귀양보내고, 얼마 안 되어 풀어 돌려보내서 경승부사윤(敬丞府司尹)이 되게 하였는데, 신묘년에는 통정 예조좌우 참의가 되었다.
공이 고려 말년에 오례의주(五禮儀注)가 실전되었음을 개탄하여 곧 당송(唐宋) 때의 전고(典故)를 인용하여 조묘(朝廟)의 예악과 서사대부의 상제(喪制)에 대하여 예법을 참작하고 현실을 시정하여 모두 찬정(撰定)하였으니, 이로부터 늘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의 제조(提調)가 되었다.
글을 올려 학당을 세울 것을 청하고, 뒤에 또 사부(四部)에 학교를 설립할 것을 청하자, 이를 모두 따랐다. 병조와 이조의 참의를 거쳤다.
갑오년에 공을 보내어 평안도의 산성을 순찰하고 모든 조치를 공의 의론에 많이 따랐으며, 임금 앞에서 평안도의 민생고를 진술하자 임금이 특히 조세를 면해 주었다.
그 뒤에 뵙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무술(武術)은 비록 폐할 수는 없었으나, 험준한 곳에 말을 달림이란 위태함을 측량할 수 없었으니, 전하께서는 친히 사냥을 하지 마소서.” 하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이어 강무장(講武場)이 너무 많은 폐단을 말하였더니, 임금이 그의 말을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을미년 봄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가선(嘉善)의 직계에 오르고, 겨울에는 예문관 제학이 되고, 병신년에 예조참판 봉상시제조가 되었는데, 봉상시의 일에 대하여 마음껏 지휘하고 계획하여 그릇된 점은 바로잡고, 폐기된 것은 회복하여 모든 일이 펴져 의식에 맞게 하였었다.
공이 말하기를, “경기도의 세금이 너무나 번거롭고 무거우므로 백성이 살 수 없다.” 하여, 양감(量減)할 것을 청하였고, 또 아뢰기를, “해군이란 국가의 울타리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공사만 생겨도 폐기하곤 하니, 돌보아 줄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정승이 되어서는 2ㆍ3차례 청하자 모두 따랐다.
무술년 봄에 개성유후사 부유후(開城留後司副留後)가 되었고, 또 경기도 관찰사를 겸하였더니, 여름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가을에 임금이 선위를 받자 공안부윤(恭安府尹)으로 가정(嘉靖)의 직계에 오르고, 얼마 안 되어 예조 판서로서 자헌(資憲)의 직계에 오르게 되어 공이 헌의(獻議)하기를, “집과 나라와 천하에 윤리가 있는 곳에는 각기 군신(君臣)과 상하의 명분이 없을 수 없거늘 근래에는 아랫사람으로 윗사람의 잘못을 엿보아서 조그마한 틈새라도 발견하면 이를 얽어서 고소하는 일이 예사이니, 이러한 풍속은 그대로 방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 당 태종 때에 종이 주인의 모반을 고발한 자가 있었는데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어 목을 베었으니, 이제부터 노예로서 주인을 고발하는 자는 이에 의거하여 처단하기를 바랍니다. 또 주문공(朱文公)이 효종(孝宗)에게 아뢰기를, ‘무릇 옥송(獄訟)에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범한 자와, 낮은 이로서 높은 이를 업신여기는 자는 비록 그 일이 옳았다 하더라도 돕지 아니할 것이요,
옳지 않을 때는 그 죄를 범인이 지은 죄 이상에다 둘 것입니다.’ 하였으니, 원하건대 이제부터 아전으로 관리를 고발하였거나, 부민(部民)으로 수령과 감사를 고발한 자는 그 일이 사직(社稷)이나 잘못 법을 적용하여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면 치죄하지 말 것이며, 무고한 자는 중한 죄로써 논하여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기풍을 막기를 바랍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기해년에 생원 성이검(成以儉) 등 1백 명과 급제 조상치(曹尙治) 등 33명을 뽑았고, 경자년에 생원 민원(閔瑗) 등 1백 명과 급제 안숭선(安崇善) 등 33명을 뽑았다. 신축년에 의정부 참찬이 되며 태종이 주상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참 재상이구료.” 하고는 풍양(豐壤) 이궁(離宮)에서 모시고 잔치하게 할 때, 태종이 앞으로 공의 어깨를 잡고 왕을 돌아보면서, “이는 나의 돌기둥이야.” 하자, 공은 놀라고 감격하여 눈물을 떨어뜨렸다.
임인년 5월에 태종이 돌아가자 대신이 백관에게 상례를 의론할 때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이미 장사를 지냈으니, 상복을 벗고 담복(淡服)으로 원묘(原廟)에 배제(陪祭)함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공이 반박하기를, “군신은 한 몸이어늘 이제 왕의 효도가 돈독하고 지극하니, 상복과 수질(首絰)로써 3년을 지내시는데, 유독 여러 신하가 장사를 지냈다고 해서 길복을 입는 것이 옳겠는가.
일을 맡을 때는 담복을 입고, 모시고 제사를 올릴 때는 상복으로써 끝내게 하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마침내는 공의 의론을 따랐다. 명나라에서 사제(賜祭)하였을 때, 사신이 백관들이 상복으로써 배제(陪祭)함을 보고서 예에 맞음을 탄복하였다. 공이 휘(諱) 신(辰)을 만나면 나물밥으로 재계하여 슬피 울었다.
그해 가을에 이조 판서로 구임법(久任法)을 세울 것을 청하되 경관(京官)으로서 돈과 곡식을 맡은 자는 3년으로 하고, 수령은 6년으로 하게 하고 또 청하기를, “옛날에는 죄인이라도 노비로 삼지 않았는데, 모든 법에 연좌되지 않은 자는 금고(禁錮)를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모두 따랐다.
계묘년에 정헌(正憲)에 승급이 되자, 공에게 명하여 《속육전(續六典)》을 수찬하게 하고 공이 말하기를, “이 책은 국맥(國脈)을 배양하는 근본이니 지나치게 까다로워서는 안된다.” 하고는, 당시 준엄한 법률을 모두 고쳐 법률대로 죄를 논하였다.
선덕(宣德) 병오년에 해결할 것을 구하였으나, 또 세자빈객이 되었고, 겨울에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간관으로 법을 범하여 장형(杖刑)에 해당한 자가 있거늘, 공이 아뢰기를, “간관은 임금의 이목(耳目)인 만큼 관대히 처리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돈을 바쳐 속죄를 하게 하였다.
공이 매양 대간(臺諫)들의 견책을 입을 때마다 힘을 다하여 구출하였다. 정미년에 숭정(崇政)에 오르고, 무신년에 다시금 사직하였으나,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가 되었다. 상언(上言)하기를, “우리나라가 동북에 적이 있는 만큼 평화로울 때에 삼가 방비를 하여야 할 것이니, 먼저 연변에서 내지(內地)까지 성을 쌓아야 합니다.” 하고, 뒤에 또 수성전(修城典)과 선색(船色)을 두어 전적으로 성과 요새 및 전선을 다스리게 하니, 모두 따랐다.
기유년에 임금이 국학(國學)에 가서 선성(宣聖)을 뵙고 친히 학생을 고시할 때, 공으로 하여금 시권을 읽게 하여 급제 조주(趙注) 등 3명을 뽑았고, 경술년에 의정부 찬성이 되며, 임자년에 다시 이조 판서로 숭록(崇祿)의 직계에 올라 여러 차례 전형의 일을 맡았다.
공은 감식안이 공평하고 명백하여 한 벼슬자리를 보임하더라도 반드시 동료 관원과 더불어 상세히 품위를 정하여 제수하였기 때문에 뇌물이 없어지고 효자, 순손(順孫), 충신, 현인의 후예를 먼저 기록하였더니, 어떤 이가 말하기를, “어찌 효자와 순손이 이렇게 많을 수가 있겠는가.” 하니, 공은 “가끔 거짓이 있다 하더라도 풍속에 격려가 되지 않았는가.” 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공을 불러서 여러 신하 중에 누가 어질고 어질지 못한가를 물었는데, 당시의 이름 있는 사람들이 공의 추천에 의해 많이 등용되었으나, 공은 비밀에 붙이고 누설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계축년 봄에 임금이 장차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 이만주(李滿住) 등을 치려고 대신을 불러 의논을 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응당 쳐야 합니다.” 하자, 공이 반박하기를, “그 무리가 완강하여 한 번 원수를맺으면 대대로 보복할 것인 만큼 가벼이 칠 수 없습니다.” 하였더니, 뒤에 변장(邊將)의 계책을 써서 임금이 홀랄야인(忽剌野人)을 불러 무마하고자 하였다.
공이 또 반박하기를, “되놈의 풍속은 기뻐하면 사람 노릇을 하고, 화내면 짐승 같은 노릇을 하여 욕심이 계곡처럼 깊어 싫증이 없으니 불러 무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모두 듣지 아니하였다. 공이 일찍이 도당(都堂)에서 일을 의논할 때 어명을 전하는 근신이 있기에 공이 아뢰기를, “옛날 태종께서 일찍이 해동청(海東靑)을 기르시다가, ‘이는 본보기가 될 수 없다.’ 하고는, 곧 놓아 주었으니, 이제 이미 중국에 바치지 않을 바에야 잡아서 기를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겨울에 판중추(判中樞)가 되었고, 을묘년에 본직으로서 지성균관(知成均館)이 되었다.
정통(正統) 병진년에 예조 판서를 겸임하였는데, 당시 과거시험에서 오로지 사장(詞章)만을 시험하기에 공이 경학(經學)을 일으키기 위하여 초장(初場)에는 경서를 강할 것을 여러 차례 청하였고 이때에 또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사년 봄에 묵은 병으로 물러갈 것을 청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전후 병으로 사직한 일은 기록하지 아니하였으나, 사직을 할 때마다 조회 참석을 면하여 주었다. 겨울에 공이 병이 더하자 임금이 내의(內醫) 두 사람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문병하는 자가 길에 이어졌다. 공이 억지로 병을 견디고 몸을 일으켜 주위 사람을 물리치고 상소문을 직접 초안을 작성하여 외환(外患)을 경계하고 겸손한 덕을 높이며, 정권을 중시하고 올바른 말을 받아들이며, 대신을 공경해야 할 것을 청하였으되, 말이 절실하고 곧았으나, 병이 위독하여 올리지 못하였다.
무오년에 진사 신숙주(申叔舟) 등 백 명과 급제 하위지(河緯地) 등 33명을 뽑았고, 여름에 의정부 우의정 영집현전경연감춘추관(議政府右議政領集賢殿經筵監春秋館) 세자부(世子傅)로서 대광보국숭록에 올랐다. 공이 일찍이 《가례(家禮)》에서 사대(四代)를 제사하는 것을 의거하여, 대부로서 고조(高祖)에게 제사할 수 있도록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왜인(倭人)이 바닷가 고을에 붙어 살면서 생선과 소금을 판매하는 자가 늘 몇천 명이나 되었더니, 여러 차례 아뢰기를, “그들은 승냥이와 같은 야심을 지니고 있으니, 모두 돌려보내야 합니다.” 하니, 이 의견을 따랐다. 겨울 11월에 큰 우레와 번개가 일자 공이 인책하여 면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기미년에 궤장(几杖)을 주고 곧 좌의정 영춘추관에 올랐으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겨울 10월에 병이 나니 임금이 또 의원을 보내 문병하는데 정사년보다 자주 보냈으나, 공이 병이 더욱 심하였다. 사직을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고 공의 아들 눌(訥)에게 특히 사온서 영(司醞暑令)으로 세 품급을 올려 주었으니, 이는 공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병이 위독하자 의원이 진찰하기를 청하였으나, 공이 사절하고 보지 않고 또 말하기를, “태평시대에 태어나서 태평시대에 자라서 태평시대에 죽으며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되 아무런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이 70에 벼슬이 수상에 이르러 좋은 때를 만나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하였고, 소원을 이룩하였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지만 도승지를 보기를 원한다.” 하였다. 그 말이 위에 들리자, 도승지 김돈(金墩)을 시켜 가서 보게 하였더니, 공이 사람을 물리치고 비밀리에 말하였으니, 국가의 중대한 일들이었다.
처음 병이 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나라를 걱정하는 말이 입에 끊이지 않았고, 일찍이 한 마디도 개인적인 일은 언급하지 않고 편안히 서거하였다. 늘 자손에게 경계하여 상사(喪事)에 《가례(家禮)》를 따르라고 하였다. 부고가 이르자, 임금이 심히 슬퍼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곡을 하고 반찬수를 감하고 조회를 중지한 지 사흘이나 되었으며, 사신을 보내어 조문 위로하고 부의금을 중히 하였고, 동궁도 이와 같이 하였으며, 원근을 불구하고 들은 자는 모두 애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발인(發靷)할 때에 조정의 경사(卿士) 가운데에서 교외에 나간 자가 매우 많았으니, 공의 사후 영예는 유감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공의 성품은 바르고 크며 씩씩하고 맑고 삼가면서도 어질고 관대하였으며, 학문에는 염락(廉洛 정자ㆍ주자의 학문을 말함)을 거슬러 올라 수사(洙泗 공자)에 따르고 너무 해박함에 힘쓰지 않고 닭이 울면 일어나 단정히 앉아 날마다 《소학》과 《중용》을 읽어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여 밤이 깊어서야 잠시 취침을 하였다.
공은 서실을 경암(敬菴)이라 하고 평소에 수양이 깊고 말이나 움직임이 예법에 알맞게 하고 비록 창졸간에 일을 만났으나 법도를 잃지 않았으며,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제사받들 때는 성의를 다하였다. 공의 어머니께서 일찍이 친히 누에를 쳐서 옷을 지어서 주었더니, 공이 제사 때마다 입고서 당시(唐詩) 중의
인자하신 어머니의 손수 하신 바느질을 / 慈母手中線
이라는 한 연(聯)의 시를 외면서 슬피 울었으며, 또 자손에게 명하여 죽은 뒤에 이 옷을 반드시 습구(襲具)에 쓰게 하였다.
공은 형님을 아버지와 같이 섬기고 친족에게 어질게 대하였다. 공의 부인의 누이 하나가 일찍 과부가 되고 아들이 없어 병이 위급하자, 공의 아들로 후사를 삼고 재산을 모두 줄 것을 청하였을 때, 공은 사양하기를, “모름지기 형제에게 나누어 주어 천륜(天倫)을 돈독하게 하시오.” 하여, 10여 차례를 왕복하였으나, 마침내 듣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림에 예법이 있어 안팎이 화락한 기운이 어리고 엄숙하였으며, 더욱 벗에게 믿음이 있어 길ㆍ흉사가 있을 때는 조문과 부의 물품이 삼가하고 지극하였으니, 공이 윤리에 돈독한 것이 이와 같았다. 평생에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고 의복과 음식이 검소하여 흉년이 들면 온 집안이 죽을 먹었으며, 선비를 장진(獎進)하기를 좋아하여 장점은 드러내고 단점을 묻었으므로, 문전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으나 정성껏 접대하여 사람들에게 사랑하고 공경하게 하였다.
네 조정을 섬기되 국사에 대한 근심이 집안을 근심함과 같아서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부지런하였으며, 관가를 일으키거나 또는 일을 당해서도 근신하여 곧 처결하지 않고 심원한 계획을 세웠었다. 큰 의옥(疑獄)이 생겼을 때는 임금이 반드시 자문하여 결정하였으며, 모든 외교에 있어서는 국사의 기밀을 묻지 않은 사안이 없게 되고, 공도 역시 알고서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시정에 대하여 가부를 논할 일이 있다면 그 지위를 관계하지 않고 밤이 새도록 벽에 기대어 생각하고 생각해서 대면하여 간절히 진술을 하면 더러는 듣고 더러는 듣지 않았으나, 뒤에는 증험되는 일이 많았다. 농사에 힘쓰고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 뜻을 두었으며, 그 나머지로 고금의 일을 증거하여 여러 의논을 꺾고서 국시(國是)를 정한 일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급기야 정승이 되자, 더욱 임금을 돕고 백성에게 혜택을 입히는 것으로서 자기의 임무를 삼아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죽을 때까지 해이하지 않았으니, 그 충성과 부지런함이 이와 같았었다. 아, 슬프다. 공은 애초에 경륜의 재주에다 성리학으로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의논이나 정사에 있어서 대경대법(大經大法)과 큰 충절과 정직으로 광명하고 거룩함이 일세에 빛났으니, 이른바 재상 중에 참다운 재상이었다.
부인은 정숙부인(貞淑夫人) 박씨(朴氏)니 영해(寧海)의 대성(大姓)으로서 사헌부 대사헌 양정공(良靖公) 휘 경(經)은 아버지요, 도첨의찬성(都僉議贊成) 기공(奇公) 휘 유걸(有傑)은 외조였다.
성품이 밝고 엄숙하여 부녀자의 품절이 완비되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 후(詡)는 병오과(丙午科)에 장원하고 또 병진년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승정원 좌부승지 경연참찬관 보문각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수찬관 겸판군기감사 지형조사(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經筵參贊官寶文閣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修撰官兼判軍器監事知刑曹事)였고, 다음 눌(訥)은 통선랑 사온서령(通善郞司醞暑令)이었고, 세 딸이 있었으니, 맏딸은 세자좌필선 최유종(崔有悰)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평산도호부사 정잠(鄭箴)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급제 윤미견(尹彌堅)에게 출가하였다.
승지가 판흥해군사(判興海郡事) 이흥문(李興門)의 딸에게 장가들고, 서령(暑令)은 호조 좌랑 민보문(閔普文)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조(慥)요, 다음은 담(憺)이요, 그 다음은 돈(惇)이요, 네 딸은 모두 어렸다. 필선(弼善)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경동(敬同)이요,
세 딸 중 맏딸은 예문관 검열 안철손(安哲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유학 이극배(李克培)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유학 최윤문(崔潤文)에게 시집갔으니, 이는 같은 최씨가 아니었다. 평산(平山)이 한 아들 숙정(叔精)을 낳았으니, 서부녹사(西部錄事)였고, 세 딸은 모두 어렸으며, 급제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함(涵)이요,
다음은 증(徵)이었고, 두 딸에 맏은 선공감 녹사 황사친(黃事親)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어리며, 외증손(外曾孫)은 약간명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저 하양을 바라보니 / 瞻彼河陽
현달한 허씨 집안 / 許爲顯姓
대대로 거룩한 분이 있어 / 世有偉人
덕과 행실을 삼가 닦았네 / 愼德飭行
그 복 후손에게 미쳐 / 委祉于後
문경공이 나셨다오 / 篤生文敬
훌륭한 문경공이 / 翼翼文敬
크게 그 경사 여셨네 / 大啓厥慶
얼음 같은 지조 / 冰蘖其操
법도에 맞는 행실 / 規矩其武
민락에 수레 달리고 / 騁軌閩洛
추로에 채찍을 날렸소 / 振策鄒魯
네 조정 섬기며 / 歷事四朝
배운 바를 즐겁게 펴셨네 / 樂攄所學
나라 경륜을 수놓고 / 黼黻經綸
제작으로 빛내었소 / 丹責制作
거북 아니어도 슬기로워 / 匪龜而智
위태하고 의심스러운 일 잘 결단하였고 / 折事危疑
거울 아니어도 밝아서 / 匪鑑而明
남의 선악을 잘 분간했소 / 辨人姸媸
옥찰과 우수 / 玉扎牛溲
한 약통에 쌓아 놓고 / 藥籠竝畜
재목 따라 골라 쓰니 / 隨材擇用
나라를 치료함에 모두 효과 있었다오 / 咸効醫國
조정에 빠진 정사가 있거나 / 朝有闕政
정사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 政有或秕
간담을 끝까지 피력하여 / 終始瀝膽
곧은 논의를 마지 않았소 / 讜論靡已
태종께서 충성스럽게 여겨 / 太宗忠之
나의 기둥이다 하였네 / 曰予柱石
지금 임금 정승 삼아 / 今聖相之
나랏일을 맡기니 / 畀以鈞軸
나라 경륜에 계획이 깊고 / 經邦謨遠
백성에 대한 사랑이 길었다오 / 澤民心長
갑자기 방아소리 멈추니 / 遽停相杵
저 푸른 하늘아 어인 일고 / 云何彼蒼
훌륭한 맏아들 / 欒欒元嗣
효심이 깊으니 / 圖永孝思
무덤에 명을 넣어 / 納銘玄墟
먼 장래까지 밝게 보이리 / 昭示無期
[註解]
[주-D001] 민락 : 정자와 주자를 말함.[주-D002] 추로 : 공자와 맹자를 말함. 여기서는 공맹의 도를 실천함을 뜻함.[주-D003] 갑자기 방아소리 멈추니 : 진(秦)나라 정승 백리혜(百里奚)가 죽자 백성이 슬퍼하여 방아소리를 그쳤다는 데서 나온 말인데, 여기서는 문경공의 죽음을 말함. <끝>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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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領集賢殿經筵春秋館事世子傅,贈謚文敬許公墓誌銘 幷序 - 南秀文
正統四年歲在己未冬十有二月壬寅。議政府左議政許公。以病卒于私第。年七十一。太常謚文敬。越明年春三月庚申。有司具儀衛。葬于原平府治比向陽里之原。嗣子承旨詡。請銘幽堂。余與承旨。實再同榜。義不可辭。謹按公姓許氏。諱稠字仲通。慶尙道河陽縣人。遠祖康安生徐冲。徐冲生綽麟。綽麟生愼。愼生世通。世通生赫富。赫富生得諝。得諝生諱裕。大將軍。性嚴有法 。謹守家業。娶漢陽望族判太僕韓均之女。生諱綏。判典客寺事。恬靜寡欲。常具冠服。齋居一室。娶侍中安文成公諱珦之女。生諱允昌。嚴明方正。歷監察御史典法典理佐郞。官至都官正郞。娶大司成李公諱稷之女。生諱貴龍。恭敏寬厚有大度。歷散騎常侍版圖判書。卒官奉翊大夫開城尹上護軍。娶通禮門副使李公諱吉之女。生三子。長曰周。資憲大夫判漢城府事謚簡肅。次卽公。次曰倜。前嘉善大夫中樞院副使。公以洪武二年己酉四月十一日生。童丱嶷然如成人。稍長受業于陽村權文忠公。厲志力學 。中癸亥進士擧。又登乙丑司馬試。戊辰以蔭補中郞將。庚午。獨谷成公石璘。松堂趙公浚試禮闈。公擢丙科。兩公甚器重之。丞典儀寺。壬申我朝受命。特除左補闕知製敎。尋丞奉常寺知製敎。時禮樂散軼。太常職廢。公務去因循。悉遵典故。陽村亟稱之曰。異日典禮我國者。必斯人也。癸酉五月丁外艱。明年十月又丁內艱。時俗治喪尙浮屠。公一依文公家禮。哀禮俱盡。我國士庶。遵用家禮。皆本之公。丁丑典成均簿。釐正釋奠儀式。梓布中外。建文己卯。再爲左補闕知製敎。謇然有直名。庚辰太宗受禪。拜司憲雜端。言事忤旨。上怒欲寘重典。廷詰甚厲。公抗詞不屈。上嘉鯁直。左遷完山判官。視事數月。治辦有聲。以疾辭。壬午秋。吏曹正郞缺。上以銓選任重難其人。親閱官簿。覽公名曰。得人矣。遂授之。冬除朝奉大夫內書舍人知製敎。亦特命也。永樂癸未秋。以事貶知寧越郡。冬辭疾。甲申起拜護軍。直集賢殿。乙酉以本職兼世子左文學。上甞問世子僚友孰賢。世子擧公以對。丙戌改敬丞府少尹。丁亥直藝文館。仍兼文學。世子朝京師。授中訓司憲執義。充書狀官。行李之事。一委糾察。公約明令嚴。人皆懾縮。莫敢犯禁。公入朝凡事涉制度者。悉問悉書。東還道闕里。謁宣聖廟。見江都相董氏,魯齋許氏從祀。楊雄被黜。皆建白于朝施行。戊子通訓判司贍寺事,世子右輔德。世子聞之。謂左右曰。許文學復來耶。蓋素憚其嚴也。是歲平壤君獄起。逮繫寔繁。臺官不勝栲掠。誣引公以爲證。坐謫春州。未幾賜環。拜敬丞府司尹。辛卯轉通政禮曹左右參議。公慨念麗季五禮儀注失傳。乃援唐宋典故。朝廟禮樂,士庶喪制。酌右損今。悉加撰定。自是常提調儀禮詳定所。上書請建學堂。厥後又請置學四部。皆從之。歷兵,吏二曹參議。甲午。遣公廵視平安道山城。凡厥措置。多從公議。面陳平安民生艱苦。上特减租稅。他日請見啓曰。講武雖不可廢。然馳騁險阻。危不可測。願上愼勿親獵。不覺流涕。因極言講武塲猥多之弊。上嘉納。乙未春。尹漢城府階嘉善。冬提學藝文館。丙申參判禮曹。提調奉常寺。奉常之事。悉心指畫。謬者正之。廢者擧之。巨細畢張。皆中儀式。公言京畿徭賦繁重。民不聊生。請量减。又言船軍國家藩垣。而今興一役。調廢不已。請加存恤。及爲相。再三陳請皆從之。戊戌春。開城留後司副留後。又兼觀察京畿。夏辭疾。秋上受禪。尹恭安府加嘉靖。尋判書禮曹階資憲。公獻議曰。家國天下。彝倫所在。莫不各有君臣上下之分。近來以下伺上。得一小釁。羅織告訴。此等之俗。漸不可長。昔唐太宗朝。有奴告主叛者。不受仍斬之。願自今臧獲如有告主者。倣此區處。又朱文公言於孝宗朝曰。凡獄訟。以下犯上。以卑陵尊者。雖直不右。不直罪加凡人之坐。願自今吏胥告官吏。部民告守令,監司者。所告非關社稷枉法殺人。則勿治。誣告重論。以杜陵上之風。允之。己亥取生員成以儉等一百人。及第曹尙治等三十三人。庚子。取生員閔瑗等一百人。及第安崇善等三十三人。辛丑參贊議政府。太宗謂上曰。斯人眞宰相也。侍宴豐壤離宮。太宗前公桂肩。顧謂上曰。此予柱石也。公驚感隕泣。壬寅五月。太宗賓天。大臣議百官喪制。衆曰。旣葬釋衰。淡服陪祭原廟便。公駁曰。君臣一體。今聖孝篤至。衰絰三年。獨群臣旣葬卽吉可乎。請治事服淡。陪祭着衰終制。上卒從公議。及朝廷賜祭使臣。見百官衰而陪祭。嘆其合禮。公遇諱辰。齋蔬悲泣。秋判書吏曹。請建久任之法。京官主錢,穀者三朞。守令六朞。又請古者罪人不孥。諸律不緣坐者。勿錮。皆從之。癸卯進階正憲。命公修撰續六典。公謂是書。乃培養國脉之本。不可苛刻。凡一時峻法。並改依律論罪。宣德丙午春求解。又爲參贊世子賓客。冬復判書吏曹 。有諫官坐事當杖者。公啓諫官。人主耳目。乞優容。上命贖銅。公每當臺諫被譴。盡力救解。丁未進階崇政。戊申復辭。判中軍都揔制府事。上言我國東北有敵。宜及平安。謹修備禦。請先城沿邊。以及內地。後又請置修城典船色。專治城堡,戰艦。皆從之。己酉。上詣國學謁宣聖。親試學生。命公讀卷。取及第趙注等三人。庚戌。贊成議政府。壬子復拜吏曹判書階崇祿。累典銓事。鑑裁公明。補一官。必與僚佐詳品除授。關節屛蹟。孝子順孫,忠賢之㣧。率先甄錄。或謂烏有孝順。若玆多耶。公曰 。閒雖有假。不已勵俗乎。上甞引問。群臣賢否。一時聞人。多其所擧。公秘不洩。人莫之知。癸丑春。上將討婆猪江野人李滿住等。召大臣議。衆曰當討。公駁曰。此輩頑梗。一與之讎。世世報復。不可輕擧。後因邊將策。上欲招撫忽剌野人。公又駁曰 。獷俗喜人怒獸。谿壑無厭。請勿招撫。皆不允。公甞議事都堂。有近臣傳旨。公附啓昔我太宗。甞畜海靑。乃謂不可垂憲。卽命縱之。今旣不獻中朝。請勿捕養。冬判中樞。乙卯以本職知成均館。正統丙辰。兼判禮曹。時科擧專試詞章。公慨然欲振起經學 。累請初塲講經。至是又請不允。丁巳春。以宿疾乞骸。批答不允。前後辭疾者不記。辭必命除朝參。冬公不豫。上遣內醫二人診療。存問交道。公力疾扶起。屛人手䟽。請戒外患。崇謙德。重政權。納直言。敬大臣。語頗切直。疾篤不果上。戊午取進士申叔舟等一百人。及第河緯地等三十三人。夏進拜議政府右議政領集賢殿經筵監春秋館世子傅。階大匡輔國崇祿。公甞援家禮祭四代。累請士夫得祭高祖。不允。先是島倭來寓濱海州郡。販魚塩者常數千人。屢啓狼子野心。請悉發還。從之。冬十一月大雷電。公引咎請免。不允。己未賜几杖。尋陞左議政領春秋館。餘如故。冬十月遘疾。上又遣醫問視。丁巳有加。公以疾彌留辭 。不允。特官子訥司醞署令。超資三級。盖所以慰悅之也。病革醫請候。公謝不見。且曰生于大平世。長于大平世。沒于大平世。俯仰天地閒。浩然獨無愧。斯非吾所及。吾年七旬位首相。逢時盡言。克遂志願。死無遺恨。第願見都承旨。語聞命都承旨金墩往視。公辟人密語。盖國家重事也。自始病迨卒。憂國之言不絶口。未甞語及私。怡然而逝。常戒子孫。喪事悉遵家禮。訃聞上震悼。率百官擧哀。輟膳罷朝三日。遣使弔慰重賻。東宮亦如之。遠近聞者莫不痛惜。發引朝中卿士郊送甚盛。公之哀榮。可謂無憾矣。公天資正大而剛毅。淸愼而仁恕。爲學泝濂,洛。沿洙,泗。不務該洽。鷄鳴端坐。日誦小學中庸。精思力踐。夜分暫睡。題其室曰敬菴。克養有素。言動中禮。縱値倉卒。不失規矩。事父母克孝。奉祭祀盡誠。初母夫人。蠶衣製繅以賜公。祭輒衷服。誦唐詩慈母手中線一聯。悲泣。且命子孫。死必以襲。父事兄仁宗族。公夫人之妹。蚤寡無子。病亟。請以公子爲後 。將悉致家貲。公辭曰。須分晜弟。以惇天倫。往復十餘。竟不聽。治家以禮。內外雍肅。尤信朋友。有慶弔問遺勤至。其篤於倫理者。多類此。生平不事生産。服食儉素。歲侵擧家啜粥。好奬進士類。暴長韜短。門無停客。開誠接納。今人愛且敬焉。歷事四朝。憂國如家。克勤夙夜。興官耆事。愼不輒發。商確深遠。有大疑獄。上必咨决。事大交隣國家機密。靡不詢問。公亦知無不言。遇時政有所可否。不嫌越位。終夜倚壁。計度不置。面敶剴切。或聽或否。後多有驗。若務農興學育材善俗。尤致意焉 。其他證據今古。折群議定國是者。不可勝紀。及爲相益自以輔君澤民爲己任。憂國之誠。至死不弛。其忠勤如此。嗚呼。公本之以經綸之器。輔之以性理之學。故其發於論議。措諸政事。大經大法大忠大直。光明俊偉。炳耀一世。所謂宰相中眞宰相也。配貞淑夫人朴氏。寧海大姓。司憲府大司憲謚良靖公諱經其考也。都僉議贊成奇公諱有傑。其外祖也。性明以肅。壼儀克備。生二男 。長曰詡。捷丙午科。又中丙辰重試及第。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經筵參贊官寶文閣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修撰官兼判軍器監事知刑曹事。次曰訥通善郞司醞署令。三女。長適世子左弼善崔有悰。次適平山都護府使鄭箴。次適及第尹彌堅。承旨娶判興海郡事李興門之女。署令娶戶曹佐郞閔普文之女。生三男。長曰慥。次曰憺。次曰惇。四女皆幼。弼善生一男敬同。三女。長適藝文檢閱安哲孫。次適幼學李克培。次適幼學崔潤文。非一崔也。平山生一男曰叔精。西部錄事。三女皆幼。及第生二男。長曰涵 。次曰澂。二女。長適繕工錄事黃事親。次幼。外曾孫若干人。銘曰。
瞻彼河陽。許爲顯姓。世有偉人。愼德飭行。委祉于後。篤生文敬。翼翼文敬。大啓厥慶。冰蘖其操。規矩其武。騁軌閩洛。振策鄒魯。歷事四朝。樂攄所學。黼黻經綸。丹靑制作。匪龜而智。折事危疑。匪鑑而明。辨人姸媸。玉扎牛溲。藥籠並畜。隨材擇用。咸効醫國。朝有闕政。政有或秕。終始瀝膽。讜論靡已。太宗忠之。曰予柱石。今聖相之。昇以鈞軸。經邦謨遠。澤民心長。遽停相杵。云何彼蒼。欒欒元嗣。圖永孝思。納銘玄墟。昭示無期。<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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