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이 시작되면서 귀농한 뒤로 제일 먼저 한 작업은 신학책을 모두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일부 남겨 놓았던 책들도 무주에서 경주로 이사가면서 마저 처분했습니다. 그 틈에 ‘예수’도 ‘교회’도 떠나보내는 고별식을 치른 셈입니다. 그때, 책을 화물차에 실어 보내면서도 마지막까지 떠나보내지 못한 책이 두 권 있었습니다. 구티에레즈가 쓴 <해방신학>과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었지요. 나 역시 시대의 산물이라서,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열정으로 불타게 했던 ‘심장 같은’ 책이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그 때는 결코 몸이 따라잡지 못할 줄 뻔히 알면서도 ‘혁명’이란 단어에 머리털이 빳빳하게 서곤 했습니다.
민중적 지혜를 통해 혁명으로 나아간 사람
이제 다시 예수와 교회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석사논문으로 서강대 신학대학원에 제출했던 ‘도로시 데이’라는 여성이 말한 대로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스캔들)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예수만 떼어낼 수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예수의 체현(體現)이 교회라 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의 일부, 더 정확히 말해서 ‘또 다른 예수’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이해는 곧 교회에 대한 이해가 됩니다. 거꾸로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예수를 알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발견한 예수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민중이었으며, 유대종교 안에서 평신도였음을 문득 깨닫고 반가워합니다.
나는 예수를 굳이 ‘혁명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대 조류에 맞춰 예수를 ‘현자’라고 부를 필요도 느끼지 않습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분은 ‘혁명가였고 현자였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그분은 ‘민중적 지혜를 통해 혁명으로 나아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것입니다.
그분이 그저 단순히 현자로만 남았다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아도 좋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의 폭압적인 지배자라 해도 현자를 함부로 죽일만한 배포를 가진 이는 흔하지 않은 법이니까요. 또한 그를 혁명가라고만 부를 수 없는 이유는 그분에게서 ‘어떤 권력을 향한 의지’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혁명이란 민중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전복적 싸움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가 사제가 아니라 평신도였다는 점은 다행스런 일입니다. 유대종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사제는 본인의 의식과 상관없이 신분상 ‘권력’에 가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마음을 매만졌으며, 그를 만난 사람은 그 눈길만으로도 치유되었음을 ‘나는 믿습니다’. 양은 제 목자의 음성을 기억하는 법이라고 한 그분의 말씀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이들은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 기억이 훗날 그리스도교 신앙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치유자에 머물지 않고, 상처의 본질로 전진(前進)했으며, 그 본질의 중심에 ‘하느님 없는 권력의 무자비함’이 놓여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고행의 길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했으며, 거기서 무력함으로 무력한 자들을 섬기는 최고의 형식,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들의 '주님'이자 '친구'인 예수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영성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벗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분은 가난한 백성들의 약점을 잡고 ‘그들의 주님’이 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저 심약하고 슬픈 눈동자를 가진 이들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었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친구’로 죽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정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공간적 시간적 차이를 넘어 그분과 친구가 되어 동반할 의향을 가진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 ‘교회’가 될 것입니다.
친구 사이에는 계산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천년 교회사 안에서는, 우정을 빌미로 장사하는 이들이 교회로 몰려들어 있는 형상이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친구’인 예수가 슬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이제 ‘주님’으로도 부르는 것입니다. 목숨마저 내어준 다함없는 사랑 앞에서 누군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을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사모하는 이에게 “이제부터 나는 당신의 것”이라고 부른들 아쉬울 까닭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좀 더 자세히 예수에 대한 나의 인상(印象)을 다룰 것입니다. 미국의 예수세미나가 제안하는 방식을 나는 거절합니다. 다만 참고할 뿐입니다. 역사적 예수의 진면목을 살피는 작업이 성공할 가능성을 나는 믿지 않으며, 그리고 성공한다한들 그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여부, 또는 진위(眞僞)보다 소중한 것은 ‘세상과 사뭇 다른 실천을 낳는 진실’이라 여기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살았던’ 복음서를 저술한 초기교회 공동체가 ‘예수를 어떤 친구로, 어떤 분으로 기억하고 성찰했는지’를 먼저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기억하고 싶어 했던 방식으로 복음서에 드러난 예수를 조망하면서, 곰곰이 그분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복음의 탄생, 아우구스투스와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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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출처/이동진 그림, 임의진의 <예수동화>, 파랑새어린이 |
예수의 탄생은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헤로데왕 생전이니, 그가 죽은 주전 4년 이전이거나 루카복음에 따라서 퀴리니우스의 호구조사가 있던 주후 6-7년경으로 학자들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탄생시기를 언제로 잡든지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하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헤로데왕이 죽던 해에는 갈릴래아에서 대규모 봉기 발생해서, 로마총독 바루스가 3군단(6천명)을 동원해 진압했습니다. 당시 반란군 지도자 유다의 본거지였던 세포리스에서 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예수가 자랐던 나자렛이 있습니다. 당시 반란군들은 초토화되어 2천명이 십자가형으로 살해당했다는데, 나자렛에도 그 소문이 무성했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가 헤로데의 사후에 이스라엘의 영토를 삼분해 헤로데의 세 아들에게 위임통치를 시키다가, 나중엔 사마리아, 이두매, 유다를 총독의 직접통치로 전환시킵니다. 주후 6년에는 로마제국의 재정확보를 위해 호구조사 실시했는데, 이스라엘에선 납세거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의 중심지가 또한 갈릴래아였기 때문에 이후로 갈릴래아인은 무정부주의자로 여겨졌습니다. 결국 이러한 반발이 주후 66-70년경 대 로마항쟁으로 발전합니다. 물론 나자렛은 갈릴래아에 속합니다.
예수의 탄생을 두고, 메시아의 탄생이라 하고, 빛이 어둠의 세계에 스미게 되었다 하고,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음성이 들렸다고 하는데, 이게 사람들에게 ‘복음’(기쁜소식)이라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모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붙여진 말이었는데, 똑같은 말이 복음사가들에 의해 나자렛의 예수에게 붙여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메시아를 주님으로 고백할 때 어떤 메시아를 선택하는 것인지 밝혀야 합니다. 제국의 아우구스투스인가, 맨발의 예수인가?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예수가 누구인지, 이미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는 객지에서, 그것도 말구유에서 탄생하십니다. 즉, 예수는 나그네/이주민의 몸에서 태어났으며, 사람도 아닌 짐승의 밥으로 오셨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하물며 사람에게야 얼마든지 당신 몸을 밥으로 주실 수 있겠지요. 그분을 (밤을 지새는) 가난한 목자들(하층민)과 점술가들(이단자)이 찾아와 경배합니다.
예수는 또한 귀족이나 랍비나 사제의 자식이 아니라 “장인의 아들”입니다. 당시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포리스를 대도시로 건설하느라 혈안이었으니, 건축노동자였을 가능성도 높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이들은 떠돌이처럼 공사현장을 돌아다니던 하층민이었겠지요.
그러니 얌전한 숙녀 아닌 시골 촌부인 마리아에게서 ‘혁명적인 마리아 찬가(마니피캇)’가 나올 법도 합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고” “그분의 자비가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친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죠. 주님은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통치자를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높이셨고,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내치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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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출처/이동진 그림, 임의진의 <예수동화>, 파랑새어린이 |
사제가문의 세례자 요한과 평신도 예수
세례자 요한 역시 특별합니다.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루카 1,72)라고 예언합니다. 그 계약은 당연히 ‘희년’입니다. 그 희년(하느님 나라)이 곧 닥칠 것이라고 세례자 요한은 선포합니다. 예수 역시 공생활 벽두에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지요. 요한과 예수는 그 점에서 한통속입니다.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세례를 통해 연결됩니다. 세례를 받으며, 예수는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체험했으며, 그 사랑이 자신을 평생 이끌어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세례 당시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0라는 음성이 들렸다지요. 그동안 예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묻지 않고, 사랑하고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밝히지 않은 채 ‘다짜고짜’ ‘나는 너를 (무조건) 사랑한다’는 것이지요. 이게 진짜배기 사랑이지요.
그러면서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와 다릅니다. 요한은 사제 가문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율법에 정통한 지식인이죠. 그는 금욕적 엘리트로서 세례를 통해 죄를 용서함으로써 성전의 속죄예식을 중심으로 번창하던 성전세력에게 도전합니다. 그러나 그는 대중들을 요르단 강으로 부릅니다. 그가 준 물세례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위한) 과거청산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종교 안에서) 가난한 평신도 가문의 평신도의 한 사람으로, 삶의 바닥을 이미 체험한 사람으로, 특정장소로 사람들을 부르지 않고 자신이 민중 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예수에게는 요단강보다 마을이 더 친숙한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요한과 예수는 똑같이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지만, 그가 준 세례는 불(성령)입니다. 불은 미래로 향합니다. 새 세상을 이미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예수를 곧이곧대로 따라야 할 사람은 사제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가 사제출신이었다면 어쩌면 그 길을 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사회적 기득권뿐 아니라 종교적 기득권도 버려야 갈 수 있는 길이 예수의 길입니다.
광야에서 안녕해야 유혹을 상대화시킬 능력 얻어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으로 나타납니다. 참된 실천적 신비가는 굶주린 세상에 빵을 주기 위해 자신의 몫을 넘어서야 하고, 인기와 영광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투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임을 적시합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하느님께 드리는 순정(純情)을 돌려드리는 방법으로 찾은 것이 노숙인처럼 가난한 이의 한 사람으로,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눈물의 빵’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 ‘눈물의 빵’이 ‘장미 한송이’처럼 화사해지는 방법은 ‘스스로 자신의 빵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며, 이름 없이 자신(에고)을 접고, 권력 없이 권력과 투쟁하는 길입니다. 그 길을 발견하려고 예수는 가장 척박한 사막을 찾았던 것입니다. 거기서 ‘안녕(安寧’해야 하느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능력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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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출처/이동진 그림, 임의진의 <예수동화>, 파랑새어린이 |
촌락에서 호숫가로 전개된 하느님나라 운동
예수는 요한의 체포 이후에 베레아에서 갈릴래아로 이동해, 중앙권력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하느님나라 운동을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행위가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통해 출사표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 희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회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수는 정결법/안식일법을 둘러싼 논쟁으로 바리사이들과 대립한 뒤에 설교 장소를 호숫가로 옮깁니다. 그는 회당처럼 ‘보호된 종교적-사회적 공간’을 버리고, 재야인사로 일합니다. 당시에 회당과 같은 공식적 공간은 예수의 해방선언을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정작 중요한 발언은 모두 성문 ‘밖’에서 선포합니다. 성문 안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상업화된 종교’와 죽음밖에 없었습니다.
가난한 평신도 제자단
예수의 제자는 12명으로 알려져 있으나(12제자는 12지파를 상징하는 것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모은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작 복음서마다 매번 등장하는 인물은 시몬(베드로)과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입니다. 이들은 어부이며, 그 밖에 세리와 혁명당원과 여성들이 예수의 뒤를 따릅니다. 이들의 처지는 예수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이미 민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평신도이며 거처 없는 노동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이 ‘의기투합’ 할 수 있는 동지가 되었겠지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를 찾아와 하루 종일 이야기를 듣고자 했던 이들은 일자리가 없는 배고픈 군중들이었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마을로 내려가도 빵을 구할 수 없는 이들이며, 굶주림을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것 만으로 채워야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암하아렛(땅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즐겨 ‘잔치’에 비유합니다. 이들의 배고픈 처지를 소상히 알고 측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이에게 음식 같은 하느님니라
예수는 하느님나라를 가르치면서, 생활하는 백성들의 삶을 비유로 들어 이야기합니다. 즉, 민중들의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몸소 노동하는 가난한 백성들은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인식론적 특권을 지니게 됩니다. 그들은 체험이 없기 때문에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부자들의 입장과 다르며, 산상설교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되리라’는 복음을 듣습니다.
하느님나라는 날품 파는 이들이 평등하게 대접받는 나라이며, 잔치와 같습니다. 하느님은 이 잔치에 모두 초대하지만,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바리사이)과 초대에 응한 사람들(절름발이, 창녀와 소경 등 누구나)이 다릅니다. 결국 초대를 거부한 바리사이 등 분리주의자들의 우선권은 여기서 박탈당합니다. 그리고 부자들 역시 바늘귀 비유에서 보듯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언명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현재화시키기 위해 병자들을 치유해 그들을 사회생활에 복귀시킵니다. 그들은 이제 ‘죄인’에서 ‘인간’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치유는 항상 병자 자신의 믿음에 기초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항상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할 테지만, 정작 치유되려면 우리의 자발적인 동의가 필요한 것이지요. 이미 그분이 창조 때부터 우리 안에 머무시기 때문에 치유란 내 안에 계신 그분이 존재의 원천이신 분에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사람들을 하느님과 중개해주고 구전을 받아먹는 ‘중개인’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 있는 하느님 생명을 스스로가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돕는 ‘활성가(animater)’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기꺼이 그분께 자신을 개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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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출처/이동진 그림, 임의진의 <예수동화>, 파랑새어린이 |
예루살렘에서 “보라,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는 마지막 순간에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념하는 과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합니다. 낮에는 성전에서 사람들 한가운데서 선포하고, 밤에 성 밖으로 빠져나가 은신을 반복합니다. 당시 과월절이 되면 로마총독은 가이사리아에 있는 별장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감독하고, 안토니아 요새에 1개 대대의 로마군이 주둔했지요.(1개 기병대대: 100명의 기병/500명의 보병)
예수가 안식일 논쟁을 벌인 것이 바리사이 등 율법주의자들과 대적한 것이었다면, 예수의 성전정화 사건은 사두가이파를 중심으로 한 성전체제에 도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은 로마와 결탁한 대사제를 비롯한 성전세력의 아지트였으며, 이들에게 구전을 주고 ‘흠없는’ 제사용 짐승을 팔고, 환전을 통해 이득을 챙기는 성전공식지정업체들에 의해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상태였기에, 성전정화는 곧 예수가 상행위와 번제를 반대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분에게 참된 제사란 예언자들의 전통에 따라 ‘사랑과 자비’를 행하는 것입니다.
세금논쟁은 극명하게 ‘하느님의 것’과 ‘제국의 것’을 대립시킵니다. 제국과 하느님 가운데 선택하라는 예수의 태도는 엘리야 예언자가 야훼와 바알 가운데 선택하라고 백성들에게 호소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더불어 사실상 로마도 세상도 정치도 종교도 하느님의 소유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간디는 이웃사랑이 자연스레 정치적 투신을 낳는다고 말했습니다)
성전체제에 대한 이러한 강박이 예수로 하여금 죽음을 자초하게 만듭니다. 예수는 십자가 형틀에 매달렸는데, 이는 정치적 형틀이며 로마제국이 노예, 외국인, 반란자를 처형하던 방법입니다. 또한 예수가 연행당한 뒤에 하루 낮과 하룻밤 사이에 심문과 처형으로 이어진 것은 예수의 처형이 공권력을 동원한 공개적 살해음모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한 예수의 죽음은 “보라,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지극히 ‘사회적’인 구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뿐 아니라 사회악 때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죄의 연대성을 은총의 연대성으로 극복하자는 것이지요.
상급(賞給)이 ‘하느님 권력에 대한 참여’가 아니다
그리고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최후의 만찬에서 보여주는데, 여기서 ‘성체성사’는 그분이 우리에게 남겨두신 ‘정표’(情表)라고 알아들어야 합니다.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해지라”고 하신 분은 우리를 자신의 ‘벗’이라 불렀고, 우리 역시 그분처럼 ‘타인과 세상에 내어주는 삶’을 살아 거룩해지라고 초대합니다. 그 결과는 바로 ‘부활’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거룩한 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 상급(賞給)이 ‘하느님 권력에 대한 참여’가 아님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평소 늘 ‘(먼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자신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아버지(권력)라고 부르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니, 예수처럼 십자가 지고 고난의 삶을 산다고 해서 그 나라에서 다른 권력을 얻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예수의 길을 따라 살았던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사는 영광을 누릴 뿐입니다. 이미 그분이 자신에게 당도했음을 알아채는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 안에서 이미 ‘세상의 질서에 속하지 않을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살아갈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 없는 사랑’으로 살아갈 것을 가슴에 새겨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일상 속에서 세상을 거룩하게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