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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주소 : http://cafe.daum.net/chobul/1AoB/1026
※ 지금까지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가전연경]을 정확하게 주석해보았습니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 제따와나의 급고독원에 머무셨다.
2. 그때 깟짜야나 곳따 존자가 세존을 뵈러갔다. 뵈러가서 세존께 큰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3. 한곁에 앉아서 깟짜야나 곳따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올바른 견해[正見, sammaadit*t*hi], 올바른 견해라고들 합니다. 무엇이 올바른 견해입니까?
4.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거의가 다 둘을 의지하고 있나니,
[무조건, '있다(atthi)']거나, [무조건, '없다(natthi)']는 것이다.
중생들은 '집착'때문에, [무조건, '있다(atthi)']고 하는 독단적 견해인 '상견'을 고집하거나,
[무조건, '없다(natthi)']고 하는 독단적 견해인 '단견'을 고집하는 것이다.
만일, '집착'이 없다면, 독단적 견해인 '상견'과 '단견'을 고집하지 않고,
{세상의 일어남(samudaya) = 집성제}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면(or 볼 때에는),
{세상(dukkha) = 고성제}이 '있다(atthi)'고, 정견(사성제에 대한 지혜)으로 바르게 알고,
{세상의 소멸(nirodha) = 멸성제}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면(or 볼 때에는),
{세상(dukkha) = 고성제}이 '없다(natthi)'고, 정견(사성제에 대한 지혜)으로 바르게 안다.
이런 것이, 참으로 바른 견해[正見]이다.
5. 깟짜야나여, [무조건, '있다(atthi)']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ayam eko anto).
[무조건, '없다(natthi)']는 것은 두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이들 '집착'이 있는 양극단을(ete te ubho ante) 따르지 않고(anupagamma),
'집착'이 없는 정견(사성제에 대한 지혜)으로, 양극단의 '중(中)'에 서서(majjhena)
법(dhamma)을 설한다.
6. 깟짜야나여, 이것이 '집착'이 없는 정견(사성제에 대한 지혜)의 토대가 되는 '연기법'이니라.
무명을 반연하여 [업]형성들(상카라)이 있고, [업]형성들을 반연하여 알음알이가 있고,
알음알이를 반연하여 정신-물질이 있고, 정신-물질을 반연하여 여섯 감각장소가 있고,
여섯 감각장소를 반연하여 감각접촉이 있고, 감각접촉을 반연하여 느낌이 있고,
느낌을 반연하여 취착이 있고, 취착을 반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반연하여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을 반연하여 늙음과 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있다.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남이다. [12연기 유전문]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면 [업]형성들이 소멸하고 ...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하는 것이다. [12연기 환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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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전연경.......
4.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거의가다 둘을 의지하고 있나니 '있다(atthi)'거나 '없다(natthi)'는 것이다.
5. 세상의 일어남(samudaya)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는 세상들이 없다는 그런 [견해가] 없다. 세상의 소멸(nirodha)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는 세상들이 있다는 그런 [견해가] 없다.
6.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끌림과 취착 때문에 독단적 해석에 계박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런 끌림과 취착, 마음의 고집, 독단적 신조(편견), 잠재성향을 ‘나의 자아이다(attaa me)’라고 따라가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다.
고가 생겨나면 생겨나는구나, 고가 멸하면 멸하는구나라고 하여 의심하지 않고 혼동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런 것이] 그가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은 지혜이다.
이런 것이 참으로 바른 견해[正見]이다.
위 경전 어디에 부처님께서 有라거나 無를 인정하였다는 것입니까?
저는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가전연경>에는 두 개의 유무가 나오니..
하나는 세간에서 알고 있는 유무요,
다른 하나는 중도에서 보는 유무가 그것이라고.
부처님께서는 출가하여 수행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세간의 유무는 따를 것이 못 되기에 부정하지만..
중도의 정견에서 바라보는 유무는 "그렇다"고 하십니다..^^()..
제가 보기에..
공덕님과 보리수님은 세간과 출세간의 유무를 구분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함경이나 니까야 어디를 보아도 부처님께서 有나 無를 그대로 인정한 부분은 없으며, 방편으로 설명을 위하서 라면 몰라도 본격적으로 有無를 인정하신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간의 有無라거나, 출세간의 有無는 교학적으로 하는 말에 불과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논쟁을 위하거나, 교학적인 연구를 위한 입장이 아니라, 수행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더욱 명료하며, 정확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어나 문장에 얽매이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부처님께서는 세간 중생들은 있다거나 없다는 입장에서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릇된 인식에 빠지므로, 바른 눈으로 세간을 바라보기 위하여는 有라는 입장도 無라는 입장도 떠나서 중도의 입장에서 바라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소멸하는 것을 "사라짐"으로 알아차림하는 것은 사라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하는 일이며, "없음"으로 인식하는 것은 사라진 후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인식입니다. 비슷할 것 같지만 전혀 다릅니다.
일어나는 것을 "일어남" 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일어나는 것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알아차림이며, "있음" 이라는 인식은 일어난 후의 존재의 양태에 대한 인식인데......찰나찰나 변해가므로 "있음"의 인식은 바르지 못하며, 있음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변해가므로 동일한 "있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실제 위빠사나 수행에서 없는 것을 "없음"이라고 알아차림하지 않습니다. 없는 것은 현재의 인식에 잡히지 않는 관념에 불과하므로 알아차림의 대상이 아닙니다. 있음은 "있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산을 보면 '산이 있음'하지 않고 정확하게 "산~!" 그렇게 알아차림해야합니다. 소리가 들리면 "들림~!" 그렇게 알아차림합니다.
경전을 보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일어남"이라고 바르게 보며, 사라지는 것을 보면 "사라짐"이라고 바르게 본다....는 내용, 또는 유사한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가전연경을 통해 부처님이 전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현상을 여실지견하고 보니 모든 존재들은 무상하여 찰나생찰나멸하기에
[있다] 하는 순간 없어져버리니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없다] 하는 순간 생겨버리니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니
현상을 유무 존재론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연기론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견이며, 중도라는 것입니다. ^^
정확하십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보리수 : 세간의 有無라거나, 출세간의 有無는 교학적으로 하는 말에 불과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그것이 교학적으로 하는 말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간에서는 존재라 하면..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을 [거의 절대로]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도 자기랑 의견이 맞지 않음에도 논리적으로 격파할 수 없으면 화가 나는 이유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나]가 있는데. 그 [나]가 무시당했다고 보기에 화를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를 누가 내는 거라구요?.. 바로 [나]가 내는 겁니다.
우리는 [무상이다,무아다] 라고 되풀이해서 반복해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무의식 속에 실재하고 있습니다..^^
하여 관찰자인 "sati" 를 [나]라고 하지 않나요?..^^()..
Sati는 관찰자가 아닙니다. 근과 경이 부딪히는 순간 알아차림하는 식(마음)의 기능 중에 하나이지요. 관찰을 하면 이미 알아차림을 지나서 분별, 가공하는 단계로 이행한 것이지요.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Sati가 거의 죽어 있습니다. 본래의 기능을 하고 있음에도 드러나지 않으며, 그 기능이 현저히 약화되어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알아채는 단계를 휙 지나가버리고 근과 경이 부딪히는 순간 즉시 분별망상으로 들어갑니다. Sati가 아주 강해지면 분별망상으로 번지기 전에 있는 그대로 알아채는 순간 놓아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하고 경계를 놓는 훈련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觀(위빠사나)하는 것과 관찰은 다르다 여겨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존재의 부정이 아닙니다. 있다거나 없다는 관념에 대한 집착(또는 분별하고 취착하는 망상)에서 벗어나서 여실지견하라는 것이지요. 부처님 가르침을 있다거나 없다는 것으로 여기거나, 존재에 대한 부정, 또는 관념적인 가르침이라고 여기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진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분별망상이어서 바른 안목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하기는 쉽고, 머리로는 이해를 할지라도 수행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실제로는 거의 실천되지 않습니다. 오직 끝없는 명상과 훈련으로 몸과 마음을 조복시키는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의사를 전달하고, 개념짓고 표현하는 행위와 언어는 아주 불완전합니다. 그런데 말꼬리에 매달리거나, 어떤 하나의 행위에 매달리거나, 어떤 하나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사물을 바라보며 이해하려 한다면 언제나 모순에 부딪히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모두 놓고 부처님의 수행법을 실제로 따라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론을 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박학다식하여 모든 견해들을 논파하는 능력이 있어도 번뇌를 제거하는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여겨집니다.
(에구......그냥 보리수가 해본 소립니다.)
[중도 = 연기 = 정견 = 무아 = 공]으로 개념을 개략적으로 정리할 수는 있지만
모든 경우에 이와 같이 적용되지는 않는데
중관사상에서는 [공(空)]이라는 하나의 개념을 절대화시켜
이 개념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마저 까부수어버렸다는 측면에서
중관사상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중관사상에 빠져버리면 관념론에 빠져들어 아무 이득도 없는 희론으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실참수행으로 갈애를 극복하고 지혜로 무지를 타파하여
마음의 평온[열반]을 얻으면 불교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이 목적 이외 다른 것은 없습니다.
쓰잘데기 없는 희론들은 붓다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입니다. ^
쓰잘데기 없는 희론들은 붓다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입니다. ^^
............그렇습니다. ^^
그러니까..
세간과 출세간의 차이는..
사띠마저 [나]의 식의 기능으로 파악하는 것이고..
출세간의 사띠란 그냥 알아차림으로 [나]라는 의식이 붙을 곳이 없다는 게 됩니다..^^
다시 말합니다..
세간이란 무의식일 망정 주체가 있고, 그것이 주인인 듯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곳이며,
출세간이란 무의식에서도 주체가 없음을 알아 나와 너(=대상)라는 식 없이 활동하고 있는 게 됩니다..^^()..
물론 부처님이 말하는 출세간이란 출세간이 되고자 수행하는 곳이 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존재의 부정이 아니라고 하는데..
보리수님이 생각하는 [존재]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부처님꼐서는 실재로 알고 있는 존재를 부정하십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시설이 바로 [중도]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유무 중도에서..
유무 세계는 (실재한다고 여기는)존재의 세계요,
중도란 그런 존재가 아닌 법의 세계가 됩니다..()..
자칫 말장난으로 되기 쉽지만.......그래도 말씀드리자면......
존재를 부정하면 "부정"(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존재는 없다는.....無)이라는 변견에 서게 되고, 존재를 긍정하면 "긍정"(존재는 있다라거나, 무엇이 존재한다는.....有)이라는 변견에 서게 됩니다. 그런 양변에 서지 않고, 가운데를 취하는 것도 아닌 것이 중도이지요. 교학적인 측면에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하여 이런 저런 단어와 문장을 동원하지만, 핵심을 찔러보면 부처님께서는 존재를 부정하거나 긍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존재는 존재일 뿐입니다. 존재는 긍정의 대상이거나 부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존재가 답을 가진 것이 아님에도 존재라는 것에 집착하여 관념의 노예가 됩니다. 존재를 긍정하거나 말거나, 부정하거나 말거나, 모든 존재는 同時性과 相依性을 가지고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모든 존재는 關係性 속에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다 사라질뿐입니다. 저는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존재를 부정하면 눈앞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처리할까 모순에 빠지고, 존재를 긍정하면 존재에 집착하여 존재의 사라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보리수의 견해일 뿐입니다.)
존재의 세계를 강조하면 존재의 세계에 선 변견이며, 법의 세계를 중도라고 하면 법의 세계에 선 변견입니다. 중도는 존재의 세계라거나 법의 세계라는 그런 양변을 여의고, 세상의 일어남을 일어난다고 바르게 알고, 사라지면 사라진다고 바르게 아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경>을 보면..
비구들아, 세간에는 세간법(世間法)이 있어, 나는 그것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아 사람들을 위해 분별하고 연설하고 나타내 보이지만 세간의 눈먼 장님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 허물이 아니니라.
http://cafe.daum.net/bd-dm/BGji/133 침고
라고 하십니다..()()()..
이 경에는 세가지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는 부처님처럼 [세간법]을 깨치고, 연설하는 분입니다.
둘째는 부처님 연설을 듣고 [세간법]을 이해하는 제자들입니다.
셋째는 [세간법]을 알지도 못하는 눈 먼 장님들입니다.
한 부류가 더 있으니..듣고서 달리 해석하는 이들이 있군요..^^
_()_
이때 [세간법]은 무엇입니까?..
"색(=5온)은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 으로 바로 일체는 무상하고 무아인 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눈먼 장님들은 그것을 들어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눈먼 장님들은 세간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상은 실재하는 존재이기에 생주이멸하거나 생사를 윤회한다고 믿는 거지요.
그런 그들(인도인)에게 윤회가 있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
中道에 대하여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라거나, 眞空妙有가 곧 중도라거나, 다른 말로 쌍차쌍조니, 실상무상이니, 佛性의 세계이니, 열반의 세계이니, 중도는 곧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며, 부처님 가르침의 宗旨라고 하면서 갖은 좋은 말을 다 동원하여 중도라고 말합니다.
물론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도를 설명하다보면 어떻게 끌어다 붙여도 맞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알아둘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중도는 부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어느 변견에도 치우치지 않고(유무중도) 세상을 바라보신 것이 연기입니다.]이며, 고행과 그릇된 방법을 떠나(고락중도) 바른 수행법을 통해서 열반을 얻으셨으니 8정도가 곧 중도적인 수행법이라고 알면 그만입니다.
중도는 다름이 아닌 부처님께서 세상을 바른 시각으로 바르게 보시는(여실지견하는) 입장이며, 그런 안목을 갖추기 위해 걸어야 하는 바른 수행의 길인 것입니다.
중도는 부처님의 입장이자 부처님 가르침의 입장입니다.
( 위 견해 역시 보리수의 견해에 불과합니다. 大乘을 공부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전연경을 통해 부처님이 전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현상을 여실지견하고 보니 모든 존재들은 무상하여 찰나생찰나멸하기에
[있다] 하는 순간 없어져버리니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없다] 하는 순간 생겨버리니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니
현상을 유무 존재론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연기론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견이며, 중도라는 것입니다. ^^
-> 똇목님과 저와 차이는 [찰라]라는 게 아닌가 합니다..^^
님은 찰라생 찰라멸이라 하면서 무상이라 하는데..
저는 무아이면서 무상이라 합니다.
무아를 말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찰라생이란 말 마저 찰라나마 실재(=실체)하는 것으로 봅니다.
700. 무상이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만동자가 세계는 영원한가? 아니면 무상한가?..
하고 묻는데.. 그때 무상이란 찰라찰라 생멸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겁니다.
둘째는 아예 존재 자체가 없는 즉 불생불멸의 뜻이 있다는 겁니다.
첫번째 무상이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라 하겠습니다.
두번째 의미의 무상은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無常을 불생불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어디에 나오는지요?
무상(無常)이라 한역된 말에는 범어로 'assasata' 와 'ancca'가 있다고 합니다.
'assasata'는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곧 생멸이 있는 존재로 항상하지 못하고 변해가는 것이니 세간에서 알고 있는 무상이란 뜻으로..
바로 만동자의 질문에 나오는 무상이 그것입니다. (14무기 가운데 무상)
anicca는 '한 순간도 존재가 아닌' 이란 뜻으로 떌감이 타서 생기는 불꽃 같은 게 됩니다.
불꽃이란 본래 없는 것으로 연료가 탈 때 생기는 현상이건만, 세간에서는 불꽃을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
하여 실재하는 불꽃이 생겼다가(有) 사라졌다(無)고 합니다.
연생(緣生)으로 생기는 무명, 행, 식, 명색, 6입처, 촉.. 생, 노사는 모두 anicca로 본래 없지만 연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불교 설명을 보면.. 연생인 식이나 명색, 6입을 생멸이 있는 존재인 'assasata'처럼 설명하고 있더군요..^^
anicca는 '일체 무상' 할 때 무상으로 생멸이 없는 불생불멸의 의미가 되며,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려 하던 의미라고 합니다..^^()..
조건에 따라 생겨나므로(연생) 不生이라고 해서는 안되며, 조건을 따라 소멸하므로 불멸이라고 해서도 안됩니다. 조건에 따라 서로 의지하여 생겨나므로 그냥 생겨난다는 것(본래부터 존재하였다거나, 神이나 누가 창조하였다는 것)은 바르지 않으며, 조건을 따라 같이 멸하여 없어지므로 그냥 멸한다는 것도 바르지 않으므로, 생이니 멸이니, 불생이니, 불멸이니 하는 변견을 떠나서 일어나면 일어난다고 바르게 보고, 소멸하면 소멸한다고 바르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초심님의 논리를 가만히 보면
힌두교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대승불교의 논리를
그냥 아무 비판의식도 없이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진정한 불자이기를 원한다면
불생불멸 이런 관념들 다 내던져 버려요.
그런 관념은 불교와는 전혀 무관한 관념입니다.
대승불교의 논리와 힌두교의 논리를 서로 비교해 보세요.
힌두교 논리를 그대로 대승불교의 논리로 끌여들여온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그런 힌두적 관념들을 깡그리 부수어버린 것입니다.
용수 논사의 논리도 유무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공(空)이라는 관념도 존재론적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붓다의 사상은 이런 존재론적 인식이 아니라
연기론적 인식의 토대 위에 있으므로 접근자체가 용수 논사와는 다른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관념도 사실은 연기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런 표현은 존재론적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오히려 횡설수설 논리로 사람들로 하여금 애매모호, 오리무중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합니다.
물론 불생불멸을 실체적 관념으로 보면
아트만(진아)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기에
불생불멸이 맞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불교적 관점에서는 그런 관념이 전혀 필요없는 것이지요.
불교는 현상계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 생멸을 연기법으로 설명해 나가는 방식입니다.
불생불멸 관념 속으로는 불교의 기본적인 논리인 연기법의 논리가 스며들어갈 틈이 아주 없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