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비련-명국환
작사 강남풍 작곡 전오승
一
사랑을 위하여 왕실도 버리고
그대 따라 가리라 기약했더니
이다지도 세상은 말이 많은가
아 공주 몸이 원망스럽소
二
씌워진 의무이라 난들 어이하리오
부질없이 임 가슴에 불을 놓고서
못 이루는 이사랑 원망을 마오
아 이내 순정 무너만 진다
忠烈王, 忠宣王
두부자의 치열한 왕위다툼… 원의 부마 충렬황 원의 외손 충선왕
忠烈王
활동분야;왕
다른 이름; 王昛/王諶/王㖺
忠宣王
활동분야;왕
다른 이름; 王璋/王謜/이지리부카(益知禮普)
1297년 원나라에 머무르던 고려의 세자 원(충선왕)은 모후인 제국대장공주가 서른아홉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서둘러 고려로 돌아온 그는 어머니가 죽은 것이 부왕 충렬왕의 애첩인 궁인 무비 때문이라며 무비와 환관 도성기 등을 죽이고그 무리 40여 명을 내쫓았다. 세자가 아직 살아 있는 부왕의 애첩과 수족들을 처단했다는,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사건은 일단 두 가지‘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우선 두부자간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나빴다는 것과 당시 세자의 실권이 왕보다 컸다는 것이다. 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세자가 왕의 세력을 누를 수 있었으며,또 이후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우선 당시 고려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려와 원나라 이에 30년에 걸친 항쟁이 끝나자 원나라에서는 원나라 공주를 고려 왕의 왕비로 삼을 것을 강요했다. 이런 정략결혼을 통해 고는 가 함부로 반기를 들 수 없도록 속박하려는 계산이었다. 사위가 된 고려 왕이 장인에게 쉽게 저항할 수 없을 뿐더러 공주에게 이들이 있어 왕위를 잇는다면 원나라의 피가 섞인 왕이니만큼 친원적일 것이다. 또한 공주가 고려 조정을 직접 감시한다는 이점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최초로 원나라의 사위가 된 왕이 충렬 왕이다. 원종 맏아들로 1236년 태어난 충렬 왕은 1260년 태자로 책봉된 뒤 원나라에 들어가 베이징에 머무르다가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 결혼할 당시 서른아홉 살이었던 충렬 왕은 이미 혼인하여 장성한 자녀까지 두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면서 제1비였던 정화공주는 제2비가 되고 제국대장공주가 제1비가 되었다. 결혼하던 해 원종이 죽자 충렬 왕은 급히 귀국했다. 이때 그는 변발에 호복 차림이었다. 이 같은 모습에 백성들은 탄식하고,우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원 세조의 부마가 된 충렬 왕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급속도로 원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에 백성들이 안정을 찾고,무신정권에게 빼앗겼던 힘을 왕실이 회복하기는 했지만,원나라 공주를 비롯해 원나라 출신들이 실권을 장악하자 사회 전반에 변발과 호복 등 몽골 풍속이 퍼져갔다.
그러나 충렬 왕은 이런 일들에 반발하거나 저항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미 실권은 원나라 공주인 제국대장공주와 그를 보필하는 친원 세력들의 것이었다. 그는 정치를 외면한 채 즉위 초기부터 사냥을 즐기고 향락과 사치에 빠져 들었다. 이 무렵 아홉 살의 어린 세자가 ‘지금 백성들은 이루 다 말 할 수 없을만큼 곤궁하고 또 일본정벌 때문에 나라안이 모두 정신 없는데 어째서 부왕은 멀리‘사냥이나 다니는 것입니까?"라며 울음을 터뜨렸다는 기록은 어린 세자가 몹시 총명했다는 사실과 더 불어 충렬 왕과 충선 왕의 관계가 일찍부터 삐걱거렸음을 보여준다 세자는 원 세조의 강요로 일본 정벌에 동원된 고려의 백성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던 일을 말한 것이다. 충렬 왕이 즉위하던 해 시도 되었던 1차 일본정벌에서 대마도만 정벌하고 폭풍을 만나 일본본토정벌에 실패한 데 이어. 1281년 2차 정벌도 폭풍을 만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원나라는 두 번이나 더 일본 정벌 준비를 강요해 고려는 많은 곤란을 겪어야 했다.
당시 원나라는 일본 정벌에 고려를 동원한 데 그치지 않고 고려 각 행정관제가 자신들과 같으니 이를 고치라고 강요했다. 임금의 묘호에 조나 종 대선 왕을 붙이도록 하고, 왕의 시호 앞에는 일괄 적으로‘충(忠)’자를 붙이도록 했다. 또한‘짐’은‘고로,‘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격하시켰다.
이런 상황들을 자신의 대에서 겪어야 했던 충렬 왕의 심사가 편했을 리 없다. 더구나 제국대장공주는 지배국의 공주 신분임을 내 세워 국왕보다 더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충렬 왕은 점점 정사는 뒷전으로 미룬 채 총애하는 궁인 무비를 대동해 사냥을 다닐 뿐이었다. 제국대장공주뿐 아니라,그가 낳은 아들인 세자의 반발도 점차 커졌다.
그렇게 성장한 세자도 1296년 원에 가서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해 원의 부마가 되었다. 그러다 그 이듬해 모후인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죽자 세자는 강력하게 반발하며 궁인 무비를 비롯한 아버지의 사람들을 처벌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원 세조의 외손이자 원나라 황실의 부마가 된 세자와,제국대장공주의 사망으로 원나라와의 끈을 놓친 왕의 입지 차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 황실은 세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제국대장공주와 무비 그리고 측근들까지 잃은 충렬 왕은 더욱 정치에 뜻을 잃었고, 결국 스스로 왕위를 내놓고 물러나겠다는 글을 원에 보냈다 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1298년 충렬 왕은 양위한 뒤 태상왕이 되었다.
충렬 왕이 물러남으로써 1298년 세자 원이 즉위하여 충선 왕이 되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왕위에서 밀어낸 모습이지만,사실은 원 황실의 뜻으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더구나 충선 왕에게는 원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충선 왕은 아버지와 달랐다. 즉위하자마자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포부가 크고 식견이 높았던 충선 왕의 개혁들은 다소 반원적이었다. 고려의 제도를 복원하는 등 자주적 기틀을 마련하려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역시 원나라 공주인 제1왕비 계국대장공주였다. 충선 왕도 충렬 왕과 마찬가 지로 원나라 공주인 제1왕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충선 왕에게는 정식 왕비만 여섯 명이나 되었는데,이 가운데 세자 시절 혼인한 조비가 왕의 총애를 받았다. 계국대장공주는 이에 크게 반발했다. 결국 계국대장공주는 충선 왕이 조비만 총애하여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며,정사를 반원적으로 처리한다고 편지를 써 원의 왕 태후에게 보냈다.
끝내 충선 왕은 즉위 7개월 만에 국새를 빼앗긴 채 압송되고,왕위는 다시 충렬 왕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충선 왕이 추진하던 개혁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제도들도 모두 충렬 왕 대의 것으로 복원되었다.
원으로 호송된 충선 왕은 이후 10년 동안 베이징에 머물러야 했다. 다시 왕위에 오른 충렬 왕은 이후에도 여전히 정사보다는 음주 가무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들 충선 왕을 제거 하기 위해 왕위를 10촌 종제인 왕전에게 넘겨주고 계국대장공주를 그에게 개가시키려는 왕유소 등의 음모에 가담하기도 했으나,원나라에서 충선 왕의 세력이 다시 강해지면서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무렵 원나라에서는 성종이 죽고 황족 사이에 치열한 왕위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무종이 즉위했는데,당시 충선 왕은 무종의 편에서 공을 세워 다시금 그 입지가 튼튼해졌다. 충선 왕을 폐하기 위해 원에 갔던 충렬 왕은 오히려 충선 왕에게 측근들을 모두 잃고 실질적인 왕권을 빼앗기고 만다. 모든 것을 잃고 고려로 돌아온 충렬 왕은 재위 34년 만인 1308년 세상을 떠났고,부왕의 사망 소식을 들은 충선 왕은 급히 귀국해 상을 치른 뒤 10년 만에 왕를 되찾았다.
충선 왕이 복위하기 석 달 전 원 무종은 충선 왕의 공을 인정해 심양왕으로 봉했다. 이렇듯 원나라의 신임을 얻은 충선 왕은 즉위하자 조신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조세의 공평,인재등용의 개방,농장업의 장려,귀족의 횡포 엄단 등 혁신정치를 천명했다. 그러나 원나라 생활에 익숙해져서 고려의 왕궁에 적응하지 못 했던 때문인지,아니면 원나라 황실의 후한 대접을 잃을까 걱정해서였는지 즉위 두 달 만에 숙부인 왕숙에게 왕권 대행을 시키고 베이징으로 가버렸다 이후 전지(傳旨)를 통해 나라를 다스렸으니, 즉 위 시에 발표했던 개혁안들이 허사가 됐을 뿐더러 신하들은 개경과 베이 징을 오가며 국정을 수행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충선 왕은 이후 재위기간 동안 한번도 귀국하지 않았다.베이징에 머무르는 충선 왕을 위해 해마다 포 10만 필,쌀 4,000 곡 등 헤아릴 수 없는 물자들이 운반되어 그 폐해가 극심하자 고려에서는 세자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사전에 감지되어 세자와 그 측근들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에도 조신들이 왕의 환국을 계속 요청하자 결국 1313년 잠시 귀국해 둘째 아들 도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다시 베이징으로 갔다.
충선 왕이 베이징에 있으면서 고려에 이바지한 것은 베이징의 자기 집에 만권당을 설치하여 많은 서적을 수집하고 원나라 학자들과 고려의 학자들을 교류하게 한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조맹부 등 원나라 유학자들과 이제현과의 교류는 고려의 학문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원 황실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과 권력을 동시에 누리던 충선 왕은 원나라 황제 인종이 죽은 뒤 고려 출신 환관의 모략으로 토번으로 유배되었다가 겨우 풀려나,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베이징에서 살았다
한편 충선 왕의 뒤를 이은 충숙 왕 역시,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자기 아들인 충혜 왕과 번갈아 가며 원의 간섭으로 인한 중조를 하게 된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반원개혁을 하기 전까지 원의 고려 간섭은 극에 달했던 것이다.
심양왕
원나라가 고려 사람에게 준 봉작(封爵)의 하나. 심양(瀋陽)을 중심으로 랴오닝 성[遼寧省] 일대에 사는 고구려인들을 다스렸다. 최초의 심양 왕은 충선 왕. 그는 부왕인 충렬 왕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원나라에 머물다가 무종을 원나라 황제에 오르게 하는 데 공을 세워 심양 왕 봉작을 받았다. 심양 왕은 1310년 심왕(瀋王)으로 개칭되었으나, 충선 왕의 조카인 연안군(延安君) 고(暠)가 심왕을 이은 뒤부터는 실권은 없어지고 명예직으로 남았다. 심양 왕은 고려 왕과 대립하면서 고려 조정의 내분을 낳았다. 최후의 심왕은 연안 군의 손자인 탈탈불화(脫脫不花)였다.
만권당
충선왕이 세운 독서당. 고금의 귀한 책들을 많이 수집한 뒤,고려에서 이제현 • 박충좌(朴忠佐) 등을 불러,원나라의 유명한 학자인 조맹부(趙孟頫) . 염복(閻復) 등과 교유하면서 중국의 고전 및 당시 북 중국에서 유행한 성리학을 연구하게 했다. 만권당에 모여든 학자는 학문뿐만 아니라 예술 • 골동(骨董) 등 고려와 원나라의 문화교류에 중심 구실을 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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