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호 |
65 번 글 |
조회수 |
2122 |
작성자 |
바부산 |
작성일 |
2005/12/26, 08:50:25 |
제 목 |
루팔벽에서 산악계의 미래를 그려본다-히말라야거벽등반사 |
루팔 벽에서 한국 산악계의 미래를 그려본다
히말라야에서의 거벽등반은 앨버트 머메리와 월터 보나티, 라인홀트 메스너의 정신을 이어 받는다. 대규모 등반대와 고정 로프, 여러 개의 고소 캠프, 보조 산소통, 대량의 장비, 포탈렛지, 셀파의 도움으로 산을 장악하는 등반 스타일을 지양한다. 거벽등반은 산의 조건과 환경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며 수많은 도전의 기회를 모색한다. 기술과 체력, 용기의 결손을 메꾸기 위한 과도한 장비의 사용을 피하고, 장비 설치를 위해 자연을 영구적으로 파손하지 않는다. 등반가를 이어주는 로프와 등반 기술, 정신력에만 의존하는 등반 스타일을 선호한다. 타보체(6,564m) 북동벽에 도전했던 제프 로우와 존 로스켈리는, “이 벽에서의 등반 행위는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할 일이다. 3분의 2는 미쳐 있어야 하고, 3분의 1은 술에 취해 있거나 루트에 대해 전혀 무관심해야 한다. 등반을 할 때 전체 구간을 생각하지 말고, 바로 앞에 있는 구간이 마지막 피치라고 여기고 등반하라.”며 거벽등반의 곤란함을 표현했다.
훌륭한 거벽등반가는 뛰어난 체력과 기술의 소유자라기보다는 그 자신의 육체를 외부의 자연 조건과 환경에 조화시킬 수 있는 정신력을 가진 자이다. 그는 도전하는 대상에 맞게 자신의 성격조차 새로이 변화시킬 수 있는 과감한 의지의 소유자이다. 산은 자연의 힘이 비밀스런 통로로 만든 환상적인 명작이다. 그는 산에서 난관을 만났을 때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통제하면서 목표를 향해 지독하게 집중한다. 등반에서의 실수와 경험을 통하여 정확한 자기반성을 반복해야 한다. 등반을 준비하고 등반하는 과정은 곧 등반가 자신의 변신의 과정이기도 하다. 추위와 고통, 죽음에의 공포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겪으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는 과정은 철저히 인간 의지의 영역이다. 거벽등반의 역사는 초등의 역사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 하나의 거벽을 대상으로 다양한 목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벽등반의 역사는 아직도 마지막 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1872년 영국의 테일러와 펜들베리 형제가 알프스 몬테로사 동벽을 초등하면서 거벽등반의 역사는 시작된다. 벽의 길이와 눈사태의 위험이 숨어있는 이 동벽에서 그들이 믿은 것은 끈질긴 고집과 등반기술뿐이었다. 1881년 밧츠만 동벽이 초등되면서 암벽등반의 한계가 난이도와 벽의 길이를 추구하는 수준으로 향상되었고, 거벽등반의 마지막 숙제라고 했던 돌로미테의 치베타 북서벽이 에밀 솔레더에 의해 1925년 등정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차원의 등반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1931년 토니와 프란츠 형제에 의해 마터호른 북벽이 등정되고, 죽음의 벽으로 상징되는 1800미터의 아이거 북벽이 안데를 헤크마이어 등의 합동대에 의해 1938년 초등되면서 알프스의 난제가 모두 풀리게 된다. 2차 세계대전 후 비브람 창과 줄사다리, 인공섬유 재질의 로프와 안전벨트, 헬멧 등 장비의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 등반 장비의 대중화로 보다 풍부한 경험이 축적되었고, 등반의 주요 목표는 알프스와 요세미티에서의 직등으로 옮겨졌다. 1966년 210개의 하켄과 고정 로프를 이용하여 31일만에 아이거 북벽이 직등(디렛티시마)으로 등정되면서, 더 이상 등반 불가능의 대상지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이거 북벽 직등같은 스타일의 거벽등반이 아직은 알피니즘의 전환점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지만, 새로운 기회를 급속도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즉, 난공불락의 신화를 히말라야의 8000 미터 고봉으로 무대를 옮겨서 찾게 된 것이다.
1964년 시샤팡마가 중국 등반대에 의해 북릉으로 초등되면서 8000m급 자이안트의 초등 시대가 막을 내린다. 거벽등반이 유럽 알프스와 미국의 요세미티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동안 히말라야에서는 프랑스(안나푸르나/마칼루), 영국(에베레스트/캉첸중가), 독일(낭가파르밧), 이탈리아(K2), 오스트리아(초오유/가셔브룸 2봉/브로드피크), 스위스(로체/다울라기리), 일본(마나슬루), 미국(가셔브룸 1봉), 중국(시샤팡마)이 자이언트 초등의 영광을 차지하면서 피크 헌팅, 국수주의, 국력, 자존심의 상징인 국가적인 규모의 히말라야 초등 붐을 일으켰다. 이후 초등의 기회가 사라지자 보다 다양하고 어려운 루트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그러던 중 1970년 안나푸르나 남벽이 영국의 돈 윌란스와 두갈 헤스톤에 의해 등정되고, 메스너 형제에 의해 낭가파르밧 루팔 벽이 등정되면서 히말라야에서의 거벽등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암빙의 단순한 난이도에서 고도와 희박한 공기를 더한 극한등반으로의 마지막 숙제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고, 거벽등반에서의 경량화와 속공이 화두가 된다.
카라코람의 오그르는 바인타브락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77년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과 덕 스코드 등 6명의 소규모 등반대는 남서벽을 통해 초등에 성공한다. 남벽은 1200m 구간을 알파인 믹스 등반으로 통과해야 하고 7,200m 지점에서 고난도(V/A2)의 기술적인 암벽등반을 해야 한다. 스코트는 하드프리와 인공등반으로 계속 선등하며 주봉에 오른다. 그러나 첫 번째 현수하강에서 미끄러지면서 두 발목이 골절된다. 그는 폭풍이 몰아치는 악천후 속을 7일간 무릎으로 기면서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거리는 2000m에 달한다. 1982년 맥킨타이어와 박스터, 스코트는 시샤팡마 남서벽 등반에 나선다. 그들은 대규모 등반 팀에 결여되기 쉬운 모험성을 극복하기 위해, 유럽 알프스의 고전적인 등반방식을 히말라야 벽에서 시도한다. 3일만에 2500m의 벽구간을 통과한 그들의 배낭에는 약간의 식량과 침낭, 버너, 텐트와 로프 등이 들어 있었다. 전진캠프나 후속지원대, 셀파, 고정로프, 보조 산소통 없이 알파인스타일의 전형적인 속공 등반으로 등정을 이룬다. 오그르의 신화는 1983년 남측 기둥벽(사우스 필라)에서 이루어진다. 프랑스의 훠켓과 파인은 5,500m 지점에서 출발하여 1000m 구간을 완전한 암벽등반으로 루트를 개척한다. 이 구간의 평균 난이도는 V급이다. 기둥벽의 끝인 6,500m 지점부터 600m 구간의 믹스 구간을 통과한 이들은 정상 암부 밑에서 후퇴한다. 이 구간은 5피치로 짧지만 기술적인 암벽과 믹스 등반을 요구한다. 난이도는 V/A2 이다. 5일간 등반하며 많은 체력이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24회의 현수하강으로 하산하는 데만 3일이 소요되었다. 이렇게 고난도의 기술적인 등반을 요하는 히말라야의 거벽등반은, 속공과 중량이라는 딜레마만 노출시키고 만다. 이후 이 루트를 통해 등정에 성공한 팀은 없다.
안나푸르나 남벽에 직등 루트를 뚫으며 극한의 등반을 보여준 팀은 카탈로니아의 보히가와 루카스이다. 매킨타이어와 길리니는 1982년 남벽의 램프와 록밴드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직등 루트를 개척한다. 그러나 7,150m 록밴드 지점에서 후퇴하고, 하산하다 낙석으로 매킨타이어가 사망한다. 그들이 지니고 있던 장비는 1개의 아이스 스크루와 3개의 암벽용 하켄이 전부였다. 1984년 이들의 등반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보히가와 루카스는, 새로운 루트를 추가하면서 이 미완성 등반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남벽 하단부(5,800m)에서 출발하여 6,800m 지점까지는 로프를 안 메고 등반한다. 소나기처럼 퍼붓는 낙석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의 속공이 필요한 것이다. 4일간의 벽 등반후 7,600m 지점에서 다섯 번째 비박을 하는데 평균 난이도는 V+/A2/Ice 80° 이다. 다음날 중앙봉을 오르고 7,800m 부근에서 하산을 위한 마지막 비박을 한다. 두 동의 80m 로프로 16시간만에 하산을 완료하는데 총 등반일수는 6일이 소요되었다. 안나푸르나에는 세 가지 기념비적인 기록을 인정하고 있다. 하나는 1950년 인류 최초의 8000m 급 초등이고, 두 번째는 1970년 남벽 등정으로 인한 히말라야 거벽등반 시대 개막, 그리고 세 번째는 이들의 직등 루트 등정이다. 알피니즘의 새로운 진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5년 베누아 샤무는 K2를 23시간만에 오른다. 같은 시기에 로레탕은 다울라기리 동벽 동계 초등을 이루는데 36시간이 소요되었다. 쿠르티카와 샤우어는 가셔브룸 4봉의 서벽 2500m 벽 구간을 등반한다.
1986년 에베레스트에는 히말라야 거벽등반의 새로운 강자가 등장한다.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알파인스타일의 모델로 평가 받는 이 등반은, 스위스의 로레탕과 트로이에가 북벽 2600m 구간을 직등하면서 등정에 성공한 것이다. 1980년 메스너의 에베레스트 단독 무산소 등정과 비교된다. 전진캠프(5,850m)를 출발한 그들은 만 이틀이 채 못되어 베이스캠프에 내려왔다. 2600m 구간의 벽 등반을 끝내고 7,800m 지점부터는 배낭도 벗어놓고 정상을 향한다. 쿠르티카가 언급한 대로 ‘발가벗은 야간산행’이었다. 등정후 글리세이딩으로 5시간만에 귀환한다. 로프와 텐트, 산소통 없이 오직 침낭과 최소한의 식량만을 갖고 야간등반으로 벽 구간을 뚫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내려왔다. 이렇게 순수하고 강력한 주도권을 가진 등반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용기나 체력 이상의 무엇이 필요했다. 그것은 자연에 완전히 동화가 되고 자신의 생리와 심리 상태마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판단력과 순발력이었다. 1986년 쿠쿠츠카가 K2 남벽을 오르고, 1990년 토모 체슨이 로체 남벽을, 1997년에는 알렉세이 보로토프 등 5명의 러시아 등반대가 마칼루 서벽을 등정한다. 그리고 1999년 11월 2일, 20세기 최고의 위대한 등반으로 평가되는 다울라기리 1봉 남벽을 토마즈 후마가 단독등반으로 8일만에 성공한다. 초등이 된 거벽 루트라도 카리스마가 있는 루트는 계속해서 등반이 시도된다. 몬테로사 동벽과 마칼루 남벽, 아이거 북벽, 루팔 중앙벽이 그런 경우이지만 후마의 다울라기리 1봉 남벽은 결코 대중화되지 않는 루트로 남을 것이다. 1872년의 몬테로사 동벽과 1999년 다울라기리 남벽의 초등 사이에는 130년이라는 세월과 8000km라는 지도상의 거리 차이가 있었지만, 이 거벽등반의 역사에 등장했던 순결한 영혼들의 눈빛은 낯설지가 않다.
거벽등반가는 나이와 경험에 비례하는 성숙한 판단력, 산에서의 끊임없는 경계심, 외부와 격리되고 차단된 상태에서의 탈출, 급변하는 상황에서 신속하게 적응하는 요령, 파트너의 선별과 갈등해소, 돌발 상태에서의 비박에 친숙해져야 한다. 또한 저돌적이고 무모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극한의 경계선에서 자신을 마스터링하여 장난기와 심각함,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을 마치 추위와 더위, 햇살과 폭풍, 바위와 얼음같이 자연스러운 관계로 만들어야 한다. 성공적인 거벽등반에 이르는 길은 고도의 기술과 장비, 정보, 자신의 용맹성에 의존하는 것보다, 이러한 모든 메카니즘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자신의 성격과 태도를 조합시켜 변화하는 일이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을 정도의 오지에 있어서 접근이 불가능하거나, 희미한 등반 가능성에 숨어버려 터부시되어 온 대상에 도전한다는 의미는, 산에서의 모든 한계에 그 가능성을 열어주고 도전의 영역을 무한히 넓혀준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행위를 모험이라고 했지만 모험이란 단어는 너무 남발되어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한다. 모험은 위험을 찾아 다니거나 죽음과 친해지는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니다. 출발 지점부터 정상에 이르는 동안 전혀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여 내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행위이다. 히말라야를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면 시시각각 변하는 거벽들의 각도가 놀랍고 경이롭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거벽들. 저 모든 벽을 오를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시도하고자 한다. 저 거벽들도 강과 나무, 꽃과 사막같이 이 세상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산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때로는 폭풍과 눈사태로, 때로는 엔진 달린 유성이 쏟아지는 듯한 거대한 낙석으로 우리를 공포로 몰기도 하지만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이 산의 완벽한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듯이 위험과 경고로부터 조화와 공존을 이룬다면, 등반은 언제나 성공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반복되면서 새로운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을 열 수 있고 진정한 해방의 길로 향할 수가 있을 것이다. 불가능한 벽과 루트가 있는 한, 도전이란 단어는 가장 강렬한 빛을 발한다.
한국의 히말라야 진출 역사는 짧지 않다.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의 8000m 14개 자이언트 완등은 히말라야 등반의 양적 팽창과 대중화에 기여한 바 크다. 그러한 과정속에서도 산악계는 카라코람과 트랑고 산군, 가르왈 히말라야, 쿰부 히말라야에서의 벽등반을 통한 질적인 향상을 꾸준히 추구해 왔다. 1983년 악우회는 바인타브락 2봉 초등을 거벽등반을 통해 이루면서 히말라야에서의 가능성을 활짝 여는 전기를 마련한다. 일본과 영국 등반대의 끈질긴 도전을 물리치고 거벽등반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등반 스타일을 제시한 것이다. 1984년 경남공고 OB산악회가 다울라기리 산군에 위치한 푸타 히운출리의 700 미터 벽 구간을 소수의 인원과 속공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또한 한국외국어대 산악회는 쿰부 지역의 바룬체 북서벽을 등정했으며, 알파인가이드협회는 사르체 남서벽에 신 루트를 만들며 등정에 성공한다. 미국 남가주 산악회의 푸모리 동벽 원정대는 등정에는 실패했지만 직선 등반 루트를 개척하는 기량을 과시했다. 1987년 전남대의대 산악회는 쥬갈 히말라야의 최고봉이자 미등봉인 렌포강 서벽 등정에 성공하는데 등로주의의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8년 대전 자일클럽은 갸충캉 남서벽에 1,500m의 신 루트를 개척하며 이 산의 세 번째 등정팀이 된다. 배승렬 대장이 이끄는 1989년 광운대 산악회의 바기라티 3봉 원정대는, 한국인 처음으로 인도 강고트리 산군에 도전한다. 그들은 소수의 인원(3명)으로 바기라티 3봉 남서벽에 붙어 1,300 미터의 벽구간을 돌파한다. 1992년 한국산악회 원정대는 미국 알래스카의 키차트나 스파이어 동벽에 유학재 등이 신 루트를 만들며 거벽등반의 영역을 북미대륙까지 확대시킨다. 1994년 경남연맹의 박정헌은 안나푸르나 남벽으로 등정에 성공하면서 8천 미터 자이언트에서의 거벽등반에 희망을 선사했고, 바로 다음 해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성공하면서 한국의 본격적인 히말라야 거벽등반 시대를 이끈다. 1997년 한국산악회의 가셔브룸 4봉 원정대는 서벽 중앙 립에 신 루트를 개척하며 12년만의 등정을 기록한다. 1958년 리카르도 캐신이 이끄는 이탈리아 원정대가 북서릉으로 초등하고, 1986년 그렉 차일드에 의해 재등이 이루어진 후 등정자가 없었던 어렵고 위험한 대상이었다. 이 등반대는 2,500 미터의 서벽 중앙 립에 세 개의 캠프와 두 번의 비박 끝에 유학재 등이 정상에 서면서 한국 거벽등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지난 5월 ‘2005년 한국 낭가파르밧 루팔벽 원정대’(대장 이성원)의 김창호, 이현조 대원은 낭가파르밧 루팔 벽을 메스너 형제가 초등한지 35년만에 재등에 성공했다. 초등 당시에는 둘이 올라가서 한 명만 내려왔지만, 이번에는 둘이 올라가서 두 명 모두 깊은 우정을 간직한 채 살아서 돌아왔다. 히말라야에서의 거벽등반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하고 힘든지는 역사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도 이제 새로운 알피니즘의 시대에 접어든 듯하다. 1970년 루팔 벽 초등 기록인《벌거벗은 산》(이레 출판/2004년/김성진 번역) 마지막에 나오는 메스너의 독백이 새롭다. “그 때보다 좋은 기술과 장비가 줄기차게 나왔고 수많은 도전과 희생을 치뤘는데 아직도 이 루트(루팔 벽)는 재등되지 않았다!”
글/호경필(한국산서회 회원) | |
첫댓글 어라 ..훈아 나도 아는 분이 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분이고 내가 아는 선생님인가...훈아 우리도 자일 걷으러 가자 .누가 걷어 가기전에..내년 가을쯤에 ..19기 ..정예 멤버와 다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