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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치중[宋致中]의 묘지명(墓誌銘)
공의 휘(諱)는 치중(致中)이요 자(字)는 정오(正吾)이며 본은 여산(礪山)이다. 먼 조상 휘 송례(松禮)와 아들 휘 분(玢)은 모두 여조(麗朝)의 시중(侍中)으로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대대로 큰 벼슬을 하였는데, 휘 연손(演孫)에 이르러 한산 군수(韓山郡守) 증(贈) 이조 판서(吏曹判書)로서 문장이 맑고 아름다웠으며, 중종(中宗)의 잠저(潛邸) 때의 사부(師傅)로서 깊은 처우를 받았다. 세 아들을 낳으니, 세구(世球)는 문무재(文武才)가 있어 중종이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에 제수하였고, 세림(世琳)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이조 좌랑(吏曹佐郞)이었으며, 세형(世珩)은 이조 판서(吏曹判書)였다. 선전관이 성균 생원(成均生員) 증 장령(掌令) 담(曇)을 낳았고 장령이 제용 정(濟用正) 여량(汝良)을 낳았으나 후사(後嗣)가 없어 아우 군자 정(軍資正) 여후(汝厚)의 아들 당(儻)을 후사로 삼았는데, 증 병조 참판(兵曹參判)이다. 이상이 공의 3대가 된다. 비(妣) 삼척 진씨(三陟陳氏)는 승사랑(承仕郞) 진영인(陳永仁)의 딸이요, 부덕을 갖추었다. 만력(萬曆)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 2월 18일 태인(泰仁)의 고현리(古縣里)에서 공이 태어나니 문장이 일찍이 이루어졌고 어린 나이에 서울에 유학하여 널리 명성이 알려졌으며,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의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 이때 세상은 혼란스럽고 윤리는 단절되었다. 공은 이상형(李尙馨) 등 두어 사람과 상소하여 폐모(廢母)에 대한 논의를 강력히 배척하였으나 회보가 없었다. 드디어 과거(科擧)를 보지 않기로 하고 동지 6인과 더불어 강산을 방랑하니 이름하여 칠광(七狂)이라 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인조(仁祖)의 반정(反正)이 있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가 금정 찰방(金井察訪), 상서 직장(尙瑞直長), 군자 주부(軍資主簿), 형조 좌랑(刑曹佐郞), 장흥 주부(長興主簿), 호조(戶曹)의 좌랑(佐郞)ㆍ정랑(正郞), 사복 첨정(司僕僉正)을 지냈으며, 외직으로는 연기(燕岐)ㆍ경산(慶山)ㆍ천안(天安) 세 고을을 지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계미년(癸未年, 1643년 인조 21년) 3월 초9일에 졸(卒)하니,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가 증직(贈職)되었고, 태인 고현(古縣) 죽림동(竹林洞)에 돌아가 장사지냈다가 산외면(山外面) 정량동(正良洞) 경좌(庚坐)의 언덕에 이장하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공의 재능과 도량은 높고 발랐고 견식은 크고 멀었다. 향시(鄕試)에서 많은 선비의 수석이었고 일찍이 명경과(明經科)에서 발탁되었으며 정시(庭試)에 올랐으나 고시(考試)의 규격에 어긋난다 하여 내침을 받았다. 조정(朝廷)의 논의는 낭관(郎官)에 오래 침체되어 있음을 애석히 여기며 사헌부 관원이나 감사(監司)가 되기를 바랐으나, 공이 갑자기 졸(卒)한 것이다. 평소에 말과 웃음이 적었고 단정한 벗을 취하였으며 재물을 가벼이 보고 의(義)를 좋아하여 매우 가난한 벗이 있자 전토를 베어 주었다. 일찍이 흉년을 맞아 친한 벗이 이웃 고을의 수령(守令)이 되어 쌀을 보내 구호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를 흩어 이웃에 나누어주고 집에는 남긴 것이 없었으며 종족(宗族)을 돌보아 혼가(婚嫁)를 이루게 하였다. 집안은 본래 넉넉하여 분가를 하게 되어서는 모두 누님에게 미루어 주어 스스로 택하게 하였다. 서제(庶弟)를 어루만져 기르되 엄하면서도 은혜롭게 하였고 토지와 종을 나누어주되 한 탯줄의 아우와 같이 고르게 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의 병이 깊어지자 똥을 맛보아 길흉을 점치었고 앞뒤 부모의 상에 슬퍼함이 예제(禮制)를 지나쳤다. 관직에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별다른 일을 하여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고 청고(淸苦)에 뜻을 두었다. 바르지 않은 빛을 멀리하였고 고을을 이어 맡으면서 조금도 불리지 않았다. 한때의 명사들과 모두 교류하였는데 상국(相國) 이후원(李厚源),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불녕(不佞)의 선조 유하공(柳下公, 최혜길(崔惠吉)), 감사(監司) 심연(沈演), 부제학(副提學) 신천익(愼天翊), 부윤(府尹) 심제(沈), 교리(校理) 이상형(李尙馨)과 가장 친했다. 우재 상공(迂齋相公, 이후원(李厚源))은 늘 공의 재능은 본병(本兵, 병조)의 장이 될 만하다 하였는데, 졸(卒)하자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유하공은 일찍이 공의 장자에게 이르기를, “나와 자네의 어른하고는 같은 시장(試場)에 있으며 그 문장이 신속함을 늘 말하였는데, 마침내는 급제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고 하였다. 당시 호남의 인재를 논함에는 반드시 공을 첫째로 말하였다. 자손을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치되 매우 엄격하였고 후학들을 권장하되 간절하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집안의 재물로 서적을 비치하여 배우러 오는 자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니, 마을이 감화하여 복종하였다. 그리고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집 북쪽에 암천(巖川)의 아름다움이 있어 한가한 날에 곧 시객(詩客)과 더불어 노닐며 잔도 기울이고 시도 읊조리며 농담도 하니, 마치 속세(俗世)를 벗어난 기상이 있는 듯하였다. 처음에 호를 호암(壺巖)이라 하였고 또 그 정자(亭子)에 ‘사가(四可)’라고 이름하였다. 초취(初娶) 평양 조씨(平壤趙氏)의 아버지는 사재 주부(司宰主簿) 조영준(趙英俊)이요, 증조는 사헌 집의(司憲執義) 조광옥(趙光玉)이며 일찍 졸하여 무후하다. 재취(再娶)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아버지는 호조 참의(戶曹參議) 김상복(金尙宓)이요, 외조는 송계(松溪) 이인기(李麟奇)이다. 1녀를 낳아 생원(生員) 이여정(李汝淨)에게 출가하였다. 삼취(三娶)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아버지는 부사용(副司勇) 홍종길(洪宗吉)이요 조부는 개천 군수(价川郡守) 익성군(益城君) 증 호조 참판(戶曹參判) 홍유(洪裕)이다. 부인의 착한 성품과 옳은 행실은 안팎이 아름답다 하였고, 정성으로 선조를 받들고 바르게 몸을 가지며 이웃과 종족(宗族)을 돌봄에 모두 그 환심을 얻었다. 맏딸을 돌봄에 있어 자기 소생과 다름이 없으니, 집안과 이웃에서 칭송하였다. 5남 4녀를 낳았는데, 맏이 이현(以鉉)은 추천되어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효우(孝友)와 덕행(德行)으로 일컬음을 받았다. 다음 이석(以錫)은 처사(處士)요. 끝 이진(以鎭)은 장가 전에 죽었다. 딸 맏이는 참봉(參奉) 이시찬(李時燦)에게, 다음은 학생(學生) 오영석(吳永錫)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이 죽었다. 참봉은 이조 참판(吏曹參判) 유하공(柳下公) 최혜길(崔惠吉)의 딸과 혼인하니 불녕(不佞)의 큰 고모이다. 4남은 문연(文淵)ㆍ성연(聖淵)ㆍ도연(都淵)과 명연(明淵)은 진사(進士)로 지금은 사헌 감찰(司憲監察)이며, 2녀는 김명삼(金命三)ㆍ곽명적(郭明績)이요, 2남 1녀는 일찍 죽었다. 처사는 판교(判校) 홍남립(洪南立)의 딸과 혼인하여 2남을 낳아 유연(有淵)이고 다음은 일찍이 죽었으며, 3녀는 이하귀(李夏龜)ㆍ생원(生員) 김지광(金知光)ㆍ이수규(李洙規)이다. 이여정 3남은 이안헌(李顔憲)ㆍ이증헌(李曾憲)ㆍ이민헌(李閔憲)은 무선전관(武宣傳官)이요, 3녀는 생원 최재옹(崔載翁) 최의주(崔懿柱)ㆍ진사 김재백(金載白)이다. 이시찬 1남은 이동징(李東徵)이요, 2녀는 현감(縣監) 송세정(宋世鼎)ㆍ황윤정(黃允貞)이다. 오영석 3남은 오대림(吳大臨)ㆍ오대관(吳大寬)ㆍ생원 오대이(吳大頤)요, 딸은 이영존(李永存)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기록치 않는다. 고향 선비들이 그 덕의(德義)를 숭상하여 고향 사우(社宇)에 배향(配享)시키려고 두 번씩이나 통문(通文)을 발송하였으나, 참봉공(參奉公)이 공의 뜻이 아니라 하여 강력히 저지하였다. 불녕(不佞)이 늦게 태어나 공의 풍모(風貌)를 미처 뵙지는 못하였으나 연가(連家)인 관계로 하여 존경한 지 오래였는데, 전중군(殿中君, 전중은 사헌부 감찰로, 송명연을 지칭함)이 찾아와 묘지(墓誌)를 청하였다. 삼가 그 대략을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전(傳)에 이르기를, ‘그 사람을 모르면 그 벗을 보라’고 하였는데, 우재(迂齋)와 유하(柳下)는 곧 공의 친한 벗이었으니, 곧 공의 몸가짐을 대략 알 만하고, 그 확실하고 굳센 자질에 깊고 넓은 학식을 알 수 있네. 이른바 작게 알고 크게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공은 영예롭고 중요한 직책에 있게 될 것이라 하였는데, 공은 주군(州郡)에서 부침(浮沈)하자 진취(進取)할 생각을 접었네. 벼슬은 그 덕에 차지 않았고, 나이 또한 수(壽)에는 오르지 못하였네. 나는 들었네. 잠깐 굽힌 자는 오랜 동안 펴나가고, 몸에 인색한 경우는 후손에게 넉넉함이 있다고……. 아들은 모두가 선사(善士)요, 손자들에 뛰어난 수재(秀才)가 많다네. 조짐의 흐름 반드시 빛이 있고, 인하여 쌓이는 것 대체로 두텁다네. 나 그 묘에 지명(誌銘)을 쓰노니, 아마도 전함에 끊임이 없으리.
司僕僉正宋公墓誌銘
公諱致中。字正吾。系礪山。遠祖諱松禮。子諱玢。俱麗朝侍中。封府院君。世有冠冕。至諱演孫。韓山郡守。贈吏曹判書。文章淸麗。以中廟潛邸師傅。深被眷遇。生三子。世球有文武才。中廟特授宣傳官。世琳魁文科。吏曹佐郞。世珩吏曹判書。宣傳生成均生員贈掌令曇。是生濟用正汝良。無嗣。取弟軍資正汝厚子儻爲後。贈兵曹參判。是爲公三世。妣三陟陳氏。承仕郞永仁女。婦德純備。以萬曆辛卯二月十八日。生公于泰仁古縣里。詞藻夙成。童年遊京師。聲譽蔚然。中壬子司馬。時世道昏亂。人紀斁絶。公與李尙馨等數人陳疏。痛斥廢母之論。不報。遂廢擧。約同志六人。放浪湖山。號七狂。癸亥仁廟改玉。始筮仕。歷官金井察訪,尙瑞直長,軍資主簿,刑曹佐郞,長興主簿,戶曹佐郞,正郞,司僕僉正。外則燕岐,慶山,天安三邑。俱有聲績。癸未三月初九日終。贈承政院左承旨。歸葬于泰仁古縣竹林洞。後改葬山外面正良洞坐庚原。從先兆也。公器局峻正。識度弘遠。鄕解輒冠多士。嘗一擢明經。一登庭試。以違試格見黜。朝議惜其久屈郞潛。擬處以南臺按廉。而公遽歿矣。平居簡言笑。取友必端。輕財好義。有友人家甚貧。割給土田。嘗値年凶。親友作倅隣邑。送米周急。公散賑隣里。家無所餘。周恤宗族。俾成婚嫁。家故饒財。當析箸。悉推與姊氏。任自擇。撫養庶弟。嚴而惠。給田僮。與同胞均。母夫人疾谻。嘗糞以驗吉凶。前後丁憂。哀毀過制。當官涖職。不爲詭激崖異事。以求知於人。厲志淸苦。遠不正之色。歷典郡邑。不長尺寸。交遊盡一時名勝。李相國厚源,尹海嵩新之。不佞先祖柳下公,沈監司演,愼副學天翊,沈府尹,李校理尙馨最相善。迂齋相公每稱公才可長本兵。及歿。痛惜不已。柳下公嘗語公長胤曰。吾與而翁。同在場屋。每歎其詞翰神速而竟不第。豈非命耶。當時論湖南人材。必以公爲稱首。敎子孫義方甚嚴。奬進後學。諄諄不倦。又以家財備書籍。以惠承學。鄕黨化服。雅愛山水。舍北有巖川之勝。暇日輒與韻士逍遙。觴詠劇談。蕭然有出塵之想。始號壺巖。又以四可名其亭。初娶平壤趙氏。考司宰主簿英俊。曾祖司憲執義光玉。早歿無後。再娶安東金氏。考戶曹參議尙宓。外祖松溪李麟奇。生一女。適生員李汝淨。三娶南陽洪氏。考副司勇宗吉。祖价川郡守益城君贈戶曹參判裕。夫人至性懿行。內外純美。奉先以誠。持身以正。恤隣周族。咸得其歡心。撫視長女。無間已出。宗䣊稱之。生五男四女。長以鉉薦授禧陵參奉。棄官歸。以孝友德行稱。次以錫處士。季以鎭未冠歿。女長適參奉李時燦。次適學生吳永錫。餘皆夭。寢郞娶吏曹參判柳下公惠吉女。於不佞伯姑。四男文淵,聖淵,道淵,明淵進士。今爲司憲監察。二女金命三,郭明績。二男一女夭。處士娶判校洪南立女。二男有淵。次夭。三女李夏龜,生員金知光,李洙規。李汝淨三男。顏憲,曾憲,閔憲武宣傳。三女生員崔載翁,崔懿柱,進士金載白。李時燦一男東徵。二女縣監宋世鼎,黃允貞。吳永錫三男。大臨,大寬,生員大頤。女李永存。曾玄以下不備錄。鄕士追尙德義。欲俎豆鄕社。至再發通文。寢郞公以非公雅意。力止之。不佞生晩。未及望公風範。而以連家之故。欽悅蓋久。殿中君來請幽誌。謹敍其略而銘之。銘曰。
傳曰不知其人。視其友。迂齋柳下。是公執友。則公之所存。槩可識。有觀其確毅之資。淵博之識。所謂不可小知而可大受。謂將處公以顯重之位。公則浮沈州郡。絶意於進取。爵未滿其德。年又不躋於壽耇。吾聞詘於頃者信於久。嗇於身者贏於後。子皆善士。孫多穎秀。徵流之必光。由積之蓋厚。我銘其藏。庶幾垂諸不朽。장달수
송치중(宋致中)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정오(正吾), 호는 칠광(七狂). 아버지는 송상(宋償)이며, 어머니는 승사랑(承仕郎) 진영인(陳永仁)의 딸이다. 태인(泰仁)의 고현리(古縣里)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문장을 짓는 재능이 숙성하였으며 경사(京師: 서울)에 유학하여 명성을 떨쳤다. 1612년(광해군 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 때 세도(世道)가 혼란하고 정치적인 기강이 문란해졌으므로 이상형(李尙馨) 등과 더불어 폐모론을 반대하는 극렬한 소를 올렸다. 이 때문에 벼슬길이 막히게 되어 동지 6인과 더불어 호산(湖山)을 유랑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이르러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금정찰방(金井察訪)·상서직장(尙瑞直長)·군자시주부(軍資寺主簿)·형조좌랑·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호조좌랑·호조정랑·사복첨정(司僕僉正)을 거쳤다.
지방관으로서는 연기·경산·천안 세 읍을 거치면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성적(聲績)이 있었다. 관직에 나가서는 특이한 일을 하여 이름을 떨치려고 하지 않았으며, 의지를 굳게 하고 청렴하여 부정한 사람을 멀리하였다.
사람됨이 바르고 학문도 깊었으므로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대의 명인들이었는데, 특히 이후원(李厚源)·윤신지(尹愼之)·심연(沈演)·신천익(愼天翊)·심제(沈癠)·이상형(李尙馨)과 친하였다.
당시 호남의 인재를 칭할 때는 송치중을 으뜸으로 하였다. 산수를 좋아하여 휴일에는 운사(韻士)와 더불어 소요하였다. 이 때 호를 호암(壺巖)이라 하였으며, 정(亭)을 사가(四可)라고 이름지었다.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석정(崔錫鼎)
본관 전주(全州). 자 여시(汝時) ·여화(汝和). 호 존와(存窩) ·명곡(明谷). 시호 문정(文貞). 초명 석만(錫萬). 최명길(崔鳴吉)의 손자.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의 문인. 1671년(현종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친 뒤에 이조참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이조판서를 지냈다.
1697년(숙종 23) 우의정에, 1699년 좌의정과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을 겸직,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속편과 《여지승람(輿地勝覽)》 증보 ·편찬을 지도했다. 1701년(숙종 27) 영의정으로 장희빈(張禧嬪)의 처형을 반대하다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소론(少論)의 영수로 많은 파란을 겪으면서도 8번이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시 배척받던 양명학(陽明學)을 발전시켰다.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경세정운도설(經世正韻圖說)》 《명곡집 (明谷集)》이 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