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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회 국민강좌] '巫俗에 살아있는 우리 上古史'
- 舞天문화연구소장 조성제님 -
삼신종교
삼신할머니는 창조의 신
태백진교의 모체가 된 종교가 있었다면 그 종교는 <삼신종교>가 아닐까 한다. 삼신종교는 바로 우리 민족이 지금도 믿고 있는 <삼신신앙三神信仰>이 있다. 우리 민족은 삼신이 생명을 점지해야만 아기가 탄생된다고 굳게 믿어온 것은 삼신은 바로 창조의 신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이렇게 삼신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 바로‘삼신신앙’이며, 민족의 종교인 것이다. 삼신은 부도지에서는 마고와 두 딸인 궁희와 소희라고 하였다. 또 한인·한웅· 단군을 삼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천지인을,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원방각(圓方角)을 삼신이라고 한다.
또한 하늘의 직녀성을 삼신이라고도 하는데 직녀성 세별을 마고본성, 실한성, 허튼성이라고 하였다. 이들 세 성을 소리로 본다면 마고본성은 본소리(本音), 실한성은 실한소리(實音), 허튼성은 허튼소리(虛性)가 된다. 삼신산을 다른 말로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라고 한다. 삼신할머니를 다른 말로 삼신상제(三神上帝)·삼신제왕(三神帝王)·삼신제석(三神帝釋)으로 부르며 삼신신앙(三神信仰)이 탄생되었다. 다만 삼신신앙이 종교라는 기록은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면 종교가 되는 것이다.
삼신신앙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삼신할머니’ ‘마고삼신’ ‘삼신산’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등이 있다. 하늘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직녀성이다. 이 직녀성은 ‘마고麻姑’ ‘궁희穹姬’ ‘소희巢姬’를 나타내며 이것을 삼신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북두칠성, 해, 달을 삼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삼신은 마고, 봉래, 영주라 부르기도 한다.
삼신종교는 오랜 세월 거치면서 이론적 토대를 구축해 나갔다. 이론적인 근거가 되는 <일석삼극>의 원리가 보편적인 진리로 자리 매김하였고, 여기에 <음양조화론>이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삼태극 사상이 완성되었다. 삼신은 천부경의 일섬삼극(一析三極)으로 표현되었으며, 천일·지일·인일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있어 삼신은 삼진(三眞)과 삼망(三妄)으로 구분한다.
삼신종교를 근거로 도 · 불 · 유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한웅천황에 의하여 <태백진교>로 확립되어 가르쳤다. 삼신사상에 있어 삼진인 선청후(善淸厚)를 망치는 삼망인 악탁박(惡濁薄)이 들오는 길은 삼도(三途)인 감(感)·식(息)·촉(觸)이다.
삼진이 머무는 집인 삼가(三家)는 심(心)·기(氣)·신(身)이며,
삼진을 지키는 세 개의 관문은 성(性)·명(命)·정(精)이 된다.
이렇게 삼진을 지키기 위하여 생긴 것이 바로 유·불·선이며, 삼교일체 사상이 성립된다.
感 (止感) 心 (明心) 性 (覺性) | 觸 (禁觸) 身 (修身) 精 (精誠) | 息 (調息) 氣 (養氣) 命 (長命) |
불 교 | 유 교 | 도 교 |
즉 모든 느낌을 끊어 버리고(止感) 마음을 맑게 하여(明心) 본래의 성품을 깨달아(覺性) 성불을 추구하는 사상은 불교라는 옷을 입었다. 또 모든 육체적 감각(관능적인 욕구)을 극복하여(禁觸) 행실을 닦고(修身) 정기(정력)를 성실하게 함으로써(精誠) 성인군자를 추구하는 사상이 유교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게 쉬고(調息), 원기를 길러(養氣), 불로장수(長命)하는 신선을 추구하는 사상이 도교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불교에서도 3이라는 개념이 중심사상이 되어 회삼귀일(會三歸一) 또는 개삼현일(開三顯一)을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원효스님은 난마처럼 얽힌 불교 속의 삼(三)이라는 개념을 삼회일귀(三會一歸)라 풀이하였다.
또 삼신(三身)이라 하여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하고 있으며. 관세음보살은 33가지의 모습으로 몸에 나타내어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그리고 오래된 사찰을 가서 대웅전 팔작지붕 양 옆 밑을 보면 큰 원 속에 작은 원이 3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바로 삼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필자는 큰 원은 우주로 보고 적은 원은 즉, 천일의 마고, 태일의 궁희, 지일의 소희로 보아 삼신의 신성성을 의미한다고 보며, 우주에서 최초로 삼신이 창조를 시작하였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해석하고 싶다.
유교의 성리학에서도 삼극지의(三極之義)라고 하여 삼의 사상을 풀이하였다.
그리고 불로장생으로 신선을 추구하는 도교에서도 『태청(太淸)의 세계에 구선(九仙)이 있고, 상청(上淸)의 세계에 구진(九眞)이 있으며, 옥청(玉淸)의 세계에 구성(九聖)이 있어, 모두 27위(位)라 하였으며, 선(仙)을 상선(上仙)· 고선(高仙)· 대선(大仙)· 현선(玄仙)· 천선(天仙)· 진선(眞仙)· 신선(神仙)· 영선(靈仙)· 지화(至化)의 9계급으로 나누었다.』라는 기록을 《운급칠첨(雲?七籤)》의 권3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에서도 성부와 성자과 성신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삼신사상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기본이념과 사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백진교
한웅천왕시대에 와서 비로소 종교의 이름이 나왔다. 그 이름이 <태백진교>였다.
태백진교는 천부에 근원을 두고 지전地轉(자전)을 합쳐 인사人事(사람이 하는 일)가 우주의 섭리에 맞도록 하는 것이다. 라는 기록이 <한단고기/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247쪽>에 나온다.
소도경전본훈은 태백진교가 우주의 섭리에 근거를 둔 종교임을 밝히고 있다. 한인천제는 천부삼인을 한웅천왕에게 주어 백성을 가르치게 하되, 가르침의 근원을 천부에 두도록 하였다. 이는 인간의 우주의 섭리에 순응하도록 가르쳤다는 말이다. 이 가르침이 太白眞訓태백진훈(필자 주,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이라고 한다.
태백진훈은 우리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치는 교훈으로 우리의 정체성은 바로 천부에 있다고 하였다. 곧 북두칠성과 해와 달에 있다는 것이다. 일석삼극一析三極이라는 우주의 원리에서 태백진교가 나온다. 우주에 3이라는 우주만물이 생성하고 운행하는 이치가 있다. 이 이치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종교가 나온다. <태백>은 한웅천왕이 나라를 세운 때 주산으로 삼은 산 이름이다. 또한 그 아래 神市를 만들어 그 곳에서 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침을 주어 깨달게 했던 것이 바로 <진교>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웅천왕의 <태백진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시원종교라고 할 수 있는 대배달민족의 시원종교는 <태백진교>보다 더 오래된 어떤 종교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웅천왕의 태백진교의 진훈은 단군왕검시대로 넘어가서 덕교德敎라는 이름으로 백성을 교화 화였다.
단군의 가르침 덕교
일석삼극의 원리를 신화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 태백진교는 일석삼극의 원리가 운삼사성환運三四成環의 원리로 발전하면서 덕교를 잉태한다. 3 이라는 수가 우주라는 구체球體를 운행하면서 4 라는 수로 발전하는데, 덕교는 우주의 균형을 잡아주는 4 라는 수를 신학적인 체계로 가지고 있다. 우주를 3 이라는 수와 4 라는 수가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친 분이 단군왕검이었다.
그는 우주에 충만한 4 라는 수에서 덕교를 완성하였다. 덕교는 우주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자는 격조 높은 사상을 담고 있다. 3 이라는 수가 운행하면서 도달하는 4 라는 수는 우주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원리를 생산한다. 이 원형이정의 원리에서 사계절이 나온다. 사계절의 자연스러운 병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에 순응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우주의 모든 것은 네 과정의 순환을 거친다. 잉태와 탄생과 성장과 멈춤이 있다. 유년과 청년과 장년과 노년이 있듯이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다. 동서남북이 있으며, 상하좌우가 있다. 이 모두가 자연의 순리를 말하고 있다.
단군왕검은 이를 덕교에 수용하였다. 덕교로 세상을 교화하였다. 덕교는 공격성을 가지지 않았고, 사술성도 가지지 않았다. 덕교의 경전으로 태백진교로부터 이어 받은 천부경과 삼일신고. 그리고 고려 때 만들어진 참전계경에는 경전이 갖추어야 할 순수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 덕교의 문화가 우리 민족의 떡문화로 발전하였다.
혈구에 꽂은 모기?旗
한인천제 시대에 소도라는 것이 있었다. 소도는 특정지역을 성역화 한 것이다. 소도의 정상에는 반드시 모 라는 깃발을 세웠다. 이 깃발은 하나님이 계신 신성한 곳이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며 신성시 한다.
丘非人爲之曰丘 丘前高後下? (구비인위지왈구 구전고후하모) <康熙字典>
사람을 위하여 만들지 않는 언덕이 구이다. 구는 앞이 높고 뒤를 낮은 곳으로 모를 꽂는다.
소도에 모를 꽂는 것은 소도가 나라의 중심이 되는 땅이라는 뜻이다.
한웅천왕의 청구라는 곳은 바로 소도가 있는 나라의 중심이라는 말이다.
청구에 세웠던 깃발이 모였고 모는 다른 말로 당幢이라고 하는 기다란 깃발을 말한다. 이것이 사찰의 당간지주가 되었다.
土地高者曰丘 因高以事天 故於地上 (토지고자왈구 인고이사천 고어지상) <강희자전>
땅이 높은 곳을 구라고 한다. 높으므로 하늘을 섬기는 일을 한다. 고로 땅위에 세운다.
이 말은 청구의 높은 언덕에서 하늘의 제를 지낸다는 말이다. 이를 줄여서 말하면 구사천이 된다. 하늘에 제사 지낸다는 말이다. 이는 곧 굿의 어원이 된다. 그러면 청구의 높은 언덕 에서 굿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丘因以下事地 故於澤中 (구인이하사지 고어택중)<강희자전>
구가 낮은 곳에서는 땅을 섬기는 일을 한다. 고로 못의 가운데에서 한다.
언덕의 높은 곳에서는 하늘의 제사를 지내고, 구가 낮은 곳에서는 땅에 제사를 지내며 못 가운데에서 하는 것이다. 강화도 마니산이 바로 땅에 제사 지내는 구의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丘事天과 九事地란 말이 나오고 이 말이 바로 굿의 어원이 아닌가 한다. 구에서 모라는 깃발을 꽂고 굿을 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 언제 굿을 하였을까? 강희자전에 기록을 보면
前高後下曰 ?丘 星名昴七星僞?頭 (전고후하왈 모구 성명묘칠성위모두)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곳이 바로 모기를 꽂는 언덕이라 한다. 별이름이 묘수인 칠성이 모기의 머리가 된다.
모기의 생김새와 모기를 꽂는 곳에 대한 기록이다. 모구에 모기를 꽂은 이유는 지금으로 부터 BC4400년에서 BC 2000년 사이에 묘수와 태양이 일치할 때가 춘분이었다. 이때가 바로 한웅천왕이 세운 신시의 배달나라를 거쳐서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이 중원을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이때 모구에 춘분을 상징하는 모기를 꽂고 춘분마지 굿을 하였다.
<모>는 천제를 지낼 때 <쇠꼬리>를 바쳐서 천제를 지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굿을 할 때는 반드시 춤을 추어야 한다. <예>의 舞天에서 이를 증명하고 있다.
무교의 정신 生生之生과 相生
굿의 기원
무교는 우리 할머니들의 생활의 지혜요, 삶 그 자체였으며 오랜 세월 우리들과 함께 하면서 우리 민족 심성의 원형이라 생각한다. 굿이란 말은 얼마나 좋은 말인지 영어에 좋다는 뜻인 굿(Good)이 있고 신을 말하는 갓(God)도 굿에서 나왔다.
화해동참(和解同參)과 해원상생(解寃相生)
굿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 굿의 기원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문헌으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종교적 제의로는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전하는 예맥의 무천(舞天),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마한의 소도(蘇塗)라는 제사의식이다. 이러한 제천의식들이 굿의 원형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들을 종합하면 소도라는 신성한 곳에서 동쪽을 향하여 재물을 바치고 북을 치며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서 뜨는 해와 달을 맞이하는 굿이라고 해석할 수가 있다. 이것이 오늘날 굿의 기원이며 지금도 무당들이 행하고 있는 일월맞이 굿이다.
무당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제2대 남해왕 조를 보면 남해왕은 차차웅으로 불렸는데, 이 말은 무당을 나타내는 말이라 한다. 남해왕은 시조의 묘를 세워 친누이동생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들은 굿의 기원을 밝히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강희자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牛尾 舞者所持以指麾 모모우미 무자소지이지휘
모는 희고 털이 긴 소의 꼬리이다. 춤을 추는 자가 쥐고서 흔든다.
이 기록은 제천의식에서 흰 쇠꼬리를 쥐고서 흔들면서 춤을 추었다고 볼 수가 있다. 우리 속담에 「쇠꼬리 쥔 놈이 임자」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그 당시 쇠꼬리를 쥔 사람이 임금이라는 말일 것이다. 지금도 무당들이 굿을 할 때 부채 끝에 긴 천을 달아 그것을 쥐고서 춤을 춘다. 이러한 행위도 흰 쇠꼬리를 쥐고서 춤추던 그 때의 풍속이 아닌가 한다.
무당내력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가람문고본에 조선시대 무당에 대한 기록을 한 <무당내력巫黨來歷>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을 보면, 『상원 갑자 10월 3일 신인이 태백산을 내려오시어 신의 가르침을 설하고 백성을 가르쳤다. 큰아들 부루가 어질고 다복하여 집집마다 땅을 택하여 단을 쌓고 질그릇에 벼와 곡식을 채워 짚으로 영을 짜서 덮는다. 이를 부루단지 혹은 업주가리라고 하였다. 매년 시월 햇곡식으로 채우며 떡과 과일과 술을 바쳐 기도를 한다. 기도할 때는 반드시 나이든 여인이 한다. 이를 무당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검토하여 보면 무당이라는 공식적인 말이 부루단군이 죽고 태자 가륵이 즉위하면서 백성들 사이에 일어났던 부루단군을 추모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부루단군을 추모하는 과정에서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 영적인 힘이 생기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무당이 현재까지 이어온 무당이다.
<삼한관경> 본기 제4편을 보면 “한웅천왕이 제사를 지내려 갈 때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우사는 북을 치며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풍백이 천부의 거울을 들고 앞서갔다는 것은 지금 무당들이 지니고 있는 명두明斗나 동경으로 해석이 되며, 우사가 북을 치며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는 것은 하늘의 신을 맞이하러 가는 사람, 즉 무당의 보조자라고 할 수 있다. 북을 치면서 주위를 돈다는 것은 지금 국악이나 풍물에서 여러 명이 북을 치며 원을 그리며 도는 소고춤 등으로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무巫란 낱말을 풀이해 보면 무는 공工자에서 비롯되었다. 단군시대에 공공共工이라는 벼슬이 있었다. 공工은 일을 업으로 삼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 즉 ‘숙달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공공共工은 하늘에 제를 지내고 하늘의 뜻을 전하는 일을 맡아 하는, 즉 단군의 일을 맡아서 잘 처리할 사람이란 뜻이다. 이 말을 증명하는 기록이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있다. 巫는 ‘신명을 다해 춤추는 사람으로, 춤으로 신을 접하므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공工자의 양쪽에 두 사람이 춤을 추는 형상을 취한 글자다.’라고 하였다.
초어楚語에는 「신명강지재 남왈격여왈무 神明降之在 男曰覡女曰巫」 란 기록이 있다.
이 공工 자에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이 무巫 자이다. 공工 자에 들어간 두 사람은 즉 단군왕검을 대신하여 하늘과 땅에 제를 올리는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던 남녀 두 사람을 말한다. 신라 방언에 무당을 차차웅次次雄이라 하는데 차차웅이 제사를 숭상하고 신을 섬김으로써 그를 경외하여 불렀다고 한다. 차차웅을 무당이라고 하는 것은 신시 한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약 155년 뒤 이차돈의 순교 후 23대 법흥왕(514~540) 때 비로소 불교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법흥왕 이전의 왕은 제사장으로서 상징적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지증마립간麻立干등의 호칭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머리에 썼던 모자가 바로 신라 금관이다. 또한 금관을 장식하고 있는 출자모양의 기둥을 비롯하여 곡옥과 해와 달 그리고 별을 의미하는 명두 등 모두가 제사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산해경/해외남경>을 보면 무함국巫咸國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무함국이 여축의 북쪽에 있다. 무당들이 오른손에는 푸름 뱀을 왼손에는 붉은 뱀을 쥐고 등보산에 있는데 이 산은 여러 무당들이 하늘로 오르내리는 곳이다.』
무함이란 무당은 황제黃帝 또는 요堯 시대의 무당이라고 하며, 무함을 중심으로 무당들이 세운 국가가 바로 무함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등보산은 천계天界와 지상地上을 연결하는 곳이므로 영산靈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무함이 또한 최초의 신의神였다고 한다. 또 <대황남경>과 <해내남경>에도 무당들이 제사장의 개념보다 신의神醫로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희남자 설산훈>을 보면 「醫師在女曰巫 의사재여왈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바로 무녀가 바로 의사라는 말이다.
지금도 병원이나 의사라는 뜻의 ‘의’(醫)자를 무당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 혜민서 근무> 그리고 지금 흔히 말하는 무당巫堂은 개인을 나타내는 말로서, 무당이라는 당堂자 역시 토지신을 지키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보통 글자가 아니다. 우리는 아무에게나 당호堂號를 부치지 않는다.
무교에서 사용하는 명두의 의미
<삼환관경본기>를 보면 「한웅천왕이 천제를 드리기 위하여 산에 행차할 때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우사는 북을 치면서 돌아가며 춤을 추며, 운사는 백검으로 호위하였으니 」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풍백이 천부를 새긴 거울을 들고 앞서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천부를 새긴 거울을 앞장세운 것은 바로 하늘의 대리자인 천제天帝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아울러 절대권력을 나타내는 상징이라는 것을 거울이 말해준다고 하겠다.
그러면 명두는 해와 달과 그리고 북두칠성의 빛을 명두로 받아들여 만신들에게 천지의 정기와 교감을 할 수 있게 하여주는 안테나 역할을 하게 된다. 아울러 신령들의 몸체가 되기도 하며, 사제자의 표시나 왕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또 만신들이 신령과의 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통신수단이기도 하다. 명두는 절대권력의 상징으로써 명두에 햇빛이 반사되어 빛을 발할 때의 눈부심은 감히 누구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이런 현상은 곧바로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자로서의 위력을 발휘하는 절대신의 상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밤에 비치는 달의 빛과 북두칠성의 빛을 받은 명두의 빛은 자비로움과 은은함, 그리고 포근함을 함께 느낄 수 있어 절대 신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신의 신비스러움을 더해주게 하는 것이 바로 명두이기도 하다.
즉 명두에 해와 달과 북두칠성이 비추면 그것은 바로 명두 자체가 우주가 되는 것으로 명두를 거는 순간 거대한 우주는 명두로 옮겨지고 무당들이 신당에 앉아 기도를 할 때도 그 명두를 통하여 우주의 파장 즉 기氣와 통신을 하고 더 나아가 우주를 가슴에 안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명두明斗는 한자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명두에는 반드시 해와 달, 그리고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어야 하며, 이것들을 천부삼인이라고도 한다.
무당들은 일월명두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무당이 되기 위하여 신을 받는 내림굿을 할 때 일월대日月擡 제일 위에 매달린 일월명두를 통하여 신을 받아 드리고 신과 처음으로 교감했기 때문이다.
일월대는 소나무를 많이 사용하는데 반드시 동쪽으로 뻗은 솔가지를 꺾어다가 사용한다. 솔가지 형체는 몸체와 양팔 그리고 머리 부분을 구분할 수 있는 즉 사람 형상을 닮은 사람의 키보다 조금 큰 것을 선택하여 자른다.
그리고 솔가지에다 홍색치마와 노랑저고리 입히고 겉옷으로 남쾌자를 입힌다. 때에 따라 도포를 입히기도 하는데 신목에 옷을 입히는 사례는 지금도 강릉단오굿에 남아 있다. 이런 풍습은 한웅천왕 때 소도에 웅상을 세워 옷을 입힌대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남쪽지방에선 소나무외에 대나무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소나무와 대나무는 부정한 액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무당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무당의 고깔이 가지는 의미
부도지 제 25장에는「백소씨와 흑소씨의 후예가 오히려 소(巢)를 만드는 풍속을 잊지 아니하고, 고탑(高塔)과 층대(層臺)를 많이 만들었다.」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소(巢)는 바로 천부(天符)의 본음 즉 하늘의 소리를 듣기 위하여, 조금이라도 하늘로 가까이 가기 위한 수단으로 고탑(高塔)과 층대(層臺)를 세우는 것을 소(巢)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소를 세운 증거가 몇 년 전 독일 학자 <하우스 돌프>에 의해 발견된 북중국 내몽골의 피라미드이다. 무당들이 무심코 머리에 서고 굿을 하는 고깔이 바로 부도지의 소(巢)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피라미드이다.
무당은 삼신이 살던 성 즉 마고성(麻姑城)의 소에서 유래된 피라미드를 머리에 서고 굿을 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천부의 본음을 바로 듣고 많은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하여 피라미드와 같은 역할과 의미를 지닌 고깔을 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금 불교에서 세우는 탑 역시 탑을 통하여 전해오는 천부의 소리를 가까이서 잘 듣고 인간의 본성을 찾자는 의미로 삼신할머니의 마고성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교회의 지붕이 역시 소(巢)에서 비롯된 고탑과 층대의 변형된 형태로, 천부의 본음이 뾰쪽 지붕을 통하여 전해오는 것이라 믿고, 교회의 지붕을 뾰쪽하게 만들었지 않나 생각한다.
개신교 역시 천부 본음의 뜻이 뭔지를 잘못 깨우치고 하늘의 뜻과는 다르게 인간이 만들어 논 교리에 묶여 타종교를 배척하고, 이(異) 민족에 대한 침략의 수단으로, 타민족의 정신을 동화시키는 사상 주입서로 탈바꿈하여 온갖 약탈을 일삼고 있으며, 한국의 개신교 목회자들 역시 태양이 자기에게만 비추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논리에 맞지 않는 어거지를 부리며 온갖 비리를 자행하는 모습을 보면 또 하나의 이도(異道)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부정을 쳐낼 때 던지는 콩
콩은 인간이 최초로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천신(薦神)한 음식이라 생각한다. 그 예로 콩두(豆)의 모양이 제사 드릴 때 사용하는 제기의 모양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백태(白太), 청태(靑太), 서모태(鼠眸太), 유월태(六月太) 등 콩을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면서 ‘태’자를 붙이고 있다.
본디 ‘태’자는 크다는 뜻 이전에 태시(太始), 태초(太初), 태고(太古) 등에서 처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가장 먼저 농사를 지은 곡물도 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최초로 바친 음식이 콩이라는 뜻이 있다.
교도소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두부를 먹이는 풍습이 있다. 콩은 태초에 하늘에 바친 성스러운 음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드시는 음식이기 때문에, 모든 부정한 것을 스스로 소멸시키는 힘이 있다고 믿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무교에서는 금기사항을 어기면 부정이 든다고 한다.
부정을 쳐 낼 때 사용하는 것
소멸할 때 사용하는 인간들의 생로병사에는 반드시 따라오는 부정이 있다. 흙을 다루어도, 돌을 다루어도, 나무를 다루어도 부정을 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부정을 탔을 때 무당들은 부정을 쳐 낸다고 한다. 부정은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고 쫓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굿을 하거나 부정을 쳐낼 때 사용하는 것으로 부정을 쳐 내는 가장 원초적인 도구는 물이다. 부도지 기록에 따르면 마고삼신이 더러워진 마고대성을 천수로 청소를 하였다. 이때 천수 즉, 물로 부정을 씻어낸 행위를 황해도 굿에서는 ‘천수치기’라고 하여 물로 부정을 씻어내고 주변을 정화 시킨다. 마고삼신이 마고대성을 청소하던 그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콩과 두부, 팥 그리고 미나리와 북어, 황토흙, 소금이 있다. 콩과 두부를 사용하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하였다. 팥을 이용하는 것은 팥의 붉은 색이 벽사의 의미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북어는 곤이라는 이름에서 나오는 북극의 가장 큰 물고기라는 의미와 곤이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으로 부정을 쳐 내는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神市와 축제
신시(神市)와 부도(符都)는 나라의 중심지인 서울을 나타내는 말이다. 부도는 나라의 중심에 하늘에 제를 지내는 천제단을 세웠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 선생이 쓴 부도지(符都誌) 제 14장을 보면 「 이에 황궁씨의 후예 6만이 이주하여 지키고, 곧 나무를 베어 뗏목 8만을 만들어서, 신부(信符)를 새겨, 천지(天池)의 물에 흘러 보내, 사해의 제족을 초청하였다. 제족이 그 신부가 새겨진 뗏목을 얻어서 보고, 차례로 모여들어, 박달나무 숲에 신시를 크게 열고, 수계정심(修?淨心)하여, 천상(天象)을 살핀 후, 마고의 계보(系譜)를 닦아 그 족속을 밝히고, 천부의 음에 준하여 그 어문을 정리 하였다. 또 북진(北辰)과 칠요(七耀)의 위치를 정하여 반석(盤石)의 위에서 속죄의 희생물을 구해 전(奠)을 올리고... 」란 기록을 보면 신시를 열었다는 것과 그 목적을 알 수 있다.
神市, 朝市, 海市
신시를 여는 목적은 그 당시에 제족들이 너무나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지나다 보면 사투리가 생기듯이 언어가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지고 생활풍속이 달라지고, 그러다 보면 마고의 계보를 잊어버리고, 수계정심(??)하는 자세도 잊어버릴 것 같아 10년에 한 번씩 모여 삼신의 뜻을 기리고, 하늘에 제를 지내면서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성을 회복하고 달라진 언어와, 문화를 바로 잡을 목적으로 신시를 열었다고 볼 수가 있다.
축제(祝祭)는 어느 나라든 간에 다 화려화게 펼쳐지고 있으며 축제가 있는 곳에는 난장이 펼쳐져 외관상으로는 신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신시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제의의 개념이 있다는 것이 외국의 축제와 우리의 축제가 다른 점이다.이 신시를 재현하는 축제의 한가운데 우뚝 자리 잡고 있는 제사장이 바로 무당인 것이다. 무당은 신시의 주체이자 삼신의 대리자였다.
우리를 비롯한 동이족 축제에는 반드시 무당이 등장하여 하늘에 제례를 올리는 형태로 시작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난장이 펼쳐져 시장의 형태가 되므로 신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이때 각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어 제사를 준비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 바로 대감으로 굿의 대감거리라고 할 수 있다.
칠성신
칠성신은 우리 민족이 존재하면서부터 삼신신앙과 더불어 믿어온 신이다. 무교는 굿거리 중에서 칠성굿을 가장 큰 거리로 치고 있으며, 칠성신 또한 반드시 모시고 있다. 그러나 우리 고유의 신 칠성신도 불교의 신으로 변한지가 오래 되었다.
또 칠성을 우물 정(井)으로 표시를 하기에, 우리의 우물들은 둥근형보다는 정(井)자 형태의 우물이 많다. 우물 정(井)은 곧 사정(四政)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칠성신께 많은 공을 들였다. 인간의 생명은 삼신께서 주시지만 인간들의 수명장수와 길흉화복은 칠성신이 관장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무교에서는 제일 큰 신으로 받들며, 불교에도 각 사찰마다 칠성각을 세우게 되었다.
북두칠성은 항상 동북 간방(艮方)에서 떠서 서남 곤방(坤方)으로 진다. 이 방위를 귀방(鬼方), 즉 귀신의 방위라고 한다. 북두칠성은 이렇게 귀신의 길을 매일 한 번씩 지나간다. 귀신의 길은 신명이 활동하는 길이다. 간방은 신명이 드러내놓고 활동을 하므로 표귀방(表鬼方)이라고 하고, 곤방은 신명이 숨어서 활동하므로 이귀방(裏鬼方)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간방에 속해 있으므로 표귀방에 있다. 북두칠성이 표귀방에서 떠서 이귀방으로 지므로 한밤에 귀신이 나타났다가도 닭이 울면 사라진다는 설화가 생겨났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고찰의 대웅전이나 칠성각을 보면 반드시 동북간방에 세워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성은 천추성(天樞星) 또는 생기탐랑성(生氣貪狼星)이라고 하는데, 하늘의 도리를 펼치는 별로, 천제의 임무를 수행하는 별이다. 북극성과 함께 하늘의 중심을 잡아준다고 하는데 이 별에서 황제를 탄생시킨다고 한다.
제2성은 천선성(天璇星) 또는 천을거문성(天乙巨門星)이라고 하는데, 하늘의 창고요, 복 주머니의 원천이 되는 별이다. 임금의 족보를 관장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왕족의 족보를 선원보(璇源譜)라고 하는데 그 이름을 천선성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또한 천선성은 인간의 식록을 주관하므로 칠성님 전에 복을 비는 이유가 바로 이 별 때문이다. 우리가 설날 복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이유와 섣달그믐에 팔았던 복조리 등은 바로 이 별의 감응을 받아 복을 받기 위함이다.
제3성은 천기성(天璣星) 또는 화해녹존성(禍害祿存星)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복을 받은 만큼 화도 함께 받게 하는 별로서, 인간이 평생을 노력하여 살 만큼 되었다고 안심할 때 일시에 재물이며 생명을 앗아가는 역할을 담당한 별이다. 흔히 주변에서 “살 만하니 죽었다”는 말은 녹존성에서 장난을 친 것이다. 인간이 살 만큼 될 때까지는 수많은 고생도 하였지만 남에게 못할 짓도 많이 하였을 것이다. 이 때 남에게 덕을 베풀지 않으면 이 별에서 그 사람을 데리고 가게 되는 것이다. 즉 칠성판을 상징하는 별로서, 인간의 죽음을 관장한다.
제4성은 천권성(天權星) 또는 육살문곡성(六煞文曲星)이라고 하는데 육살이란 경양(擎羊), 타라(陀羅), 화성(火星), 영성(鈴星)의 네 살성과 천공(天空), 지겁(地劫)이라는 두 흉성을 합친 것을 말한다. 이 별은 하늘의 권력을 잡는 별이다. 이 별에 조응하면 권력은 잡으나 요절하는 수가 생긴다고 한다. 세조 때 남이장군과 중종 때 조광조가 여기에 해당되나 이 별의 정기를 타고나야만 크게 출세할 수가 있다. 권세를 좌우하는 별이다.
제5성은 옥형성(玉衡星) 또는 오귀염정성(五鬼廉貞星)이라고 하는데 북두칠성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하늘의 형벌을 시행하는 별로서 중심을 잘 지키면 세종대왕과 같은 명군이 나와 태평성대를 이루지만 그렇지 못하면 연산군이나 스탈린 같은 사람이 나온다고 한다. 민가에서 이 별에 조응하면 효자와 망나니가 나온다.
제6성은 개양성(開陽星) 또는 연년무곡성(延年武曲星)이라고 하는데, 자미궁의 방어를 책임지는 별로서 북두칠성 중, 힘이 가장 강력하다고 한다. 또 악살과 흉성을 물리치며 오른손에 천부인을 들고 있다 한다. 천둥 번개를 치도록 명하며 하늘의 모든 별을 부릴 수 있다.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로서, 이 별은 인간의 수명을 무쇠에 돌 끈 단 듯 길게 늘려 주는 별이다. 특히 노인들이 이 별에다 빌면 수명이 연장된다고 하는데 칠성님께 명을 비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7성은 요광성(搖光星) 또는 파군절명성(破軍絶命星)이라고 하는데, 하늘의 기운을 관장하는 별로서 특히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별이다. 옛날 임금들과 장군들은 요광성을 군사의 신(軍神)으로 모시고 초제(醮祭)를 지냈다. 초제를 가장 먼저 지냈던 왕이 14대 한웅천왕인 자오지천왕 일명 치우천왕 일 것이다.
그리고 북두칠성은 우리가 육안으로 잘 볼 수 없는 2개의 별이 더 존재하고 있다. 이 별은 칠성의 개양성의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좌측에 있는 별을 보성(輔)이라 하고 우측별을 필성(弼)이라고 한다. 이 두 별을 합쳐서 좌보우필성이라 한다. 이 별은 천추성을 보필하는 별인데 여기서 보필(輔弼)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우리민족은 칠성 즉 부두칠성과 오랜 세월 인연을 맺어 왔다 고조선 때에는 무덤인 고인돌 뚜껑 위에 북두칠성을 그려 넣었고, 고구려 역시 무덤 속에 북두칠성을 크게 그려 넣었다. 이어서 고려도 그러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북두칠성을 새겨 넣은 칠성판이 등장하게 되었다. 단군 이후 우리 역사상 북두칠성을 가장 숭상했던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북두칠성을 나라의 징표로 삼았다. 임금 스스로 자신을 북두칠성의 화신으로 생각하여 국강이라고 하였다.
북두칠성을 주술적인 말로 ‘괴강(魁?)’이라고 하는데 ‘괴강’의 괴(魁)자는 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귀(鬼)자와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두斗자가 결합한 문자다. 즉 칠성의 신명에 잡혔다는 뜻이다. 북두칠성을 나타내는 괴강(魁?)의 강(?)은 사정(四政)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사정이란 자(子:정북)·오(午:정남)·묘(卯:정동)·유(酉:정서)의 네 방위를 말하는 것으로 천지를 바르게 지키고 세운다는 뜻이다. 즉 북두칠성을 선기옥형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으며, 이는 똑바른 정사를 의미한다.
북두칠성의 바가지는 자시(子時)쯤 부터 땅을 향하게 된다. 이때부터 땅위의 모든 물은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게 되는데 북두칠성 정기를 많이 받고 적게 받음에 따라 물의 맛과 질이 달라진다. 밤에 별과 달의 빛을 받고 새벽이슬에 젖은 물을 으뜸으로 치는 이유가 바로 북두칠성의 기(氣)를 받은 물로 이 물을 정화수井華水이며 천일생수(天一生水)이다.
일월 오악도가 가지는 의미
동이의 음악
한자에서 “매昧”란 말은 새벽, 또는 동틀 무렵을 나타내는 뜻이지만, 하늘에서는 북두칠성의 꼬리별 뒤쪽에 자리 잡은 별자리의 이름도 “매昧”다. 이 “매昧”에 대한 기록이 <예명당위禮明堂位>에서 인용하여 <강희자전>에 나오는데 “매昧는 동이의 음악이다.” 라고 하였다.
북두칠성의 머리 부분을 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 하고 꼬리 부분을 두표斗杓라 한다. 선기옥형은 북두칠성의 두 번째 별 천선성天璇星, 세 번째 별 천기성天機星, 다섯 번째별 옥형성玉衡星을 의미한다. 천선성과 천기성은 북두칠성 머리 부분에 있는 별이고, 옥형성은 몸통부분에 해당하는 별이다.
두표斗杓는 북두칠성의 손잡이 끝 부분으로 꼬리별이다. 두표의 뒤쪽에 매昧라는 별자리가 있다. 매昧는 동틀 무렵을 뜻하는 것으로 해가 아직 뜨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물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여명의 시간인 혼돈을 나타내는 말이다. 바로 이때 “매”별에서 음악이 시작된다.
북두칠성의 꼬리인 두표斗杓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게으름을 부리는 태양을 깨우기 위하여 매昧별을 두드리면 태양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혼돈의 시간이 끝이 나는 것이다. 태양을 깨우는 과정에서 매를 두드리므로 음악이 발생하는 것이다. 두斗드림은 바로 별을 두드린다는 뜻이다. 서양의 악기인 드럼이란 이름도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나 한다. 또 두斗는 북두칠성을 의미하므로 북두칠성에게 드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두드린다’ 의미에서 비롯된 민간신앙은 경주지방의 독특한 민간신앙으로 전해되고 있는 두두리豆豆里 신앙에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두두리 신앙은 <삼국유사>에 가록된 비형랑 설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두두리는 경주 남쪽 10리에 있는 왕가수王家藪란 숲에서 제사지냈다고 한다. 두두리豆豆里는 두드린다는 의미로 도깨비방망이라는 설도 있다. 우리 민속에선 도깨비가 귀신을 쫓는 역할을 한다. 북두칠성의 두표斗杓가 매昧별을 두드리고 날이 밝아오면 귀신은 달아난다. 도깨비가 귀신을 쫓는 다는 것은 결국 두표斗杓가 매昧별을 두드리면 날이 밝아 귀신이 달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두두리豆豆里 신앙을 대장장이 신앙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두豆자가 가지는 모양이 바로 대장간에서 단조나 판금 작업을 할 때 반드시 필요한 모루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가장 먼저 청동기를 발견한 사람은 치우천왕으로 대장장이 신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청동기를 제조할 때 뜨거운 열기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 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탈은 전쟁에서 투구로 변하였다고 생각 한다. 황해도 굿에 천신대감은 도깨비대왕인 치우천왕을 의미하는데, 이 놀이에서 천신대감은 굴뚝과 아궁이를 넘나드는 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태양 상징한 인류 최초의 제관 '한인천제'
한인천제라고 하면 처음 들어 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한인천제는 아득한 우리의 상고사의 제일 꼭대기 계신 분으로 지금으로부터 9천 여 년 전의 인물이다. 단군도 신화로 간주하는 지금 우리의 역사에서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분이기도 하다. 인류최초로 한국(桓國)을 세운 한인천제에 관한 기록은 정말 찾기가 어렵다. 진주 소(蘇)씨 문중에 전해오는 진주 소씨 족보의 서문인 <부소보서(扶蘇譜序)>에 한인천제에 관한 기록이 있다.
「옛날에 적제(赤帝), 즉 황제요 휘가 부해(復解)이고 호가 축융(祝融)이란 이가 한국桓國의 제(帝)가 되어 기묘년에 나라를 세우고 풍주(風州)의 배곡(倍谷)에 도읍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가 바다에서 떠오르는 것을 부상이라 하며, 부상(扶桑)이라는 말이 부해에서 나왔다. 또 부해(復解)는, 푸는 일을 되풀이 하는 것으로, 하늘로부터 어떤 해답을 받기위하여 잘못된 일이나, 노여움을 푸는 일을 되풀이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제사장을 의미한다.
축융(祝融)은 신을 섬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신의 노여움을 풀고 인간들 상호간에 화합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일을 맡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보면 바로 한인천제가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인천제는 태양을 상징하며, 태양을 신으로 모시는 최초의 제사장이었던 것이다.
무교에서 내림굿을 할 적에 일월맞이라는 의식이 있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물동이를 타고 처음으로 하늘과 통신하는 굿이다. 여기서 물동이는 동이족의 상징이며, 동이 속의 물은 바다를 의미하며, 그 위에서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민족최초의 태양신인 한인천제를 맞이하는 의식으로 무당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의식이다.
천신대감과 도깨비
무당들의 굿거리에 군웅거리라는 것이 있다. 이 거리를 난 바로 치우천왕의 거리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사용하는 무구 중에 뚝대라는 것이 있다.‘뚝’은 도깨비를 나타내는 말로 바로 도깨비 방망이 인 것이며 치우천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또 이 굿에서 돼지를 육각으로 자르는 이유가 치우천왕의 죽음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치우천왕의 혼백을 위로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드렸던 치우제가 변형된 것이 군웅거리의 시작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선 치우천왕을 한족의 전쟁의 신으로 모시기 시작하였다 그게 바로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다. 황제와 신농, 그리고 치우가 중국의 조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전설로 도깨비 타령만 하고 있을 때 중국은 우리의 조상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궁궐이나 사대부의 기와집, 심지어는 사찰의 기와지붕에서까지 집안에 들어오는 귀신의 침범을 막으려는 뜻으로 치우천왕의 형상인 도깨비 모습의 귀면와를 만들어 놓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치우천왕을 사천왕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절간에 들어오는 잡귀를 막는 수문장 역할을 맡기고 있다. 마을 어귀에 두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장승 또한 마을을 귀신들의 재앙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치우천왕의 형상인 도깨비를 변형시켜 만들어 낸 모습인 것이다.
중여곤과 고사
<태백일사/삼환관경본기>에 보면 「웅녀군(熊女君)의 후손으로서 여(黎)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책봉 받아 왕검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크게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나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는 자가 천여 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이 지나 신인 왕검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의 신망을 얻어 비왕(裨王)이 되었다. 섭정하신지 24년에 웅씨의 왕은 붕어하시니 왕검은 마침내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을 통일하고 나라를 여시어 조선이라 하시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진한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여시니 조선이라 하시고 이를 일세 단군이라 한다.」란 구절이 있다.
여기서 여(黎)란 사람이 바로 중여곤(衆艅?)이다. 그러니 중여곤이 단허(壇墟:옛날 제사 터)에 책봉 받아 왕검이 되었다는 것은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460년 후에 우리가 말하는 단군왕검이 탄생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이 기록에서 알 수가 있다. 여(艅)는 즉 중여곤(衆艅?)을 말하는데 곤의 조상은 한웅천왕시대의 농관을 지냈던 고시(高矢)에서 시작된다.
유망은 전욱고양과 대계를 낳는다. 전욱고양은 아들 둘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어 대계의 자손인 곤이 전욱고양의 셋째아들로 입적되어 장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 자리가 역사상 최초로 나라에서 임명한 제관의 자리였다. 그를 중여곤이라고 하고 곤에게서 조선(朝鮮)이라는 문자가 나왔다고 문자학회에서는 말한다.
김대성이 쓴 <금문의 비밀>에서는 <곤>은 당시 전욱고양의 양자 즉 대부로 들어와 사당의 제사를 총괄하는 대례관의 관직을 맡자 물고기 토템의‘ 어(魚)’자는 그대로 두고 ‘곤’자의 오른쪽에 있는 ‘계(系)’ 대신에 신농계인 양족의 대부라는 표시로 ‘양(羊)’자를 써서 ‘선 (鮮)’이라는 글자를 만들다. 이렇게 하여 전욱고양 때 만들어진‘조(朝)’자와 결합하여 비로소 조선이라는 글자가 생겨났다고 한다.
또 그는 중여 라는 말은 삼신을 받드는 제사를 모신다는 뜻도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艅)는 ‘짐이 곧 나라’, ‘짐이 곧 나’라는 천자 자신을 칭하는 짐(朕)으로 변한다. 짐은 곧 사당에 차를 올리는 제주(祭主)라는 뜻이다. 라고 말한다.
장자가 쓴 <소요유>에서 곤은 크기를 알 수 없는 북방의 큰 물고기로 비유하였다. 또한 「곤의 크기는 몇 천 리 인지 알 수 없고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그 이름이 붕(鵬)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장자에 따르면, 곤은 우주의 북극에 산다고 하였다.
곤(?)자를 파자하면 고기 어(魚)자와 실 계(系)로 나누어진다. 고기 어(魚)자의 의미는 북방의 큰 물고기로 북극에 산다고 하였으니 추운 바다에 사는 생선이다. 오행 중 북방은 수(水)를 나타내는 것으로 즉 바다를 의미한다. 바다는 음(陰)을 나타내며 바다 생선 중 찬물에 사는 음기(陰氣)가 가장 센 큰 고기는 북어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화상을 당한 환자에게는 북어를 이용한 치료를 하고 있다.
그리고 계(系)는 실을 의미하면서 이 실은 조상으로부터 이어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고사를 지낼 때 북어와 실을 올리는 것은 중여곤을 상징하는 것이며 시루떡은 덕을 나타내는 것으로 중여곤의 큰 덕을 기리 킨다. 중여곤은 단군왕검의 조상이 되며 또한 조선(朝鮮)이라는 문자를 탄생케 한 사람이라고 한다.또 <산해경>을 보면 곤은 백마(白馬)라고 하였다.
치수의 달인으로 용왕이 된 부루태자
용궁의 근원은 물이다. 용왕은 물의 다스리는 물의 제왕이다. <태백일사/삼환관경본기>를 보면,
「부루태자가 우사공(虞司空, 禹임금)에 이르기를, ‘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수정자의 주신(主神)은 삼신상제(三神上帝)이다. 삼신상제는 조선의 주신이자 우리 민족의 주신이다. 또한 그대의 왕(舜임금)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마침내 천부왕인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神針)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수정자(水精子)란 수정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수정’은 물의 근원이다. 그러니 물의 근원이 되는 분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즉 물의 정기를 타고 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에서 ‘수정’은 남방주작칠수에 속한 첫 별자리인 ‘정수(精宿)’라고 한다. 땅에서 정수는 아홉 개의 우물이다. 팔괘 방위에 우물이 하나씩 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더 있는 것이다. 이 아홉 우물에서 샘솟는 물을 구룡토수(九龍吐水)라고 한다.
이 물을 길어다 술을 빚으면 그 술은 정화(淨化)하는 힘이 생겨난다고 한다. 그래서 정화주로 많이 사용한다. 부루태자는 원래 오가 중에서 호가(虎加)를 다스리는 우두머리에 있었다. 호랑이가 그의 수호동물이자 토템이었다. 그러다 임진 25년(BC 2309년)에 단군왕검이 남해로 순시를 떠났다가 그때 바다에 적룡(赤龍)이 출현한 것을 보고 단군왕검은 이것을 대단히 상서로운 일이라 생각하여 부루태자가 관장하는 호가를 용가(龍加)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부루태자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사공에게 자신을 수정자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으며 홍수를 막는 비결로 오행치수법을 기록한 금간옥첩(金簡玉牒)과 물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신침과 물을 진압할 수 있는 황거종(皇鉅宗)을 주어 홍수를 막게 하였다.
그리고 단군왕검은 용이 물을 다스리듯 부루태자가 물을 다스릴 수 있다고 창수사자(蒼水使者)부루로 불렀다. 이렇게 하여 부루태자가 홍수를 막는 등 물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는 용왕이 되었으며 많은 무당들이 용왕님 즉 창수사자 부루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다. 부루태자는 물만 마음대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천부왕인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액을 막고 인간들을 복되게 하므로 그때부터 ‘홍수막이’란 말이 생겨났고 지금도 정월달이면 무당들이 단골들의 일 년의 액운을 막아 주는 것을 ‘홍수매기’라고 한다.
굿거리 중 창부거리가 있으며 홍수막이가 나온다. 창부란 말도 ‘창수사자 부루’의 준말이라고 생각한다.
<단군세기>를 보면 「BC 2183년 부루 단군께서 붕어하시니 이 날 일식이 있었다. 산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친 듯 소리를 지르고 백성들은 심하게 통곡했다. 그 후 백성들은 집안에 땅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 그릇에 쌀과 곡식을 가득 담아 단 위에 올려놓았다. 이를 부루단지라 부르고 업신으로 삼았다.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전계(佺戒)라고도 불렀다.」라는 구절이 있다.
부루단지를 업주가리 또는 업양(業樣)이라고 부르는데 ‘업양’은 ‘업왕’이 변전된 것으로 업왕가리라고도 부르고 있다. 벼를 익는 것을 축하하여 업이라 하였는데 업을 생산, 작업의 신이라 했다. 시골에 가면 지금도 집안 한 곳에 단지에다 볏짚으로 주저리를 틀어 지붕을 씌워 놓고 곡식을 담아 모시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우리가 단군의 자손, 부루단군의 자손이기 때문에 이어져 오는 것이다.
○ 강사 : 조성제 (舞天문화연구소장. 한국 무교학회 이사)
○ 주제 : 巫俗에 살아있는 우리 上古史
○ 일시 : 2010년 12월 14일 화요일 오후 7시~9시
○ 장소 : 삼청동 입구 대한출판문화협회 4층 (전화:02-735-2701~4)
○ 찾아오시는 길 :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10분거리 (약도 바로가기)
○ 참가비 : 무료
○ 문의전화 : 02-766-1110, 041-620-6700, 010-7299-6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