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성씨의 뿌리공원-7
01.여산송씨 02.경주임씨 03.진주정씨 04.광주이씨 05.고부이씨
06.금산김씨 07.광주정씨 08.순천박씨
[01]
시조 송유익(宋惟翊)은 고려 때 진사(進士)로 나라에 훈공을 세워 여산군에 봉해졌으며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다.
문헌에 의하여 그의 선계(先系)는 중국 경조(京兆)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의 후손 자영(自英)이다.
그는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인 유익(惟翊)은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시조가
되었고, 둘째 천익(天翊)은 은진 송씨(恩津宋氏), 막내 문익(文翊)은 서산 송씨(瑞山宋氏)
의 시조가 되어 우리나라 모든 송씨의 연원(淵源)을 이룬것으로 전해진다.
[02]
경주 임씨(慶州林氏)는 고려(高麗) 때 평찰품사(評察品事)로 지낸 임몽주(林夢周 : 시호는
충선공)의 17세손 임계정(林繼貞)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있다.
「경주임씨세보(慶州林氏世譜)」에 의하면 관조(貫祖)인 계정(繼貞)은 1505년(연산군 11)
에 생원(生員) 곤(棍)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여 인종조(仁宗朝)에 성균관(成均館)의
진사(進士)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경주 판관(慶州判官)을 지냈으므로 후손 들이
경주(慶州)를 본관(本官)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
인물을 보면 조선(朝鮮) 때 희지(熙之)가 역과(譯科)에 급제하여 봉사(奉事)에 이르렀다.
[03]
진양정씨(晋陽鄭氏)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세계(世系)를 달리하는 여러 계통(系統)
으로 갈라진 〈진주 8정(晋州 八鄭)〉이라고들 일컫는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를 비롯한 제문헌(諸文獻)에 진주정씨는 19파(波)가
나와 있으며 「전고대방(典故大方)」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5파(派)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한 소목(昭穆)은 밝힐 수 없고 현존하는 계파중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다음 5파(波)로 대별(大別)해서 상고(詳考)한다.
예계(藝系) 시조(始祖) 정예(鄭藝)는
고려통합삼한벽상공신광록대부(高麗統合三韓壁上功臣光祿大夫) ·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문익공(文翼公) 정시양(鄭時瀁)을 일세조(一世祖) 계대(系代)하고
있다. 그리고 유(裕)의 6세손 수(需)를 증조로 하는 파(波)도 있다.
시양(時陽)의 21세손인 신중(臣重)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으며,그의 아들 이오(以吾)
는 조선(朝鮮) 태종(太宗)때 명신으로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르 역임했다.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분(奔)이 단종(端宗) 때 상신(上臣)을 유명하다.
분(笨)은 태종 16년(서기 1416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세종과 문종조에 걸쳐
조정의 중신(重臣)으로 많은 치적(治績)을 남겼고 단종이 죽을때 김종서(金宗瑞) ·
황보인(黃甫仁)과 함께 어린 단종의 보호를 유탁(遺託) 받았으며,
이어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반대파로 몰려 사사(賜死)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귀양지에서
늘 조상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제사를 지냈는데 하루저녁에는 자다가 일어나서
수행하는 종에게 밥을 짓게 하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 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조금 뒤에 한양으로 사약(賜藥)을 받았다고 한다.
[04]
신라가 망하자 유독 칠원만이 성을 굳게 지켜 절의(節義)를 높이고 항복하지 않으니
고려 태조가 크게 노하여 병력을 증강하고 성을 포위 공격하여 오랜 뒤에야 성을
함락하자 칠원성주(漆原城主)의 일족(一族)을 회안(淮安:지금의 광주<廣州>)에
이주시키고 고을의 역리(驛吏)로 복역하게 하였다.
[05]
고부 이씨(古阜李氏)의 시조(始祖) 이경조(李敬祖)는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최 충(崔 沖)이 설립한 사학(私學)의 효시인 구재학당(九齋學堂) 출신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랐다.
그는 1071년(문종 25) 김 제(金 悌)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송(宋)나라에
다녀왔으며, 문종(文宗)에서 숙종조(肅宗朝)에 이르기까지 5대(代)를 섬긴 공(功)으로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여산군(礖山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검교 좌정승(檢校左政丞)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의 전세거지(前世居地)인
고부(古阜)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06]
시조 김문부는 경순왕의 제5자 의성김씨 시조 석의 후손 용주의 7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원외랑을 역임, 후손들이 본관을 금산이라 했다.
후손 김시창은 조선 명종 때 효자로 부모상에 여막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맹호가
보호했다. 1519년(중종14) 여러 유림 의 추천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고 그 후 누차에
걸쳐 추천하였으나 끝내 불응, 명종 때 정려가 명해졌다.
[07]
시조 신호(臣扈)는 고려 충선왕(忠宣王)과 충숙왕조(忠肅王朝)에 걸쳐
판도판사사(版圖判司事) · 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내고 봉은사 진전직(奉恩寺眞殿直)으로
삼중대광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에 추봉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신호(臣扈)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을 광주(光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말에 무장(武將)으로 이름을 날린 세운(世雲)이
공민왕(恭愍王)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와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대호군(大護軍:무관벼슬의 종3품)이 되고, 이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올라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에 왕을 호종하여 총병관(摠兵官)이 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연산군(燕山君) 때 목사(牧使)를 역임한 인인(麟仁)과 명종(明宗) 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만종(萬鍾)이 유명했다.
한편 사위(士偉)는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여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임진왜란 때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왕을 호종하여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08]
조형물 의미와 설명
신라 시조왕 혁거세님은 박씨의 공동기원시조로서 진한 6부를 통합하여
신라를 열게 되었는바 혁거세님의 탄생 신화가 작품의 주제로 제작케 되었다.
작품의 최고 상단에 있는 화강석 원형의 알은 서라벌 양산밑 나정에서
진한 6부 촌장들이 모여 경이 스러운 혁거세님의 출현을 목도한 혁거세님의 탄생 직전
형태의 모습이며 알을 바치고 있는 구부러진 반원형과 그것을 바치고 있는
화강의 두다리는 알을 지키고 있었던 천마의 형태를 추상형 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른 또 한가지의 의미가 부여 될 수 있는바 알은 혁거세님을 표현하여
전체 조상을 대입 의미하여 알 을 바치고 있는 반원형의 형태와 그 하단에 있는
수직의 화강석은 후손들의 손과 다리를 추상적으로 표현하여 후손들이 정성스러이
조상을 모신다는 뜻으로 표현 된 것이다.
순천박씨 유래
순천박씨(順天朴氏)는 신라54대 경명왕(景明王)의 여덟 대군(大君)중
강남대군(江南大君) 언지(彦智)의 후손으로 알려져 왔다.
시조(始祖)는 고려의 개국공신 이며 삼중대광(三重大匡)의 벼슬에 이르고
승천군(昇天君)에 봉군된 정양공(貞襄公) 박영규(朴英規)장군이시다.
중흥조(中興祖)는 고려 정승 평양군(平陽君) 난봉(蘭鳳) 선생과 당대의 석학
보문각(寶文閣) 대제학공(大提學公) 죽계(竹溪) 숙정(淑貞)(고려 충숙왕1314년)
선생이시니, 숙정선생을 중시조 1세조로 한다.
이후 종파와 지파의 현손(玄孫)이
문숙공파(文肅公派). 군수공파(郡守公派).부정공파(副正公派).
의주목사공파(義州牧使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경역공파(經歷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제주목사공파(濟州牧使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감사공파(監司公派). 충정공파(忠正公派). 교리공파(校理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박사공파(博士公派). 검열공파(檢閱公派). 전직공파(殿直公派).
인의공파(引儀公派). 부위공파(副尉公派). 의 19파(派)로 나뉘게 된다.
순천 박씨의 역사를 살피건대, 신라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망족(望族)으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조에 이르러서 태종조(太宗朝)의 명신(名臣). 석명(錫命)선생의 훈업(勳業)과
문민공(文愍公) 중림(仲林)선생의 경학문장(經學文章) 및 만고충절(萬古忠節),
사육신(死六臣) 충정공(忠正公) 팽년(彭年)선생의 정충절의(精忠節義)가
세상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세조조(世祖朝), 예종조(睿宗朝), 성종조(成宗朝)의 삼조(三朝)에 걸쳐 공신(公信)에 책훈된 중선(仲善)선생의 충성(忠誠)과 무장(武將) 패기로 군주(君主)에 도전하여
부패한 혼주(昏主)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는데 앞장을 서 중종반정(中宗反正)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