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규(朴英規)는 승주(昇州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사람으로 견훤의 딸을 처로 맞이하여, 견훤의 장군이 되었다. 신검(神劒)이 반역한 후 견훤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하자, 박영규가 처에게 은밀히 의논했다.
“대왕께서 마흔 해 넘게 부지런히 힘써 왕업이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하루 아침에 집안 사람이 재난을 일으키는 바람에 나라를 잃고 고려에 투신하셨소. 무릇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약 내가 섬기던 임금을 버리고서 역적을 섬긴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의사(義士)를 대하겠소?
게다가 고려의 왕공(王公 : 태조 왕건)은 인후하고 근검하여 민심을 얻었다는 말이 들리니, 아마도 하늘의 계시인가 하오. 필시 삼한의 주군이 될 것이니 어찌 글을 보내어 우리 임금을 위문하고, 왕공에게도 내 간절한 마음을 알려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으리오?”
그의 아내도, “당신의 말씀이 바로 나의 뜻입니다.”라며 찬동하였다.
태조 19년(936) 2월, 박영규가 사람을 보내 귀부의 뜻을 표하면서, “만약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신다면 바라건대 내응해서 왕의 군대를 맞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내리고 돌아가서 박영규에게 다음과 같이 알리게 하였다.
“만약 그대의 은혜를 입어 길이 막히지 않는다면 장군을 뵈온 뒤 당에 올라가서 부인에게 절을 올린 후, 그대를 형처럼 섬기고 부인을 누님처럼 받들어 반드시 끝까지 죽을 때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소. 하늘과 땅의 귀신이 모두 이 말을 들었을 것이오.”
9월에 태조가 신검을 쳐서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 박영규에게,
“견훤이 나라를 잃고 멀리서 투신했던 이래, 그의 신하들 가운데 그를 위로하고 도와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소. 경의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도 소식을 전해 성의를 보내었으며, 과인에게도 귀부하는 뜻을 보였으니, 그 의리는 잊을 수 없소.”라며 감사하였다.
좌승(佐丞)으로 임명하고, 토지 1천경(頃)을 내려 주었으며, 역마 35필을 주어 집안 사람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의 두 아들에게도 벼슬이 주어졌으며, 박영규는 뒤에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