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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90)
보장된 구원은 없습니다
(2022. 09. 01. 목)
본문 : 누가복음13:22-30 (마7:13-14, 21-23)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하면서
특별한 구도를 가지고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하나의 여행 구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가시는 여정을,.....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 여정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구조
–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사역 (4:14-9:50)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이야기(9:51-19:27)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사건을 포함하는
예수님의 나머지 행적(19:28-24:53)
지금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도중에
일어난 일들을 묵상하고 있는 중입니다.
22절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곧장 올라가지
않으시고 여러 마을을 방문하셨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간을 아껴서 ‘각 성 각 마을’을
방문하려고 애를 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종 목적지는 물론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지셔야 할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질문>
그렇게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23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런데 이 질문 자체는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구원받는 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이 구원에 대한 관심이 많이 식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통하여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에 관심이 있고....
혹은 기독교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상적인 성공과 부를 얻을까에 더 큰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신앙의 목적이요, 가장 근본적인
관심이어야 함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고
말씀하였습니다.
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요한복음 3:16에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앙생활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우리 영혼이 구원받는 데 있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사람은
상당히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질문은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입니다.
이 질문에서 우리는 이 사람이 얼마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 랍비들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모두가 구원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었던 것입니다(선민사상).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했습니다(눅 13:5).
포도원에 심겨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눅 13:6~9).
이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구원받는 사람이
적은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정말 구원받는 사람이
적은 것인지’를 확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28-30절>
28절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절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기대를 꺾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대답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었겠지요.
“너희가 그래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인데
하나님이 구원하시지 않겠느냐.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라는 말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모든 선지자들은
믿음으로 살았기에.....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셨지만,
그렇지 못한 너희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선민과 구원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민이라고, 혈통적인 후손이라고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발 더 나아가셔서,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29-30)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세계 열방의 모든 민족’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생생한 장면을 요한계시록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계7:9-10>
9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절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하나님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을 쓰는
많은 사람이, 곧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찬양하는 모습을
환상 가운데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은 선민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 중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나중 된 자’는 이방인들을 나타내는 것이고....
‘먼저 된 자’는 하나님의 선택을 먼저 받았던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에게 먼저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믿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가는데......
먼저 기회를 가졌던 유대인들 중에
그 길에서 낙오될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기를 원하셔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각성하게 하시고,
구원하시려는 목적에서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지 않기 위하여>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즉 구원받는 사람의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첫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2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여기서 ‘좁은 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는 들어가기 어려운 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짐이나 부피가
큰 짐을 지고는 통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 욕심이나 자기주장을 그대로 가지고는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신 바가 있습니다.
눅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자기 부인입니다.기독교 신앙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우선순위를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둔다는 의미입니다.
이 자기 부인이 먼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경험 등과 대척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은 일반적인
상식과 동떨어지는 내용이 많습니다.
<마5:38-42>
38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절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절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구원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받아들인 말씀을 자신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내 삶의 주도권을
내어드리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성경은 make every effort로 번역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이 단어의 원어(‘아고니조’)의 의미는
경기장이나 격투기장에서 선수들이 싸워 이기려고
땀을 흘리며 몸부림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몸부림치면서 애를 써서
노력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제가 현재형으로서 이는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지속하여 애써야 함을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기독교 신앙의 위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는 데서 옵니다.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것은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예수님과 사도들은 인간의
편에서의 책임에 대한 강조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빌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이 선물로 주어지지만,
동시에 인간 편에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합당하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구원받을 사람의 수가 많은가 적은가는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또는 이방인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신학적으로 구원 얻는 자의 수가
많거나 적거나를 명확하게 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의 지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로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즉 구원받는 사람의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첫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둘째, 한번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언제
시작해야 하느냐” 입니다.
<25-27절>
25절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절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아무리 좁은 문이라고 하더라도 열려있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은 그렇게 마냥 열려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닫을 때가 있고, 한 번 닫히면
다시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 후회하면서 아무리 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고 애
걸복걸하더라도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징계하시려고
노아를 시켜 산 위에 방주를 짖게 하였습니다.
바다에 짖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배는 어업을
위한 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방주를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을
대략 120년으로 봅니다.
즉 120년 동안 회계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충분한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완악한 마음을 열지 않으니...
결국 하나님은 노아의 방주 문을 친히 닫아버리고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호흡 있는 자들은 다 물에 빠져 몰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방주로 몰려들었겠습니까? ...
그러나 한번 닫힌 방주의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문이 꽝하고 닫힐 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이 남아 있는 기회입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늦을 수 있습니다.
고후6:2b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그런데 사람들은 위기에 처하면 인맥을 동원하거나
특별한 관계를 끌어옵니다.
본문을 보면, 문이 닫힌 후 문밖에 있는 사람들과
집주인의 대화를 나눕니다.
문밖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26)하며
집주인을 잘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27)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7:22-23>
22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3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렇습니다.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번 닫힌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맥을 동원하고,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며
애걸해도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믿음으로 그 문으로
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씀 - 보장된 구원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무리 혈통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라고
하더라도 보장된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선민과 구원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선민 유대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좁은 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열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당연히 구원받을 자’라는 교만함을 내려놓고,
더 늦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값싼 구원’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좁은 문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길입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