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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128)
가난한 과부의 헌금
(2022.10.26 수)
본문 : 누가복음21:1-4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적인 태도를 경계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식하며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을 의식하며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
긴 옷을 입고 다니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과 잔치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까지도
사람을 의식하며 길게 기도하였습니다(중언부언).
그럼에도 그들의 실생활은 악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과부의 가산을 탐내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정하는 자들’(딤후3:5)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닮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실 때에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할만한 일에 눈에 띄셨습니다.
<1-2절>
1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절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헌금할 수 있도록, ‘여자들의 뜰’이라고 불리는 곳에
열세 개의 헌금함이 놓여있었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실 때에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동안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을
넣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바리새인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많은 사람이 보도록 유도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액수는 알 수 없지만 상당한 금액을
넣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뒤이어 어떤 가난한 과부가 오더니 부끄러운 듯,
그러나 정성스럽게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이 얼마를 넣는지
아셨습니다.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옛날에는 주조 화폐가 없었고,
귀금속의 무게(주로 은)를 따라 값을 치렀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쓰던 화폐
– 게라, 베가, 세겔, 므나, 달란트
로마의 화폐 –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헬라(그리스)의 화폐 단위 – 렙돈, 드라크마
‘렙돈’은 그 당시 가장 작은 화폐 단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동전’(하루 품삯의 128분의 1,
두 렙돈이니 64분의 1)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금전’도 ‘은전’도 아니 ‘구리동전’입니다.
값어치가 크진 않은 동전입니다.
아마도 빵 한 개를 사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돈이었을 것입니다.
누가 보면 부끄러워할 만한 헌금입니다.
아마도 누가 볼까 부끄러운 마음으로 넣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절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수학적인 기준으로 보면 사실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액수에서는 많이 넣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4절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기준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드린 사람을 기준으로 계산을 합니다.
‘얼마를 드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받아드리는 분의 기준으로
계산을 하십니다.
받아드리는 분이 그 헌금을 얼마나 크게
받아드리셨는가 하는 것입니다(‘하나님 나라의 기준’).
부자들은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자기를 위해 남겨두었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겨우 ‘두 렙돈’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을 위해 남겨둔 것은 한 푼도 없었습니다.
이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녀의 헌금을 더 크게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세상적인 기준과는 다른 것입니다.
한편, 오늘 말씀을 들으시고,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과부와 같이 자신의 모든 생활비를
다 드려야 기뻐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 과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과부의 예를 드는 것은 교만한
바리새인과 타락한 서기관들을 책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외견상 하나님께 많은 헌금을 드리는
것 같아도 시상은 자신들의 영적인 권위를 이용해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을 드렸다는 데 그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패하고 교만한 자들의 많은 헌금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는 자세>.....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헌금을 드리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첫째, 헌금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헌금을 요구하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물질이 필요하실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주’라 믿습니다.
이는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시편50:9-12>(아삽의 시)
9절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10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절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절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아삽의 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굳이
우리의 재물이 필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산상수훈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6:19-21>
19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예, 하나님이 물질이 필요하셔서가 아니라, 물질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예, 400년 가까운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주신 해방자입니다.
전적으로 그들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강력한 통치와 인도와 기적으로
그들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 은혜를 기억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기를 바랐습니다.
예물은 그 구체적인 표현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우리에게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 사랑을 기억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뻐하고 감사를 표하는 구체적인 표현 방법입니다.
그것이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주일헌금 등의
다양한 명목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헌금을 드리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첫째, 헌금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둘째, 헌금이 사람 앞에서 교만의 동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행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나바라는 충성스러운 성도 자기 밭을 팔아
헌금을 하자 사도들이 그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시기심과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자기도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드렸습니다.
문제는 그가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비교의식, 경쟁의식, 시기와 질투) 이 일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팔아놓고 보니 큰돈이라
그중에 일부를 숨겨두었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였고,
그 결과 그와 그의 부인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드리고도 망한 것입니다.
이것은 헌금의 동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교훈하여 줍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십니다.
그 동기가 순수하고 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자신의 드린 헌금으로
영적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더 많이 드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며 겸손하게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헌금을 드리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첫째, 헌금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둘째, 헌금이 사람 앞에서 교만의 동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께서
받을만하신 ‘거룩한 제물’이 되도록,....
성실하고 정직한 삶에서 나온 열매를 드려야 합니다.
<사1:11-13>
1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절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불의한 수단으로 얻은 재물을 드린들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헌금을 드리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첫째, 헌금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둘째, 헌금이 사람 앞에서 교만의 동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께서
받을만하신 ‘거룩한 제물’이 되도록,....
성실하고 정직한 삶에서 나온
열매를 드려야 합니다.
넷째,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이어야 합니다.
<출25:1-2>
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바치는 것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쁜 마음으로’의 옛날 번역은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스스로 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만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말씀으로 교훈하셨습니다.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이런 재미나는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영국 농부가 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그 소가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습니다.
기분이 아주 좋아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송아지 두 마리나 낳았는데 한 마리는
우리 것으로 하고, 한 마리는 주님께 바칠 거야!”
신앙이 별로 없던 남편이 그런 소리 하니까
부인이 기분이 좋아 “아 ! 우리 남편이 신앙이
좀 생기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아주 시무룩해서 집에 들어오더니
아내에게 “송아지 중에 한 마리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인이 “어떤 송아지가 죽었어요?”라고 물으니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지”라고 하더랍니다.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이
‘아깝지 않을 만큼’만 헌금합니다.
헌금시간에 큰 액수의 돈이 잡힐까 봐 조심하면서 ......
적은 돈을 골라 헌금해본 경험들이 솔직히
얼마나 많이 있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아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헌금하지 않습니다.
잘 준비된 헌금을 드립니다.
<헌금의 올바른 사용>
중요한 것은 이렇게 드려진 헌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드려진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는 일,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선교하는 일,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
예배하고, 교육하고, 교제하는 등의 각종
선교 사업을 위해 등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일을 전담하는 일꾼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사도 바울과 같이 자비량 선교를 하거나,
이중 직업을 가지고 목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역자가 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마땅히 전임 사역자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셋째는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섬기는 일입니다.
예루살렘 성도를 섬기는 일은 그곳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여
헌금함으로 구제하여 돕는 일이었습니다(행11:29).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은 ‘헌금의 액수’보다도
‘헌금의 동기와 자세’를 더욱 중요하게 보십니다.
첫째, 헌금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둘째, 헌금이 사람 앞에서 교만의 동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께서
받을만하신 ‘거룩한 제물’이 되도록, 성실하고 정직한
삶에서 나온 열매를 드려야 합니다.
넷째,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이어야 합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잊지 말 것은.....
하나님의 사업을 활성화하고....,
전임 사역자를 세우고,.... 구제하기 위하여 ....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의 정성스러운 헌금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도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