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서
건너온 메르스 때문에 학교는 휴업하고 대규모 행사들은 연이어 취소되고 있다. 발원지로 알려진 경기도 일부 시군에 살고 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거주지를 떳떳하게 밝히지 못할 정도로 공포가 번지고 있다. 이 와중에 우리나라의 메르스 환자 수는 세계 2위에 달하고 있다. 역사 속 전염병의
창궐과 이에 대한 조상들의 대처를 기록 속에서 찾아보자. - 편집자 주-
연이은 하교, 세심한 배려 역시
세종
우리
역사의 황금기라 불리는 조선 세종 대에도 전염병은 발생했고 명군이던 세종답게 대처도 신속하고 빨랐다. 세종실록을 보면 전염병이 발생하자 세종이
치료와 구제에 노력한 기록이 여러 건 보인다.
세종
14년(1432) 4월21일자 세종실록 기사이다. 이때 세종은 8도 감사의 전염병 환자구제대책 미흡을 지적한다.
“민간에
전염병이 발생하거든 구제하여 치료해 주라는 조항을 여러 번 법으로 세웠었는데, 각 고을의 수령들이 하교의 취지를 살피지 않아서, 금년은 전염병이
더욱 심하건만 구료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일찍이 내린 각 년의 조항(條項)을 상고하여 구료해 살리도록 마음을 쓰라.”
다음날에는
불요불급한 각종 공역의 중지를 명한다.
“성중(城中)의
영선(營繕)하는 공사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경기의 선군들도 또한 와서 역사에 나가고 있으니, 이 무리들이 아마 집을 떠난 채 전염병에 걸린다면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중 내월의 역사에 나가기 위하여 올라오는 도중에 있는 선군은 통첩을 내어 돌아가게 하는 것이
어떠할까.”
전염병에
대한 세종의 심려 깊은 대처는 그 다음 날에도 이어진다. 이번에는 전염병이 돌고 있는 와중에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실상을 보며 구호대책을 지시하고
책임자를 단호하게 문책한다.
“임금이
전염병에 걸린 자를 구호하지 못하고, 혹 생명을 상하게 하는 데에 이를 것을 염려하여 사람을 시켜서 거리를 돌아보게 하였더니, 소격전(昭格殿)의
종인 눈먼 여자 복덕(福德)이 아이를 안은 채 식량이 끊어져서 거의 죽게 되었다 하므로 임금이 놀라서 즉시 소격전의 전지기[殿直] 선숭렬과
북부령 유열을 형조에 내려 추국하게 하고, 복덕에게는 쌀과 콩 각 1석을 주게 하였다.“
치료서 배포에서 제사까지 다양한
구휼책
조선조에서는
전염병 구제에 구휼과 대규모 공사 중지 외에도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 가운데는 치료방법을 책으로 편찬해 전염병이 발생한 곳에 내려 보내는
것도 있었다. 중종 때에 전염병이 발생하자 긴급하게 의서를 해당 지역에 보내는 기사가 보인다.
중종
20년(1525) 5월6일 중종은 전염병 치료서를 전염병이 발생한 지역에 내려 보낸다. 당시 실록의 기사다.
“<벽온방(辟瘟方)>을
중앙과 외방에 반사하다”
<벽온방>과
<간이벽온방>은 중종 19년 평안도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자 이의 치료를 위해 중종 20년(1525)에 의관 김순몽· 유영정· 박세거
등을 시켜 엮은 의서이다.
치료서와
함께 치료약도 내려갔다. 병으로 죽은 이에 대해서는 시신의 매장은 물론 제사도 지내주었다. 죽은 백성의 영혼까지 달랬던
것이다.
중종
21년(1526) 실록의 기사이다
“충청도에서
여역으로 많은 사람이 죽게 되어 지극히 놀라우니 죽은 사람이 몇 명이고 병의 기세가 가라앉게 되는지를 계속해서 치계하도록 해야 한다. 또 죽은
사람의 수가 이미 4백 60여 명이나 되는데도 병의 기세가 점점 만연된다면 시기에 미처 구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평안도의 예대로
의약품을 내려 보내 마음을 써 구료하도록 하고, 또한 중앙(中央)에서 제사지낼 것을 예조에 말하라.”
중종
22년(1527) 2월24일의 기사다.
“근래
백성들 가운데 병사한 자가 매우 많은데, 외방에는 전염병이 치성하니 진실로 사망자가 많을 것을 알겠다. (중략) 부자는 시체를 매장할 수
있겠지만 빈자는 혹 시체를 유기할 우려가 있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어찌 측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략) 각도의 감사와 한성부에 효유하여
구장(舊章)을 신명(申明)케 하라.”
광해군
때도 유사한 기사들이 보인다. 광해군 2년(1620) 12월10일자 기사다.
“전염병의
기세가 날로 성해진다고 하니, 활인서(活人署)로 하여금 각별히 치료하여 구완토록 하고, 여제를 다시 지내는 일을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죄수 방면도 실시된다.
효종
2년(1651) 4월21일자 기사다.
“감옥
안에 전염병이 크게 성하자 상이 승지에게 죄수를 조사하여 그 중 죄가 가벼운 자를 석방할 것을 명하였는데, 승지가 죄인 가운데 석방할 자와
석방하지 않을 자를 기록하여 아뢰니, 하교하였다. '이제 형조의 수안(囚案)을 보건대, 이미 석방하였는데 아직도 옥중에 있는 자도 있고 이미
가두었는데 죄수 명부에 기록되지 않은 자도 있으니, 무슨 이유인가. 당상은 추고하고 낭청은 파직하라.'”
전염병, 임금이 책임을
통감하다
조선의
국왕들은 전염병이 돌면 비망기를 내려 자책했다. 아래는 숙종이 전염병이 돌자 내린 비망기다. 숙종이 재위 25년(1699) 1월1일에
내렸다.
“아!
국운의 불행이 어쩌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4년 동안의 큰 흉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머지 또 전에 없던 모진 여역(癘疫)에 걸렸는데,
봄부터 겨울까지 갈수록 더욱 치열해져 마치 물이 젖어들 듯 불이 타오르듯 하였다. 처음에는 서쪽 변방에서부터 시작하여 팔로(八路)에 두루 퍼져
마을에는 완전한 가호가 없는가 하면, 백에 하나도 치유된 사람이 없다. 그리하여 벌려 세운 병막(病幕)이 서로 잇따랐고, 신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 더욱 혹독한 경우에는 온 집안이 함께 몰살하는 참담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시체가 무더기로 쌓여 망령들의 울음소리가
처연하니, 병화의 급박함을 어찌 이에 비유할 것인가? 아! 해마다 잇단 흉황(凶荒)의 재해가 혹독하였는데, 토착민이 거의 다 죽기로는 지난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었으니, 그에 대한 놀라움은 굶주리고 불에 타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 백성들이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으니 나라가 앞으로
무엇을 의지해야 하겠는가? 이 때문에 근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침식도 편치 못하다. 삼가 정성을 들여 기양(祈禳)함에 있어 극진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도 신명(神明)이 돌보지 않아서 그 보응이 더욱 까마득하기만 하다. 그 원인을 궁구하여 보면 죄가 진실로 나에게 있으니,
적자(赤子)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중략) 구제할 수가 없으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 그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이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의 마음이 이러하니, 안으로 경조(京兆)와 밖으로 도신(道臣)들도 어찌 나의 소의한식(宵衣旰食)하는 근심을 몸받아
구제할 방안을 극진히 마련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모쪼록 이런 내용으로 특별히 칙유(勅諭)하여 사망하는 사람이 없도록 제 때에
약을 지급하여 구료(救療)하고, 시체는 거두어 매장함으로써 널려 있는 일이 없게 하도록 하는 등등의 일을 한만(閑漫)히 보지 말고 착실히
거행하게 하라. 그리고 여역이 좀 침식(寢息)되기를 기다려 특별히 진휼(軫恤)하는 혜택을 베풀도록 하라. 또한 근시(近侍)를 중외(中外)에
나누어 보내어 여단(厲壇)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고, 측은하게 여기는 뜻을 보임으로써 조금이나마 원통한 마음을 위로해 주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