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 양의
대속의 죽으심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활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거룩하게 되었으며 진리의 성령에 의해 보좌에 않으신 어린 양에게
붙잡혀 있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파악하고 진리의 성령의 가르침과 생각나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므로 그리스도께 참예하는 자가 되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이 되어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갑니다.
이와 같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을 것이며 주님이 함께 역사하시므로
그가 전하는 말씀에 표적이 따르게 되어 확실한 말씀을 증거하게 됩니다(막16:20)
로마서를 익히고 요한복음을 알고 히브리서를 파악하면 대단한 사역자가 될 겁니다.
17절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범죄한’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대적하거나 원망하는 건 바깥의 증세일
뿐 그 원인은 아닙니다.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 인격 곧 그 중심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범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완고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망 불평한 게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강퍅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고하게 되면 대번에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대적을 합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증세는 자신의 중심에 있는 인격의 표현일 뿐입니다. 사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으므로 악한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불신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뱀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옛 뱀 곧 마귀 사단이 귀를 막아 완고하게 합니다.
용의 입의 물은 악한 언어들이 아닙니다. 철학사상에 의한 이 시대의 교육학입니다.
18절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안식은 곧 평안입니다. 안식은 거룩하게 된 후에야 안식이 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는 말씀은 안식은 거룩한 것인 줄 알라는 말입니다.
거룩한 가운데 안식이 옵니다. 내게 거룩이 없으면 안식은 오지 않습니다.
나는 왜 마음에 평안이 없을까? 거룩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하심으로 거룩하게 된(히2:11)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할 줄 몰라서 평안이 없습니다.
거룩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얻습니다(히2:11)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평강(에이레네)입니다. 그 다음에 안식이 옵니다.
그럼 어떻게 거룩해지느냐? 창1장에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일곱째 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곱째 날 그 날이 바로
안식의 날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고 거룩하게 되는 것은 일곱째 날 사람인 거죠.
곧 진리의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 날, 오늘이라
하는 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먼저 거룩하게 되고 그 다음 평강이 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안식이 옵니다.
이 원리를 익혀 거룩함을 얻어 그 다음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는 원리를 알고 있습니까? 이 길을 반복 답습해 보세요.
지금 안식일은 없어도 안식은 있습니다. 일, 월, 화, 수, 목, 금, 토는 잘 압니다.
여섯째 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일곱째 날 무덤에 안식하셨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살아나셨습니다. 곧 팔일 째입니다. 이 날은 새 날입니다.
영원한 새 생명의 날입니다. 이 날 곧 팔 일째 날은 일월화수목금토가 다 겹칩니다.
그야말로 매일 이 팔일과 중첩되어 있습니다. 인간 세상은 육신의 달력에 따라
나아가지만 이 팔일 째 새 생명의 날, 바로 ‘오늘이라 하는 날’은 매일 겹쳐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날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날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걸 바로 안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날이 안식일이다 저 날이다 싸우지 마세요.
일요일이 안식일이라고 하면 무식한 사람이 됩니다. 분명히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안식일 운운하거든 너희들은 율법으로 안식일을 지켜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식을 일요일에도 안식, 월요일에도 안식... 화, 수, 목, 금, 토요일도
안식하겠다고 말하세요. 지금은 안식일은 없어도 그리스도 안에 안식은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날이나 월삭이나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오직 그것은 머리를 붙잡는 것이 아니다’(골2:16-19)고 합니다.
그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라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붙잡는데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안식일은 없어져도 안식은 우리에게 있는데 ‘그 안식일을 거룩한
것으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고 거룩하게 된 것’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에게 안식이 오는 것입니다. 그날이 바로 ‘오늘날’입니다.
19절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우리는 계주의 마지막 주자와 같습니다. 아브라함도 달리고 다윗도 달렸습니다.
엘리야도 지금 다 달려놓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히11장에 허다한 증인들이
다 달리고 난 다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다니엘이 인봉해 버린
책을 유다의 뿌리 다윗의 자손인 어린 양이 인을 떼는 순간부터 생명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역사책도 아니고 도덕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바로 생명의 책입니다. 생명가진 족보의 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영생을 얻고자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은 곧 나에 관하여
증거하는 책이라”(요5:39)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성경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 관하여 증거한 책이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성경은 나에 관하여 증거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 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가 되어야 생명의 족보에 등록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읽다가 ‘어 이게 바로 난데, 어 내가 여기 있네’ 하는
시인과 고백과 찬양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넘어진 자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표적과 기사에 대해
말하는 것을 경계를 하고 있는데 사실 나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확정하는데 표적이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완고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미리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제 주변에서 여러 가지 질병이 낫고 있습니다만 그건 복음을
전할 때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 곧 사역의 영에 의한 치유이기 때문에 말씀을
받아 구원을 이루면 반드시 따르는 표적일 뿐이므로 그리 큰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걸 보고도 하나님의 안식에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 히3장의 포인트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가나안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에 대한 유혹이고 완고함입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은 항상 변명을 합니다.
뭣 때문에 말씀 안 듣고, 뭣 때문에 나는 기도 안 해 라고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사실은 이와 같은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퍅(완고)이라는 겁니다. 강퍅하게
되었기 때문에 안하는 겁니다. 다만 사람들은 자기 의를 위해서는 열심을 내라고
말하면 누구든지 재빨리 덤빕니다. 그게 롬10:3절 말씀대로 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세우려고 열심히
하나님의 의를 거역하였다는 말씀대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적인 죄입니다.
지금도 그와 같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수직적인 기도를
통해 안식에 들어가야 될 텐데 자신의 필요를 좇아 어떻게 할까요 묻는 정도입니다.
앉기만 하면 이런 식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게 광야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안식을 얻고, 평강을 얻고 그 마음에 여유가 있고,
자신 있고 담대하고 넉넉하게 되어 누구를 만나든지 사랑하고 베풀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이 사람이 제게 덕이 될까요? 저 사람이 덕이 될까요?’
이렇게 말해 놓고 ‘제비는 우리가 뽑지만 일의 작정은 주님이 하시죠’하고 나옵니다.
기도가 이해타산입니다. 제가 거짓말하고 있는가요? 듣고 보니 다 현재 교회 꼴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둥, 관상의 기도로 휘황찬란한
하늘 성소의 빛을 본다는 둥 말들을 합니다. 그것도 다 구름기둥 불기둥과 같습니다.
그런 증거는 있는데 중요한 것은 도무지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심고 거둠이 있는 것처럼 열매가 있어야 함에도 도무지
열매가 보이질 않습니다. 언제나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내게 이익을
줄 건가 말건가 계산부터 먼저 하는 약삭빠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지금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고자는 하는 말씀이 뭐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식을 주시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심고 거두고 풍성함이 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로 나타나게 하려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선악의 기준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전에는 내게 덕이 되면 선이고, 실이 되면 악이었다면
이제는 내 안에 이해득실이 아니라 참 선과 악의 기준을 가져야 됩니다.
선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기도를
이렇게 하세요. ‘주님!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알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간절히 구할 때에 전혀 알지 못하는 기쁨을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주십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날마다 새롭게 하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