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모어 경(Sir Thomas More) 영국 정치가. 법률가.
반역죄로 몰려 런던탑에 투옥되었다가 1535년 7월 6일, 57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가톨릭 교회는 그의 사후 400년이 되는 1935년에 모어를 聖人에 추대하여
성·토머스 모어(St. Thomas More)로 시성(諡聖)하였다.
토머스 모어 경(Sir Thomas More)
잉글랜드 헨리 8세 시대의 법률가이자 정치가. 개신교(성공회)와 기독교의 성인.
철학에서는 가톨릭 인문주의자로 알려져 있고,
현대인들에게는 《유토피아》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생애
토머스 모어는 1478년 런던 법조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모어는 자신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법률가가 되기 위해 링컨 여관(Loncoln's Inn)에서 법률 교육을 받았다.
모어의 인생에 매우 중요하고 영향을 많이 준 에라스무스를 만난 것도 이곳에서였다.
모어는 법률을 공부하면서 당시 영국에서 부상하던 인문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에라스무스와의 만남은 모어의 이러한 관심을 더욱 고무시켰던 사건이었고
그 둘은 평생 우정을 유지하였다.
모어는 계획대로 법조계에서 일을 하였고 하원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어의 공직 생활은 시련을 맞는다.
헨리 7세가 행한 전제정치의 하나였던 과도한 특별세가 모어의 반대로 삭감되자,
헨리 7세는 격노하여 모어의 공직을 박탈시켜 버렸다.
이로 인해 모어는 영국을 떠나야 할 상황에 처하기도 했고,
수도원에 들어갔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고 전해진다.
수도원에 한동안 있다가 10살 연하의 17세 소녀 제인 콜트와 결혼하기 위해 탈속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수도자 시절에 입었던 거친 속옷을 계속해서 입고 다니는 등
수도원에서 배웠던 절제된 생활 태도를 잊지 않으려 했다.
헨리 7세의 전제정치는 헨리 8세의 즉위로 막을 내렸다.
헨리 8세가 왕이 된 후 모어는 헨리 8세의 개인 비서로 등용되며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헨리 8세는 유머러스한 토머스 모어의 성격을 매우 좋아했고,
국정의 여러 부문을 모어와 상의하기도 했다.
특히 헨리 8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모어의 종교적 성향을 좋아했다.
1509년에는 런던의 상사와 안트웨르펜 상인 대표들 간의 협상과정을 통하여
통상문제 전반에 관한 역량을 인정받았고, 1510년 9월부터 1518년 7월까지는
법률 무역 관계 업무를 청산하고 런던의 민선행정관 대리로 일했으며
공평무사한 판관이자 빈민의 보호자로서 런던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이후 모어는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면서도 종교적으로도
헨리 8세와 갈등 없이 신앙심 깊은 공직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마르틴 루터를 비판하는 편지를 써서 보낸 것도 카톨릭적 체계가 무너지지 않았으면 했던
헨리 8세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것이었다. 이에 헨리 8세가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1529년 마침내 왕국 재상(Lord High Chancellor)에 임명되었다.
이는 헨리 8세가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탄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추기경이었던 토머스 울지를 재상에서 파면시키고
그 자리에 측근인 토머스 모어를 앉힌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혼 사건에서 모어는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토머스 크롬웰이 등장하면서 사태가 급변했고 더 이상 중립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모어는 종교적 문제로 교황권을 부정하는 등에 대하여 반대하며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고, 1532년 대법관직을 사퇴했다.
1533년 헨리 8세는 첫째 부인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과의 결혼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은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분노한 헨리 8세는 영국과 교황청의 관계 단절을 시도했다.
헨리는 항소법을 제정하여 로마 교황청으로 이송되던 이단 고소 문제를
자신의 소관 아래 두었고,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대신
앤 볼린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에게 왕위를 계승한다는 왕위계승법을 통과시켰다.
헨리 8세는 신하들에게 그들이 왕위계승법을 따를 것이라는 서약을 요구하였고
나아가 1534년 영국 교회의 최고 결정권자는 로마 교황청이 아니라
영국 국왕 자신임을 공표하는 수장령과 이를 법률적으로 보호하는 반역법을 제정하였다.
모어는 왕위계승법에 대한 서약을 거부하고 묵비권을 행사한다.
이에 크롬웰에 의해 잡혀 런던탑 감옥에 수감되었고 처형까지 15개월을 보내게 되었다.
재판에서 "의회가 인정한 왕의 권능에 대해 그는 악의적이고 반역적으로 행동했다."는
공소 이유에 대하여, 모어는 "반역은 말이나 행동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침묵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이 사이에 벌어진 재판 과정에서 모어는 적극적인 항변을 행사한다.
항변과 재항변이 이어지고 공격과 수비의 논리 싸움은 큰 이슈가 되었다.
모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법조문 하나, 문구 하나에 매달리는 위대한 법률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가 생명을 버리기 아까워서가 아니라
법률가로서 법적 논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친구가 크롬웰 편에 서서 위증을 하자, 상황은 크게 불리해졌다.
그 위증으로 인해 반역죄로 사형판결을 받던 순간,
그는 재판관들에게 "여러분들이 지금은 이 땅에서 재판관으로서 나를 정죄하지만,
나중에 우리가 하늘에서 다시 만나 영원한 구원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라는
말로 통렬히 풍자해 버린다.
처형대에서는 군중을 향해 “나는 왕의 충실한 종 이전에 하느님의 종으로 죽는다.”라고 선언했다.
죽을 때까지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아서,
사형 집행인에게 자기 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도끼를 받을 이유가 없다면서
수염을 잡아 빼고 최후엔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에라스무스는 토머스 모어의 죽음에 대해 “눈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영국은 과거에도 그리고 이후로도 그가 지닌 천재성을 다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그를 애도했다.
그의 죽음에는 초인적 영웅의 무용담도, 전투적인 투쟁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유머와 해학,
그리고 인간적인 매력 덕분에 후대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성인 시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캐릭터는 각종 연극으로 재생산되었고
이로 인해 '유머넘치는 원칙주의자'로 각인되면서 영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학자들의 재평가를 감안하여 1886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복자가 됨)되었고,
그가 죽은 지 4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193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법률가의 수호성인으로 인식되었다.
축일은 6월 22일. 또한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가톨릭에서는 성 토마스 모어(Saint Thomas More)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1980년에는 성공회(개신교)의 성인록에까지 올라갔다.
성공회를 목숨 걸고 반대한 사람이 성공회 성인이 된 것이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가 법률가로서 어쩔 수 없었다는 점과 공과를 따지면 카톨릭 탄압을 명령한
헨리 8세의 잘못이 더 크기 때문이다.
물론 시행한 모어의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되었고,
이에 개신교의 성인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영어권 내에서의 넓은 인지도를 무시할 수 없었다는 점과
그 동안의 개신교-기독교 분쟁에 대한 화해의 손짓을 뜻하는 역사적 의미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토머스 모어
토머스 모어(1478~1535)는 성스러운 그리스도교인이자 수완 좋은 정치가.
글과 말에 두루 능했던 탁월한 문사(文士)이자 법조인.
무엇보다 인간과 평화를 사랑한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
1477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런던의 일류 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12세 때 대주교 존 모턴의 집안에 시종으로 들어가서는 학문에 두각을 나타내어
모턴의 후원을 받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다.
중세 스콜라 철학의 본거지였던 대학에서 그리스 신학과 고전어에 대한 지식을 키우다가
아버지의 권고로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며 지식의 범위를 확장했다.
에라스무스 등 당대 인문주의자들과 친분을 쌓아 가던 토머스 모어는
이미 20대에 연로한 학자들을 대상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에 대해 강연하고
라틴어로 시를 쓸 정도로 학문과 언어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1504년 27세의 나이로 하원 의원이, 1510년에는 런던 부시장이 되었고
1529년에는 대법관이 되며 그 탁월한 능력과 뜨거운 열정을 공직에 쏟았다.
그러나 1530년 헨리 8세가 왕비와의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청과 충돌하여
<수장령>을 선포하자 모어는 이에 불복하였고 반역죄로 런던탑에 유폐되어
1535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사후 4백 년인 1935년 가톨릭교회는 그를 성인(聖人)으로 추대하였다.
『유토피아』는 1515년에 토머스 모어가 헨리 8세의 대사로 네덜란드에 파견되었을 당시
제2권을 집필하고 이듬해 런던으로 돌아와 제1권을 붙여 간행한 작품이다.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 나태한 귀족, 전쟁을 좋아하는 군주,
욕심 많은 지주와 사유 재산 제도를 비판하고 이상 국가 『유토피아』의 법, 종교,
제도에 대해 서술함으로써 당대 학자들의 지지와 비판을 동시에 받으며 수많은 논쟁을 양산했다.
『유토피아』는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즘과 종교적 관용, 평화주의,
평등을 주장한 근대 소설의 효시이자 사회사상사적 명저로 꼽힌다.
토머스 모어 경(Sir Thomas More) 명언
1. 타락한 돈 조금이 그의 주머니 바닥을 태워버렸다.
2.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이야 말로, 모든 것을 전복시키려는 가장 강한 욕망을 품는다.
3. 막대한 재산도 사람의 목숨과는 견줄 바가 안된다.
4. 자연에 어울리는 삶은 고통받는 자들을 구제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사하는 삶이다.
5. 하늘이 치유할 수 없는 슬픔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6. 돈이 권력을 크게 흔들 수 있는 곳에서는 국가의 올바른 정치나 번영을 바랄 수 없다.
7. 후회란 천국을 바라보면서 지옥을 느끼는 것이다.
8. 인간은 이익 추구의 동기가 사라지면 게을러지고 부지런히 일하지 않게 된다.
9.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소소한 행동들은 단순해 보이지만 우리 영혼에
큰 영향을 준다.
10. 바보와 다투다가 당신도 바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11. 질 나쁜 쾌락에 물든다면 진정한 쾌락은 절대 누리지 못하리라.
12. 사랑 같은 우정은 따뜻하고, 우정 같은 사랑은 한결같다.
13.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의 집에는 항상 여유가 있다.
14. 너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미소를 주고 내게는 너의 눈물을 주라.
15. 노동하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사람들은 정신과 영혼을 계발할 여유를 얻게 된다.
16. 의학은 인간에게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과학이다.
17. 지나친 맹신이야말로 각종 재난의 원인이다.
18. 아름다운 외모는 남자의 마음을 사로 잡지만 남자의 사랑을 오래
유지 시키는 것은 착한 마음씨이다.
19. 하늘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이 무수한데 별들보다 하찮은 보석 따위에
현혹되는 사람들이란!
20.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
비록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이 우리 눈에 매우 나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우리를 위하여 가장 좋은 것이다.
자신을 위한 기도 / 토마스 모어
주여, 저에게 건강을 주시되 필요한 때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그 건강을 잘 보전케 하여 주소서.
저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시고
선하고 맑은 것을 알아보게 해 주소서.
악에 굴복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말게 해 주시며
사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지루함을 모르고 원망과 탄식과 부르짖음을 모르는 영을 주소서
나 자신에 너무 집착하지 말게 해 주시며 너무 걱정하지 않게 해 주소서.
행복하게 살며 그 행복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저에게 유머를 이해하는 친절과 풍자를 포용하는 은혜를 주소서.
[출처] 블로그 열린 생각 | 작성자 조아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