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가수에서 심리상담가로 변신 불임부부 돕기, 보건복지부장관상 수상 어린이 센터와 선교 상담위해 기도
방송과 대학, 대중 강의를 넘나들며 활동 중인 심리상담컨설턴트 박상희 소장. 굳건한 신앙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아픔과 기쁨, 삶을 이해하는 박 소장은 10여 년 전 방송가에서 쇼프로그램의 MC와 여성댄스그룹의 멤버로 활동한 경력의 소유자다. “20대 때까지는 방송을 괜히 했다는 생각도 했어요. 방송 하느라 나만 뒤쳐졌다고 느꼈죠. 최근에 너무 바빠져서 방송은 자제하려고 하는데 한 지인이 ‘그건 너의 달란트인데 왜 안하니? 미디어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데’라고 말씀하셔서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방송과 연예인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어요”
박상희 소장은 2005년 ‘대한민국 여자, 일촌을 움직여야 성공한다’를 출간하던 즈음 한 기업의 후원으로 샤론정신건강연구소를 설립했다. 심리상담가로 변신한 박상희 소장을 10여 년간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가에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덕분에 작년 한해만도 공중파 방송과 케이블 채널에서 250여 회의 방송을 했다. 방송에서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없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향기와 빛을 담아 내담자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다.
박 소장의 20대 초반은 화려했고 바빴다. 대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찾아온 기회로 잡지 표지 모델이 되면서 EBS ‘나도 발명가’의 MC로 발탁됐고 이어 한일 합작 프로젝트로 구성된 4인조 여성 댄스그룹 S.O.S 멤버로 활동했다. 동시에 후지 TV ‘아시안 비트’와 SBS ‘쇼 서울서울’ MC를 맡는 등 당시로서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중심에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억압되어 있다가 대학에 오면 자유가 주어지잖아요. 마침 방송계에서 요청이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방송계에 몸담았죠. 점점 신앙과는 멀어졌요. 다이나믹한 삶, 평안이 없는 생활이 계속 됐어요” 5대째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난 박상희 소장은 아주 어린시절부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정도로 깊은 신앙을 가졌었다. 하지만 방송 생활을 하면서 학교도 휴학했고 생활이 화려해질수록 영혼은 가난해졌다.
영혼의 곤고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숙모님이 다니는 교회 수련회에 참석해서 성령체험을 했다. 방언과 방언 통역 등 뜨거운 성령체험을 하면서 4년 간의 방송생활을 과감히 접고 신앙을 택했다. “연예계를 떠날 때 왜 미련이 없었겠어요. 인간 박상희만의 삶이었다면 재미와 쾌락을 좇으며 살았겠지요. 하지만 신앙이 있었기에 더 큰 비전을 볼 수 있었지요. 지금의 마인드를 그때도 가졌더라면 방송 신앙 둘다 잘했을텐데 당시는 나 하나 지키기도 힘든 상태였어요”
신앙을 택하고 과감히 연예계 생활을 떨쳐버린 박상희 소장은 학교로 돌아갔다. 어머니의 추천으로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석사를 시작했다. 목회상담을 접하면서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좋아졌다. “나를 알고 타인을 알아가는게 좋았어요. 공부를 하면서 사람들의 역동이 보이고 하나님이 보였죠” 일반적인 심리학을 전공할 수도 있었지만 박 소장이 목회상담학을 한 이유에는 ‘영적인 것을 배제한 사람에 대한 이해가 전인적일수 있는가?’라는 나름의 확고한 인식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상희 소장은 다소이른 나이인 25살 때 결혼을 했다. 남편은 불교집안에서 자랐지만 신앙 생활에 열심인 박 소장을 따라 스스로 교회도 따라오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진 순수한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박 소장보다 더 열심이 생겨 100일동안 철야기도를 했다. 이 모습에 감동한 박 소장의 어머니는 ‘다니엘 같다’며 결혼을 승낙해주었다. 철없이 그저 신랑이 좋아서 결혼을 했지만 결혼한 그 다음달 10월에 IMF사태가 일어났고 남편의 사업이 휘청거렸다. 게다가 미국에 정착한 큰 언니를 따라 엄마와 작은언니도 이민을 갔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박상희 소장은 막막해졌다. “몇년동안 연예인이었는데 어린나이에 평범한 아줌마가 된거에요. 남편은 사업으로 힘들어하고 엄마와 언니들은 멀리 떠나 나만 홀로 남겨졌죠. ‘도데체 언제쯤 이 모든 일이 해결될까?’라는 생각 가운데 내 인생과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요”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 뿐이었다.
30대에 접어든 어느날 박상희 소장은 문득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남편의 사업도 바닥을 치고 일어나 반석 위에 다시 시작 됐으며 엄마와 언니들에게 의존하기만 하던 막내가 오히려 언니같은 동생이 되어 든든한 조언자로 바뀌어 있었다. 경상도 불교협회 회장까지 지내시던 시아버지가 구원 받으셨고 시어머니는 권사 직분을 받았다. 소중한 아들 위도 태어나 세상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갖게됐다. 샤론정신건강연구소도 자리를 잡아 상담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으며 복지관, 복지재단, 대학, 정부 기관 등과 협력 사업을 펼치고 있다. 작년에는 저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해결에 동참하고 불임부부들이 겪고 있는 신체적, 심리적 고통과 어려움을 덜어준 무료 상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박상희 소장은 요즘 소장으로서 컨설트하고 프로그램을 계획을 하고 실행시키고 전체적인 기관 운영을 하는 업무가 늘어나 바빠졌지만 부부상담의 전문가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제 비전은 선교 상담이에요. 국내 외를 막론하고 상담을 도구로 선교를 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이룰 것인가 고민중이죠. 영혼구원을 위해 장차 상담적 마인드로 어린이들을 돌볼수 있는 센터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어요” 박상희 소장의 이웃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에서 태어난 꿈과 선교의 비전이 장차 아름답게 피어나길 소망한다.
MC, 가수에서 심리상담가로 변신 불임부부 돕기, 보건복지부장관상 수상 어린이 센터와 선교 상담위해 기도
방송과 대학, 대중 강의를 넘나들며 활동 중인 심리상담컨설턴트 박상희 소장. 굳건한 신앙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아픔과 기쁨, 삶을 이해하는 박 소장은 10여 년 전 방송가에서 쇼프로그램의 MC와 여성댄스그룹의 멤버로 활동한 경력의 소유자다. “20대 때까지는 방송을 괜히 했다는 생각도 했어요. 방송 하느라 나만 뒤쳐졌다고 느꼈죠. 최근에 너무 바빠져서 방송은 자제하려고 하는데 한 지인이 ‘그건 너의 달란트인데 왜 안하니? 미디어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데’라고 말씀하셔서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방송과 연예인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어요”
박상희 소장은 2005년 ‘대한민국 여자, 일촌을 움직여야 성공한다’를 출간하던 즈음 한 기업의 후원으로 샤론정신건강연구소를 설립했다. 심리상담가로 변신한 박상희 소장을 10여 년간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가에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덕분에 작년 한해만도 공중파 방송과 케이블 채널에서 250여 회의 방송을 했다. 방송에서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없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향기와 빛을 담아 내담자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다.
박 소장의 20대 초반은 화려했고 바빴다. 대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찾아온 기회로 잡지 표지 모델이 되면서 EBS ‘나도 발명가’의 MC로 발탁됐고 이어 한일 합작 프로젝트로 구성된 4인조 여성 댄스그룹 S.O.S 멤버로 활동했다. 동시에 후지 TV ‘아시안 비트’와 SBS ‘쇼 서울서울’ MC를 맡는 등 당시로서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중심에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억압되어 있다가 대학에 오면 자유가 주어지잖아요. 마침 방송계에서 요청이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방송계에 몸담았죠. 점점 신앙과는 멀어졌요. 다이나믹한 삶, 평안이 없는 생활이 계속 됐어요” 5대째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난 박상희 소장은 아주 어린시절부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정도로 깊은 신앙을 가졌었다. 하지만 방송 생활을 하면서 학교도 휴학했고 생활이 화려해질수록 영혼은 가난해졌다.
영혼의 곤고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숙모님이 다니는 교회 수련회에 참석해서 성령체험을 했다. 방언과 방언 통역 등 뜨거운 성령체험을 하면서 4년 간의 방송생활을 과감히 접고 신앙을 택했다. “연예계를 떠날 때 왜 미련이 없었겠어요. 인간 박상희만의 삶이었다면 재미와 쾌락을 좇으며 살았겠지요. 하지만 신앙이 있었기에 더 큰 비전을 볼 수 있었지요. 지금의 마인드를 그때도 가졌더라면 방송 신앙 둘다 잘했을텐데 당시는 나 하나 지키기도 힘든 상태였어요”
신앙을 택하고 과감히 연예계 생활을 떨쳐버린 박상희 소장은 학교로 돌아갔다. 어머니의 추천으로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석사를 시작했다. 목회상담을 접하면서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좋아졌다. “나를 알고 타인을 알아가는게 좋았어요. 공부를 하면서 사람들의 역동이 보이고 하나님이 보였죠” 일반적인 심리학을 전공할 수도 있었지만 박 소장이 목회상담학을 한 이유에는 ‘영적인 것을 배제한 사람에 대한 이해가 전인적일수 있는가?’라는 나름의 확고한 인식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상희 소장은 다소이른 나이인 25살 때 결혼을 했다. 남편은 불교집안에서 자랐지만 신앙 생활에 열심인 박 소장을 따라 스스로 교회도 따라오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진 순수한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박 소장보다 더 열심이 생겨 100일동안 철야기도를 했다. 이 모습에 감동한 박 소장의 어머니는 ‘다니엘 같다’며 결혼을 승낙해주었다. 철없이 그저 신랑이 좋아서 결혼을 했지만 결혼한 그 다음달 10월에 IMF사태가 일어났고 남편의 사업이 휘청거렸다. 게다가 미국에 정착한 큰 언니를 따라 엄마와 작은언니도 이민을 갔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박상희 소장은 막막해졌다. “몇년동안 연예인이었는데 어린나이에 평범한 아줌마가 된거에요. 남편은 사업으로 힘들어하고 엄마와 언니들은 멀리 떠나 나만 홀로 남겨졌죠. ‘도데체 언제쯤 이 모든 일이 해결될까?’라는 생각 가운데 내 인생과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요”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 뿐이었다.
30대에 접어든 어느날 박상희 소장은 문득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남편의 사업도 바닥을 치고 일어나 반석 위에 다시 시작 됐으며 엄마와 언니들에게 의존하기만 하던 막내가 오히려 언니같은 동생이 되어 든든한 조언자로 바뀌어 있었다. 경상도 불교협회 회장까지 지내시던 시아버지가 구원 받으셨고 시어머니는 권사 직분을 받았다. 소중한 아들 위도 태어나 세상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갖게됐다. 샤론정신건강연구소도 자리를 잡아 상담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으며 복지관, 복지재단, 대학, 정부 기관 등과 협력 사업을 펼치고 있다. 작년에는 저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해결에 동참하고 불임부부들이 겪고 있는 신체적, 심리적 고통과 어려움을 덜어준 무료 상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박상희 소장은 요즘 소장으로서 컨설트하고 프로그램을 계획을 하고 실행시키고 전체적인 기관 운영을 하는 업무가 늘어나 바빠졌지만 부부상담의 전문가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제 비전은 선교 상담이에요. 국내 외를 막론하고 상담을 도구로 선교를 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이룰 것인가 고민중이죠. 영혼구원을 위해 장차 상담적 마인드로 어린이들을 돌볼수 있는 센터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어요” 박상희 소장의 이웃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에서 태어난 꿈과 선교의 비전이 장차 아름답게 피어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