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리 유적을 찾아서
이 덕 희
병신년 7월 2일 안동지킴이들과 관광버스편으로 아침 7시 복주여중 앞에서 출발 오후 1시 30분부터 개회식을 마치고 전주관광호텔에 투숙한 후 다음날 익산 왕궁리 유적을 찾았다.
백제역사 유적 지구는 익산의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공주의 공산성, 송산리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능산리고분군 등 8개 유적으로 2015년 7월 8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백제역사 유적 지구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고대 동아시아 왕국들 사이의 교류역사를 잘 보여주고, 백제의 내세관과 종교, 건축기술, 예술미를 보여주는 특출한 증거라는 평가를 받아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왕궁리 유적은 1989년부터 실시한 발굴조사결과에 의하면 백제말기 왕궁으로 조성되어 일정기간 사용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 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으로 확인되었다.
백제왕궁으로서는 처음 왕궁의 외곽 담장과 내부 구조가 확인되었다. 왕궁의 남쪽 절반은 의례와 의식, 정무, 생활을 위한 건물들이 동서방향으로 4개 석축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북쪽 절반은 왕궁내 휴식을 위한 공간인 정원과 후원, 백제시대 가장 귀중품인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터와 현재까지 확인된 국내 최고의 화장실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왕궁리 유적의 왕궁은 후에 사찰로 변화하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정전 건물은 철거하고 땅을 편평하게 고른 후 탑과 금당, 강당 승방을 조성하였다. 왕궁의 중심축과 사찰의 중심축이 일치하며, 사찰 건물 주변에서 회랑이 확인되지 않고 왕궁의 담장을 계속 사용하고 있어서 특별한 용도의 사찰일 가능성이 있다.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 원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무왕 사후에 익산쌍릉에 모셔 짐에 따라 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리 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는 1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왕궁이나 사찰과 관련된 유물들이다. 백제시대 가장 귀중품인 금제품과 유리제품을 비롯하여 이곳이 백제수도이며, 서울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수부’라고 도장찍은 기와, 전달린 토기와 백제 최고 기술로 제작된 뚜껑이 있는 토기완이 있다. 또한 백제와 중국과 교류 사실을 알 수 있는 중국천자편과 정원석, 굴뚝 상부를 장식했던 연가, 왕궁내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했던 벼루, 용변을 보던 변기형 토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 중 토기류는 백제도성 지역에서만 출토되어 도성양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왕궁리 유적 전시관은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여 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유적 남측에 건립되어 2008년 개관하였다.
상설전시실에는 유적의 전체 축소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중요유물 300여점을 선별하여 전시하고, 기획전시실에서는 1965년 왕궁리5층석탑 해체보수 과정 사진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체험은 백제 무왕대 익산천도 사실을 기록한 유일한 자료인 ‘관세음응험기’를 목판으로 만들어 목판찍기 체험과 출토 유물을 도장으로 만들어 도장찍기 체험을 할 수 있다. 또한 사전 예약을 할 경우 발굴체험도 할 수 있다.
왕궁리 5층석탑은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하는 과정에 건립된 탑으로 처음에는 목탑이었는데, 후에 석탑으로 변화되었다.
왕궁리 5층석탑은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백제, 통일신라 초기,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초기의 탑으로 보고 있어서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왕궁리 5층석탑은 탑신부의 기둥을 민흘림으로 표시하고 지붕돌의 끝이 반환한 점, 지붕돌 사이의 탑신부를 기둥과 벽석을 하나의 돌로 깍아 만든 점 등 미륵사지석탑(동탑)에서 볼 수 있는 백제탑의 흔적이 남아있다.
아! 세월은 가도 선조가 남긴 유물은 그대로구나. 천오백년이 흘러가도 선조들의 혼은 그대로 남아있다.
丙申年 初夏之節 德庵精舍 閑筆